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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은 시집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찬란한 이 계절과 어울리지 않은 시집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시인는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말아야 하고 시로 감정을 노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이므로. 시인 박시하의 『눈사람의 사회』는 슬픔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슬픔은 더이상의 슬픔이 아니다. 그러니까 슬픔을 초월한 슬픔이며, 새롭게 태어난 슬픔이다.
검은 우산 밑에서
누군가 내 검은 우산을 자기 우산과 바꾸어갔다 그러자 다른 검은 우산이 나를 따라 나온다 비슷비슷한 역사를 가진 우산들 부풀고 젖고 캄캄한 곡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나간다
우산의 세부는 같지 않다 손잡이의 옆얼굴과 살의 휘어진 정도 묶였을 때의 저항력과 비를 맞이하는 탄력도 다르다 다르지만 결국, 같다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 어쩌면 그들의 종말도 멋지게 같다
비는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비의 정체성인가 전선 위의 멋진 까마귀들도 언제부턴가 울지 않는다 이것이 울음의 역사인가 역사의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어떤 정체성의 역사인가
검은 우산들이 펼쳐졌다가 접히기를 조용히 반복한다 그들은 매우 조용하지만 끝내주게 다이내믹하기도 하다 까마귀와 전봇대 통치와 치통 열린 무덤과 녹아내린 이름들
결국, 우리는 멋지게 둥글어진다 커다란 검은 우산 밑에서 (32~33쪽)
오래된 새장
한쪽이 무거워진 새장은 기울어 있다 문은 닫혀 있고 열쇠는 반짝이지 않는다
낡은 철창에 푸른 번개가 치면 숨은 장소들이 삐걱삐걱 나타난다
뼛조각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별들이 어둠을 이어 붙인다
부유한 어제는 죽었다 가난한 내일이 홰를 친다
우리는 낮에만 태양이 타오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밤에만 별이 빛난다고 믿는다
너에게 나는 빛나고 있니? 빛나는 건 모두 멀리 있니?
우리는 말이 새어 나올까 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잠이 든다
우리의 귀는 새를 닮아 있고 심장은 새장 모양이다
새장을 열고 날아간 새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56~57쪽)
누구나 느꼈을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우산에 대입한다. 우산은 슬픔이면서 슬픔이 아니다. 시인은 당신과 나의 슬픔을 달래려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슬픔을 말할 뿐이다. 저마다의 슬픔은 어떤 과정을 통과하면 어느 순간 멋지게 둥글어진다는 시구처럼 날카롭지 않고 둥글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부유한 어제는 사라졌고 허약해진 오늘을 살고 있지만 이제는 안다. 빛나는 별은 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지만 견뎌내는지도 모른다.
삼원색
슬픔 없는 참혹이 사거리에 서 있다 어제의 모래 기둥을 껴안는다 버스가 시립병원 앞에 선다 슬픔이 노선을 벗어난다 바퀴가 쿨럭쿨럭 공회전 할 때 사랑이 사라지며 나타난다 죽은 혁명의 살점이 오늘의 다리 사이로 떨어진다 ‘아직도’ 라며 사이렌이 울린다 순간마다 영원을 던진다 내일 위에 머리카락을 뿌린다 마른 눈꺼풀을 가진 그림자를 감는다 서로 닮지 않은 우리들이 한 쌍의 눈물처럼 춤을 춘다 내가 너의 뼈와 가죽을 가르고 무릎을 꺾으며 걸어 나온다 (61쪽)
타인의 고통
별의 유언이 바닥에 내리는 것을 보았어요 푸드득 푸드득 붉은 나비들이 날아올라요 별의 주검이 하얀 날개를 토해요
사라지는 입들이 사라지는 이름을 자꾸만 불러요 사라지는 사람이 웅얼웅얼 바닥을 들어 올려요 8월의 혀처럼 뜨거운 바닥이 등을 구부리고 언덕이 돼요
우린 붉은 언덕을 사랑하고 푸른 죽음을 사랑했지만 바람으로 바람을, 순간으로 순간을 말할 수 있을까요?
누가 타오르는 다섯 망루를 별의 높이에 세우려 하나요? 기도문이 손을 흔들며 입 안으로 들어가요 입이 몸 안에 맺혀요
우리의 무게를 꽉 다물어요 저 깃털 같은 입들이 (84~85쪽)
여전히 슬픔의 뿌리를 깨내지 못하고, 슬픔의 줄기는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나 존재하는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았다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울적하고 서글픈 시들이다. 하지만 슬픔을 말할 수 있을 때 영혼은 건강해지고 단단해지지 않을까. 분명, 그리 될 거라 믿고 싶다.
눈사람의 사회
각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마주 보고 있지만 악수를 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웃거나 울고 있다면, 그건 첫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나 이별의 습관 때문입니다 어떤 기분일 뿐입니다
춤을 추면 굴러갈 수 있다구요? 그럼, 눈 오는 날 하얀 새들은 길을 잃어버릴까요? 새들은 어디서 밤새 녹아내리나요? 한쪽 눈썹은 원래 그렇게 우스웠나요? 코가 비뚤어진 건 내 탓이 아닙니다
줄줄 심장이, 결국, 흘러내렸나요?
몸이 둥근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넘어집니다 우리는 더욱 조용히 웃고 펑펑, 희미하게 웁니다 눈 내리는 창 너머에서 누군가 새 눈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닥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62~63쪽)
<눈사람의 사회>에서 그런 믿음을 본다. 비뚤어진 코, 우습게 그려진 눈썹, 결국 심장까지 녹아버린 눈사람을 누군가 다시 만들어 내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눈사람의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라는 눈사람과 ‘당신’이라는 눈사람이 사는 세상도 그리 될 것이다. 울음 대신 조용하고 환한 웃음으로 태어나는 눈사람들처럼.
사랑을 잃다
사랑을 잃었네 그리고 뒷마당의 보리수나무 한 그루와 노래하는 종달새 한 마리를 찾았다네
두 눈을 잃었네 그리고 노래를 받아 적을 두 손이 남았다네 구두 뒤축은 땅 위에 누워 있네 값싸고 튼튼한 한 켤레의 구두 발에는 시간의 꽃이 피네 발가락에는 하늘을 향해 휘날리는 깃발들이 꽂혀 있다네
노래를 잃었네 그리고 노래하는 입을 얻었다네
마음을 잃었네 마음을 담을 주머니를 받았다네 그건 외롭고 낯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네 결코 찢어지지 않는 주머니에서는 낡은 사막의 냄새가 난다네 냄새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네
두 발을 잃었네 그리고 노래를 알아볼 두 눈이 생겼다네 멀리까지 가라 더 멀리까지 가라 눈은 명령하고 발은 누워만 있네 깃발을 휘날리며 힘껏 누워만 있네
그러니 이제 사랑할까, 나의 잃어버린 사랑 그러니 이제 노래할까, 나의 잃어버린 노래
두 손을 잃었네 그리고 그려야만 할 마음을 가득 품었다네 (114~115쪽)
그러니 사랑을 잃고, 두 눈을 잃고, 사랑을 잃고, 그것들을 대신할 무언가를 얻는 게 우리네 생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시가 있다는 걸, 슬픔이 돌고 돌아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