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소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보편적인 범위 내에서 소설은 시작을 한다. 범인(凡人)의 일상으로부터 출발한 글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역사를 대입시키고, 매 전환의 국면과 매 서술간의 호흡사이에 철학을 투입시킨다. 그리하여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이야기의 스케일. 쿤데라는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을 때 쯤하여 괴테를 이야기의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각 단락속에서의 철학적 성찰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해서는 이따금씩 헤밍웨이를 초대한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잊혀져 버린 상상과 진실은 서서히 그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며 스케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광대해져 간다. 그리하여 아담한 개척교회의 피아노로부터 시작된 가스펠은 사방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둘러쳐져 있고 천정 또한 한 없이 높은 성 베드로 성당의 육중한 파이프오르간이 만들어내는 거룩하고도 장엄한 그레고리안 성가로 화하였다. 불멸.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이름과 권위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어 놓은 추상들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괴테는 무기력하였고 처녀는 맹렬하였으며 모든 것은 역사 위에 나열되었다. 그리고 범인(凡人)의 생활속에서도 '불멸의 메카니즘'이 흐른다는 사실이 인정되었고 그래서 일상은 일상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쿤데라의 방대한 지식과 삶을 관통하는 철학, 무한하게 확장되는 스케일과 한없이 다채로운 관점의 변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린 형태파괴적 구성과 심도있고 장중한 문체. 놀라운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쿤데라의 깊이에 감탄을 하고, 또 그와의 엇갈린 첫만남을 이제서야 아쉬워한다. 마르고 닳도록 '고정관념 탈피'를 외쳐대고 있는 세상에, 그 실천의 완성물로서 제시된 이 작품은 불과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기에 족한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쿤데라는 주워담아야 할 노다지를 작품의 광활한 공간 곳곳에 널어놓았으니 어찌 이를 외면할 수 있을런지.... |
| 시작을 보면 끝을 알수 있을 것같은 많은 흔해 빠진 미디어의 횡포 속에서 찌들여 가는 우리들의 천박하고 알량한 지식세계를 구해줄 알수 없는 주제란 없는 것일까...? 나는 늘 궁긍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주제를 찾기위해 괴로워했다. 그러던중 만난 사람이 바로 쿤데라이다. 우리에게 쿤데라가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일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 작품의 유명세로 인해 쿤데라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알게해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한 귀절에 반해버린 불멸 에 대한 난해함 때문인지 선듯읽을 수가 없다. 아마 책에 대한 기대를 좀더 갖고 싶어서이리라.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지만 이 책은 나에겐 특히 더 어렵고 알쏭달쏭하다. 그동안 재미있고 쉬운 책만 읽었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나이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였고 기억하지 못한 나이기에 불멸 은 늘 정복 대상이다. 쿤데라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 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더욱 많은 책을 읽고자 한다. 밑거름을 쌓기 위해서말이다. 내가 그의 전작들을 읽지 못하는 다른이유역시 이와 같겠지... 책이란 나의 열등감의 대상이다. 이런 나에게 쿤데라 역시 같은 대상이 될 것이다. 책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꼭 이책을 정복할 것이다. 불멸의 이유는 이런 것일 것이다. |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문구로 나에게 다 가온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indera). 그렇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시작된 그 와의 만남은 "생은 다른 곳에",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을 거쳐서 이 "불멸"이라는 작품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문구 때문이었지만 확신을 가진 것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였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한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어 그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고 다양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모자와 트럼펫 관혁악단에 대한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그의 소설 곳곳에서는 이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감히 생각하기로 쿤데라는 최소한 절대론자는 아닐것이며 막연하게나마 절대적인 세계에서 미약한 흔들림을 느끼며 상대적인 세계로 넘어오던 과도기적 세기의 세대들에게, 그런 절대적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어떻게 상대적이 될 수 있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세대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전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런 그의 색깔이 강하게 베어있는 작품으로써 하얀 도화지에 여러 선들이 그어져 있고(그 선들의 이름은 토마스, 헬레나 등이다) 그 선들은 하나의 교점을 갖는 형태로 이미지 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그를 비교하자면 베르나르는 그의 소설 각각을 하나의 선으로 이용하여 그의 책 모두가 한 교점을 향해 나아가는 식이고 그는 한 소설의 등장인물 각각을 하나의 선으로 이용하여 책 하나는 교점 하나를 같는 식의 차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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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대 혹은 문학이 예술의 최고봉에서 위세를 부리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이 났다. 영화와 공중파 방송,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는 더 이상 따분한 책과 인내력을 요하는 독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시대는 끝이 난 것 같다. 나 역시 영화나 TV 드라마가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이니까. 장르가 뒤섞인영화같은 소설, 만화같은 소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 같은 소설을 감히 누가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어느 자매와 한 남자의 러브스토리를 기본 축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사랑에 대한, 삶에 대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념들을 설파하며, 이따금씩 괴테를 비롯하여 헤밍웨이, 베토벤 같은 거장들, 심지어는 작가 자신까지 나타나서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한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식으로 7부에 걸친 에피소드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자아의 본질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은 자전거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한다네.'(302 쪽) 내 시야는 너무 좁으며 사유는 얕고 지식은 적으며 감정은 편파적이다. 나도 언젠가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인상깊은구절] - 그렇다면 대단원을 향한 뜀박질이 아닌 것은 모두 따분하다는 얘긴가? 이 맛있는 오리 궁둥이를 뜯으며 자네는 따분함을 느끼나? 목표를 향해서 서두르고 있나? 정반대로 자네는 이 오리고기가 가능한 한 천천히 자네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네. 그 맛이 영원히 지속되길 원한다구, 소설은 자전거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한다네... |
| 대학시절 읽었던 MILAN KUNDERA의 "불멸(L'immortalite)"을 우연히 다시 집어들게 되었다.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에 지쳐서라기 보단, 답답하고 초조한 나의 맘에 뭔가 응답을 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예전엔 "이마골로기(imagologie)"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미지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잠식은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에 녹아들어 시각적인 것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정말 잘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골자로 이번엔 "덧셈법/뺄셈법"이란 대비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의 "가벼움/무거움"의 대비만큼이나 깊숙이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자신의 독창성을 단일성을 확인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야네스"는 자아의 순수한 본질로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이고 차용된 모든 것을 추려내는 뺄셈법을 택했고, (연속적인 뺄셈에 의해 제로에 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로라"는 자신의 자아를 좀더 가시적이 되게 하고 좀더 파악하기 쉽게 좀 더 두뎝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부가물을 덧붙여 그것에다 자기를 동화시키는 덧셈법을 택했다. (그 연속적인 부가물에 가려 자기 자아의 정수를 상실해 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과연 어느 쪽인가? 대학의 간판을 들고, 대기업 뺏지를 달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서있지는 않나? 내 삶의 가치가 진정 그러한 것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지금껏 "살아남아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이런 질문을 달고 있다. "사람들이 자네에게 다음의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고 상상해 보게. 첫째는 브리지트 바르도나 그레타 가르보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녀와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는 것. 유일한 조건은 아무도 그것을 몰라야 한다는 거네: 그러든가 아니면 그녀와 양어깨를 팔로 휘감아 안고 자네 고향의 대로를 산책하는 것. 절대 그녀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네. 나는 이 둘중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 정확한 백분율을 몹시 알고 싶네." 우리는 역시 무엇인가 드러내 보이기 위해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우릴 그렇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결국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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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유쾌한 입놀림. 옴니버스형태를 취하면서도 실존을 향해 내밀한 관계를 맺는 각 파트를 읽어가면서 나는 '밀란 쿤데라가 머리 지끈거리게 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또한 우스꽝스러운 냉소, 위트, 독설 속에서 자신의 유연한 필치를 살리는 그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가는가? 남들이 알고 있는 이름을 통해?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 실존이 아닌 실존이라고 믿고 있는, 남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는 그런 양태를 우리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남들에 의해 인정받은 그 실존의 불멸에 대한 거대한 욕망을 위해 부단히, 끊임없이 더 큰 인정 받기를 원한다.
이제 이 책의 가닥을 잡았다. 이 책의 의도는 우리가 실존을 나타내고자 할 때는 이미지라는 것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진짜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있다'라는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픈 욕망 때문이라고, 나폴레옹이 세계 전쟁을 감행한 것은 세계사라는 지도 위에 자신의 명부를 올리고픈 욕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데올로기나 실존은 저 멀리 사라지고 오직 이미지만이 남는다. 쿤데라는 수많은 옴니버스식 사건을 통해 실재 관계맺음은 결국 '나와 너' 사이의 혹은 '나-나' 사이의 관계맺음이 아니라, '나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맺음이었다고 피력한다. [인상깊은구절] 괴테는 그의 일화때문에 영원히 기억된다... 불멸이 가능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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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소설가. 우리나라에선 1984년도에 나온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의 저자로서만 잘 알려진게 자못 아쉽지만 그 책 또한 <농담> <불멸> <웃음과 망각의="" 책="">과 함께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빼 놓을 수 없는 책이므로 그렇게 기억되어도 좋다
<불멸>은 내가 가장 줗아하는 소설중의 하나요 가장 선물을 많이한 소설중의 하나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설중의 하나다. 소설은 어느 한 노부인의 몸짓에 대한 쿤데라 특유의 철학적 주입으로 시작된다.그리고 아녜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내가 중간의 이야기들은 쓰지 않은 것은 이 책은 요약해서 주제를 이야기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이건 독자의 이해부족이 아니라 작가의 조작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조작은 완벽하게 끝난다.
쿤데라는 소설중에서 " 오늘날 사람들은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 혹은 만화로 바꿀 목적에서 씌어질 수 있었던 것에 달려들고 있네.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오직 소설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개작되었건 각색에서는 비본질적인 것만 남게 되기 때문이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서 그것을 이야기할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네" 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에 약속이라도 하듯 <불멸>은 거의 파격의 극단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쿤데라 자신이 직접 소설속으로 뛰어가는가 하면, 소설속의 인물인지 현실의 인물인지 알 수 없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작가와의 대화, 소설의 주인공인 폴이 마지막에는 쿤데라와 상담하는가 하면 죽은 괴테와 죽은 헤밍웨이가 만나서 불멸에 대해 이야기 하는등 일찍이 본적도 없고 볼 일도 없을 것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불멸>은 마치 감독들이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를 수십번 영화화를 시도하다가 결국엔 포기한것처럼 끝가지 옷을 바꿔입지 않을 것 같다. 이런 획기적인 형식에 질세라 내용도 걸출하다. 특히 개인의 이미지에 대한 성찰과 그 존재 고유의 몸짓에 대한 유무에 대한 성찰, 당신은 완전한 당나귀로 임명되었습니다라는 메모를 익명으로 전하고 통쾌해 하는 아베나리우스교수의 엉뚱함등은, 마치 <정체성>에서 여자의 각막의 움직임을 보고 역겨움을 느끼는 주인공처럼 기발함을 넘어선다. 책의 10분의 9를 다 읽고도 당신은 나머지 10분의 1일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인생에서 참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컴퓨터 덕택에 조물주는 무수한 자아와 그들의 삶을 이 세상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그 모든 삶의 한쪽켠에서 우리는 보다 기초적인 어떤 존재, 조물주가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존재했었고 그리하여 그가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상해 볼 수가 있다. 풀밭에 누워, 그녀의 자아를, 그녀의 자아의 더러움을 씻어가는 시냇물의 단조로운 노랫가락에 몸을 실은 아네스는 달리는 시간의 목소리와 창공의 푸르름속에 현현하는 바로 그 기초적인 자아에 참여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차를 몰고가는 그 지방도는 조용했다. 멀리, 끝없이 먼 곳에서 별들이 반짝였다. 아녜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 그것은 이 세상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것일뿐정체성>유혹자의>불멸>참을수>불멸>불멸>웃음과>불멸>농담>참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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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그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보면 남들과 우산이 부딪치지 않기 위해 피하는 테레사의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불멸의 여주인공 아녜스도, 길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애쓴다. 사람들, 타인에게서 나를 격리시키고 고독해지고자 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공통된 욕구일까?
요즘의 내 생활이야말로 바로 그렇다.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생활,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생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생활..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일종의 자폐증이라고도 한다. 평소의 조잘대고 덤벙대는 내 행동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자폐증이래." 하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지만,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전제 하에 판단하자면, 근거없는 말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이고, 역시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그래도 나는 일주일에 한번은 기를 쓰고 기어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야 만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나, 기억되는 나에 결코 초연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에서도, 인간은 결국 혼자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거라고 말하면서도, 불멸로 남고 싶어하는 어쩔 수 없음을 그린 것 같다. 나 역시도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이기에, 아녜스의 그 고독에 공감하면서도, 이 소설에서 나는 석양 아래서 괴테가 베티나의 가슴에 손을 대는 장면, 인간과 인간이 만나 접촉하는 그 장면이 눈물나도록 좋았다. [인상깊은구절]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자아를 창출하기 위해 그들은 애써 뭔가를 덧붙이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부가된 부속물들의 선전자가 되어 가능한 많은 이들이 자기들을 닮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그들 자아의 단일성은 즉각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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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1991년 전 유럽의 베스트 셀러, 그리고 유명한 밀란 쿤데라. 귀동냥으로 밀란 쿤테라라는 작가에 대한 명성만 듣어왔을 뿐이지 한번도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도 역시 그 책을 참을 성 있게 넘기기가 어려웠을 만큼 내겐 어려웠던 책이였다. 결국은 나의 인내력의 한계에 밀려 그 책은 중도하자 해 버렸고 그에 대한 분풀이 격(?)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내겐 너무나 어려웠던 책이다. 빽빽한 글자수도 그러커니와 비단 두께로 인하여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몇장씩 넘기다 잠을 들곤 하였으니 이 책을 읽기 위해 투자한 시간은 넉넉잡아 6개월은 넘게 걸린 듯 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이제는 밀란 쿤데라에 대해 아주 무지하지 않다는 것, 이 책으로 인해서 조금이지만 그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는 것에 우선은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다 읽고 난 지금도 이 책을 보면 아찔해지기도 하는 데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되어 다시 한번 이 책 읽기를 도전하고 싶다. 그때는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미 읽은 후이여야 하겠지만. 어렵지만 소장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녀는 그 사내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일단 영혼이 깃들고 나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녜스 같은 사람이 자신의 고무로 된 초록색의 코를 비틀며 재미있어 하는데 격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곧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우스꽝 스런 코를 장난감처럼 여길 테니까. 그리하여 그 어린 사내의 인생에는 두려움과 고통만이 남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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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를 몰랐다. 솔직히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 않는다. 과학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교양서나 가끔 읽을까.... 고교를 졸업하고 소설류를 읽은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군에 있을때 후임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얽히고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허클베리핀에 톰소여가 나오고 톰소여의 모험에 허크가 나오는 이유로 마크 트웨인을 좋아한다고.
그때 후임병이 권했떤 책이 바로 이것이다.
휴가를 나온김에 바로 사서 읽었다. 군에서 읽어서 그런지 너무나 어려웠다. 아니 어렵고 쉽고가 군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내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나를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한다면 조금 어려운 소설이다. 하지만, 너무나 독특했다. 현실과 소설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은 소설. 작가가 극중에 등장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나 만화에서도 재미있게 하려고 카메오 식으로 등장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속에 자신을 투입함으로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허물었다. 재미있다. 하지만, 어렵다. 나의 깜냥으로는 느낀 기분밖에 이 소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 재미있었다. 어렵고 재미있다. 마치 함께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이 책은 분명 어려우면서 재미있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안경뒤에 눈물이 있다는 생각은 이따금 너무나 강렬해서, 상상된 그 눈물은 타는듯 뜨거워서 그들 두 사람 모두를 감싸버리는 희뿌연 안개로 탈바꿈하곤 했다. 그들은 판단력은 앗아버리고, 그들을 맹목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폴은 그 안개를 간파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도 이해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그려보자 : 어떤 소녀가 소년을 보러 왔다. 소녀는 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 절 진찰해 주세요..."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잘라 말했다. : "하지만 아가씨! 나는 의사가 아니라오!!!" 정확히 바로 그렇게 폴은 행동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