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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고려인 연해주 이주 160주년이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에 한분이신 홍범도 장군은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삶을 알수 있는 자서전을 찾던 중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어 구매하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영화 봉오통 전투에서도 잠깐 나오적이 있는데, 그때 최민식 배우가 연기하여서 더욱 인상깊게 봤던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봉오동 전투 이후 홍범도 장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에서 평범하게 사시다 외로이 돌아가신 홍범도 장군, 1943년 10월 25일 크질오르다에서 세상을 떠나기 까지 그분의 삶은 어떠했을까? 파란만장했던 그분의 젊은 시절과 독립군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분의 좌절, 광복을 2년 앞두고 돌아가시기 까지 그분의 삶을 되돌아 보며 나는 그분을 기억하려고 한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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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만큼 전투에서 최강의 무력을 지닌 분입니다. 10년 넘게 일본군과 싸우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온전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영웅중의 영웅입니다. 무식하기 그지없어서 일본군이 보이는 족족 쏴 죽였다고 합니다. 190cm가 넘는 장신이셨습니다. 수많은 전투 중 봉오동전투가 유명하지만 사실은 유명해서 봉오동전투를 하셨던 분입니다.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벌였던 전투가 봉오동전투입니다. 읽어 보시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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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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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22세 때인 1890년,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가 곡절 끝에 지담파 스님의 상좌가 되어 팔자에도 없는 승려 생활을 하게되었다. 사실 만해 한용운도 21세 때인 1899년 가출하여 백담사 김연곡사에게서 득도하고 이후 평생 승려가 되어 독립운동과 문필에 전념했다. 단재 신채호 역시 44세 때인 1922년 망명지에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1년여 동안 베이징 근처 관음사에 의탁하면서 조선상고사의 등을 집필했다. 말하자면 생계형' 승려들이었다.
신라 법흥왕 때 보운조사가 창건했다는 신계사는 김유신, 김유신의 부인, 묘청 등이 중건하고 1920년대 효봉 스님이 입문 수도한 사찰로도 널리 알려진다. 홍범도는 신계사의 지담 스님에게 오갈 데 없는 사정을 말하고 상좌가 되는 데 허락을 받았다. 말이 좋아 상좌이지 절간의 잡일을 맡아 하는 행자였다.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한 홍범도에게 신계사는 은신과 합께 정신을 수양할 수 있는 안정된 거처가 되었다,
2년여 신계사의 생활은 홍범도의 정신과 사상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스님과 신도들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당 등 선사들의 구국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의식에 눈이 뜨이고, 국가의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홍범도의 생애에서 이 무렵은 그의 앞날에 자못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마도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은둔과 수도를 통하여 이순신이나 서산대사, 사명당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임진왜란 당시의 대일항전에 관하여 일상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반일 감정이 누적되었고, 의병의 전통이 우리나라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머릿속 깊이 새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에서의 상좌 생활은 고달픈 것이었고 별로 깊이 있는 사상이나 학문에 접해 보지 못했던 그였기에 불교철학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익에 급급하며 감정적인 (행동보다는) 통찰력과 장기적 전망에 입각한 올바른 실천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종이 한 장으로 그것도 백성의 뜻이 아닌 지배자 몇 명이 참여한 매국 문건으로 2천만 민중, 3천리 강토, 4천 년 역사가 일제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반만년을 자주독립 국가로 유지해 온 민족이 비록 한때의 쇠운과 무력에 의해, 일시로 짓밟히기는 할지언정 역사와 민족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쫓긴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와 러시아 해삼위 등지로 홀어졌다.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일가 등 애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신홍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홍범도가 국경지대에서 힘겨운 의병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일제는 한국 병탄의 야욕을 채우고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는 한국합병 실행에 관한 건]을 비밀리에 의결하여 병탄을 공식화하고, 7월에는 기유각서를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사무를 빼앗았다. 이어서 9월 초부터 감행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의병전이 가장 활발한 전라도를 먼저 진압해 나섰다. 일제는 이 작전에 2천200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현지 경찰과 각지의 밀정들을 총동원하여 수색작전을 벌였다.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고 있는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아처럼 받아들여졌다.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렇게 레닌 정부가 식민지 해방투쟁을 지원하게 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도 큰 영향을 받았다. 홍범도는 당장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간도보다 러시아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적중하지 않았다. 극동 러시아의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1918년 6월 26일 노령 하바롭스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독립운동의 숙원을 달성하고자 유력한 정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 불셔비키 정부와 손잡은 것이다. "이동휘는 처음에는 반일독립의 민족운동에 주안을 두고 사회주의운동은 부차적인 관심사로 생각했다. 또 그 자신이 사회주의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었다." 여운형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한마디로 유치한 시기여서(사회주의에 대한 인식-필자) 선언서의 발표도 없었으며, 별도 강령. 규약 등도 확정함이 없이 다만 한인의 공산당을 조직하여 목제당의 승인을 얻어 독립운동을 하자는 것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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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온전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참모습은 오랜 세월 가려져 왔고 그는 아직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외로이 잠들어 있다가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책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조선 말의 부정부패에 관한 내용도 전달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