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이후로 러시아 문학은 거의 처음인 듯합니다. 더구나 책의 띠지에 인쇄된 출판사의 마케팅 문구는 ‘이토록 유쾌하고 발칙한 러시아 추리소설은 없었다!’라고 되어 있으니, 러시아 추리소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과연 이 작품이 추리소설인지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동의할 수가 없네요. 범죄가 일어나고 단서를 모아가며 범인을 추리하는 형식을 이 소설은 전혀 따르고 있질 않거든요. ‘유쾌하고 발칙한’ 분위기도 결코 아니라는 건 덤이구요.
이야기는 니콜라이라는 남자가 낯선 남자를 차에 태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낯선 남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한 니콜라이가 현장을 벗어나면서 사건은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죠. 권력과 부패, 섹스 스캔들, 이권 개입, 그리고 각자의 욕망과 이기심이 충돌하면서, 범죄인지 사고인지조차 불분명한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피해자의 수는 계속 늘어갑니다. 애초 범인 찾기를 목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충돌하면서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지를 각자의 입장에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요. 크고 작은 권력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뀌기도 하고 용의자와 조사대상이 계속 늘어나는 모양새가 마치 의혹과 배신의 판데믹 상황 같습니다. 2018년에 출간된 작품이라 공산주의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로 바뀐 지 오래인 시점인데,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브랜드의 등장과는 별개로 여전히 비밀경찰 못지 않은 공권력 조직이 자의적인 법 집행을 하고 있어서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둡기만 합니다. 자유를 갈구하고, SNS를 통해 여론몰이가 진행되는 모양새는 서구 자유사회와 다를 바 없지만, 공권력이 개입되는 장면마다 부패와 폭력이 얽혀 자유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통제사회의 분위기를 드러내죠. 물론, 끄트머리에 갑자기 ‘나, 추리소설 맞아!’라고 주장하듯 사건을 촉발시킨 인물을 밝혀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쯤엔 이미 서로에 대한 불신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모든 이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치부가 파헤쳐지며 숨기고 싶은 비밀이 까발려지기 시작하기에 사건의 인과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죠. 그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암울한 사회가 예측될 뿐...
몇 가지 아쉬운 점으로는, 우선, 아무래도 자주 접하지 않은 러시아 문학이라 정서적으로 많은 부분이 낯설었다는 겁니다. 시작부분에서 특히 현실감이 떨어졌는데, 낯선 남자를 차에 태운 니콜라이가 과하게 떠벌이는 바람에 과연 러시아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에게도 넉살좋게 떠드는 걸까, 아니면 단지 전개상의 부자연스러운 설정일까 헷갈렸어요. 그리고, 러시아식 비유나 속담, 농담들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러시아와 동유럽의 전통 음식들 명칭은 외계어처럼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 외에도, 돈의 단위가 루블화와 원화에서 오락가락함으로써 러시아 분위기가 갑자기 확 깨는 경우들이 있었네요.(53페이지의 ‘레이저 제모 시술비 10만 원’부분은 정말 확 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