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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감동과도 같은 소설이다.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 독자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두 도시 이야기》는 읽는 내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휴잭맨을 불러낸다. 지적이고 감성 가득하며 선한 시민의 모습으로서 말이다. 두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아버지-약혼자-딸이라는 삼각 구도가 레미제라블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프랑스혁명이라는 뿌리만 같을 뿐 뿌리에서 자라 역사와 혁명,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은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두도시 이야기]는 혁명과 사랑과 역사가 너무도 조밀하게 연결되어 이들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기 힘들다는 점과 빅토르 위고의 ‘혁명’은 보다 진취적이고 시민의 삶을 대변하는 피끓는 역사를 대변하고 있지만, 찰스 디킨스의 혁명은 ‘혁명’의 시대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두 소설이 같은 듯 달라보이는 점이다. 두도시 이야기의 유명한 첫 문장에서 말하듯이 이 소설은 시대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한 인간의 슬픈이야기이자,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18세기,프랑스는 루이 15세에서 루이 16세로 바통을 이어가고 있었고 영국은 찰스 1세에서 찰스 2세로 이어지는 세대교체기를 맞았다. 런던과 파리, 이 두 나라의 수도는 서로를 경쟁하며 견제하느라 바빴지만 너나없이 혼란한 시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추위와 더러움과 빈곤이 내려앉은 프랑스 뒷골목에서 구두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노인은 바로 이 시기의 혼란스러움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불쌍한 주인공이다. 한때 존경받던 의사선생님이자, 지적이고 선량하며 바른 신사였던 마네트 박사에게 닥친 불행은 소나기처럼 예고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귀족의 만행을 목격하고 고발하려 했다는 이유하나로 납치 된 후 악명높은 바스티유 감옥 ‘북탑105호’에 감금되어 강제노동에 길들여진 마네트 박사에게 남아있는 것은 절망과 고통, 망각이라는 강에 몸을 맡긴 채 구두를 만드는 것만이 전부인 삶이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돌봐주던 술집 주인 드파르주는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 서 있는 시민들의 중심이였다. 마네트 박사의 재산관리인인 프랑스 텔슨 은행의 직원 로리는 죽은 줄 알았던 마네트 박사가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런던에 있던 마네트 박사의 딸 루시를 데리고 파리의 뒷골목을 찾는다. 아버지를 런던으로 모셔오면서 우연히 배에서 만난 남자 찰스 다네이가 영국의 적이자 미국의 친구라는 오명을 받고 재판을 받게 되자 마네트 박사와 루시는 찰스의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 재판의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찰스와 변호사 카턴, 스트라이버'로 이들과의 만남은 루시와 마네트 박사의 남은 생을 써 갈 주인공들이다.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 변호사 카턴은 루시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프랑스의 귀족이지만 귀족들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신분을 숨긴 채 영국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생활하던 찰스 다네이 역시 루시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반하여 남몰래 사모하는 마음을 움트고 있었다. 루시를 동시에 사랑했던 이 두 남자-카턴과 찰스-는 '루시'라는 여인을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더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카턴과 찰스가 쌍둥이처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다. 찰스와 루시가 결혼하던 날, 카턴은 루시에게 목숨바쳐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스포일러 !)
프랑스의 귀족인 찰스가 신분을 숨기고 런던에서 행복한 삶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찰스의 숙부인 에브레몽드 후작이 농민들에게 암살되고 찰스의 옛 하인이 투옥되자, 하인을 구하기 위해 행복한 삶을 뒤로 한채 태생에 이끌리는 자석바위처럼 운명에 끌린 찰스 다네이. 프랑스에 가면 기껏해야 심판이나 재판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에브레몽드 후작의 조카라는 사실만으로(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다. 사위의 소식을 들은 텔슨 은행원 로리와 마네트 박사, 루시는 찰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넘어오고, 사위의 석방을 위해 그리고 딸의 행복을 위해 마네트 박사는 바스티유 감옥과 군중들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한다. 마네트 박사의 희생으로 찰스는 석방되지만 이내 다시 투옥되는데 이 장면에서 마네트 박사와 사위 찰스의 얽기고 성긴 관계의 실체가 군중 앞에서 까발려지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네트 박사로 인해 풀려나지만, 마네트 박사의 편지로 다시 투옥되니 말이다. 마네트 박사가 과거 납치 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사건 전말을 써 놓았던 편지- 절망과 고통가운데 에브레몽드 후작에 의해 짓밟힌 농가의 이야기-로 인해서 드파르주 부인이 고발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찰스가 귀족의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군중의 광기를 불지피우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렇게 찰스는 단두대 위에 다시 한번 선다.
혁명과 사랑, 역사 ..... 세 가지가 얽혀가며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는 눈물과 안타까움, 슬픔이다. 혁명이 주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가슴 묵직한 슬픔을 남긴다. 마네트 박사는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 역을 하였던 휴잭맨을 연상하며 읽게 되었다. 지적이면서도 때론 강인한 장발장이 빵 한조각을 훔친 대가로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했듯이 마네트 박사 역시 귀족에게 착취당한 농민을 위한다는 이유로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빅토르 위고와 찰스 디킨스가 말하고자하는 프랑스 혁명의 이면들이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는 시대였던 혁명의 시기는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인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얼핏 보아서는 루시와 찰스의 사랑이야기 인듯 하나, 그 둘의 사랑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 마네트 박사의 애정과 로리의 충성과도 같은 믿음, 카턴의 희생과 하녀 프로스의 우정이라는 개개인의 사랑과 믿음으로 파생된 완성체라는 점에서 그 숭고함이 빛나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혁명이라는 씨줄에 사랑이라는 날실을 자아 역사라는 천을 만들어 탄생한 '두 도시 이야기'는 혁명이 품고 있는 시대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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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트 박사, 한 순간 정의감의 대가로 18년간 산송장이 되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마네트 박사는 독특하면서도 전형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의 정의감과 어느 정도의 비겁함이 공존하는 현대의 소시민을 보는 듯하다. 그가 에브레몽드 후작으로부터 “선생, 내 동생 놈이 촌뜨기들과 어울리다 사고를 쳐서 선생의 도움이 필요했지요. 선생은 명성도 높고 전도유망한 분이니 뭐가 본인이게 이로운지 잘 아실 거라고 믿소. 선생이 여기에서 본 일,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해주시오.1)”라는 은근한 협박을 듣고, 침묵하는 대신 에브레몽드 후작 형제의 만행을 고발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그의 정의감이 드러난다. 물론 그도 이 고발이 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 18세기 파리는 아직 앙시앵 레짐이 공고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도 “당시 궁중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이며, 귀족층의 면책특권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묻힐 것을 각오했다. 다만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2)”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서 산송장이 되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릴 만큼. 그의 소심함은 그가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기 벅찬 위기를 맞이할 때 드러난다. 바로 현실을 도피하고 바스티유의 죄수, ‘북탑 105호’가 되는 것이다. 딸의 연인이 그가 저주했던 에브레몽드 후작가의 인물인 것을 짐작했을 때도, 사위를 구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무산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과거로 도피했다. 찰스 다네이, 꿈만 꾸고 실천에 실패하다. 에브레몽드 후작가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고 있다. 비록 작품해설에서 이들을 ‘시골나리’라고 폄하했지만, 조선시대 향반(鄕班)처럼 그 지역에서 절대자로 군림했다. 그렇기에 마네트 박사의 비극과 관련된 초야권(初夜權)이나 백지 체포장 같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 권리를 휘두를 수 있었다. 그들이 피지배계층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공포’와 ‘폭력’이었으니……. 하지만 이 에브레몽드 후작가를 상속해야 할 찰스 다네이는 조지 위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존경하며, “나는 내가 살아온 이 체제를 영속화시키며 죽어갈 것3)”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숙부인 에브레몽드 후작과 대립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찰스 다네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해서 작위를 포기했지만, 뼈 속까지 ‘귀족’이었기에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베이 감옥에 갇힌 늙은 하인 가벨을 구하려 파리로 향한다. 불행하게도 찰스 다네이는 나약하고 풋내 나는 지식인이었다. 그렇기에 작위 및 재산 포기 절차도 허술하게 처리했고, 피지배계층을 위한 개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한 어정쩡함 때문에 가문에 충성하는 늙은 하인 가벨에게 사실상 일을 떠맡기고, 런던으로 도피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이 결국 그의 늙은 하인 가벨이 망명자의 대리인으로 인식4)되게 만들었고, 그의 목숨도 위협하게 되었다. 시드니 카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원한 이방인. <두 도시 이야기>에서 시드니 카턴은 재미있는 존재이다. 먼저 그는 과거를 알 수 없는 존재다. 흔히 영웅 이야기에서 보이는 신이(神異)한 출생에 해당한다. 또한 단번에 사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은 그의 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는 영웅이 될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 영웅 되기를 거부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거친 언동과 늘 취해있는 모습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고 방관하는, 마치 도통(道通)한 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염세적 태도는 “전 어려서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인생은 줄곧 그래왔습니다.5)”라고 고백한 그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루시 마네트를 대하는 그의 자세는 마치 아이돌을 대하는 팬처럼 보인다. 혹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제이 개츠비가 데이지 뷰캐넌을 대하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루시 마네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가 겪어보지 못했지만 가지기를 원한 또 다른 삶에 대한 회한(悔恨)일 수도 있다. 하여간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 같은 그의 위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결과 마지막의 바꿔 치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과거 그가 루시 마네트에게 청혼한 것이 거절되었을 때, “만약 제 경력으로 도움이 되어드릴 일이 있거나 희생할 기회나 능력이 된다면 기꺼이 아가씨와 아가씨가 사랑하는 분에게 희생할 것입니다.6)”라고 했던 말이 이루어진 것이죠. 테레즈 드파르주(=드파르주 부인), 혁명의 복수심을 상징하다. “떨어져서 깨진 커다란 포도주 통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수레에서 술통을 내리다 사달이 난 것이다. 떨어진 포도주 통이 떼굴떼굴 구르면서 통을 묶은 고리가 터지고 술집 문 앞 돌멩이에 부딪혀 호두 껍데기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자 주변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 게으름을 피우던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술을 맛보려고 달려 나왔다. ~ 어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오므려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렸고 어떤 사람은 술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등 뒤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들에게 한 모금 맛보게 해주었다. 깨진 사금파리로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떠 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머릿수건을 풀어 포도주에 담갔다 아이 입안에 짜 넣어주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포도주가 밴 통 조각을 손에 넣고 핥아 먹거나 포도주가 배어 썩어 문드러진 눅눅한 통 조각을 질겅질겅 씹는 사람도 있었다.7)” “굶주림이 어울리는 곳 어디에나 굶주림은 풍겼다. 범죄와 악취가 그득하고 좁고 구불구불한 샛길이 많은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에는 어딜 가나 넝마를 걸치고 나이트캡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넝마와 모자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그들을 음울하게 내려다보는 것들은 모두 병색이 완연했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궁지에 몰리면 역습할 것 같은 야생동물 같은 면이 있었다. 하도 짓밟히고 억눌려서 슬금슬금 움직여도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다. 무언가 억누르느라 꼭 다문 입술은 하얗게 질렸다. 이마에는, 자신이 매달리거나 누군가를 목매달아 죽일 때 생각하는 교수대의 밧줄과 비슷한 주름이 파여 있었다. 간판들(간판이 가게 수만큼 많았다.)도 하나같이 우울하게 빈곤을 보여 주었다. 정육점에는 말라빠진 고기만이, 빵 가게 간판에는 거칠고 빈약한 빵 덩어리가 그려져 있었다. 술집 간판에는 묽은 포도주나 맥주 양이 적다며 투덜거리거나 인상을 쓰고 수군거리는 술꾼들이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무기와 연장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풍요롭지 않았다.8)”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 드파르주 부부다.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지배계층의 횡포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당하면서 언제가 올 혁명의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이 오자 그들은 자신들의 오랜 증오를 폭발시켰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 드파르주 부인이 마치 검은 천사의 날개가 솟아오르듯 한 제스처로 “Out of Sight, Out of Mind”를 부르는 모습은 분노의 억눌림과 폭발을 잘 보여준다. “~ 모두 심판하리 너희들의 죄를 고통스런 죽음 선물할 때까지 참고 견디리라 바로 이 곳에서 차가운 어둠 속 차가운 어둠 속”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의 “Out of Sight, Out of Mind” 중에서) 하지만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어느새 그들도 또 하나의 지배계층이 되었다. 혁명의 원인이 된 지배계층만 아니라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은 모두 단죄하려고 한 것이다. 혁명이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굶주렸고,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그 동안 억눌러온 분노를 터트릴 기회뿐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증오에 먹혀버립니다. “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가 무엇이냐!9)”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느새 혁명의 뜨거운 열기는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광기에 취해 스스로 사형선고에 서명을 한 셈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드파르주 부인의 죽음이다. “드파르주 부인이 문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미스 프로스는 본능적으로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힘껏 두르고 조였다. 드파르주 부인이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애를 써도 허사였다. 미스 프로스는 언제나 증오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으로 그녀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드파르주 부인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잡고는 마구 할퀴려고 했지만 미스 프로스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돌린 채 물에 빠진 여자보다 더 엄청난 힘으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그때 드파르주 부인의 손이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미스 프로스는 고개를 들어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손으로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하더니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서 그곳에는 미스 프로스 혼자 서 있었다. 모든 일이 일 초 사이에 일어났다. 연기가 가시고 끔찍한 적막만 남았을 때 연기 사이로 죽은 듯 바닥에 누워 있는 광포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10)” 이렇게 드파르주 부인은 자신에게 걸맞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복수심에 잡아 먹힌 대가를 치른 셈이죠. p.s.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의 흥취(興趣) 때문인지, 소설의 리뷰가 캐릭터 분석과 같은 형태로 되었다. 10년 후 다시 읽으면 어떤 리뷰를 쓸 지 궁금하다. 1)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이은정 옮김, (펭귄클래식, 2012), p. 470 2)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473 3)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179 4)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p. 344~345에서 가벨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엄청난 폭력과 분노에 시달리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날 며칠을 걸어 파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 제가 재판정에 불려나가 목숨을 잃게 될 죄목이(나리의 관대한 도움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 제가 망명자들을 대신해 자신들을 핍박해 왔다는 겁니다. 제가 나리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도왔고, 그들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망명 귀족의 재산 몰수 명령이 나기 전에 그들이 체납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주장해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지대를 징수한 적도 없고, 집행 절차를 밟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막무가내로 저에게 망명 귀족을 대변한다면 망명자의 거처를 대라고 합니다.”라고 호소한다. 5)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216 6)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220 7)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p. 47~48 8)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50 9)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 567 10) 찰스 디킨스, 앞의 책, pp. 531~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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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출판사 : 펭귄클래식
시간만 있다면 책 전체를 필사하고플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한 묘사가 많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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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도시 이야기>에서 파리의 극단적인 귀족과 하층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 귀족들의 잔인성을 마차에 치여 아기가 죽고 말았던 이야기로 그리기도 하지요. - 마차들은 으레 사람을 덮치고도 다친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떠났으니까. 안 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158) 질: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여 우리는 귀족의 행태를 비난합니다. 그 당시 귀족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층민을 아예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그들을 ‘당연히’ 비난할 수 있습니까 답: 배려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이 비인간적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마차에서 귀족의 인성을 엿볼 수 있다면 15장 뜨개질에서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일찌감치 드파르주의 술집으로 술꾼들이 모여든 것은 오늘로 연 사흘째이다. 그들은 술 한 잔에 목숨이 달려 있다 해도 그 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술통을 주문할 능력이라도 있는 양 열심히 이곳에 드나들었다" (p.236) 묽은 술을 마시면서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하층민들은 사람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시대에서 허락된 유희로 사람행세를 하며 축축한 일탈을 이어 나간다. 굶주림이 얼굴마다 쓰여 있는 가난하고 암담했던 그 시대에선 계급과 순응은 당연하다. 마치 손가락이 열 두 개인 사람들만 모여있는 마을에선 손가락이 열 개인 사람은 비정상이 되고, 손가락이 열 개인 마을에선 손가락 9개인 사람을 장애로 구분하듯이 지배층에 의해 사회 규범과 질서가 정해지고 다수의 군중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두려운 것은 무자비한 결정을 내린 그들이 아니라 그런 결정을 당연하게 내리고 받아들이는 얼굴 없는 사회 분위기이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다만 그 시대의 제도를 비판할 수 있다. 2.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장 큰 주제는 아마 연좌제가 아닐까 합니다. 찰스 다네이이자 시몽 에브레몽드는 자신의 귀족이라는 지위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윗대에서 했던 악마적인 행위로 인해 죽음을 대가로 치뤄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죠. - 선생님, 전 이 아이를 위해서 속죄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아도 절대 번창할 수 없을 거예요. 다른 누구라도 이 잘못에 대해 속죄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 아이가 죗값을 치러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제게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좀 있습니다. 보석 몇 가지밖에 안 되지만 만약 그 여동생을 찾을 수만 있으면, 제가 죽더라도 이 아이로 하여금, 어미의 동정과 슬픔을 잊지 않고 그 재산으로 불행한 가족에게 배상을 함으로써 죗값을 갚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471) 질: 그의 엄마는 아이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게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그리고 그 윗대의 일들을 속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는 한 번은 타당한 이유로 살아남았지만, 마담 드파르주의 복수로 인해 결국 사형을 선고 받게 되지요. 그런 그의 운명은 인과응보일까요 답: <10장 그림자의 실체> 재판과정의 일부분을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오직 피만을 갈망하는 아우성. 글의 내용은 가장 뜨거운 복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로 자신의 화를 상대에게 쉽게 겨냥한다. 사형 선고를 내릴 때 그 누구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마치 광기에 씐 것처럼 무자비로 비난의 화살을 쏜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인과응보라는 덮개 안에. "민중에게는 고대의 의심스러운 미덕을 흉내 내어 스스로 인민의 제단에 제물이 되고 희생하기를 바라는 광기 어린 열망이 잠재해 있었다. 그 말에는 인간에 대한 동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고 오로지 흥분에 겨운 환호성과 애국심의 열기만 있을 뿐이었다. (475) "다네이는 배심원단과 소란스러운 청중을 둘러보며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악한이 정직한 사람을 심판한다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가장 비천하고 잔인하고 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천하고 잔인하고 악한 성품을 이용해 이 무대를 감독했다" (405) 3. 파리의 시민들은 결국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귀족들을 몰아내고 서서히 나라 전체를 점령해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나 갈구하던 자유, 평등, 박애를 얻게 되지요. -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덜 굶주리고 덜 고생한다면, 그 애가 오래 살 수 있을텐데.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텐데. (532) 질: 하지만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런 사상이 아닌 기요틴인 듯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피가 섞이고, 내일의 피까지 준비되어 있다는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시피 매일같이 그들은 희생물이 필요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일까요?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적인 ‘살인’은 응당 치뤄야만 하는 대가일까요 답: 기요틴을 마치 하나의 유행 또는 트렌드처럼 여기는 시점부터 어느새 그들에게 '살인'은 유희의 또 다른 형태가 되었다. 톱이 놓여 있는 창가에는 '귀여운 성 기요틴'으로 쓰여 있고, 사람들은 기요틴을 마치 패션 아이템처럼 여겼다. "기요틴은 십자가의 지위를 빼앗았다. 사람들은 십자가 목걸이 대신 기요틴 모형 목걸이를 걸었다. 기요틴에게 절을 했고, 십자가가 치워진 곳에서 기요틴을 숭배했다" (392) 기요틴은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분해했다가 원하는 때 다시 맞출 수 있었다. 기요틴은 달변가를 침묵시켰고, 권력자를 때려 눞였으며, 아름답고 선량한 사람들을 제거해 버렸다. '살인'은 응당 치뤄야 할 대가가 아니다. 다만 올라간 위치에 따라 다른 풍경이 보이듯이 달라진 시대에서 그들이 숭배했던 사상이 뒤틀려 폭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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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투쟁하는 ‘피지배계급’ 자신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이 계급은 패배한 세대의 이름으로 해방의 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하는 억압받고 또 복수하는 최후의 계급으로 등장한다. 라고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역사철학테제의 12번째 장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벤야민은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실패한 혁명가의 초상화에 대한 아이콘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혁명의 운동의 주체적 성질은 아니지만 그가 보여준 글들은 혁명가들에 의해서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으며 ‘선전문구’였다. 그는 “사건의 크고 작음을 구별함이 없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는 연대기 기술자는 다음과 같은 진실 즉, 이 지상에 언젠가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서 주목되어야 한다는 진실에 공정하고 있는 셈이다.” 라며 거시적인 사회적 연대기와 미시적인 개인적 일대기에 대해서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서라도 모든 사건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문학가들보다 이러한 동일한 작업에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맹렬하며 격렬하게 활동한 사람은 바로 ‘찰스 디킨즈‘이다. 그의 생애는 전반적으로 웨스트민스턴 성당 그의 묘비명에 쓰인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고 박해 받는 자들의 동정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와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는 일화를 통해서 잘 아려진 사실과 같이 지금현대시대로 전환해서 이야기하자면 친노동자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의 의식을 지닌 참여 문학가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그런 연유에서 그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며 은유이며 알레고리를 담은 역사 소설<두 도시 이야기>(정확하게 1859년 4월20일 주간지 <올 더 이어 라운드 All the Year Round>에 연재를 시작한다)를 그의 나이 47세 1859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거기의 세계의 뉴스는 온통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비참한 현실과 제국주의에 대한 탐욕의 역사에 대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랄한 비판이 종종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하던 시절이었다. 동시에 ’1859년‘은 소다수 병마개, 빨래 짜는 기계, 새로운 바닥 마감재, 선박용 요리 스토브 등이 발명돼 특허를 받은 과학기술의 해라는 점이며. 더불어 1859년은 흔히 생물학 텍스트에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 자리 잡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해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면서 세상은 늘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증명의 사례로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합중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진화론자 찰스 다윈과 미생물학자 루이스 파스퇴르가 각각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으며. 미시(微視)적인 시선을 따라가면 1859년 무렵에 세계 인구가 10억을 넘었고, 알루미늄은 이해를 기점으로 금(金)보다 싸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볼티모어에서 뉴올리언스에 이르는 철도가 개통됐고, 세 명의 모험가가 세인트루이스에서 뉴욕까지 809마일을 열기구를 타고 여행했으며 영국 왕립미술원의 여름 전시회에서 세밀화가 빠진 첫해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기록 매체이며 아카이브인 사진의 등장 때문이다. 예컨대 1859년에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며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아포리즘적 시작의 발단이다. 이 소설의 백미(白眉)는 바로 1부 되살아나다(나는 내내 이 동사를 보고 'Revive'를 생각해냈지만 본래의 문장은 ”Recalled to Life“ 명시되어 있는데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1장 시대의 서두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라는 문장이다. 바로 이 시대는 혁명의 새벽이 도래하기 몇십년 전 1775년이다.(1775년 12월부터 1794년까지 시간적 배경이다) 그 해는 혁명의 맨 앞장을 장식하는 미국독립전쟁이 발생한 해이다. 미국역사에 해맑은 디킨즈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에 그가 작가 서문에도 밝혔듯이 월키 콜린스의 연극 <얼어붙은 바다 The Frozen Deep>(1856)(모험가 플랭클린에 대한 탐구서적인 성격에 극본)를 연습하고 있을 때 인물과 구조에 모티브를 빌려왔듯이 전체적인 윤곽(Layout)은 구체적인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사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서로의 존재를 바로 알아차릴 수 없게 비시가적인 영역으로 공존하다. 실적적인 재현의 역사의 시간이 돌아가고 있을 때 가상적인 현실의 체감의 속도는 계속해서 증가하게끔 우리들의 눈과 혼을 정신차리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찰스 디킨스가 영화계에 교차편집(크로스커팅)이라는 개념을 선물해준 장본인답게 이 소설에도 이러한 효과의 차용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쏟아진 적포도주는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좁은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손과 얼굴, 헐벗은 발과 나막신까지도 물들였다. 나무를 톱질하던 남자의 손은 나무토막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아기 엄마는 낡은 머릿수건을 다시 두르는 바람에 이마에 붉은 얼룩이 생겼다. 술통 조각을 게걸스럽게 씹었던 사람들의 입가에는 지저분한 얼룩이 남았다. 긴 자루 같은 나이트캡을 더러운 자루 밖으로 머리가 쑥 튀어나온 듯 뒤집어쓴 멀대같이 키가 큰 익살꾼은 포도주가 스며든 진흙을 손가락에 묻혀 벽에 낙서를 했다. 피. 때가 오고 있었다. 또다시 포도주가 거리의 자갈 틈으로 쏟아지고, 그 흔적이 그곳의 많은 사람을 붉게 물들일 때가 오고 있었다.“ 파리의 슬럼가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에는 타이번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기에 뉴게이트 바깥거리가 아직 악명을 얻기 전이었다. 하지만 감옥은 방탕하고 온갖 악행을 일삼던 자들이 처형되던 악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질병이 퍼져나가는 곳이었다.“ 라는 런던의 범죄와 전염병이 들끓는 도시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에 대한 일정한 바라보기에 대한 메시지이며 알려주기이다. 그런데 이 건조한 하드보일드한 세계에서도 핑크빛 연애는 생성된다. ”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저의 새로운 사랑도, 저의 새로운 의무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말씀해 주실 순 없으세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이렇게 루시는 격정적인 사랑에 대해서 빅토리아 시대에 철저한 윤리적인 도덕관념에 걸맞게 근심어린 걱정을 한다. 여기에는 그 당시에 처한 공포 분위기도 틈입하게 된다. ”내가 네 남편을 구해 냈다.“ 그 말은 그가 자주 꾸던, 집으로 돌아가는 꿈속에서 듣던 말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떨고 있었다. 뭔지 모를 공포가 그녀를 엄습했다.”에서 보여주다 시피 혁명시대에 공포정치는 개인의 은밀한 침실의 환상과 현실을 뒤범벅된 카오스의 혼란의 장소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그로테스크는 더해져셔 “ 이 여행도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만약 이 여자가 이 무시무시한 수레바퀴 소리를 듣지 못하다면,” 크런치 씨는 자신의 어깨너머로 흘끗 보면서 말했다.“ 이세상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겠구나.” 정말로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라는 종결부에서 보다시피 세상에 대한 호소하고 극렬하게 반응하는 사운드의 소멸에 대해서 망연자실하며 아쉬운 소리를 내 뱉는다. 여기에는 지금-여기에서 사건의 토픽들이 함유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혁명‘에 대한 시끄러운 소란과 소동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의 계승에 대한 학습은 계속되며 현재 진행중인 과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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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기분이, 권말에 실린 해설을 보면 깨끗이 지워집니다.
첫째, 이 소설 내에서 귀족들의 행태는 너무 과장되어 있습니다.
둘째, 그 반대편에 선 민중들의 입장도 너무 과장되어 있습니다.
셋째, 인물들의 행적이 너무 비밀스러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마지막 장면의 카턴만이 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첫째와 둘째 단점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해설에 의하면, 디킨즈는 그의 시대가 100년 전의 시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19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었을 겁니다. 물론 디킨즈를 그 세대의 아픔을 외면한 작가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겠죠. 그가 끊임 없이 후벼팠던 영국의 치부들은 후대의 귀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이전 시대의 양극단의 광기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그려냈을 겁니다. 아마도 디킨즈에게는, 그저 그런 평범한 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겠죠. 그러한 극단적인 면모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게 중요한 면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목은 거창한 두 도시 이야기이면서, 실상은 다만 한 가족과 주변 몇명에 국한되는지는 좀 아쉽긴 하네요. 내용상 아쉽다기 보단 제목에 눌렸다고나 할까요? 해설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버지-딸-약혼자의 삼각 구도는 이후에 레미제라블에게로 계승이 됩니다. 혁명을 매개로 한 두 명작이, 혁명을 정면으로 주시하기 보다는 한 가족에게로 눈을 돌린 이유는 간단할 겁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혁명이, 좀더 피부로 와닿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족의 비극만큼 극적인 게 있을까요? 혁명을 맞아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이걸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흩어진 친구는 이미 남이지요.
그렇지만 그 한 가족을 구성하면서, 각각의 캐릭터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쉽습니다. 이 소설에서 살아 있는 캐릭터는 텔슨 은행의 로리 씨, 거만한 변호사 스트라이버, 심부름꾼이며 색다른 부업에 종사중인 제리 크런처 정도이고, 가장 비밀에 휩싸여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장 속마음이 드러난 카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격인 마베트 박사와 그 딸 루시, 사위 찰스 다네이의 내면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네요.
물론 주변인과 비참한 자를 훨씬 잘 그리는 디킨즈의 솜씨는 대단한 겁니다만, 오로지 주변 인물에 대해서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게 묘하네요. 특히나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위대한 유산도 그렇고, 디킨즈는 사실 여자를 두려워 한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여성해방적인 측면에서 그가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여자를 모른다고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요.
기대한 것만큼 아쉬움이 남았다,고 결론 내려야 겠습니다. 물론 당대의 소설 중에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디킨즈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고, 영문학에서의 위치도 고귀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다시 읽기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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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샘물도 대저택의 분수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흘러갔다. 시간의 샘에서 분이 똑똑 떨어져 흘러가듯 세 시간동안 깜깜한 어둠 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이윽고 두 곳의 잿빛 물이 으스스한 빛을 띠었고, 성의 얼굴 석상들이 눈을 떴다. 날이 점점 환해지더니 마침내 태양이 잠잠한 나무의 우듬지를 매만지고 언덕 너머로 빛을 뿌렸다. 햇빛을 받은 저택의 분수물은 핏빛으로 변하고 석벽은 주홍색으로 물들었다."(183쪽)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에너지를 모으며 다가오는 폭발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사악한 귀족 에브레몽드 후작의 저택에 드리우는 핏빛 햇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가 뜨고지는 자연의 변화처럼 혁명을 요구하는 역사의 힘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후작을 증오하는 농노들이 사는 생탕투안 마을의 언덕에는 프랑스 혁명을 촉발했던 바스티유 감옥이 있다. 이곳의 북탑 105호에는 이유도 모르는 채 십여년 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있던 보베 출신의 의사 알렉상드르 마네트박사가 벽에 묻은 그을음을 자신의 피에 개어 써놓은 편지가 숨겨져 있다. 마네트 박사가 석방되어 예전의 하인이었던 드파르쥬의 도움으로 영국 런던에 망명하게 되면서 조국 프랑스에서 상처를 입고 도망한 사람들과 더불어 런던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의 삶을 이어간다. 파리와 런던, 두 도시의 이야기의 출발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13쪽)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며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는(543쪽) 더 유명한 구절로 끝나는 이 책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영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비교되는 숙명을 안고있다.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출간되었으며 1832년의 6월 폭동을 그리고 있는데 비해 《두 도시 이야기》는 1859년에 출간되었고,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촉발된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두 도시 이야기》가 시간적으로 앞서 있어서, 사용된 언어가 다르지만 《레 미제라블》이 《두 도시 이야기》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얼마전 영화로도 개봉되어 더 많이 알려진 《레 미제라블》의 등장인물과 비교한다면 마네트 박사는 장 발장, 마네트 박사의 딸인 루시는 코제트, 루시의 남편인 찰스 다네이는 마리우스, 마네트 박사의 하인인 드파르쥬의 부인은 자베르 경감, 찰스 다네이를 대신하여 죽는 시드니 카턴은 에포닌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역학관계 또한 유사하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이 장 발장이라면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시드니 카턴이다. 친구인 스트라이버가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하도록 뒤에서 도와주면서도 친구에게 술값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인생을 소모하고 있던 그가 루시 마네트를 사랑하게 되면서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해 나간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15:12-14 )"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시드니 카턴에게 용기를 준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라는 성경 구절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자유 평등 박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왕족과 귀족들을 기요틴으로 참수하는 무지렁이 "애국시민"들의 핏빛 복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참혹한 시대를 견뎌낸 인간들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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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말할 때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하는데,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독특한 역사관이 꽤 설득력 있었던 이유가 크다. '조롱할 줄 아는능력과 세상이 미쳤다는 생각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 앙드레 모로가 소설 초반에 귀족의 학정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에게 내뱉는 시니컬한 말들이 인상적이다. 그는 귀족정치가 끝나면 모두가 원하는 평등을 얻게되는 대신 금권정치가 시작될 것이며, 권력은 주체가 바뀔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귀족에 의해 친구가 희생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시민 계급의 선봉이 되어 귀족의 학정을 고발하는 위대한 연설을 하며 혁명의 불을 당기는 데 앞장선다. 구체제를 붕괴시킨 위대한 공화주의자가 된 그는 소설의 말미에 다시 한 번 공화정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속마음을 드러낸다. 줄곧 귀족 혹은 공화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유지해 온 앙드레 모로를 통해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담론을 개인과 그가 처한 극히 개인적인 환경 속에서 바라보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패한 권력들이 장악한 구체제에 반한 시민들의 위대한 피의 승리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선과 악은 경계는 뚜렷해진다. 혁명을 위대한 승리로 규정짓기 위해서 귀족들은 억압자로 그에 대항하는 혁명가는 영웅으로 묘사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담론 속에는 실상 앙시앵 레짐에 환멸을 느꼈던 귀족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군주에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하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는 세도있는 귀족의 상속인도 있고 시민의 영웅인 바스티유 죄수 출신 의사도 있다. 공포정치에 동조하는 혁명가도 있고, 광기어린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외국인도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음으로써 역사가 놓쳐버린 중요한 사실들을 되짚어준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에브레몽드 후작을 한 편에, 또 공화주의자 드파르주와 그의 부인을 그 반대 편에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부당한 과거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일련의 일들을 겪은 후 통쾌한 복수극으로 마무리된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플롯의 개연성을 완성해준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는 이처럼 편하고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에브레몽드 후작과 드파르주 사이에 루시, 마네트 박사 그리고 찰스 다네이와 같은 복잡한 인물들이 자리한다. 사랑과 가족애로 뭉쳐진 이들은 오로지 그 사랑을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 역사의 파도 속에서 원치 않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책을 읽노라면 마네트 박사와 루시, 찰스에게 닥친 고통이 에브레몽드 후작의 부도덕성이 불러온 과거의 비극적 사건 탓인지, 아니면 드파르주 부인의 비이성적인 복수심때문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게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어느 한 쪽을 가해자로 단정짓기를 거부한다. 소설 속의 개개인 각각의 행동에는 모두 그나름대로의 당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그 각각의 당위가 충돌하는 지점에 프랑스 혁명이라는 배경을 배치해 두고 영리하게 활용한다. 그 자신이 귀족이거나 공화주의자인 인물들 뿐 아니라, 귀족의 자손이면서 평민의 편에 선 찰스 다네이도, 평민의 영웅이면서 귀족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마네트 박사도 그들로서는 마땅했던 행동들이 그 시대의 요구와 화합하지 못한 것이 이들에게 닥친 모든 시련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도시 이야기>는 도식화된 역사적 담론을 뒤로 하고 인도주의적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개인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와중에도 작가는 인간의 순결한 정신에 줄곧 초점을 맞춘다. 로리의 조건없는 우정, 마네트 박사가 보여주는 용서, 루시와 찰스의 깊은 사랑이 혁명이라는 사회적 상황 이상으로 부각된다. 특히 소설은 카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랑과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숭고한 인간적 가치를 크게 강조한다. 부당한 학정과 지나친 증오에 비해 숭고한 사랑과 희생이 한 개인의 삶에 평생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큰지 작가는 카턴의 입을 빌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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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다해 사랑을 맹세할 수 있는 사람이 내겐 있을까? 자신의 삶을 다 바치더라도 상대방의 행복한 삶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이란 내겐 지나치게 낭만적인 사치스런 사랑이었다.
시드니 칼튼처럼~~ 혁명 속에서 인간의 정의란 절대적 군중이 사로잡기 마련이다. 이상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적인 분류가 절대적인 이념으로 지배되는 시대, 단 한 사람은 역사도, 혁명도, 정치도, 민중도 아닌 사랑 하나를 선택한다. 사랑이 사치라고 모두가 말하는 프랑스 혁명의 시대 홀로 사랑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적 가치를 따르는 선인지 될지 우민한 낭만주의자가 될지를 판단하는 것이 지금 현대를 살아하는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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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시기가 있었나 보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보면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여자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전쟁의 비극이 잊혀지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인간들의 사투, 벼랑끝에 몰린 인간들의 이중성은 결국 살아 남았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고 전쟁시대가 아닌 평화의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무안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었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내 이런 마음으로 읽었다. 카턴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 조리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현실적인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소용돌이 시기에 태어나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말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역사소설임에 틀림없다. 유럽역사에 문외한이기에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기를 겪으면서 루시라는 가족이 겪는 가족사는 읽는 내내 가슴 졸이게 했다.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둔 입장이다보니 루시 가족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목이 두 도시 이야기다. 도버해협을 마주한 런던과 파리의 이야기다. 런던은 평화의 상징이고 파리는 혼란과 광기의 상징이라는 식으로 극명한 대립을 이루지는 않는다. 1700년대 중반 런던도 치안이 불안하고 서민의 삶도 고달픈 그런 도시로 묘사된다. 파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며 혼란에 휩싸였다. 작가가 왜 두 도시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두 도시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역할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치밀한 드라마 같다. 어느 한사람 그냥 등장 시킨 인물이 없고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든, 하찮은 심부름꾼으로 나오든 중요한 역할 하나씩을 정해줬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얽히고설켜 있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반전의 하이라이트는 드파르주가 바스티유 감옥을 탈환한 뒤 마네트 박사가 18년 동안 투옥됐던 감옥에 들어가 획득한 마네트 박사의 고백록을 읽는 장면이다. 모든 독자의 궁금증을 단숨에 해결해 준다. 마네트 박사와 찰스 다네이의 숙명적인 관계도 낱낱이 파헤쳐진다. 등장인물들간의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두 도시 이야기 책표지에서 카턴이 단두대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허공 어딘가를 주시하는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카턴은 맹목적으로 루시라는 여인을 사랑한다. 목숨과도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현실적으로 있을까? 나도 과연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올해가 찰스 디킨스 탄생 200주년이라고 한다. 두 도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꼭 도전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