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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안에서 시점인 지로
그리고 그의 형 이치로...
이치로는 ''메디러스'' 라는 작가의 말을 빌려
" 그는 자신의 서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 -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아무래도 여자의 영(靈)이나 혼(魂), 이를테면 정신을
획득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겐 도무지 연애 사건
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도 부인에 대해서 그렇게 입장을 취한다.
자기 자신에만 빠져서 스스로 타인과의 깊은 관계불능의 이치
로 그러면서 옆에 있는 정신을 획득하고자 하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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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는 마침내 형에게 여행이 필요하다 여겼고
아는 H에게 형과의 여행을 주선한다.
중요한 건 여기서 부터다.
친한 가족에게는 이해 받지 못하지만 H에게 이치로는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이치로는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스물네 시간 무얼하나 그 일에 안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할 만큼 괴로
운건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뭘해도 불안하다.. 지금 내가 이것을 하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
이에 H가 '' 목적은 못되어도 수단이 되면 되잖은가?''라고 말하지만
이내 ''어떤 목적이 있어야 수단이 정해지는 거니까''
이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아~ 이치로는 과연 어쩌려는 건가
안되~ 막 소리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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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서 ''자네는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네. 그래서 행복한 거
지.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라네'' 라고 H에게 말하며 은근한 부러
움을 표시한다.
덧붙여 자신의 집에서 잡일을 하던 여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단순함에 부러움을 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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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들에게는 일상이 괴로움이다.
이치로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시도를 안해본건 아니다
생각뿐이지만 신에게도 접근을 한다.
'' 죽느냐, 미치광이가 되느냐, 아니면 종교를 얻느냐.
내앞엔 이 세가지밖에 없네.''
뭔가 어쩔 수 없이 종교를 선택한 사람들의 대답인 것 같다
당연히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세상살기 힘들어서 선택한 믿음
자신의 짐을 내려놓을 신을 찾지만
결국 그에게 신은 자신 이상의 존재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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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날의 내안의 이치로
내 옆에 있는 이치로
그리고 안에 숨어있을 이치로를 발견했다.
하지만 인정 할 수 없는거
여기서 인정이란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나 또한 이런 생각의 나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있다.
당신의 표현에서 이부분에서 H가 된것 같다.
하지만 난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나쓰메 소세키는 염세주의자다.
작가의 삶을 보았을때 기구함 삶의 연속이고
더하여 사색의 감성을 지난 사람이다.
이런 작가가 염세주의자가 안되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어려우리라 예상이 된다.
난 염세주의자가 아니기에 이치로의 상태가 유지가 안된다.
실행주의자의 면모도 있는 것 같다.
바로 여기서 이들과 갈리게 된다.
이해가 되기에 눈물이 나지만
너무 슬프지만
이치로를 빌어서 내가 당신들을 충분이해하지만
계속 이치로같이 군다면... 내 이해는 거기까지
내 입장에서는 거기까지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합리화 하면서
계속 그 안에 머문다.
무엇도 제시하지 못한체말이다.
지혜가 많은 사람들인 그들이
그 지혜가 돌파구를 찾는 지혜까지 더해지길 바란다.
돌파구...
그것이 이책의 주된 목적이길 바란다.
작가가 무언가를 더 말해주길 바라면서
갈증이난 체로 책을 덮는다. [인상깊은구절] '' 죽느냐, 미치광이가 되느냐, 아니면 종교를 얻느냐. 내앞엔 이 세가지밖에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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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쓸쓸한 거다.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연인은 떠나가고, 마음 한 켠에 남은 상처는 새벽 네 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마냥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이 현대식 사랑이다. 그러니 다치지 않기 위해 사랑은 한 켠으로 밀어 놓은 지 오래. 하얀 눈이 보기 드문 겨울이 가고 황사 가득한 봄이 오고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만나게 된다.
어떤 확신처럼, ‘인생은 쓸쓸한 거다’라고 읊조리지만, 그것을 확인할 때면 가슴 한 쪽이 아려오는 건 어쩌지 못한다.
방 안은 촛불로 인해 소용돌이치듯 동요했다. 나도 형수도 눈살을 찌푸리고 타오르는 불꽃 끝을
아무런 사건도 없지만,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소설은 당황스럽고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쓸쓸함으로 시작해 불안함으로 끝나는 이 소설 앞에서 독자가 쥐게 되는 것은 그저 ‘인생이 그렇지, 뭐’ 정도.
나쓰메 소세키는 여러 상황들과 공간들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인물들을 가둔 채 그들의 외면을 훑는 것만으로 그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긴장이 흐르지만, 그 긴장 끝에는 어떤 결말이나 긴장의 해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독자의 몫이란 건가. 하긴 그에게도 그것을 해결한 힘도, 지혜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이 쓸쓸한 걸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래, 인생은 쓸쓸한 거다. 그것을 받아들인 채 늙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이 쓸쓸한 거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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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의 유장한 세월에 반해 소세키의 작품들은 그 깊은 철학적 성찰과 내밀함으로 인하여 현재에도 조금도 촌스럽다거나 뒤쳐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이런 시대를 초월한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감탄만 나올 뿐이다.
여타의 소세키 소설이 그러하듯, 소세키는 곳곳에 그의 분신들을 등장시킨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의 구샤미선생, "한눈팔기(道草)"에서의 겐조, "산시로"에서의 산시로, "마음"에서의 선생, 그리고 "그후"에서의 다이스케처럼... 이처럼 유약하고 강박적이며 고뇌에 찬 고등유민의 모습들은 소세키가 현실에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라 할 수 있다.
"행인" 또한 그러하다. 허나 여기선 주인공인 지로의 모습이 아닌 그의 형인 이치로의 모습에서 그를 찾을 수 있다. 학문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대학교수 이치로,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학자로써의 존경과 인정은 받지만 하루종일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가족이나 주위사람들과의 소통을 끊어버리다. 스스로에 대한 역격리(逆隔離)로 인해 그는 그의 동생인 지로와 그의 아내인 오나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이치로는 지로에게 오나오와의 여행을 권유하며 그의 아내와 동생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책의 종반부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이 책에서 클라이막스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이 여행이 바보같다며 거부하는 동생에게 내뱉는 이치로의 한마디는 가히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탁하지 않겠다. 대신, 난 평생 널 의심하겠다"
그의 모든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건, 어떻게 평범한 일상을 다루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을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이런 치밀하고 심도깊은 내면묘사와 고찰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당황스러울 만큼의 놀라움이었다.
소세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문제점들과 해답을 던져준다는 것에서 그의 문학의 위대함과 영원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깊어가는 겨울의 문턱에서 따스한 차한잔과 함께 이 책을 여러분께 권해드리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 인력거에서 마차, 마차에서 기차,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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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men Want'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주인공 닉은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여자가 되어 보기'로 결심하고 여자들처럼 화장도 하고 여자들 속옷도 입어보며 조만간 자신이 여자들의 욕구에 맞는 광고 기획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분이 으쓱해지는데, 순간 욕실 바닥에 넘어져 정신을 잃고 만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행인>애서 남자가 자신의 아내조차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책 제목도 행인인가 보다. 독일 속담에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는 없다' 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인공 나가노 지로와 그의 형인 이치로, 형수인 오나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인간심리와 감정추이를 묘사한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 아니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진정한 상대방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학교수로 학문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형 이치로는 따뜻한 정은 부족하지만 주위사람들에게 훌륭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 타인과 깊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고 만다. 집에서 그의 부모도 아내도 동생도 그와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터놓는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이다.
이 소설은 이치로가 아내와 남동생 지로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마침내 아내의 정절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는 데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인간 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쳐 그 진상을 극단까지 끌고 가 타인불신으로 인하여 인간내면의 모순과 암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실존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섬인지' 아니면 정현승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간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의심의 눈초리로 상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애정과 이해하려는 그런 마음을 앞세워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가족들에게 이치로를 욕하기 전에 그가 처한 고독감을 이해하고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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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최고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마음>과 이 책 <행인>을 꼽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에고이즘적으로 바라본 사랑과 삶일 될 것이다.
지로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건, 마음과 마음이란 그저 서로 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뿐이지, 실제 저쪽과 이쪽은 몸이 떨어져 있는 만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것이다. 종교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종교에서 神의 존재는 보이는 것도, 이성적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닌 '그저 존재한다'라는 믿음이다. 사랑 역시 아무 조건없이 만인에 대한 神적 사랑인 아가페가 아니라 개인의 고통과 고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100% 소통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해도 그건 지로의 말처럼 '느낌'일 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현대성을 강하게 느낀다면 에고이즘적으로 사랑과 삶, 인간에 대해 말하며 보편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후대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적 美라는 과거(?)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가만하면 소세키에서 왜 더 현대성을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커튼>에서 밀란 쿤데라는 장면에 대해 말한다. 소설은 장면을 통해 밀도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나의 장면에 대해 수십, 수백 페이지를 할애한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영화의 한 씨퀀스처럼. <행인>의 백미는 이런 장면 속에서 그 장점을 발휘한다.
아내를 의심하는 형 이치로는 동생 지로와 아내 사이를 의심한다. 지로와 형수가 여관에 있는 장면은 거부할 수 없는 미묘한 끌림, 불륜에 대한 고뇌를 보여주며 장면적 美로서 에로티시즘을 느끼게 만든다.
1. 전등불이 바람에 꺼지고 사방이 어둡다 2. 형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르는 지로. 3. 형수의 대답. "있고 말고요. 사람인걸요. 거짓말이라 생각되면 이리와서 손으로 만져 보세요"
4.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지로 5. 형수가 유카타를 어둠 속에서 갈아 입는 소리. 6. 하녀가 가져온 등불 7. 돌아앉아 화장을 얇게 한 형수
이 장면들을 차례로 상상해 보면 된다. 형수에게 묘하게 끌리는 감정을 직접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장면들과 구성장치들을 통해 더욱 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다는 시각적 차단, '부름-대답-옷갈아 입는 소리'가 상상하게 만드는 청각적 이미지, 하녀가 가져온 등불에 의해 시각적 차단이 해제되고 얇게 화장을 한 모습이라는 시각적 표현, 그리고 그 모습에서 상상되는 얇게 떠도는 화장품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 이 공감각적 구조 사이에 떠도는 장면적 이미지는 그 미묘한 분위기와 감정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 미묘한 끌림은 이성 간에 발생하는 '자연'적 현상이다. 하지만 "체면과 의리"에 의해 제약이 된다. 불륜은 사랑에 포함된다. 하지만 사랑은 순수한 무엇으로 찬양하면서 불륜은 부도덕으로 배제한다. 파스칼 키뇨르에 따르면 "사랑의 속성은 반사회적이다". 사랑은 두 사람만 남고, 다른 관계를 배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불륜 역시 다른 사회적 요건을 제외한다면 두 사람 간의 감정의 끌림, 두 사람만이 남는 관계로서 사랑의 일종이 된다.
이치로는 동생 지로에게 바울과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프란체스카의 시동생으로 두 사람은 사랑(불륜)을 하다 남편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다. 이치로는 지로에게 "중요한 남편의 이름을 잊고 바울과 프란체스카만 기억하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답한다. "인간이 만든 부부라는 관계보다도 자연이 일궈낸 연애 쪽이 훨씬 신성하니까"
이치로의 친구 H가 동생 지로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그 편지를 통해 지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형 이치로의 고민, 이치로가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을 잘 보여준다. 그는 神을 믿고 싶어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내면, 욕망과 금기를 보게 된다. 더불어 그 속에서 고뇌하는 이치로의 모습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기적인 인간 사회에서 '자연'적인 그 욕망들의 발현과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치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교양, 양심, 질투, 자기비하가 뒤섞여 고통만을 받는 이치로의 대사는 그래서 더 절실할 것이다.
"죽느냐, 미치광이가 되느냐, 아니면 종교를 얻느냐. 내 앞엔 이 세 가지밖에 없네" "신은 자기다. (중략) 나는 절대다."
"나는 분명히 절대의 경지를 인정하네. 그러나 내 세계관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절대는 나와 멀어지고 만다네. (중략) 멍청한 줄 알면서, 모순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지. 나는 바보다."
p.s 이 소설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런 인간의 내면에서 나온다. 사랑을 하면서도 질투와 의심을 멈추지 못하며 결국 고뇌하고 좌절하는 이치로와 나머지 인물들 간의 관계들 속에서 긴장감이 유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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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줄거리: 신경쇠약을 겪고 있는 형(이치조)와 결혼 적령기의 동생(지로), 그리고 이치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치조의 부인 나오가 있다. 이치조는 동생 지로와 나오가 서로 좋아하지 않을까에 대해서 의심한다. 결혼적령기의 지로는 결혼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시점에서 형의 의문을 알게 되어 당황한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하는 소세키 책의 중요 키워드인 고등유민 그리고 사랑(부부관계) 중, 사랑(부부관계)에 치중한 책이다. 지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치조가 주인공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이치조와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치조의 고난과 심각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작가 소세키가 각별히 따르던 형수가 있었다는 경험을 아는 나는, 관계적으로 보아 읽으면서 서술자 동생, 지로의 이야기로 생각했지만 읽는 도중 나는 이치조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형수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는 소세키지만, 역으로 형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았고, 그리고 신경쇠약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로인한 가족들의 괴로움과 심란함도 적어나갔다.
작가 소세키는 신경쇠약으로 고생하였고, 부인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다르게 감정변화가 심한 정신질환 환자의 비유를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괴로움과 애로사항을 소세키 자신도 알고 있어서 소설에서 그대로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신경쇠약 때문인지, 맞선이라는 인위적인 인연으로 연인이 된 부자연스러운 관계 때문인지 이치조와 형수, 나오는 사이가 좋지 못하다. 맞선과 사랑에 관해서「행인」에서는, 친구 미사와의 과거, 미사와와 게이샤, 아버지의 이야기, 하인의 맞선 상대자를 알아보러 가는 일 등 이야기로서 다룬다.
거의 유일하게 영국의 자유로운 연애결혼을 봐온 일본인 소세키는 연애결혼이라는 새로운 문화와 자신도 겪었던 그리고 아직도 유지되는 맞선이라는 구시대적 문화에 대한 고민과 혼란을 하였을 건데 그러한 모습이「행인」에서 볼 수 있다.
번외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작가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에 쓴다고 보인다. 어느 정도 더하고 덜하고, 그리고 각색해서 글을 쓰나 그 차이지, 판타지 소설에서도 조차 자신이 느꼈던 인간관계 속의 감정을 투영시킨다. 소세키는 그러한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평가하는 작가인데 근대 소설을 개척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소세키의 작품을 쭉 봐보면 소세키의 인생관, 세계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행인」을 쓰면서 맞선으로 이루어진 결혼관에 고민이 극심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원래 형수 나오와 도련님 지로가 먼저 알던 사이였고 그 뒤 나오와 형이 맞선을 통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그런데 그들의 사이는 위태롭게 삐걱삐걱 거렸다. 이치조는 나름대로 자신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지위 안에서 애정을 표현했고, 나오는 신경질적이고 우월감 있는 이치조를 아녀자로서 부양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화약고처럼 언제 터질지 위태로운 부부를 보는 가족들은 항상 불안해한다.
이치조는 지로의 친구, 미사와의 이야기에서 미사와와 관련된 여인이 미사와를 좋아했을 거라는 판단, 그리고 아버지의 무책임했던 일화에 대한 분노 등을 보면 사랑을 갈망하는, 애정결핍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이치조가 부인 나오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애정표현도 했다면, 이들이 소통했다면 동생 지로와 나오가 서로 좋아할 거라는, 나아가 불륜 관계를 맺을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소통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심리를 그대로 옮긴 소세키의 소설이 그래서 현실적이고 탐미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치조는 신경쇠약의 중증 환자이다. 그것이 그를 힘들게 한다. 지로가 이치조의 모습을 보고 사색가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치조는 사색을, 생각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치조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고뇌를 자연 반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원하는 않는 사색으로 이치조는 정신적으로 힘들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치조의 심정, 혹은 소세키의 토로를 잘 볼 수 있는 대목은 이치조와 친한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나눈 대화이다. 과학이 발전하여 도보에서 말, 그리고 마차가 생기고 이제는 기차와 자동차가 생기고 나아가 비행기까지 생기는, 나날이 발전하는 환경에 한시도 가만히 있는 것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친구는 누구나 그러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이치조의 마음이기도 한 그의 대답은 ‘알고 있다’이다. 즉, 정신병을 앓아 병원에 가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주체를 못 하고 ‘조절’을 못해서 병원에 가는 것이다. 이치조는 자신이 잘못된 걸 알고 있기에 더 힘들 것일 수도 있다.
또 이치조는 고독이여, 나의 유일한 은신처라고 말한다. 고독의 늪……. 행복하지만 불행한, 행복하지만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위험한 낙원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치조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 가장 고상하다고 한다. 이치조는 자신이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타의적으로, 강압적으로 사색가가 되는 것이 우울하고 버거워하고 있다. 그러한 버거움에 지식인이라는 엘리트라는 지위보다 별생각 없이 살아가는 천한 여자 하인을 부러워한다.
이러한 이치조의 모습을 보고 이치조의 친구는 이런 말을 남긴다. ‘형님은 자신의 몸이며 마음부터 이미 성에 차지 않으니까요’, 최악의 슬픔은 자기혐오이다. 자신부터 사랑하고 아껴야지 타인 나아가 세상까지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 자신한 몸 챙기기 힘든 이치조는 신경질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신경질적으로 바뀌어서 자신한 몸 챙기기 힘든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를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치조, 혹은 소세키가 소설「행인」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 거라고 묻는다면, 책의 말미에 적힌 글귀라고 생각된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에게, 왜 햇빛을 주지 않느냐고 탓을 할 게 아니라, 구름이 걷히길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가족들이 좀 더 이치조를 이해줬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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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설읽기를 시작하는 일은 흔치 않다. 대가의 경우 그 전에 유명세나 소문으로 이미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일본 문학에 대해 기준치 이상의 호감을 갖고 시작하는 경우는 더 드물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 세 번째, 오래 전 읽다만 작품들까지 합하면 다섯 혹은 여섯 번째쯤 될 것이다. 일본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하루키를 제외하면 좋아한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을 미시마 유키오보다도 훨씬 앞선 수준이고, 작품수가 많다보니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다. <행인>은 왜 행인인가, 에 천착하면서 읽어내려갔다. 형수를 두고 벌이는 형과의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 연애와 결혼관, 이상과 현실의 낙차에서 오는 괴로움을 노래하는 와중에 커다란 우주의 티끌만한 세계에서 당신은 무엇에 귀의한 채 살아가고 있느냐 묻는 듯하다. 나는 남이 모르는 괴로움을 남에게 말하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홀로 고뇌해보지 않은 자에게 이 책은 덜떨어진 부적응자가 엽기적 실험을 시도하는 치정극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지로의 형 이치로가 아내 오나오와 동생의 불합리한 관계를 의심해 정조를 시험하고자 동생에게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를 종용하는 장면만 제외하면 특별히 도덕적 잣대를 들먹여 당시 윤리관을 비난할 여지는 없으나 이치로가 겪는 내면과 외부의 갈등은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끓어오르는 슬픔의 주제가 된다. 믿고싶은 동시에 믿고싶지 않은 이치로의 고독과 절망이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 짐작된다. 마침내 이치로는 "죽느냐, 미치광이가 되느냐, 아니면 종교를 얻느냐, 내 앞엔 이 세가지밖에 없네."라고 토로하면서 부부 간의 갈등을 형제 간의 불신, 가족 간의 불화로 확대시킨다. 그는 전형적인 신경쇠약에 불안증을 안고 있는 제 안의 세계에 고립된 고리타분한 지식인이다. "요컨대 나는 인간 전체의 불안을 나 한 사람에 모아, 그 불안을 1초 1분의 단시간에 응축시킨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네." 이치로의 고뇌는 이 한 문장만으로도 넘칠 만큼 추측되고도 남을 정도다. 작은 불신이 또 다른 불신을 낳아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비릿한 의심이 단정하지만 단호한 오나오의 성격과 맞물리면서 스릴러적 요소를 낳는다. 먼 곳에서 쌩쌩 부는 바람의 난폭함에서 약간은 비켜서 있는 듯한 지로와 부모 덕분에 활화산처럼 타오를 뻔한 파괴의 위력이 봉합되는 양상을 띤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 5곡에 나오는 바울과 프란체스카의 사연에 빗대어 어째서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남편의 이름은 잊혀졌는지 얘기하던 형은 이런 말을 한다. "지로, 그러니까 도덕에 가담하는 자는 일시적 승리자임엔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다. 자연을 따르는 건 일시적 패배자이긴 해도 영원한 승리자다..." 이치로는 스스로 알을 깨부수지 못한 채 갇혀 울부짖는 영혼처럼 보인다. 현대인 대다수가 느끼는 현실과 이상, 나와 사회의 괴리를 상징하듯 뼈저리도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의 고통을 단순히 개인적 문제라고 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치로의 문제를 정신과 영혼의 개인적 문제로 귀결시켜야 할까. 에고(Ego)를 스스로 철저하게 차단해버린 건 이상으로서의 사회인에 도달하려는 노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홀로 서재에서 책과 씨름하며 쌓여간 세월 덕에 고학력 고소득 직업을 얻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의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낑낑대며 사랑(연애)과 결혼 문제에 있어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인간인지 깨닫는다. 마침내 지로가 불거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여 나갔을 때 그는 오히려 텔레파시나 사후세계의 연구에 집착함으로서 단절과 불통의 끝을 보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지로의 노력으로 여행을 떠난 형의 사소한 행동을 알려달라 당부한 지인에게서 보고형식의 편지가 올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동생은 형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한사람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이처럼 고달프기 짝이 없다. 더불어 이치로는 스스로 혹은 사회가 억지로 가둔 세계에 갇혀 안전한(원하는) 곳으로의 안착을 시도하지 못한 채 불우하게 냉담한 시공을 맴돌 뿐이다.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의 충돌, 자아 형성과 보존, 세계관 형성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더라도, 역할과 지위의 관계가 틀어져버린 이치로의 위험하고도 사악한 질주를 막을 수 없다. 절망 아니면 광기로 열린 가능성은 <행인>을 더욱 어둡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초월과 한계는 반대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 작품 안에서 둘은 일치한다. 아무데도 머물지 못한다는 말은 어디에나 머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초반 지로의 오사카 여행과 친구 미사와와의 친목, 지인 오카다 부부가 베푼 친절, 어머니와 형 부부가 내려와 동행한 며칠간의 기이한 여행, 알음알음으로 만난 오사다와 사다의 혼담 성사까지, 두루 연결된 내부관계에서 해방되기까지 주인공들이 겪거나 겪어야 할 자아분열과 성장과정으로도 읽힌다. 억지스럽긴 해도 이치로의 폭주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지로나 주변인물 역시 하나같이 불완전한 성장통을 앍고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준비도 책임도 없이 앞으로 내쫓기기만 하는 이들에게, 고민하는 한, 애태운 만큼 날아오를 날이 있으리라 작은 연민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실질적으로 열린 결말을 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