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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이 벌어지던 그때를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엄마는 가평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 여직원이 전화를 한 통 받더니 갑자기 오열하며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던 모습을 말해주었다.광주가 고향인 미스리였다. 또 그날 우체국장이 전 직원을 불러 '광주에 북한을 추종하는 빨갱이와 간첩이 출몰했다'며 그들을 막기 위해 군대가 투입됐으니 쓸데없는 입놀림과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국장이 들려준 내용이 적힌 서류는 모두가 돌려 읽고 난로에 태웠던 기억도 들려주었다. 엄마는 그때 어떤 대단한 일이 광주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우체국장님이 전해준 이야기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만 진실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책의 역할과 시대정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획득한 무리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바로 '진실'이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국민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권력은 가장 먼저 언론을 장악하고 뉴스를 조작했다. 광주의 그 참혹했던 진실과 끔찍한 고통의 순간은 빨갱이 무리의 폭동으로 보도되었다. 아직도 광주 민주 항쟁을 빨갱이들의 폭동, 국가 전복을 꾀한 불순세력의 반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부패한 권력의 수법이 놀라울만큼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현재는 달라졌을까?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도 30년이 넘게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권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뿐이다. 공영방송의 8시 뉴스 기사꼭지가 기껏해야 설 연휴 '윷놀이에서 모가 잘 나오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언론을 통해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한숨짓게 만든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원래 동아일보 기자였다. 그러나 언론을 억압하고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 벌어진 1975년의 이른바 '동아해직사태'때 김언호 대표 역시 동아일보에서 해직됐다. 자유언론을 수호하고 진실을 외치기 위한 해직기자들의 투쟁과 시민들의 응원은 국민들이 주인인 신문, '한겨레'의 창간으로 이어졌지만 대다수의 기자들은 이때 진실을 향했던 그들의 날카로운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언호 대표는 대신 언론인에서 출판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신문 대신 책에서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찾았다. 언론운동, 정신운동의 일환으로 책 만들기를 시작했다. 김언호 대표와 한길사가 처음 만든 책은 언론인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시인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의 책으로 한 권 한 권이 당시의 어두컴컴했던 세상을 고고히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책은 한 사회를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고 바른 길을 제대로 걷게 만들어준다. 이때 한길사에서 나온 책들이 그랬다.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마주하게 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의 책은 언론이 할 수 없었던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판금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몰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시대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의 사상과 철학, 송건호, 리영희 선생의 깨어있는 언론인의 자세와 목소리, 장준하 선생의 기개있는 외침과 이오덕 선생의 우리말을 향한 예찬이 담긴 책을 보고 있자면 87년의 뜨거운 함성, 결의에 찬 행동, 기개 높은 의지의 민주화 운동은 출판인들의 불굴의 노력에 의해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책은 당대 지식인들의 자유를 향한 외침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통신과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그 때 모두가 함께 연대할 수 있도록 가교의 역할을 담당했다. 책이 가진 역할과 시대정신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하게 만든다. 김언호 대표는 책은 세상을 향해 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의 흐름과 분위기를 읽고 이를 정확히 짚어내 한 권의 책으로 지금 이 순간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 나아가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 시대를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책이 가진 역할이자 시대정신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속도의 사회 그리고 다시, 책이 가진 역할과 시대정신 세상이 바뀌었다. 신문과 뉴스가 언론의 전부였던 시절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다. 이제 신문은 대표적인 사양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공중파 뉴스는 이미 권력에 길들여졌다.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공중파 뉴스를 외면한 지 오래다. 대신 새로운 언론이 등장했다. 신문과 뉴스 외에도 세상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채널이 훨씬 다양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서로 진실을 공유하고 확산시킨다. 때로는 스스로 언론의 역할을 담당한다. 실시간 중계도 가능해진 스마트폰 덕분에 사건 현장을 시청자들에게 가감없이 내보낸다. 기자의 노력이 담긴 글, 활동가의 혼이 실린 외침은 '리트윗'과 '좋아요'를 통해 순식간에 대중에게 퍼져나간다. 정부가, 권력이 진실을 틀어막을수록 걷잡을 수 없이 진실을 대중을 향해 뻗어나간다. 하루밤 사이에도 모두가 똑같은 글과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속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책의 역할도 변했다. 대안 언론이 충분히 등장한 오늘날, 사람들은 책보다 인터넷을, 스마트폰을 가까이 하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 속에서 호흡이 느린 책이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무리인 시대가 온 것이다. 1987년 우리 손으로 이루어낸 민주항쟁이 책을 통한 혁명이자 시대의 변화였다면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쟈스민 혁명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한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책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상가의 철학과 정신이 담긴 책 대신 대중들의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익명의 이란 시민이 유튜브에 올린 네다 솔탄의 죽음은 인터넷과 모바일의 위력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맞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네다 솔탄은 테헤란 아자드 대학의 여학생이었는데 이란 민병대의 조준사격에 숨을 거뒀다. 그녀가 총을 맞고 죽는 장면이 누군가의 스마트폰을 통해 촬영이 됐고 이는 유튜브 올려지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SNS에서는 '이란의 민주주의를 위한 녹색 리본 운동'이 전개됐다.) 그럼 이제 책이 가진 가치와 역할은 무엇일까? 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분명 책의 역할은 변했다. 그러나 책이 가진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영롱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깊이 있는 지식과 가치 있는 진실을 향한 욕구는 오직 책만이 채워줄 수 있다. 빠르게 변한 사회만큼 정보와 진실도 빠르게 흩어지고 사라진다. 오늘 사회를 한껏달군 진실이 한 달 뒤에는 또 다른 사건 때문에 흔적도 없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제 스마트폰, sns를 통해 진실을 빠르게 마주했다면, 그 진실의 깊이와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는 것 역할은 책이 담당해야 한다. 호흡이 느린 대신 깊이가 있는 지식, 빠르게 흘러가는 사회 속에서 하나의 사건에 온전히 몰두하고 침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오늘날 책이 가진 시대정신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