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딜 가나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잘난 사람은 저래서 잘났다고 이야기하고 못난 사람은 저래서 못났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잘나고 못난 이유 때문에 상황에 따라 위치가 너무 쉽게도 변한다. 탈무드에 나오기를 한 랍비가 배에 탔는 데 그 배에는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부자는 가난한 랍비를 무시했다. 배가 난파해서 외딴 섬에 사람들이 겨우 도착하게 되었는 데 배가 가라앉으면서 부자들이의 비싼 물건들도 모두 가라앉아서 원주민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랍비는 자신의 지식으로 원주민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고 부자들은 매일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너무 뻔해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어떤게 지식이고 어떤게 재물인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저명한 시인은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었고 유명한 기업가는 지식이 얕았다. 자신에 맞는 것을 찾아가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길이 너무 차이가 나서 고민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역사는 특히 승자독식의 경향이 강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기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럼 면에서 아프리카와 중동의 역사는 과소평과된 경향이 많다. 이븐 할둔은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일대 -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의 대역사가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븐 할둔이 다른 곳의 역사가도 아닌 아랍의 역사가 사이에서 비방받는 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전반에 걸쳐 이븐 할둔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로는 움란 바다위와 움란 하다리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이었다.각각 유목생활과 정주생활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너무 제한적 혹은 확장적이라는 이유로 옳지 않다고 한다. 마그레브의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유럽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 발전의 방향으로 마그레브가 오지 않은 것은 이것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발전과 성취와 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려는 사람들의 투쟁은 언제나 사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투쟁이 느슨해진다면 상대적으로 변화는 느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껏 몇몇 종교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우리 나라를 봐도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퍼져서 귀족 백성 가리지 않고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유럽에는 기독교가 절대적이었다. 종교라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유대감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안심하게 되고 사회의 혼란은 줄어들게 된다. 이런 사회의 변화는 밑에서 일어나는 난 보다는 기득권의 권력다툼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그레브의 종교적 인식과 문화는 이 기득권의 권력다툼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소규모였고 충분한 부를 가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더 부를 늘리려고 하지 않았고 유럽의 귀족과 자본가 처럼 대립 구도로 향하지 않았다. 많은 철학가나 사상가들이 좀 더 좋았던 세상으로 과거를 꼽았다. 지금 보다 과거가 더 행복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자고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의 것을 본 받자고 했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우기가 시간에서 무언가를 본다면 과거를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생소한 곳에서 활동한 이 역사가는 14세기 지금으로 부터 약6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지금에서 봐도 손색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통찰력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으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책 내내 나온 생소한 단어들에도 불구하고 이븐 할둔이라는 역사가를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
|
최근 이집트는 시민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다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는 일이 발생했다. 독재자 무바라크를 쫒아낸 자리에 들어선 무르시 정권은 무바라크보다 더한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싸고 있다. 중동국가에서는 이집트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들이 봉기하고 있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승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재자들의 반격이 거세지고 국제적인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중동의 봄날은 흐지부지되고 마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 등 극단적인 종교분쟁까지 가세하면서 양상은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이처럼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극단적 이슬람주의, 테러, 남성우월주의, 빈곤 등 안좋은 이미지만으로 부각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오래전 인류의 문명이 발생되었던 곳이고 중세에는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으며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신적인 동력원이 되기도 한 곳일 정도로 높은 문화를 누리고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현재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강조되는 듯 하다. 중동은 우리와 멀게만 느껴져서인지 크게 관심을 가지지도 못했고, 정확한 정보가 없다보니 다소 왜곡된 이미지로 비춰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편협한 지식탓으로 이 책을 읽어내려가는 작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븐 할둔”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그가 쓴 책을 외운 정도가 전부였을 정도로, 이븐 할둔의 생애나 저작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은이의 이야기가 다소 생경하게도 들렸다. 이 책은 원래 198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21세기의 시각으로 읽히기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의 부제로 붙은 ‘역사의 탄생과 제3세계의 과거’를 떠올리면 이 책이 출간된 당시 한창 ‘저개발’과 ‘제3세계’가 논의되던 때여서 서구제국주의 시선으로 읽히던 세계에 대한 해석을 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14세기를 살았던 이븐 할둔이라는 역사학자의 눈을 통해 현재와 같이 이슬람 국가가 추락하게 된 원인을 읽어 보려고 한다. 지은이는 1,2 부로 나누어서 이븐 할둔의 생애와 연구업적에서 금 교역의 종식에서 현재 이슬람 국가들의 쇠락의 원인을 짚어 내고 있다. 이로 인해 서구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영향에 굴복하면서 19세기에 식민 지배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 지배는 현재의 저개발 상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은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으로 당대를 읽었고 이러한 합리주의는 유럽 국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이슬람 국가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븐 할둔이 쓴 책을 직접 읽어본다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아무래도 제3자의 눈과 입을 통해 다시 쓰여진 책이어서 지은이의 눈과 입으로 각색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혀 접해보지 못한 이슬람 역사학자의 이야기여서 생소하게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학자라고 하면 항상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하는데, 오래 전에 이토록 뛰어난 균형감각을 가진 역사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었던 책이었다. 치밀한 고증과 역사 분석, 그리고 각종 증거자료들이 더해져 풍부한 내용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에 따라주지 못하는 내가 아쉬울 따름이다. |
|
이븐 할둔? 낯선 이름이지 아닐 수 없다. 내 기억을 믿을 순 없지만, 정녕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음이 분명한 이름이다. 그런데, 그는 14세기 북아프리카(마그레브) 지방에서 우뚝 솟은, 아랍 최고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란다. 사실 그런 인물을 몰랐다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고, 창피할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적 편향에 그 핑계를 댈 수도 있고, 어차피 서구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이라는 것에도 핑계를 둘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안다는 것이 그저 상식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알아나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면, 몰랐다 하더라도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이름이 독서를 통해 큰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르 라코스트라고 하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은 『이븐 할둔』을 통해 단지 이븐 할둔이라고 하는 한 사상가, 혹은 역사가를 대중에게 소개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수 세기 전 세계사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지역(그곳은 범 아랍권이긴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포화가 자욱하던 중동도 아니었다)에서 현실 정치를 통해 온갖 권모술수도 동원하던 정치가가 사상가, 역사가로 변신하여 책을 쓴 얘기, 즉, 그 인물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좀 어렵지만, 저자는 이븐 할둔의 저서와 자신의 책을 통해 두 가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오늘날 제3세계라고 하는 지역의 빈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유지되었는지에 대한 것이고, 역사학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우선은 제3세계라는 지역에서의 빈곤의 악순환은 기존의 분석과는 다소 달리 내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동원하지 않고 그 사회 자체의 특성, 나아가 모순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내지 못한 부족 중심의 군사민주주의가 원인이라는 것인데, 솔직하게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것을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 적용해본다면... 책임은 그 나라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외세에 책임지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탐욕스런 제국주의, 식민주의가 없었더라면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질 이유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고민이 많이 필요한 내용이 분명하다. 또 하나는 이븐 할둔을 통해 역사학이 출현했다는 시각이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 아닌, 신앙이나 신념에 기반을 둔 일방적인 역사 해설이 아닌, 관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추론을 통해 진정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신앙주의와 합리주의의 모순 속에서 피워낸 ‘역사학의 단기 출현’은 비상한 사건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인데, 이는 계승자를 갖지 못했다. 사실 이 부분에 주목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계승자를 갖지 못한 학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그레브라 불리는 지역이 세계사에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제3세계의 출현과 유지라는 것과 맞물려서 말이다. 어느 지역이든 돌출한 사상과 빛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계승이 되느냐 아니냐가 그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 말이다. 합리주의는 근대 서구만의 발명품은 아니었다. 이븐 할둔은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낸다. 그러나 그 증명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우리는 이 이름조차 낯설게 여기며 비로소 배운다. (2012. 11) |
|
이븐할둔.. 나에게 그는 참 낯선 사람이다. 솔직히 이름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들어봤을 정도이니.. 사실 미국의영향력안에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성때문일까.. 이슬람의 문화를 접하기는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인문학자들.. 특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이 분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는게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왜냐면 그는 유럽비평가들에게 '역사의 변덕으로 르네상스보다 한 세기 전 지중해 건너편에서 출현한 르네상스 이탈리아인'이라는 긴 수식어를 부여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슬람주의들에게 배척받기도 한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의 의미와도 닿아있지 않을까? 인본주의.. 즉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오고.. 심지어 이탈리아의 인본주의는 인간의 지식과 창조성을 찬양하기까지 했었다. 도리어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느낌마저 드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들은 바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무한대로 바뀔수 있다. 심지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까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이븐할둔의 접근은 그 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나,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신에 의한, 신을 위한 과거로 역사를 인식하던 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록문화로 인식될 수 있는 역사와 또한 문학으로 치부될 수 있는 역사..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던 인물이였다. 물론 내가 다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이였고.. 또한, 그의 저서인 [역사서설]조차 읽어보지 않았다. [역사서설]을 접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수월할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심지어 동여상 강좌까지 있는 상품이 있었지만.. 품절된 상태라.. 아쉬웠다. 이번에는 서평을 쓰기 위해 조금 급하게 스스로를 재촉하며 읽게 되었지만.. 몇번을 더 읽다보면 어느정도 개념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역사가로서의 이븐할둔은 나에게 큰 의문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 역시 연대표 위주의 암기로 역사를 생각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읽는 책은 솔직히 읽는 재미가 반감된다. 무방비 상태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 책을 읽을 때 화자와 독자의 상호교류가 있어야 생각하고 비판하고 또는 감정을 이입하는 맛이 나는데 이런 책들은 나에게 완전히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한다. 누굴 탓하랴. 나의 무지함을 탓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나에게 새로운 영역의 지식을 제시해준다. 취하고 흥미를 느끼고 또 지식을 확장할 것인지는 나만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 책 <이븐할둔>을 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븐할둔의 <역사서설>을 먼저 읽어야 하는 것. 이 책에 의해 이븐할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역사서설>을 읽어 가는 방식도 나쁘지는 않다만, 이 책은 철저하게 이븐할둔이 쓴 <역사서설>로써 이븐할둔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서설>을 읽고 이 책을 읽는 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아프리카 그리고 아랍민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처음 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또는 이 책의 부록에 나와 있는 인명, 지명 용어정리를 자주 들춰보고서야 책의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이슬람문화나 아랍민족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 책을 읽기 위해 용어를 이해하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첫 번째는 14세기 속에서 이븐할둔이 겪어 온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이븐할둔이 겪은 경험들을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는 역사가로서의 이븐할둔의 중요성과 그의 사상을 평가한다. 이븐할둔이 치열하게 의미를 해석해나간 역사는 14세기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지역에 해당되며 주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지역을 일컫는다.) 지역의 혼란의 시기이다. 그는 고귀한 가문의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고급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이 교육은 이븐할둔이 <역사서설>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관을 만드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 마그레브지역을 통일했던 알모하데제국이 무너지고 혼란의 시기가 도래했는데 이 시기에 태어난 이븐할둔은 그의 신분과 지식의 이용가치를 가지고 여러 왕조와 부족들을 오가며 군인을 이끄는 장수로서, 정치가로서, 또는 사상가로서 활약을 한다. 때로는 여러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보필했던 군주를 배신하기도 하며 왕조의 흥망에 관한 다양하고 직접적인 경험으로 그는 역사를 인식해 나간다. 그전까지 역사란 그저 사실들을 나열하거나 신이 개입하거나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치장을 하거나 자신이 속한 왕조를 위한 왜곡된 역사였다면 이븐할둔이 해석하는 역사는 철저히 경험에 의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사건이 나타난 원인을 사회적·정치적 구조들을 분석한 역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이브라코스트는 이븐할둔을 가치 있는 역사가이자 최초의 진정한 역사가로 분류한다.
그리고 후에 이븐할둔은 마그레브지역을 떠나 카이로로 옮겨 집필에 전념한다. 그는 마지막 생애에서 그의 합리적인 사상보다 신학과 종교에 전념했다고 한다. 사실 이븐할둔은 어릴 적부터 합리적인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아 합리적인 역사의식을 가졌지만 역사를 의미 있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내내 종교에 대한 집념도 강하게 드러냈다고 한다. 그가 살아온 세기에서 종교의 중요성은 얼마나 컸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철학을 역사에 끌어들이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보편적인 생각을 고정해두고 여러 사건들의 원인을 그 생각에 끌어들여 끼워 맞추는 것은 상황에 따른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븐할둔은 14세기 마그레브지역 왕조의 잦은 쇠락과 새로운 왕조의 출연의 원인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유럽의 역사가들과 달리 이 모든 것을 외부적이 아닌 내부적 원인에서 찾았다. 마그레브만의 독특한 사회·정치적 구조 속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이븐할둔>의 저자인 이브 라코스트는 예전에는 찬란했던 문명이 지금의 저개발국에 머무르게 된 북아프리카의 사연도 여기에서 찾는다. 마그레브지역은 부족 간의 결집이 강한 지역이다. 하나의 왕조가 탄생하면 그들은 곧 사치와 타락에 빠지게 되고 부족이 가진 고유한 전투능력을 잃게 된다. 그러면 아사비야를 가진 부족은 왕조의 지속력을 잃은 왕조를 무너트리고 다시 하나의 왕조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곧 다시 쇠락의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왕조가 사치와 타락에 빠지면 아사비야를 잃게 되는데 이것이 곧 왕조의 쇠락의 원인이 된다. 이븐할둔이 치열하게 경험했던 시기의 역사는 이러한 사건들의 반복이었다.
그럼 아사비야는 뭘까? 여러 역사학자들조차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 같다. 그냥 쉽게 왕조를 만들기 위해 부족들이 가진 단합된 원동력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그저 우리에게는 대충의 의미만 전달되면 될 것이기에. ㅡ.ㅡ;
하나의 부족이라는 생명체가 있다고 하자. 부족은 생명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다. 그들 주위에는 같은 종(種)의 생명체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 중에 하나의 생명체가 그들 중에 왕이 되었다. 이 왕도 사실 그 전의 왕을 무너뜨리는 아사비야를 가지고서 왕좌를 빼앗았다. 하지만 왕이 된 이 생명체는 부유한 생활에 폭식과 안일함, 사치 등을 하게 되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주위의 다수의 생명 속에는 언제나 그 왕좌를 노리는 아사비야를 가진 생명체가 존재했다. 아사비야를 가진 생명체 중 가장 힘이 쌘 생명체가 왕좌를 빼앗고 그는 다시 아사비야를 잃게 되고 쇠락에 길로 빠진다. 대충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이것이 이븐할둔이 분석한 마그레브지역의 불안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훨씬 복잡한 사회·정치적 원인들을 말하고 있지만.. 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직 까지도 진정한 이븐할둔의 위대성을 실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책을 통해 내가 접근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인식의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이슬람 문명은 아직 이 시대의 주도세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 과연 그들의 문화에 있을까? 주도세력이 과도하게 자신의 문화의 우월성을 주입시키려는 데에 있을까? 난 이븐할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존 관습을 깨트리는 그의 독창성을 존중하며 오늘날에도 많은 대립이 있는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대립을 그의 자신의 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발전시켜나갔다는 점, 그리고 외부의 역사관이 아닌 주체적인 역사관으로 마그레브지역의 역사를 인식했다는 점 등이 새삼 와 닿았다. |
|
마그레브가 뭐냐…… 모르겠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그래서) 다각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밖에는. 어쨌거나 이븐 할둔이라면 저 이름 높은 『역사 서설』의 섬세한 분석인데 그가 사용한 ‘움란(umran)’을 누군가가 ‘문명’으로 옮겼다하더라도 이 용어의 의미 역시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다. 『역사 서설』에 의하면 움란의 뜻은 이렇게 풀이된다. ①야생적인 삶, 관습의 유화…… 인민이 서로서로 획득하는 다양한 종류의 우월성……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과 노력을 바치는 직업들. ②종교, 도시, 주거, 권능, 인구의 저하와 증가, 인구 감소, 과학과 예술. ③마지막으로 사물의 성질이 사회 성격 안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모든 것.
|
|
이슬람 역사를 흩어보다 보면 유난히 흥미를 끄는 이름 둘이 있다. 바로 이븐 할둔과 이븐 바투타. 14세기 역사가와 여행가로 이름을 날렸던 두 사람, 역사책을 들추다 그 둘의 이름이 나오면 늘 호기심이 일면서 언젠가는 그들에 대해 알아봐야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런 저런 일들에 치이다 까맣게 잊어 버리고, 결국 찰나의 호기심이나 결심에 그치고 말곤 했었다. 그렇다보니 "이븐 할둔" 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온걸 보고는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을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이제 드디어 오래 묵었던 내 호기심이 풀리는구나,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증폭을 하게 만들었다. 해서 반가운 마음에 펼쳐들게 된 <이븐 할둔>, 결론만 먼저 이야기 하자면 내 기대와는 전혀 딴판의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이 전기처럼 이븐 할둔에 대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의 역사사상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이었으니 말이다. 이븐 할둔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어찌나 그에게 무심하던지...이 책을 읽고난 다음에도 나는 그가 언제 결혼을 했고, 가족들과의 사이는 어떠했으며, 형제는 있었는지, 아내는 몇 명이었으며, 자식을 남겼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전무했다고 봐도 좋다. 그저 아주 기본적인 정보, 그가 몇 년에 태어났고, 어디어디를 떠돌며 살았으며, 어떤 책을 썼다 정도는 적혀있었지만서도, 그건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아니말할 수 없었기에 썼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븐 할둔이라는 자에 대해선 관심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이븐 할둔이라는 사내가 시대를 거스르는 천재였으며, 14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근대적인 역사가였고, 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상을 전개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 아무런 연관도 없이 나타난 천재였다고나 할까. 그의 사상이 그토록 놀라운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들이 근대성과 닮아았다는 것 때문이다. 14세기에 이슬람에 나타난 근대인이었다는 뜻이다. 놀랍지 않는가. 당시 시대에 짓눌려 있는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으로 사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슬람 역사에서는 그런 자가 없었다고 하니 , 이 책의 저자가 흥분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이븐 할둔의 사상만 물고 늘어지는데, 역사를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하는 나로써는 솔직히 이렇게 재미없는 책은 오랜만이야 할정도로 재미없었다. 그나마 후반으로 넘어가니 읽어줄만 하던데, 그럼에도 좀 더 재밌게 서술할 수는 없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더라. 나 이븐 할둔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읽고 났는데도 아는게 읽기전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가 천재라는 것도 역사가라는 것도 모르진 않았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 책에서 이븐 할둔에 대해 건진 것이라면, 그가 대단히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난 사람이었다는 것, 여기 저기를 떠돌면서 한때는 귀함을 받기도 하고 한때는 박해를 받는 등의 흥망성쇠를 되풀이 했다는 점, 충분히 정치적인 권력을 탐할 수도 있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은둔을 자처했다는 점, 그리고 본인 자신은 지극히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자였지만서도,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진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점. 이슬람을 독실하게 믿었다는 뜻인데, 그게 그의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서도---아마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싶다. 아무리 천재적인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영성을 인정하는건 또 다른 이야기니 말이다.--하여간 저자가 보기엔 그런 그의 태도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근대적인 사고로 역사를 해석했으며 또 그런 취지에서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 기록 자체도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정확성을 높이 샀다는 것, 자신이 독특한 사고를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아마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등이 기억에 남는다. 한마디로 한 천재의 초상을 그럭저럭 그려볼만한 정도의 내용이었다는 생각이다. 그게 재밌었다면 환호를 했겠지만서도, 뭐...어쩌랴. 이 세상의 모든 저자들이 빈약한 정보로 무장한 독자들에게 맞춰서 쉽게 글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하니, 이 책은 어쩌면 역사를 전공한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나처럼 전혀 문외한이 읽었다간 왜 이렇게 재미없냐고를 반복할 수도... 해서, 이븐 할둔에 대한 호기심을 풀 수 있을줄 알고 반색했던 이 책은 결국 그에 대한 진한 호기심을 남긴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야 했다. 그에 대한 갈증이 남았다는건 좋은 것이려나?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하던 <역사 서설>부터 읽어볼 생각이다. 그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수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을 내가 이해할때의 말이겠지만서도...<역사 서설>은 읽을만하기를 바랄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