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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실세계의 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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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인 현수는 직장도 없고 직장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 소유의 건물에서 잡다한 일을 해주고 용돈이나 받아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고 캥거루족인 것은 아닌 게 부모가 자신의 따뜻한 자루가 아니라는 것을 (어려서 형이 사고로 죽는 바람에)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아버지인 경술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은 아니지만 애매하게 마음을 얹어놓은 여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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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인 현수는 직장도 없고 직장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 소유의 건물에서 잡다한 일을 해주고 용돈이나 받아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고 캥거루족인 것은 아닌 게 부모가 자신의 따뜻한 자루가 아니라는 것을 (어려서 형이 사고로 죽는 바람에)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아버지인 경술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은 아니지만 애매하게 마음을 얹어놓은 여자의 자식이라는 점이 오히려 엄마인 복임의 마음을 더 어지럽히고 손상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은 사람의 인정이나 도리 같은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의미에서는 여자의 더 넓은 품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동생이나 시누이의 혈육인, 집안의 아이였다면 그 아이를 키워야 할 정당성 같은 것을 조금 더 쉽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밖에서 본 자식이었다면 시대를 핑계 삼아 당당하게 물리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아이를 단지 남편이 대추나무에 연 걸듯 마음을 걸어둔 여자의 아이라는 이유로 키워야 했다면 양육자로써 복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러한 인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죽어야 할 자식은 살고 살아서 대대손손 무궁해야 할 자식은 죽고 만 이러한 집안에서, 눈칫밥에 길들여진 채 성장한 게 현수다. 현수는 뚱뚱하고 소심하며 자기표현에 서툴다. 취미는 위키를 수정하면서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세상일에 일조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다. 또 하나의 취미는 먹는 것인데 용돈은 늘 궁하기만 하고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철공소에서도 유일하게 자기 분야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여자가 현수 앞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철공소 신입인 다솜이고 다른 한 사람인 세라는 아버지의 지인으로 찾아와 아는 고모를 자처하더니 꺼림칙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이번에 양명시 시장 후보로 나온 송찬우에게 인터넷상으로 해작질을 해서 좀 괴롭혀달라는 것. 수고비는 꽤나 쏠쏠했지만 그렇다고 돈 보고 아무데나 덤빌 나이는 아니어서 사건의 내용을 고치꼬치 파고 물어보지만 송찬우가 30년 전 자신의 전세금 2천만원을 가지고 튀었다는 내용만을 전달 받는다.

문제는 ‘30년 전이라는 기표와 세라가 낳아서 남에게 준 아기라는 기표가 자신이 부모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차디찬 경험을 상처로 간직한 그에게 우연히 연결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현수는 세라에게 질문한다.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아르바이트를 제안한 것이냐고.

찜찜함이 남더라도 일정한 자극이 오면 앞으로 슬그머니 나아가 보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 현수는 돈 떼 먹고 오리 발이라는 내용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송찬우 스토리를 올리는데 반응은 즉각 나타난다. 글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납치된 상태로 송찬우와 마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막장 드라마 식의 활극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세라가 자신이 낳은 아이 현수를 거친 아르바이트로 떠민 것은 (의도야 어떻든) 어미가 그렇게라도 아들을 아비에게 떠안긴 격이 되어 현수는 일생에 한 번이나마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세라의 이러한 꿈틀거림은 현수라는 이 청년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현수는 세라를 생모라고 감 잡았듯이 송찬우가 아비라는 것을 단숨에 감 잡는다. 또한 송찬우 역시 현수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송찬우는 현재 잘 나가는 여자와 결혼해 살지만 두 아이는 모두 아내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들이다. 그러한 아이들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그는 문화로 사기를 치면서까지 어렵고 비루한 삶을 유지하고 지탱해간다. 송찬우의 인생 역시 서늘하게 그늘져 있다.

남은 문제는 진실공방으로 집중된다. 세라는 30년 전 송찬우의 앞가림을 대신하기 위해 전세금을 몽땅 털었는데 돈이 교환되는 순간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충분히 감 잡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런 계산 없이 그냥던지고 그냥주었다. 심지어는 그가 말없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냥 주었던 그 마음을 거두지 않고 송찬우라는 블랙홀에 갇힌 채(혹은 스스로를 가둔 채)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가 바로 물 밑, 세라의 데린쿠유다. 세라는 그때 치명적인 지병을 앓고 있는지라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려서 우물에 빠졌을 때도 그랬다. 사람을 부르거나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리지 않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그 안에서 그냥 버텼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런 식이다. 송찬우와 최초로 만난 날을 기념하듯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알리고 말없이 끊기를 30년간 반복한다. 이런 세라를 두고 송찬우는 세라와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며 혀를 내두른다. 자신이 말없이 사라진 것을 경술과 연관시키기까지 한다. 경술이 송찬우가 세라를 떠나기만 하면 뒷일은 다 알아서 하겠다, 아이까지 거두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송찬우는 다른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을 순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짐작이 가느냐고 현수에게 묻는다.

현수는 그 기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어머니인 복임을 찾아가 왜 자신을 거두었는지 물어본다. 복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왔으니까 거두었다고 말한다. 얼결에 갈 데 없는 생명을 팔에 안았는데 내려놓을 자리가 안 보여 그냥키웠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러자고 결심했으나 때로는 아이를 향해 차갑고 싸늘한 표정을 지어 상처를 안겼을 것이다. 이를테면 현수로 인해 복임 역시 데린쿠유를 소변주머니처럼 달고 살아야 했다. 소변주머니에 채워진 것은 소변이 아니라 남 몰래 흘린 눈물이다.

현수와 송찬우는 마주 앉아 있어도 상대에게 다가가 손 내밀 처지가 못 된다. 이 세상의 자리는 엄중하기만 해서 누가 누구의 진짜 아들이고 진짜 부모라는 사실은 사정없이 물 밑으로 가려진다. 그들 사이에는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위치는 생물학적 진실의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고 생물학적인 아들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냥 아버지이고 그냥 아들인 무책임한 자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다. 인간계는 자연계가 아니라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문화적 질서 내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려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현수의 감춰진 역사이다. 그는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도 알게 된다. 다솜이와 함께 현실세계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려면 헝클린 역사를 재정비해야 비로소 어른이 되어 책임지는 세상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선택의 문제처럼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 중에서 누가 진정한 부모인지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점 말이다. 현수는 복임과 경술은 부모의 자리에 그대로 두고 세라와 송찬우의 스토리는 이야기로 기록하기로 한다. 키워준 이와 낳아준 이들을 동시에 부모로 아우르기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기록되어야 할 사연이 세라와 송찬우의 이야기는 아니다. 뭐가 되었든 그것은 그들의 역사이다. 현수가 기록하려는 것은 세라와 송찬우가 등장하는 현수 자신의 이야기다.

왜 하필 이야기여야 하는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라가 30년 동안 왜 데린쿠유에 갇혀 산 것인지의 문제와 닿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송찬우를 상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자를 상실할 때 행간이 발생하듯이 떠나간 연인은 마땅히 상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질 수 있다. 현수는 세라와 송찬우라는 데린쿠유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그들을 상실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소설이란 이렇게 세상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때가 있다. 존재는 있는데 부여할 자리가 없을 때 이야기 속으로 데려와 그 안에서 살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 순간 이야기는 현실세계가 잃어버린 것, 즉 행간이 된다.

데린쿠유는 다른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는 공간이기에 우물이고 지하세계이며 개인의 눈물주머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현실세계가 법과 규칙에 의해 꾸려진 세계인데 반해 데린쿠유는 사랑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점이다. 진정한 사랑은 법 바깥에서나 가능하다는 자크 라깡의 전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세라도 복임도 남성적 규칙의 계산으로는 닿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우물(데린쿠유)을 지키고 관리한다. 이 여성들의 법은 세상의 표면으로가 아니라 물 밑 저 아래 보이지는 않는 곳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힘이다. 그렇게 대신하고 떠받치는 힘에 의해 현실세계는 지탱되고 보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거기에서의 사랑은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슬픈 사랑이다.

k********2 2019.07.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