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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은 ‘변호’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학창시절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다가 번역에 의문이 들었다. ‘변호’ 대신에 왜 다소 부정적인 낌새가 있는 ‘변명’으로 번역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펴는 사람 견지에서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며, 동시에 듣는 사람은 그것을 변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중립적인데 사람이 주관을 반영한다.
가나안 교인이란 용어에는 ‘가나안’이라는 좋은 의미와 ‘안나가’라는 그 반대의 뜻이 담겨있다. 처음 제목에서 그들의 이야기라는 것에 두 개의 의미가 동시에 다가왔다. 몇 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용어의 호불호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오래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제목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100만명 이상의 교회를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한다. 책에 의하면 사실상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들 중 극히 일부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솔직히 담아 나름의 관점에서 목록화해 주어 이해가 쉽게 해주었다는 것에 별 하나를 주고 싶다. 읽어 나가는 동안 교회에서 가끔 내가 느꼈던 것을 이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와 12명의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타종교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오랜 역사와 환경에서 단련되고 여기까지 왔다. 시간과 환경에는 다양한 시민과 민중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과 이야기에 변하지 않는 하나님 아래서 기독교는 실천적으로 변화, 발전하였고,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생각을 했다. 마르틴 루터의 예처럼.
‘존중’과 ‘공동체’의 중요성에 저자와 공감한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면서 나는 형제, 자매, 내 이웃을 존중했던가. 헬 조선이라고 불리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치환되는 이 공동체에 나는 어떤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이 점에서 별 하나를 더하고 싶다.
교회를 잘 안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들의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명’과 ‘변호’는 화자와 청자의 관점의 차이일 뿐 이야기의 내용은 그 자체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어느 시점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말씀과 목회에서, 신자는 생활과 교제에서, 비신자는 기독교인 중에도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서 참고한다면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발전적 변화를 조금은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반면교사. 타산지석 이라고 하지 않는가.
예스24가 책값이 저렴한 줄 알았는데, 다른 사이트가 더 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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