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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진실의 향방은?, 광해, 그 위험한 거울
"역사 속 진실의 향방은?, 광해, 그 위험한 거울" 내용보기
조선시대 대표적 폭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연산군'과 '광해군'일 것이다. 연산군은 폐비가 된 어머니의 일로 동정하거나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으나 '폭군'이라는 사실과 인식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광해군 만큼은 어쩐지 '폭군'으로만 볼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우선 가정사에 있어 그 역시 연산군 못지 않은 아픔이 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여의고 중전인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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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 폭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연산군'과 '광해군'일 것이다. 연산군은 폐비가 된 어머니의 일로 동정하거나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으나 '폭군'이라는 사실과 인식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광해군 만큼은 어쩐지 '폭군'으로만 볼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우선 가정사에 있어 그 역시 연산군 못지 않은 아픔이 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여의고 중전인 의인왕후의 돌봄 아래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여기던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엔 광해군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인목대비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으니 그의 속이 말이 아니었을 테고 뿐만 아니라 인목대비가 왕의 적장자라고 할 수 있는 영창대군을 낳게 되니 이는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굉장히 위협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당시의 상황에 미루어 짐작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후에 그가 일으키는 수많은 옥사를 보면 위의 상황들을 참작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어쨌든 위의 상황들이 광해군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폭군'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은 또다른 이유는 인조 반정 뒤에 일어난 '호란'때문이다. 사실 이유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가 처신을 잘했다기보단 신하들이 외교적 이해관계의 득실을 따져 처신을 잘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조 반정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또다시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강산이 유린되었으며 반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란 걸 당하게 된다. 세자는 청에 인질로 잡혀가고 귀국 후, 원인모를 병으로(독살이라는 설도 있다!)죽게 되니 인조, 그에게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광해군이 '폭군'이 아닌 '중립외교에 능한 왕'으로 새삼 주목 받을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로 평가한 것을 언급한다.(p14)

 

그리고 이는 적어도 내가 배웠던 국사 교과서의 내용과 말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비슷하다. 왜란을 수습하고 '명'과 '후금(=청)'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펼친 왕... 하지만 광해군은 정말 그런 왕이었을까?


 

그는 왜 친형인 임해군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는 왜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해 서궁에 유폐까지 시켜야했을까?
왕으로서의 자질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경연'을 그는 왜 그토록 멀리했는가?
왜란 후 전란의 수습과 재정난에 허덕이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궁궐을 지어야만 했는가?
그리고 옥사는 왜 그렇게 많이 일으킨 건가? 꼭 필요한 옥사였는가?
정말 그가 반정으로 물러나지만 않았다면 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미 일어난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그렇지 않을까?하고 생각은 해볼 수 있어도 이미 일어난 일이니 잘못된 일이라면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 그가 역사 속에서 되살아나 재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 테다. 평가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광해군, 그를 배제하고 역사를 논할 수는 없으므로...


 

***

 


광해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조목조목 파헤치면서 어떠한 사료에 근거한 말이라도 확언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한 점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사실 이와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그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의 역사적 사실이 옳은 듯 하고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의 사실이 타당한 듯 한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든 판단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그러려면 지금 보다 더 다양한 역사서를 접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각도로 접근을 해야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k****e 2012.10.16. 신고 공감 12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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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 오항녕" 내용보기
역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지나간 과거에 대한 기록이고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남겨진 자료와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처음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출판사가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께서 초등학교때 사주신 <한국역사대관>이라는 6권짜리 전집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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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지나간 과거에 대한 기록이고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남겨진 자료와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처음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출판사가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께서 초등학교때 사주신 <한국역사대관>이라는 6권짜리 전집이었다. 단군신화부터 근대 광복 이후 까지의 한국의 역사가 글과 그림, 그 시대의 에피소드들과 함께 실려 있었던 그 전집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어떤 동화책보다도 재미있었던 책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사실,, 역사라는 의미보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생각을 했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배우던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간간히 책,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보게되는 역사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인물들...

그렇게 우리의 역사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얼마전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박영규 저>를 통해  간단하지만 짜임새 있게 조선의 임금들에 대해 죽 읽었던 기억이 났다..

노래를 부르듯이 외우며 공부했던 조선의 임금들과 그들의 정치.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그리고 요즘 세간의 화재가 되고 있는 <광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왕, 지도자의 역할 그리고 지금의 답답한 현실을 대변하는 듯한 이야기..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관심의 촛점이 되어있는 '광해'라는 이슈가 잘 맞아떨어진 흥행작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된 '광해군'..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극적인 내용이 아닌 역사으로 ,좀 더 객관적으로 그에 대해 알고 싶은 맘이 생겼다.

그리고 나서 읽게 된 이 책.. 생각했던 것 보다 광해군에 대한 냉담함에 당황스러웠다.

 

<왕자 광해군>

 

조선의 임금 중 폐위가 되어 폭군으로 기억되는 두 임금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연산군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폭군이었지만 광해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간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p 304 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광해군은 위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임금이었다.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하는 광해군과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

즉위하자마자  1608년에 선혜청을 설치하고 순차적으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  세무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고 알고 있던 대동법 실행..

실제로는 선조 37년에 공안을 고치고 선조40년에 왕실의 제사물품을 제외한 공물을 쌀로 내도록 하는 대동법의 전신이 시작되었고 안정적인 정책으로는 인조대에 가서 정착을 했다고 한다.

광해군시대를 건너뛰게 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왕실과 권세가의 방납 커넥션, 관례에 따른 현물납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대동법 반대에 대한 광해군의 동의, 선혜청과의 의견대립,,등으로 제도적으로는 환영을 받는 제도였으나 광해군때에는 그 시행이 매우 불투명했고 대동법이 아닌 공납제의 현상 유지를 원했다고 한다.

 

왕권의 안정을 위한.. 정적들의 제거

즉위하자마자 동복형이었던 임해군을 유배시켜 죽이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다.

훗날 반정에 의한 폐위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게 된다.

그러나 어떤 성군이나 명군도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고 대표적인 예가 태종과 세조였다. 그들에 비해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반면,

즉위후 많은 옥사를 치르느라 실제 국정이 마비되고 , 작은 아들이 즉위한 것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명을 자극했고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외교를 뇌물로 어지럽히고 경제적인 곤궁을 자초했다고 말한다.

 

궁궐건립을 위한 토목사업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궁궐을 복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 와중에 인력과 많은 자원들이 동원되는 무리를 가져왔으나 궁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일반 서가에서 논의해야하는 지경이었기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반면..

궁궐건립의 규모가 크고 그것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여 국가 예산의 15~25%가 들어가 전쟁후 어려웠던 백성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는 점.. 군량미까지 동원하며 궁궐을 지었다는 점.. 그로인해 민생이 더욱 곤궁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명, 후금과의 양면외교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응해 강홍립에게 1만군사를 내주어 응하게 했으나 명이 후금에 패하자 적당히 싸운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의 를 맺도록 하는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고 말하는 반면..

강홍립의 항복을 전후로 전사한 군사가 9천여명이고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고 강홍립은 정묘호란 때 후금 침략의 길잡이로 왔다는.. 실리주의 결과치고는 너무 비참하다고 말한다..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인조반정의 명분은 크게 두가지라고 알려져 왔다.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점과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피를 유폐시켰다는 즉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그러나 이책에서 말하는 광해군의 폐위 원인은 그러한 명목보다 민생의 안녕을 돌보지 못한 성군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더 부각시킨 듯 하다.

임금의 가장 기본적인 일인 경연을 소홀히 하여 정책을 원활하게 의논하지 못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적 부담, 세금과 부역의 과중 내명부의 청치참여등,,

임금으로서의 자질 그리고 정치 씨스템 그 자체의 붕괴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정을 위한 명분론보다는 민생을 돌보지 못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지 못했다는 그 이유가 좀 더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국왕이 즉위한 후 제일 먼저 내리는 명령이 실록편찬이라고 한다.

선왕이 승하한 후 바로 국왕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즉위식을 하고 그 즉위식 후에도 삼년상이 끝날때까지 장례절차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러다보면 국정을 살필 수 없어 국왕이 상복을 벗고 평복을 입고 국정을 보기 시작하는 '졸곡'을 기점으로 실록 편찬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렇게 남겨진 역사의 기록을 근거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 연구자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비운의 왕으로 그리고 시대의 폭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광해군..

영화에서 처럼 극적인 모습이 아닌 역사적인 인물 ,그 자체를 알고 싶었지만 결국 이렇다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저자가 제시한 사료를 통해 그 시대와 그의 면모를 볼 수 있었지만

또 그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측의 주장 또한 이러한 사료를 통해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광해군에 대한 관심은 그의 엇갈리는 평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지만 그의 그러한 면모들을 통해 지금을 바라보고자 하는 맘이 있기에 더 관심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한다.

 

지도자에 대한 간절한 열망..

그러한 것들이 이런 관심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m 2012.10.10. 신고 공감 10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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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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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책을 읽었다. 광해군이라고 하면 조선의 2대 폭군으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었지만, 간신 이이첨과 김개시라는 상궁의 치마폭에 휘둘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쫓겨난 왕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이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광해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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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책을 읽었다. 광해군이라고 하면 조선의 2대 폭군으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었지만, 간신 이이첨과 김개시라는 상궁의 치마폭에 휘둘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쫓겨난 왕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이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 곁에서 무사히 전쟁을 수습한 총명한 왕자였고, 왕이 된 후에는 명과 후금과의 전쟁 당시에 중립을 지켜서 수많은 병사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낸 실리주의 군주였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런 차에 이 책에서는 찬물을 끼얹듯 시종일관 광해군 치세 15년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조가 1608년 2월 1일 승하하자 광해군은 그 이튿날 즉위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첫 번째 한 일은 친형인 임해군 역모에 관련된 사람들을 추국청에 끌어내어 죽게 만들었으며 임해군 역시 서인으로 강등시켰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내용을 적고 있다. 이 때 광해군의 즉위를 의심한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자 조정에서는 뇌물로 이 일을 수습한 결과 은을 탐내는 사신들로 인해 나라의 재정이 휘청거렸으며 이때부터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가 뇌물로 어지럽혀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광해군 시대의 경제 사정은 대동법 실시를 놓고 혼란에 빠진 시기라고 보고 있다. 대동법은 조세로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던 공납제를 바로 잡고 공납을 현물이 아닌 전세(田稅)로 받자는 것인데 전세화가 실현될 경우 실질적으로 토지를 가진 부자에게 세금을 물리게 됨으로써 자영농이나 소농의 조세감면 효과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어진 관행과 개혁 앞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대동법 추진은 광해군 5년에 제대로 시행도 해보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광해군은 일반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 실시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공납법의 현상 유지를 원했는데 이 역시 성군의 자질과는 멀다고 보고 있다.


광해군은 제위기간동안 민생 안전 대신 과대소비 즉 궁궐을 짓는 토목공사를 선택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은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창덕궁을 짓고도 또 다른 궁궐을 증축하고 보수하는데 많은 공을 기울였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백성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으며 이때 공명첩이 나돌고, 군량미까지 빼내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폐위이유는 경연불참, 대동법 반대,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 및 민생 파탄, 끊임없이 이어진 옥사로 인한 정치 기반 약화, 형과 아우 및 인목대비 탄압으로 인한 민심 이반 등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명과 후금과의 중립 외교 역시 실록을 근거로 치적이 될 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한다. 강홍립의 항복으로 살아남은 병사는 총 1만 3천여명 중에 4천명  정도에 불과했고, 살아남은 자들도 노예로 동원되었으며, 강홍립 역시 정묘호란 때 후금침략의 앞잡이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실리주의 외교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광해군이 15년 치세동안 한 일이라고는 형제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일, 대동법을 좌절 시킨 일, 온갖 핑계를 대고 경연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친국에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간 군주, 군량미를 빼어 쓰면서 까지 토목 공사에 매달려 민심과 재정을 파탄으로 이끈 왕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의 어리석은 치세가 막을 내리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면서 광해의 15년 역사가 없었더라면 조선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살려 사회 안정과 문화의 질을 높여 훨씬 더 나은 나라를 꾸려나갔을 터인데 광해의 잃어버린 15년 때문에 나라꼴을 회복하는데 30년 이상이나 걸렸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저자는 왜 광해군의 긍정적인 면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오는 걸까? 광해군의 긍정적인 면을 가장 먼저 밝힌 학자는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관을 연구한 일본학자에 의해서라고 한다. 인조반정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광해군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정확한 역사 인식이야말로 그 민족을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게 해주므로 저자는 오직 역사의 사료에 의해 광해군을 재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바탕으로 삼은 자료는 <<광해군 일기>>이다.


사료에서 광해군의 치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폄하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책에 나와 있는 광해군은 한 나라를 다스렸던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왕자의 교육을 받았고, 어려운 전란을 부왕 곁에서 도운 왕자의 면모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혹시 편견을 깨기 위해 또다른 편견으로 에워싼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되짚어 해석하는 학자의 어려움과 두려움도 함께 느껴졌다. 



t******e 2012.10.08. 신고 공감 10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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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일기로 다시 보는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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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종종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에 감을 잘 잡지 못하였다. 실제로 둘 다 폭군의 이미지이고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지도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조선에 이런 왕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만들어지는 왕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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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종종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에 감을 잘 잡지 못하였다. 실제로 둘 다 폭군의 이미지이고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지도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조선에 이런 왕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만들어지는 왕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거 보면 , 역사의식 자체가 없는 일반사람들에게 정치와 임금, 그리고 역사의 이미지는 만들어기 나름이라는 것은 이 세가지 키워드, 정치와 임금,역사라는 것이 상징으로  세뇌시키기에 얼마나 쉬운가를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은  사료《광해군일기》라는 자료에 충실하여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아닌 광해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20세기에서 21세기에 조명되기 시작한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재평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관보다는 광해군 시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광해군 시대는 한편으로는  조선이 근대사회로 넘어가지 못하고 중세에 머물게 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해군에 의한 재평가의 시작은  '인조반정'이 '근대 역사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새롭게 재평가받으며 부활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근대주의에 포섭된 조선 근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조금 더 거시적인 안목의 역사사관을 일깨워주기 위해 광해군의 역사를 살펴보기를 권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두가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사실과 광해군에 관한 새로운 평가는 정당한 명제인가.

 

또 이 책은 《광해군일기》 사료에 충실하였는데 이 광해군일기를 비판하는 이유의 하나가 서인들이 편찬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누가 편찬했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참인 명제가 아닐뿐 더러 누가 편찬한 사료든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서인이 편찬했다는 사실로 비판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인조반정이후에 후에 남인과 북인도 참여한 사료이기에 믿을 수 있는 사료이다. 광해군일기는 광해군 재위당시 기록된 사관의 사초,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관청끼리 주고받은 문서이다. 따라서 재위 당시의 기록이므로 인조반정을 예상해서 편파적으로 작성했으리라고 보기에는 어렵을 뿐더러  광해군 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다 남아 있어서 원래기록에서 어떤 기록을 빼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일기》를 통해 광해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최근 광해군 재평가의 시조 또한  《광해군일기》에 의존한 사실이다. 그런 거 보면 광해군일기는 비판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추앙할 수 있는 자료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시대를 세 시기로 나누어본다.

1기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

2기 1613년부터 1618무렵까지

3기 1618~인조반정까지

 

 

 

책은 광해군의 역사를 말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사관의 저술이 아니라 사료 <광해군일기>에 실린 원문에 충실하게 현재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까지의 보다 총체적이고도 거시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약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은 성군이 될 가능성은 과연 몇 프로나 될까?  물론 광해군이 집권 당시의 시대는 난세였다. 그 와중에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회복시켜야 했고 붕당정치속에서 바른 정치를 하기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근대라는 과정을 일본의 식민지로 겪어야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 광해군이라는 임금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동시에 현 우리나라 정치상황과 잘 맞닿아있다.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까지는 좋지만,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대로의 광해군은 솔직히 성군에 끼지 못할 재목이라고 본다. 아무리 정치가 도덕적인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친 것외에는 딱히 왕으로서의 자질은 극히 의심스럽다. 상징을 만들고 그 상징에 지배받으며 사는 것이 정치습성이라고 보면 광해군의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실제의 모습 또한 중요하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말로 앞으로 계속 바꾸어가야할 미래를 쓰는 일이 아닐까 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2.10.01. 신고 공감 10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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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외교의 달인인가? 실패한 반면교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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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3종 세트 리뷰최근에 영화 "광해"가  히트를 치면서 더불어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저도 개인적으로 아주 신이 납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논쟁이 있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솔솔해서요.자 그럼 광해군 3종세트에 대한 독후감을 시작해 봅니다.최근까지 광해군에 대한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가 있었고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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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3종 세트 리뷰




최근에 영화 "광해"가  히트를 치면서 더불어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아주 신이 납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논쟁이 있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솔솔해서요.


자 그럼 광해군 3종세트에 대한 독후감을 시작해 봅니다.


최근까지 광해군에 대한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가 있었고 최근에

오항녕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이 출간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 전문가이지만 색다른 해석을 내 놓는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중 "광해군 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도 빼 놓을 수는 없겠습니다.

( 사실 재미는 박시백의 책이 제일입니다. 만화에요. )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논점은 크게 1) 실록에 대한 평가 - 광해군 일기에 대한 평가 - 공정한가?  후대에 많이 조작이 되었는가? 2) 외교정책 - 중립 외교 의도된 전략인가? 후대의 인식때문인가? 3) 민생정책 - 폭군인가? 전제 군주의 한계인가? 이렇게 세가지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실록에 대한 평가

한명기는 책 25쪽에서 [인조반정 이후 거의 전멸해버린 북인들의 행적은 오롯이'승리자' 서인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들은 서인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실록'을 다시 검토하거나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광해군과 북인들이 남긴 행적,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모습은 서인들의 눈과 평가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 ] 이라고 말하며 일차적으로 실록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오항녕은 책 27쪽에서 [ 첫째 <광해군 일기>가 서인들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은 '의문'이지 논리적으로, 사실적으로 참인 명제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서인이 편찬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은' 누구 말이니까 믿을 수 없다 말만큼이나 비약적이다.]


28쪽부터에서 [한편 사실의 차원에서 볼때, 광해군일기의 편찬에는 서인 만이 아니라 남인은 물론 반정 이후 조정에 들어온 북인도 참여 했다. 그러므로 서인이 편찬 했기 때문에 믿을수 없다는 의문은 훨씬 제한적으로 타당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둘째 <광해군일기>에 실린 기록 자체의 성격을 보겠다. <광해군 일기>의 기본사료는 인조반정 이후 편찬할 때 작성 한것이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기록된 사초,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관청끼리 주고 받은 문서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95퍼센트 이상이 광해군 당시 사관이나 관리가 남긴 사료이다.]


[셋째, 이점이 재미 있는 대목인데, 광해군 재평가의 시조인 일제 식민학자 이나비에서부터 최근 민족 통일의 비전을 줄 수 있는 존재로까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참고하고 논거로 삼은 연구 자료의 90퍼센트 이상이 <광해군일기>이다]


일단 이 부분에서는 한명기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먼저 오항녕이 주장한 첫째 주장에서 인조반정 이후 들어온 남인, 북인이 자신들의 주장을 생각을 쉽게 밖으로 보일 수 있었을까요? 당연이 숨 죽이며 서인들의 주장에 따랐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혹은 살아 남아 서인정권에 합류한 사람들인데 이미 없어져 버린 광해군을 위해 자신과 가문의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료의 문제점은 오항녕이 말한 95퍼센트이상의 자료의 신빙성이 아니라 그 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그 자료의 해석이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자 서인들이 북인들의 선조실록을 재해석해서  "선조 수정실록'을 만들었고, 남인들의 "현종실록"을 서인들이 수정해서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했고, 소론들의"숙종실록"을 " 노론들이 "숙종실록 보궐정오"를 편한 한것 입니다. 광해군의 일기를포함해서 저 세편의 수정실록도 실록 작성의 기본 자료는 같은 자료였을 것입니다. 단지 해석에 따라 엄청난 역사적 의미가 바뀌기 때문에 그리고 역적과 충신이 변하기 때문에 실록을 수정 한것이지요. 셋째는 약간 비꼬는 말투가 들리네요. 중요성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 실록의 신빙성이 없다라기 보다는 실록 자료의 해석적인 면에서 평가가 갈리고 그래서 역사적인 평가가 바뀌는 것인데 '사실적'인 면에서있는 자료 가지고 쓴책인데 왜 있는 그대로 읽지 않냐라고 주장하는 오항녕은 모순되는 면이 보입니다. 

반정에 성공한 (한명기는 반정이라는 말에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서인이 쓴 실록이기에 - 아니 서인이 해석하고 서인의 시각이 들어갔기에 "광해군 일기"는 사료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의 해석을 생각하고 행간을 읽으면서 신중하게 읽어야 된다라는 말이 정확하겠습니다.

1Round 한명기 1 : 0 오항녕 




두번째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

먼저 오항녕의 광해군에서는 이 외교분야에 대한 내용이 너무 적습니다 원래 오항녕의 촛점은 광해군의 내정실패였지만, 그래도그 당시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였던 명,후금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책 339쪽에서 342쪽까지 겨우 4쪽에 걸쳐 정말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책341쪽에서부터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 안으로는 자강책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대후금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 갔다. ~~~~~둘째, 광해군은 자신의 입장이 후금과 화친하는게 아니라고 극력 부인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장계에서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광해군 자신이 보낸 장군인 강홍립의 장계에서 나온말이다. 국왕에게 올리는 장계에 이런 말을 쓰는것이, 과연 국왕과 사전 교감이나 논의가 없이 가능했으리라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은 기조나 원칙, 그리고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없고, 대동법은 흐지부지되고 궁궐 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 보니 자원가 군비가 허술해졌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이에 반해 한명기의 "광해군"에서는 책 155쪽부터 251쪽까지 100여쪽에 이르는 분량이 명과 후금과의 관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장점을 크게 부각하자는 의도 인것 같습니다. 주제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입니다. 그중 책 200쪽에서 [광해군은 왜 명의 징병 요구를 왜 거부 하려고 했을까? ~우선 그는 전쟁의 참상을 잘 알았다. 임진왜란 직후 왕세자가 되자마자 전장을 주유했던 그였다. ~더욱이 당시는 왜란이 끝난지 겨우 20년. 아직 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시기였다.~~ 다음으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자신이 추진하고 있던 일련의 사업들이 전쟁 때문에 방해받게 되는 것이 싫었다. 비판 여론을 무릎쓰고 한창 짓고 있던 인경궁과 경덕궁의 공사도 걱정이었다.~ 그 밖에 광해군이 지녔을"반명감정"을 생각 할 수 있다. ]


그리고 213쪽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심하 전투'에 출전했던 조선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주로 조선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에게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 그와 관련하여 최고 통수권자인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의 사실여부를 따지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필자는 여기서 어느쪽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를 따지지 않겠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하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강홍립 등 조선군 지휘부가 뚜렷하게 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고, 후금군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강홍립등은 '역적'으로 몰렸고 끝내는 광해군까지 '명을 배신한 폐륜한'로 몰려 폐위당하는 빌미로 이용되었다.


240쪽 [광해군은 '심하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더이상 재징병 요구를 못하도록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243쪽 [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의 동태까지 감시하라고 비변사에 지시했다. 1623년에는 아에 명사들을 접견하는 것을 회피했다.]

 

오항녕은 광해군의 후금과의 화친의지가 강홍립에게 전달 되었다고 보고 한명기는 중요한 논점이 아니라고 발을 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두사람의 관점은 전쟁의 결과에서 갈립니다. 오항녕은 후금과의 패배가 광해군의 내정실패로 원인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의 외교정책은 전쟁의 실패로 별 볼일 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입장을 주장합니다. 그에 반해 한명기는 국력의 규모에서 후금과의 전쟁을 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후금과의 전쟁을 회피하려 했던 모습과 전쟁후 추가적인 명의 징병요구를 피했던 광해군의 모습에서 외교적 장점을 강조합니다.

일단은 후금과의 전쟁이 터무니 없었던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전투에서 바람이라는 돌박적이고 불운한 요소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광해군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후금과의 전쟁을 극력 피하려고 했던것도 사실이고요. 그렇다면 400년이라는 시대가 지난 오늘날 그의 외교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 뒤에 이념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합니다. 반명외교라는 것이 반미혹은 탈미라는 그림자에 투영되면서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추숭되고 반대쪽에서는 극단적으로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현대사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보면서 400년전 명과 조선을 떠올리고 그 시대에 명에게 이리저리 피하며 "싫다"라는 주장을 한 광해군에게 통쾌함을 느끼고 자주외교라는 이념에 가슴이 벅차고 인조와 그 서인세력에게 친미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에 대한 저항 논리로 광해군은 내정에 실패하고 그에 따라 외교에서도 실패한 반면교사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역사를 평가할때 현 시대의 이념이 투영되니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광해군 외교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을 400년 후에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미국의 압력에 굴한 파병이라고 할까요? 미국의 압박에도 비전투부대를 안전지대로 파병한 외교적 수완이라고 평가할까요?  

두번째 판은 승부를 가를 수가 없네요. 역사 평가의 사실이라서 누가 옳고 그르다라고 말할 수 없고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의견이 다를 수 밖에 없고 또, 의견이 달라서 학문 연구가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2 Round까지  한명기 1 : 0 오항녕 


세번째 내정에 대한 평가

광해군의 내정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를 봅니다 워낙 변명할 여지가 없게 궁궐 공사를 크게 벌여서 내정이 피폐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동법에서는 조금 의견이 갈립니다. 한명기는 대동법의 단초를 만들어 낸것을 평가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고, 오항녕은 대동법이 광해군때 방납에 의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던 북인들의 의해서 저지되었다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대동법에 대한 연구물들을 보면 광해군때의 대동법은 실패라고 보이며 의미도 거의 무시 되는것으로 보입니다. (이정철의 대동법에서)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재벌들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민생경제가 망가진거죠. 폐모문제도 광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인 라이벌이고 또 역모세력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명기는 광해군에 궁궐공사에 대한 집착을 왕권강화 측면에서 약간 옹호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공가를 많이 벌였죠.

하지만 광해군에게 유독 평가가 박한 것은 아닐까요? 조선 시대 전체를 볼때 광해군의 내정 실패는 본인과 그 당시 정권의 책임이 있지만 다른 왕과 정권에 비하면 그렇게 박하다고 볼 수 없을 듯합니다. 즉 그의 실패는 조선 전제군주의 한계가 아니 었을까 합니다. 여러 원인에 의해서 궁궐 공사를 벌여 조선 경제 규모를 뛰어넘는 지출을 해서 경제가 파탄 났지만 다른 정권을 살펴보아도 경제가 백성들의 삶이 살기 좋았다고 볼 수 있는 조선시대는 없습니다.  성군이라고 말하는 몇몇 왕이 있지만 백성의 삶은 약간의 부침은 있지만 그대로고 그 왕의 다른 업적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단점이 가려지는게 아닐까요? 광해군에게는 그런 업적이 없기에 평가가 박할 수 밖에 없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광해군의 실정의 비판 받을때 가슴이 아려옵니다.좀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왜 그렇게 했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듭니다. 

광해군의 내정면에서는 오항녕의 비판이 신랄하네요.


 3Round 까지 오항녕 1 : 1 한명기


광해군에 대한 대중적인 연구서가 두권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서로 상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책이 두권이 되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행복해 졌습니다. 더 많은 연구와 좋은 책을 기대합니다.




YES마니아 : 골드 l****0 2012.10.06. 신고 공감 9 댓글 3
리뷰 총점 종이책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광해군..기록에만 의존한 그 위험한 미시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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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와 내용과 주장 면에서 많이 비교된다. 특히, 두 책의 근거가 된 <광해군일기>가 얼마나 사실적인가, 그리고 광해군의 외교정책, 대동법에 대한 평가, 내치에 관한 평가, 이는 전반적인 광해군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그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광해군 일기는 과연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쓰여졌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광해군..기록에만 의존한 그 위험한 미시적 해석" 내용보기

이 책은 한명기 교수의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와 내용과 주장 면에서 많이 비교된다. 특히, 두 책의 근거가 된광해군일기가 얼마나 사실적인가, 그리고 광해군의 외교정책, 대동법에 대한 평가, 내치에 관한 평가, 이는 전반적인 광해군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그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광해군 일기는 과연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쓰여졌는가?

 

한명기교수는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인조 이후의 실록에 입각한 평가는 한계가 있다(조선일보, 2012. 10. 3 인터뷰)”, 인조반정 이후 거의 전멸한 북인들의 행적은 승리자 서인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북인들은 서인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실록을 다시 검토하거나 수정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광해군과 북인들이 남긴 행적,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모습은 서인들의 눈과 평가로 보아야 한다(한명기, 2000)는 관점으로 광해군일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이다.

 

이해 반해, 이 책의 저자 오항녕은 본서에서 "모든 역사가 승자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극단은 역사에 대한 냉소이며, 역사에 대한 관찰이나 기록이 승자에 의한 왜곡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광해군일기에 대해 사료로써 긍정적인 관점이다. 이는 사료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사관들에 대한 무한신뢰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서 여러 곳에서 조선시대 사관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기록학을 공부한 저자의 관점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일기>의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수정해 삭제, 가필 또는 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크고 작은 부전(附箋)들이 많이 붙어 있으며, 거의 초서로 쓰여 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는 실록과 같은 사료일 뿐 아니라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이 작용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한국민족대백과). 광해군일기실록 초고는 통상 최종본 인쇄 후 세초(洗草)시 실수로 남겨졌는데, 남겨진 초고에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는 구절 등이 삭제되어 광해군에 대한 왜곡기록을 하였던 단면이 드러난 예 (한국일보, 2012. 9. 16)가 있는 것으로 보아광해군일기를 완벽한 사료로 보아 그에 대한 인용만으로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시도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가까운 역사에서 5.16 사건만 살펴보아도 유신에 대한 역사 교과서와 해석이 그에 동조했던 정권과 비판적인 정권간의 해석이 크게 다름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고 전 박대통령의 친딸인 박근혜 당선인도 아버지의 유신정권에 대해서는 수정된 관점을 표현하였다. 이는 사관도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늘 공정하고 사실만을 객관적인 입장으로 정리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특히 인조반정 후 인조시대에 재해석된광해군일기만으로 광해군 시대를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을 빌면 실록은 풍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좋은 기록이지만 기록자, 평론자의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당연히 사료 비판이 되어야 한다 (본서 26)고 하였고, “듬성듬성한 사료를 가지고 과거를 재구성해야 한다주관성의 개입과 추론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합리화한다. (본서 164)

 

 광해군의 명과 청 사이의 중립외교

 

 

한명기는 광해군이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들이 내치를 망쳤으나 그의 외교는 분명 탁월하고 일관성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직접 전쟁을 겪었고 명 장수들과도 접촉이 많았으며, 고려시대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도 식견이 높았던 군주로, 당시 명을 위한 조선의 희생을 주장하는 신하들도 많았던 상황에서 명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충성하지 않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시간을 벌면서 상황을 넘기려 했던 광해군은 외교적으로 탁월한 왕이었다는 것이다(한명기, 2000; 조선일보 2012).

광해군은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 편들기의 위험성을 알고 줄타기를 하며 파란만장한 명말청초의 시기를 견뎌내려 한 현명한 왕이었다. 저자는 광해군을 외교에 실패한 왕으로, 명을 배반하고 청과 화찬하려 했으나 결국 청에게 굴욕을 당한 왕으로 평가했으나, 광해군의 외교를 문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오랑캐 추장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굴욕을 당했다.

오항녕은 명의 요청에 의해 강홍립을 후금과의 전쟁에 파병한 결과는 참담했으며, 광해군의 대후금과의 화친정책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실패였다고 간단하게 평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이미 전쟁을 충분히 경험한 광해군의 중립 외교정책이 잘못되었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의 대후금정책이 옳았단 말인가.

 

일제강점기의 만선사관에 의해서 광해군의 재평가를 시도했다고 해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최근의 광해군의 재평가는 일제강점기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며, 재해석이 옳다면 그 주장도 평가되어야 한다.

 

 

광해군과 대동법

 

한명기는 당시 대동법은 혁신적 조치였으며 광해군 때 경기도 지방에 먼저 실시해 전국확대까지 약 100년이 걸렸으며, 광해군은 대동법의 필요성은 인정하였으나 상인, 자산가, 신하 등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이 법을 확대한느데는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광개군은 전체적으로는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시도하고 실시한 것은 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에 반해 오항녕은  광해군이 궁궐건축을 위한 자금과 공물의 필요성. 그리고 기득권과의 연결 때문에 대동법 실시를 반대, 방해했다는 입장이다. 또한, 대동법 실시도 광해군이 아니라 이원익, 황신, 김상용의 공으로 돌린다. (본서 135, 154쪽 등) 그럼 왕이 반대하는 정책을 신하들이 해내었다는 말인가. 공은 신하에게 과는 왕에게 돌리는 평가는 공정하지 못하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

 

한명기는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인조 이후의 실록에 근거한 평가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은 굉장히 소심하고 예민하지만 때로는 과단성도 보여주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13명의 후궁의 자식 중에서 두번째 자식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로 지명됐다가 선조가 급서하자 1608년 왕이 되었는데 광해군은 선조에게 17년간 세자로 훈련된 왕이었으며, 탁월한 지식과 판단력으로, 형이었던 임해군을 물리치고 세자가 되는데 있어서 별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왕이 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똑똑하여 선조의 경계를 받았으며 심지어 명은 이런저런 핑계로 그를 세자 책명을 주지 않았다. 선조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인목대비는 선조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일곱명의 대신에게 부탁하는 유서를 쓰게하고 결국 이러한 일들이 광해군이 자신의 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자 하는 정책을 무리하게 펴게 하였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술사(術士)들에 꾀임으로 지나치게 궁궐역사에 집착하게 되어 민심 이반과 재정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을 만나 왕에서 쫓겨나 19년을 유배생활을 한 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조와 서인들은 그를 쫓아내면서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죄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인조도 훌륭한 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형제를 몰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보다 광해군은 포학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광해군이 성군이라거나 내치를 잘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가 무리한 궁궐공사로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백성을 어려움에 빠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중립적 외교정책과 대동법을 최초로 시행한 공은 인정받아야 한다.

 

저자가 광해군 시대를 잃어버린 15년이라면서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외교에서 더욱 주체적으로 운신할 수 있다는 점도 역사학자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에 과연 “~이라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자의 주장대로 인조는 광해군의 실정을 회복한 왕이라는 평가는 과연 온당한가.

 

사실 이책은 전주대 오항녕 교수가 쓴 책이라고 해서 기대가 많았다. 광해군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사관을 전공한 역사학자의 광해에 대한 시선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대중을 위한 책인가 전문서적인가

 

첫 번째로 눈에 띈 점은 미주뿐 아니라 각주도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자가 쓴 책이라면 마땅히 인용과 자신의 주장을 분리해서 기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기대에 어긋나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더 자세히 읽어보았다. 한자와 기록학을 공부한 까닭이었을까. 책에는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상당한 한자와 한자용어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친절하지 않았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용어(단어)는 여러 번에 걸쳐서 여러 방향에서 설명하였으나, 어떤 한자용어는 대중이 알기 어렵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가 설명하고 싶은 한자용어는 몇 번이라도 반복되어 설명되었지만 대부분의 단어는 유추하면서 읽거나 검색해서 뜻을 찾아봐야 했다. 일관성의 결여라든지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책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 책은 역사 교과서인가? 아님 성인 대중이 대상인가? 대중을 향하기에는 전문가적 풍과 현학적인 표현이 넘쳐났고 전문적인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깊이가 너무 부족해 보였다. 어떤 부분은 인용을 하고 어떤 부분은 자의적인 설명이 있어서 어디까지가 사실(기록??)에 근거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책의 모두부터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훈계형식으로 시작하여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린다. (본서 5-6, 221쪽 등) 대단한 영웅이나 위인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독자가 훈계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런 책을 집어든단 말인가. 독자를 설득한다기보다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예를 들어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고 그것은 책에서 설명하는 사실성, 진정성을 감하였다. 타겟(target) 독자가 일반대중인지 전공자들을 위한 책인지 명확하지 않은 기획이 아숴웠다.

두괄식 글쓰기의 어려움

 

"광해군은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어쩌면 자꾸 떠든다고 해서 나를 참수하려 들지도 모른다" (본서 17쪽)는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학자답지 못한 서문으로 저자는 광해군에 대한 비판적이고 편향적인 자신의 시각을 확실히 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독자는 이미 저자의 모든 주장이 광해군에 대해 비판적인 노조라는 점을 알고서 책을 읽는다. 즉, 독자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미리 수긍하며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비판하면서 읽울자 미리 결정하게 된다즉 저자의 주장을 꼼꼼하고 집중하여 읽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저자의 관점에 공감하지 않는 독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학자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책은 논문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자는 세미나를 통해 광해군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광해군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꼭 그런 서두로 독자를 불편하게 하면서 책을 집필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오히려 독자의 흥미와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저자와 다르게 생각하는 독자들을 설득할 기회도 잃은 것은 아닐까.

 

 

중심을 잡는 글쓰기의 아쉬움

 

 

예를 들어 임해군의 반역사건에 대한 내용은 정말 지루하리만큼 길지만, 광해군의 치리 중 대단한 관심을 받는 외교정책에 관한 내용은 정말 간략하다. 임진왜란, 명말청초의 긴박하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동아시아의 정세에서의 조선의 외교정책은 매우 의미가 있고 중요하며, 최근의 중국, 일본과의 영토문제나 FTA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갖는 정서와 연결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경연에 대한 내용도 그러하다. 광해군이 경연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무려 179쪽에서 212쪽까지 자세하고 장황하게 기술했다. 저자는 경연을 하지 않은 것이 폐위의 이유 중 하나라고 했으니 광해군 폐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일 것이다.

 

정인홍에 대한 비판도 맥을 같이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역사의 3대 영웅을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이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회 개혁의 정신을 찾았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조직적인 활동을 한 의병장이었고,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냈으며, 광해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신채호는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건강악화로 인해 구상 중이던 정인홍 약전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 (한명기, 2000) 물론 편협한 인품 때문에 광해군을 제대로 보필하지는 못했지만, 오항녕의 주장처럼 광해군의 실정이 모두 그와 연관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끝으로...

 

 

이 책은 저자가 정성을 많이 들인 책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광해군시대를 3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또한, 광해군일기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 다만, 여러 군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인용이 일관성이 없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침소봉대, 잘 한 정책은 신하의 덕분으로 잘못한 정책은 광해군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그 모든 것은 광해군에 대한 비판을 일관성 있게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파적으로 보여 아쉽다. 또한, 사관과 기록을 만능으로 해석한 것도 사관을 연구한 학자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기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역사에 대한 관점과 해석은 미시적 오류의 발생이 높을 수 있고, 우리 누구나 역사적인 기록이 100% 사실과 일치할 수만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두괄식 작법이나 주장을 미리 정한 후, 그를 향한 미시적 입증과 해석들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필자의 생각이다.

 

학자들마다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유익한 책이다. 또한, 저자는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조선왕조실록을 해박한 한문지식과 역사지식으로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려 노력하여, 독자로 하여금광해군일기국문판을 직접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것도 저자의 힘이다.

 

* 사족 1. 인과관계가 있으나 상관관계와는 별개의 문제” (본서 164)는 경영학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 사족 2. “모든 제도는 보수성을 띤다”(본서 174) 조직이론의 제도론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저자가 자신이 아는 이야기만 쓰면 글에 더 신뢰가 갔을 것이다.

 

** 리뷰가 날라가서 다시 썼습니다.

b*****k 2013.02.21. 신고 공감 9 댓글 15
리뷰 총점 종이책
광해군-그 위험한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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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 해석은 사람마다 주관적이다. 그 바탕엔 이성적이고 논리적 이해에 대한 동의 또는 감성적 공감이 읽는 이에게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사실의 기록이 중요하고, 오래된 역사는 다양한 동시대 사료의 복합적 배열과 분석을 통하여 논리적 개연성을 이끌어낸 해석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저자도 책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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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 해석은 사람마다 주관적이다. 그 바탕엔 이성적이고 논리적 이해에 대한 동의 또는 감성적 공감이 읽는 이에게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사실의 기록이 중요하고, 오래된 역사는 다양한 동시대 사료의 복합적 배열과 분석을 통하여 논리적 개연성을 이끌어낸 해석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저자도 책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164p)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의 나열은 매우 잘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일반독자로서, 저자의 역사인식이 매우 지엽적이고, 침소봉대의 정도, 사실에서 필요한 부분에만 방점을 찍는 기술등은 객관성이 잘 유지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어떤이는 원인에 방점을 찍고, 어떤이는 결과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 논리성과 사료의 상관성이 얼마나 합리적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책의 다른 논조가 궁금하기도 해서 CBS라디오 인터뷰, 한겨레신문기사, 포털검색등 다양하게 어떤 학문적 방향을 갖고 왔는지 궁금했다. 노론사관에 아주 비판적인 이덕일 소장과 십만양병설 기사가 많기는 하다. 색다른 사관,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학계의 작은 의견이란 겸손한 표현은 맘에 들지만 책의 기술은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마치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홈페이지는 역사문화콘텐츠학과)교수진에서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만큼 당황스럽다. 물론 시간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등의 직책을 떠나 모두 강단에 서는 교수다. 만약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이를 침소봉대해서 그의 사관에 토를 단다면 분명 객관성이 배제된 난설로 취급될 것이고 옳은 일도 아니라 생각한다. 누구나 자유롭운 생각을 할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로서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주장과 기술사이에서 많은 간극을 느낀것 같다. 특히 26페이지에서 언급한 역사기록의 왜곡가능성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광주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볼때 조금 위험한 발상이라 생각된다. 또 유일하게 중초본과 정초본이 있는데 이의 비교가 더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시대가 왜나라의 통합, 명말청초,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금의 발호등으로 이루어지는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대한 복합적인 큰 틀이 없는 것은 시대의 맥락을 갖고 접근한다기 보단 매우 단절적인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른 저자의 인용부분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문득 다분히 묵시적이며 의도적인란 생각이 들어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란 생각도 감쇄된다.


나도 광해군이 성군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재평가가 조선사편수회의 만선사관의 흐름속에 일본인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고, 무조건 배격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객과적으로 그 사관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광해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가 만선사과과의 동의가 아니라 식민사관과 분별하여 객관적으로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쁜지 모르겠다. 만약 정부기록물에 의존만 해야한다면 역사학자는 별 필요가 없는것이 아닌가?


조선이 비록 봉건왕조이지만 조선은 중세 유럽의 왕처럼 절대권력자들은 아닌것 같다. 43페이지에서도 언급되듯 복역으로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사실 이성계도 결혼을 통해 공신들을 포섭했고, 태종정도가 피의 숙청으로 세종에게 새롭게 해나갈 토대를 주었던것 같다. 그외 신권의 나라 조선은 사대부, 후기 사림들의 의도와 왕권의 균형과 경쟁이 많지 않았나한다. 위에서 말한 태종을 살인자로 평가하지 않듯, 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이 많으면 방점이 공에, 연산과 같이 과가 많으면 과에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도올선생이 조선의 왕은 참 불쌍한 왕이다라고 말한 부분에 책을 보며 공감이 많이 간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부분에서 조금 이율배반적이다. 대동법의 시행은 이원익과 황신의 공으로 평가한다. 뛰어난 사대부나 사림의 공이란 뜻이고, 그것을 재가한 왕은 허수아비라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인목대비 폐위를 시작한것은 물론 정치적 기반이된 대북파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결제를 한 왕의 과오처럼 느끼게 기술되고 있다. 특히 방납의 폐단에 있어 왕실과 대북파의 폐단을 지적한다. 그럼 왕실이 광해군때에만 방납의 폐단이 극성을 부렸다는 말인가? 이건 그가 말하는 시스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왕실은 권력을 잡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사대부와 사림중 대북파만 방납으로 권력을 취했었나? 되짚어볼일이다. 왕실의 제한적 입장을 제외하고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부폐, 사대부의 나라라는 이념하에 이들이 세금내면 해결될 문제를 착취를 통해 유지한 미진한(기득권을 유지) 사회제도에 기인한 바가 더 크지 않을까한다. 


임해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광해(세자)에 대한 시각과 이후 시각의 변화, 그 원인등에 대한 인식없이 전란후 사실만 기재한다. 그리고 임해군이 임진왜란 피난시에 왜 구설이 있었는지, 그의 집이 왜 불타올랐는지에 대한 언급없이 형제를 보낸 잔인한 왕으로 기재된다. 그것이 붕당들의 의도인지 왕의 절대적 의지인지 불분명하게 기술된다는 점이며, 이는 다분히 주관적 견해를 위한 자료의 선택적 취사선택이란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의도적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하여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교지에 보면 선조를 광해를 칭찬하는 것과 영창대군의 목숨에 대한 애뜻함을 보인다. 그런데 앞부분을 자르고 그럼에도 이복동생을 죽였다로만 몰고가기 전에 왜 라는 의문과 개연성을 좀더 확보해야하지 않을까한다.


 과도한 궁궐증축은 분명 전란 및 연속된 기근으로 백성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고 바른 지적이며 궁의 확장을 위해 민가를 철거한 것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정궁이 불탄 기사를 보면, 선조시절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선조에 대한 민심의 결과이다. 효의 입장에서 아비의 집이 불탔는데 다시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과도한 부분은 왕권강화로 치세우기엔 과한 부분이 존재하고, 스스로 심약한 부분이나 조금은 질환이 있는듯한 우유부단함이 원인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광해는 우여곡절끝에 정당하게 왕위계승을 받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도 그 권한이 보장되었다. 3살의 영창대군이 왕노릇은 할수 없다. 하지만 인조의 등극은 분명 정당성이 없다. 누가 그에게 왕위를 보장하였는가?? 사건의 원인은 결과를 통해서 유추될수 있다. 인조반정의 인물들이 뛰어난 왕을 세워 혁신과 개혁의 길을 걸었는지, 사림의 권익을 위해서인지는 어느정도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한다. 그래서 나는 광해를 보며 나약한 권력자의 말로를 보고, 인조를 통해서 부정한 권력의 말로를 보는듯 하다. 책의 저자도 순순한 학문의도였길 바랄뿐이다. 조선이 부폐하고 부정되어야할 역사가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의 발전과 대비하여 주자학과 소중화사상에 파묻혀, 동쪽 오랑캐의 입장을 너무 완고히한 아쉬움이 아닐까한다.

k***i 2012.10.06. 신고 공감 5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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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15대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넓지가 않다.선조의 뒤를 이은 군주로서 당시 명나라와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 정책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조선 국내 사정은 사색 당파의 횡행과 관료들의 부패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정책 실천적인 면에서 판단이 흐렸던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또한 선조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등극하는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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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15대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넓지가 않다.선조의 뒤를 이은 군주로서 당시 명나라와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 정책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조선 국내 사정은 사색 당파의 횡행과 관료들의 부패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정책 실천적인 면에서 판단이 흐렸던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또한 선조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등극하는 과정에 많은 잡음과 암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감지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하나인 <광해군 일기>는 그가 폐위된 군주 시대의 실록이기에 실록이 아닌 광해군 일기로 명명하고 있으며,이 글은 <광해군 일기>에 기초하여 원문을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광해군 시대의 전.후기의 시대상황을 저자의 해설과 함께 들려 주고 있다.그가 즉위하고 폐위되기까지(1608~1623)의 과정을 3기로 나뉘고 있다.1기는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이고 2기는 1613~1618년 무렵까지이고 3기는 1618년부터 인종반정까지이다.

 

 반정(反正)의 의미는 바른 길로 다시 돌아가 생활하자라는 의미로서 광해군이 군주로서 어떻게 치적을 하고 평가를 받았길래 중도하차하는 꼴불견의 폐위를 당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1기는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대동법을 통해 재정 및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는데,즉위초부터 임해군(광해군의 형) 옥사 문제가 커다란 흉사가 되었다.

 

 2기는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민생(대동법)을 외면한 채 백성들의 혈세로 궁궐을 짓고 경연보다는 친국에 맛을 들이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사건이 2기에 발생했다.3기는 불안안 정정이 극대화되면서 윤선도,이이첨,허균 등의 사대부들이 반목질시하면서 악화일로의 상황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을 뿐아니라 명의 뒤를 이은 후금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도 수습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보여 주지 않았기에 그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인종 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금,부역,신분제의 개혁이 개량적 조치로 폄하되고 탈주자학,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했는데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은 상황의 타개 능력,시스템의 혁신 능력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문제가 아닌 20세기 근대주의자들이 아닌가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그리고 광해군은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 시점에서 운 좋게 부각되는 존재가 된다.

 

 광해군 대 굵직한 현안에는 정인홍이 관여하고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부각하면서 결정적인 인조 반정의 구실을 사게 되었다.대표적인 것은 의병을 핑계로 지방에서 세력을 부리고 괴이한 학문을 주창했고, 이언적과 이황 배척(회퇴변척),사친을 종묘에 들이는 데 앞장서고,경연에서 풍수설을 하는 시문용을 추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고,계축옥사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악언을 퍼붇고,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 외교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매관매직,여알 정치는 알파로 따라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궁궐 토목 공사의 진행과 더불어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광해군 4년(1611년)에 있었다는 점이다.한양의 기운이 쇠진되었으니 술관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른 것이었는데 중론이 한꺼번에 일어나 성사가 되지 못했다.교하의 지세는 풍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평사낙안(平砂落雁)의 형국이라고 한다.현재는 교하신도시로 지정되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허약한 왕으로 인식되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피폐해진 민생과 재정,사회적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론 모든 것이 정지 내지 후퇴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민생 회복,사회 통합,재정 확보,군비 확충,문화 발전 등 내치에 더욱 힘을 썼어야 성군으로 숭앙을 받으며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외교에서 역량과 운신의 폭이 넓었으리라 생각된다.광해군 재위 15년이 남긴 실기(失機)의 업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대통령을 맡고 이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j******6 2012.10.04. 신고 공감 3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역사는 행간을 어떻게 읽느냐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역사는 행간을 어떻게 읽느냐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내용보기
처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이과 출신이지만 상당히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읽으면서 벅찼다. 내가 아는 역사란, 정말 먼지만큼의 정보밖에 주지 않는, 그런 날벌레 같은 것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리뷰를 쓰는게 옳은가 아닌가 고민했다. 하지만 나처럼 역사에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 이 책에 대해 느낀점을 적는 정도의 의
"역사는 행간을 어떻게 읽느냐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내용보기

처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이과 출신이지만 상당히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읽으면서 벅찼다. 내가 아는 역사란, 정말 먼지만큼의 정보밖에 주지 않는, 그런 날벌레 같은 것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리뷰를 쓰는게 옳은가 아닌가 고민했다. 하지만 나처럼 역사에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 이 책에 대해 느낀점을 적는 정도의 의의만 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달콤하지만 쓰기도 한 책이였다.

 

좀 우습지만 처음 이 책이 끌렸던 것은 출판사인 너머북스와 이 책의 초고를 수유너머에서 특강을 하면서 즐거워했다는 부분때문이였다. 참여는 하지않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단체에서 즐겁게 강의를 했다는 점과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는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던게 사실이다.

한가지 더 끌렸던 것은 광해군이라는 그 자체였다. 조선사에서 광해군처럼 이렇게 저렇게 평가받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뭐가 맞는 답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의 광해군은 그다지 좋지 않은 인물이였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 접한 그의 평가는 오히려 중립외교를 논한 외교에 능한 인물로, 적통만을 인정하는 조선왕조에서 잘하고도 오히려 평가 절하된 사람이란 뉘앙스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 오항녕 교수의 위험한 거울같은 광해군을 다시 만났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난 역사를 잘 몰른다. 그래서 광해군에 대해서도 표면적으로 대충만 알 뿐이였다. 물론 그 대충의 내용은 대학에서 주워들은 내용이였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달랐다. 광해군의 기록은 우리가 생각하듯 인조반정이후 심하게 그를 왜곡해서 적었다기 보다는 광해군 당시에 작성된 내용이 90%정도는 된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역사가 우연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질서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얘기한 역사는 과연 신빙성있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작가는 조선이라는 시대를 근대주의에 끼워맞추려는 역사관 자체에 문제가 있고 그럼으로써 조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삐딱함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역사건 인간사이건 그냥 지나가는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냥 지나가지는 않지만 남겨진 사람들에 의해 그 행간이 너무 넓어 오히려 밝히고 토론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이 책속의 광해군은 선조와 같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같이 겪으면서 선조를 잘 보필했던 모습이 왕이 되어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간신들의 말에만 둘러싸여있고, 사술을 믿으며, 백성은 보살피지 않고 궁궐의 재건에만 목숨을 거는 이상한 성격을 보인다. 만일 선조 살아 생전의 광해군과 왕이 된 후의 모습이 진짜 이렇게 달랐다면 그는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고통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것밖에 추측할 길이 없다. 전쟁이란, 그 참혹함이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했던 궁궐을 화려하고 크게 지으려는 것이나, 자신을 위해하거나 꾸짖는 것들로 부터 자신을 멀리 두려하고 때로는 잔혹하고 집요하게 추국을 일삼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외교문제 또핝 중립외교라고 하던 우유부단함이라고 하던,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그랬던 것이라고 하던 다 설명할 길이 있다.

 

이 책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선시대 중기의 그 나라는 얼마나 허약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올곧은 신하들이 왕에게 직언하는 내용도 심심치 않게 나오지만 아첨하고 남발하는 모습도 너무나 많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왕이 전권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삼사가 있고 수없이 토론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정당들도 있는데 광해군때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할 때, 항상 그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물러난 것은 결코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라던가 '명에 의리를 저버렸다'라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래서 광해군이 집권했던 15년을 꼼꼼히 뜯어 그 시대의 제도, 궁궐재건, 신하들의 면면 등을 살폈다. 반정이라는 큰 혁명이 한두가지 명목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말이다. 큰 것 하나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것들이 여러개 모임으로써 터짐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누군가의 이권이 개입하면 더 폭발적으로 변화한다.

 

이 책이 재밌는 점은 지금 우리가 광해군을 바라보는 역사를 거울처럼 거꾸로 뜯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이 그런지는 몰라도, 역사란 늘 행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눈이 존재했다. 다양한 의견이 없다면 지나간 과거의 역사는 정말 말뿐인 역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겪지않은 과거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웃기지 않을까. 사실 나는 광해군의 평에 대해 다른 책을 읽은바가 없다. 그래서 오항녕 교수의 책이 의도하는 바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배경지식의 책을 읽었더라면 받아들이는데 꽤나 애를 먹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른 의견의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그 책을 읽는데 애를 먹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이 책이 반골기질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싶다. 삐딱선을 타는 시선은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그리고 이 책으로 조선시대 왕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으며, 신하들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만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감히 직언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관들이 의견을 신랄하게 달 수도 있다는 것과 실론편찬이라는 게 생각보다 만만하거나 대충대충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부끄럽게도.

 

역사란 남겨진 자들이 읽는 행간을 읽는 기록이다라고 생각한다. 역사에 정답은 없다. 다수결의 원칙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다만 소수의 의견도 경청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모호해질 것이다. 역사란 흘러가는 어떤 것이니까 말이다.

s*****5 2012.10.15.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메타역사서술로의 광해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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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책『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메타역사서술로서 주목할 만 한 책이다. 광해군이라는 주제를 통해 근대주의 역사관의 폐해를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과, 이를 통해 좀 더 바른 역사서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길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머리말과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그 뒤의 내용은 광해군의 시대를 초기와 중기, 말기로 나누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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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책『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메타역사서술로서 주목할 만 한 책이다. 광해군이라는 주제를 통해 근대주의 역사관의 폐해를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과, 이를 통해 좀 더 바른 역사서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길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머리말과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그 뒤의 내용은 광해군의 시대를 초기와 중기, 말기로 나누어 그 속에서 “광해군 시대의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 사건의 우연성”를 보여준다. 하지만 뒤의 내용이 머리말과 프롤로그에서 주장한 오항녕의 생각을 뒷받침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광해군에 대한 역사서술을 통해 역사서술의 방법을 이야기하려는 책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으로 평가받았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폐위시켰다는 점과 조선에 재조지은을 내린 명을 외교의 중심에 두지 않고 오랑캐인 청과 손잡으려 했다는 점, 궁궐 증축을 통해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다는 점 때문에,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 폭군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지나 광해군은 화려하게 복권됐다. 대동법과 중립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녕과 안정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를 넘은 새로운 근대로의 시작을 열 수도 있었던 왕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업적과 성과보다는 광해군의 시도에 근대적 가치를 부여해 평가한 것이다. 게다가 광해군의 전후 세대의 임금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암군으로 평가받는 선조와 인조였다는 점은, 이러한 광해군의 긍정적 재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현재의 평가를 비판한다. 광해군에 대한 현재의 긍정적 평가는 근대주의 역사관에 조선사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근대주의 역사관에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필연적이다. 이 점에서 보았을 때 근대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중세적 가치와 근대에 대한 반동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광해군이 긍정적으로 재평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대동법과 중립외교 등의 정책에서 나타난 근대로 이행의 모습을 보여준 결과이다. 이를 통해 광해군에 대한 복권은 이루어졌지만, 조선시대를 통해 이루어온 가치는 대부분 부정된다. 인정되는 것은 근대 이행의 맹아를 보여준 것들뿐이다.


오항녕은 근대주의 역사관으로 인해 “사회와 경제구조, 농민의 운동, 변혁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긍정적 기능보다는 부정적 기능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부정적 기능 중 가장 큰 것을 그는 “덮어씌우기 오류”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로 인해 서로 상이한 문명의 차이를 비교해 이야기하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역사서술보다는, 근대주의에 근거해 어떤 문명에서 근대성을 발굴하는 동일성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동일성에 기초한 서술방식은 폭력성을 가지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열의 관계로 배열한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근대성의 표상으로 긍정적으로 기능하게 됐듯이, 이를 반대했던 인조와 서인 세력은 근대를 부정하는 반동세력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러한 서술방식이 가지는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았던 그들이 업적과 행동에 상관없이 근대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동으로 비판받아야 할 세력으로 몰려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할뿐더러 위험한 사고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항녕은 광해군의 사례를 통해 근대주의 역사론이 가지고 있는 의도의 오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도의 오류란 어떤 행동의 과정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의도가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면, 행동 자체를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광해군의 대표적 업적으로 인식되는 대동법과 중립외교는 집권 초기에는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으나, 중기와 후기에 이르려서는 유명무실해 진다. 게다가 광해군이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알려진 대동법의 확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증거는 실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광해군 2년 경기지방에서만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해 달라는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의 상소가 올라오자, 광해군은 “다른 도까지 확산하면 분명히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난처한 상황은 왕실재정이 부족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애민 개혁 군주인 광해군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느껴진다. 게다가 광해군 후기에 궁전 증축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고,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세금에 고통 받았다는 사실까지 확인한다면, 과연 광해군이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좌절한 명군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사실과 인식과의 괴리는 바로 광해군을 근대주의 역사론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인식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근대주의 역사론에 의거한 역사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오항녕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역사서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성을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실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단순히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재정립하는 것을 넘어, 역사 인식과 서술에 대한 지표를 주고, 제대로 된 역사서술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라고 지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해군이라는 실체를 비추는, 인식이라는 거울이 왜곡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지금 인식되는 다른 역사적 사실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인간 경험에 대한 성찰”로 정의한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인간을 한 가지의 동일한 체계로 묶어 설명하게 된다면, 제대로 된 인간 경험에 대한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오항녕의 생각과 역사서술 방식은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7 2013.05.15.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