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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의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이후 3년이 지나 이루어졌다. 나는 푸코의 관심사 중에서도 특히 통치술이 인간의 신체에 작용하고 그것을 규율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낀다. 이번 강의의 제목은 여지없이 그 관심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중간 단계(안전, 영토, 인구; 1977~78)를 건너뛰고 곧장 이리로 달려 왔다. 하지만 내 기대는 무너졌다. 역시 천재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이번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것처럼 여겨졌던 생명관리정치의 구체적인 양상들은 운만 떼다가 결국 사라졌다. 오히려 그것에 이르기 위한 계보학적 과정, 즉 서론만 이야기하다가 끝났다. 푸코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생명관리정치 쪽보다는 신자유주의 쪽이 훨씬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성애자-남성-지식노동자’인 나에게는 몸이 규율에 얽매인 상황이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정치경제학적인 권력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빈번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율성에 기초한 혁신, 그리고 국가의 책무성 강화라는 딜레마 속에서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할 때가 부쩍 많아지기도 했다. 얼핏 보면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생명관리정치로 이어지는지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찬찬히 훑어 나가는 푸코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단순한 경제학적 논리나 철학이 아니라 거대하고도 포괄적인 통치테크놀로지이며, 개별 주체들을 세세하게 재규정하고 관여하는 고도의 책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푸코에게 신자유주의는 생명관리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식 틀이었다.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전략, 즉 단순히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개별 주체의 자유를 방임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경쟁을 부추김으로서 확립되었다.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드는 작업은 그것을 촉진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 개별 구성원은 신자유주의의 부속품으로서 완전하게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게임의 룰에 부합하는 전략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다소 결을 달리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생산성의 촉매제로서 인적자본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데, 이에 따르면 합리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모든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가족, 사랑, 친교 등 경제활동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삶의 영역 속에서도 경제적인 경쟁과 타산의 가계부를 작성한다. 예를 들어 연애와 결혼에서도 내가 얻고자 하는 것(예: 性)과 줄 수 있는 것(예: 錢)을 계산하게 되고,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도 투자-회수 관점의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 모든 과정은 절대 본능적·생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의하여 교묘하게 학습되어 당연시되는 궤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다(338~343p).
푸코는 언제나 철학, 권력, 학문, 그리고 인간 자체를 아주 섬세한 계보학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푸코의 방식은 보편적인 발전의 방향을 상정하는 변증법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가려진 교묘한 의도, 그리고 권력을 상정하는 해체의 과정이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통치술 및 통치 도구가 자유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적인 경쟁의 촉진이 통치술을 만들어 나갔다는 역방향의 논리가 인상적이다. 이런 역방향의 침투는 푸코의 주특기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들을 변혁시켜 주는 유용한 지적 훈련이다. 예컨대 마약을 원천적으로 규제하면 가격이 극단적으로 인상되어 독점과 범죄가 발생하니, 차라리 범죄를 유발하지 않는 적정 가격에 거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편이 낫다는 식이다(363p). 인류 역사에서 마약을 원천 소거해 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가격 정책을 펼치는 것이 마약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낫다. 이것이 인간학적 의미를 소거해 버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결론이다. 모든 인과관계는 절대로 선형적이지 않다. 여러 지적 즐거움을 주는 강의였음에도 역시나 아쉬움은 남는다. 우리 같은 필부필부들은 지식의 현란한 여정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현실적이고도 즉각적인 답에 갈증을 느낀다. 신자유주의가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경제 체제임이 명백해진 현 시점에서 우리는 이 제도의 온갖 부조리들을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이번에도 역시나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푸코가 원했던 것은 세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변화해왔고, 그것을 주도했던 것은 누구였으며, 그들의 명시적인 통치전략에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는지를 우리가 아는 것, 그것뿐이다. 일단은 알아야 한다. 깨우친 자 한 사람이 주체로서 당당히 서면, 일단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사회는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내일로 그려질 것이다. 푸코가 알려준 지극히 주변적이면서도 풍성한 지식의 계보학을 온전히 흠향해야만, 우리는 통치 대상으로서 뭉뚱그려지는 비극으로부터 벗어나 실존적 주체로서 당당하게 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