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슈그로스Georges-Antoine Rochegrosse의 '종과 사자'
10년이란 직장생활은 삶의 질적인 면에서 지금의 백수건달 생활의 하루치만큼도 못됐다.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구조적 모순에 순응했다기보다는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던 관계로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
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 솔직히 ‘가르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기꺼이 선택했던 경제활동이었다. 그
렇게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심신을 혹사시키는 개미이기를 자청했던 삶. 여유와 휴식이란 소위 ‘있
는 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선생님’과 ‘원장’이란 기분 좋게 착착 안기는 호칭은 여유와 휴식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세월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세월을 반복하긴 절대적으로
‘싫다’
그랬던 내가 이 책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란 도서를 만나고 싶었다면, 그건 나도 모르겠는(사실은 너
무도 잘 아는), 지독하게 게으르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실은 몇 년 전부터 실하게 빈둥대왔으면
서. 그래, 누구 말마따나 ‘나태의 정당성’을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암튼 의외로 심신이 행복해죽겠는
난 백수다. 뭐가 되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던 시간들마저 의.미.있.게. 흘러갔는지 이제는 그조차 귀찮고 무
의미해져버렸다. 때때로 당당하고 뻔뻔하게 누릴 수 있는 이 지나치게 황홀한 여유로움이 좋다. 구워삶지
않아도 되는 한가로움만 한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므로 나는 딱 백수체질인 모양이
다. 하하.
근면이란 영어 단어 ‘Industry'는 산업을 의미하는 말로써, 이는 산업주의와 근면사상이 밀접한 관계를 가
진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런고로 게으름을 배척하고 근면을 신성시하는 역사적 기원은 영국의 산업혁명
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토마스 칼라일은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게으르게 흘려보내는 모든
순간이 반역”이라 말해 사람들을 일벌레로 만드는데 기여한다(p64).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출현을
비롯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성경구절, 즉 종교와 맞물리면서 나태는 그야말로 일순간에 쥐구
멍으로 숨게 된다. 게으름뱅이는 가난뱅이가 되는 첩경이며, 아둔하고 수동적 인간으로 치부해 그들은 누
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여받게 된다. 이렇듯 게으름이 뭔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인 정신상태(p10)를 의미했던 서구 산업사회에선 ‘노동에 종사하는 자’와 ‘노동을 착
취하는 자’의 구성으로 굴러갔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타자를 게으르다고 규정하면서 게으르지 않은 강자의 긍정적인 정체성
이 완성된다(p25)는 것과 그들의 눈과 귀와 머리는 애오라지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
고 있다. 더불어 그들이 호랑이보다 마마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도 바로 그 ‘게으름’이라는 것도. 게으름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비판능력을 증가시킨다. 해서 게으름은 불안을 야기하고 통제를 거부하며
조직 내 기강을 흐린다는 게 지배자들의 일반적 통념이다. 그런 이유로 지배계층이 노동자들에게 여가나
휴식시간을 주지 않고 가능한 풀가동으로 일을 부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자신들을 향해 시위를 하고 그
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원동력이 바로 그 ‘쉼’에 있다는 것을, 지배자들은 진즉에 간파했기 때문이었던 것
이다.
진실은 너무나 미약하며 오류는 늘 타인을 향해서만 열려있기로 근면지상주의자들에겐 게으름의 창조력
을 볼 틈이 없다. 개미나 일벌이야말로 낮의 단 20퍼센트만 일하며 그 외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진정한 게으름뱅이(p34)라는 사실을 아는가? 게으르고 느려터진 거북이와 악어가 약
4년을 사는 부지런한 새와 생쥐에 비해 평균수명이 250년으로 훨씬 장수한다는 사실. 분주한 동물이 게으
른 동물보다 일찍 죽는다는 사실도 이미 18세기에 밝혀졌다 한다. 그런가하면 열네 살의 구텐베르크는 당
시 책을 필사하는 것이 귀찮아 인쇄술을 발명하게 되었다. 게으른 자에게 문명은 없고, 게으른 사람
은 행복할 기회를 막는 실패자(p57)라고 말했던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가 그들의 업적을 목격했다면
과연 뭐라 변명했을까. 이렇듯 구석구석에서 강자가 정한 게임의 법칙은 어느 순간부터 약자들의 인식 영
역까지 잠식해 들어간다. 그리고 강자들의 그럴싸한 이론대로 굴러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약자
들 스스로 근면해져야 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4당 5락을 외치며 새벽별을 바라보는 시간을 고되지만 아주
당연스레 여기게 되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노동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
즘의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키웠다고 주장한다(p52). 뿐 아니라 1930년대 독일 나치정부 또
한 하릴없이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을 비롯한 집시들을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 노동에 가담시켰다고
한다. 더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글은 무위 태만한 인간
들은 살 가치가 없다는 무서운 메시지를 암시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게으름은 설 자
리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동화되었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한 채 자식만 주렁주렁 낳은 무능력한 흥부보다는 약삭빠른 두뇌회전으로 욕심껏 배를 불
린 놀부를 삶의 모델로 삼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우린 꽤 오래전부터 행복의 문은 다름 아
닌 ‘근면’에 있음을 터득한 셈이다.
갑론을박의 묘미에서 빠질 수 없는 건 ‘담 너머 불구경’이다. ‘근면’이 최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게으름’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내 관심은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일찍이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에서 노동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공격했고, 영국의 소설가인 스티븐슨도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에서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배 계급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p61)고 피력했다. 그런가하면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도 “노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주인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살아간다-”(p61)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
서 잠시 게으름을 찬양한 독일의 시인 토마스 만의 시를 감상해보자. 불구경을 요란하게 하지 않는 이상,
‘쉬어가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인 동시에 뜬금없는 짓거리에 묘한 재미를 느껴보자는 거다. 하하.
게으름이여, 이제 너를 위해/ 작은 찬가를 지으려 하노라/ 오! 품위를 갖춰 너를 노래하는 것
이/ 얼마나 귀찮은지/ 하지만 최선은 다하겠다/ 일이 끝난 뒤의 휴식은 달콤하니까(p68)
서구제국주의의 순한 양들이었던, 비서구권에 속하면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게으름은 꾸준히 비판
의 대상이 되어왔다. 뭐 한때 ‘시간은 금이다’를 외치며 유한한 시간에 정신없이 매달려 살아왔던 자신들
의 사회에 염증을 느껴 인도로 간 서구 히피족들의 유토피아가 되기도 했지만. 그때 욕망을 조절하는 지
혜를 가르친다는 인도의 요가와 명상이 유럽으로 수출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기도 하고 아이러니
다. 그리고 우습다. 어찌됐든 윤회설을 믿는 인도의 힌두교는 게으름에 대체로 낙관적이었고, 불교는 기
독교와 달리 지나친 게으름과 심한 노동을 비난했다. 인도에서 출현한 시크교 또한 게으름을 비판하는데,
실제로 그들은 아주 근면성실해 힌두인이나 무슬림과 달리 거지가 없다. 인도 총인구의 단 2퍼센트에 불
과한 그들이 인도 전체에 차지하는 부의 비율이 10퍼센트를 훨씬 넘을 정도로 그들의 근면성은 정평이 나
있단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종교라도 이렇듯 급격한 차이를 보이는 데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잠자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p108).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식후에 즐기는 낮잠이 몸과 정신을 맑
게 해 생산성을 높인다는 생물학적 근거에 입각해 경제활동에 접목하려든 처칠 수상은 역시 용의주도한
사람이란 생각이다. 더불어 본서에도 나오지만, 중국에 다녀왔던 관광자의 말을 들어봐도 ‘만만디’라고
해서 휴식이 관습화된 중국의 ‘천천히’와 ‘느리게’를 곳곳에서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동양국가로
써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대열에 끼여 서구 근대화를 극렬하게 답습한 일본의 근면성 또한 익히 들어왔다.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열성을 떨어 단기간에 경제부흥을 일궈 선진국이란 입지를 굳힌 그들을 보며 우
린 부러움과 동시에 혀를 차기도 한다. 세상엔 잠을 줄여가며 영악한 근면을 떨어 일궈낸 그들의 허울 좋
은 성공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근대 이후 낮잠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되자, 다음엔 차茶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식곤증을 막아주는 커피가 불티나게 인기를 끌
었던 것. 이외에도 술과 낚시도 유유자적하는 삶에 공헌한 바가 크다.
이 책이 제목부터 내 맘에 쏙 들더니 내용이면 내용, 지식과 정보면 또 그것대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게다 챕터 타이틀에 딱 들어맞는 그림과 간간이 흘려주는 시를 비롯한 우화와 속담 기타 등등. 추석
명절 연휴로 다소 늦게 수령해 서평마감 기한을 채우느라 허겁지겁 읽어냈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타이
밍에 고저 주체 못할 재미와 네이버지식사전을 방불케 하는 정보를 다발로 안겨주니... 이 어찌 아니 고마
울쏘냐. 무엇보다 내 게으름에 깨소금 같은 정당성을 떡 던져 냉큼 받아먹은 쾌감이 쏠쏠하다. 세상에는
생산적이지 않아도 가치 있는 일이 아주 많다, 오늘날은 상상력과 창조성이 필요한 시대다, 아무것도 하
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이야말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생산적인 행동이다, 시인들도 빠르게 움직이지 않
는다, 빠른 걸음에서 아름다운 시상이 떠오르기 어려워 그런다(p216)면서 아주 달콤한 위로로 에워싸는
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나 글사랑이는 앞으로도 쭈욱~~~ 게으르
겠다고. 이른바 창작활동에 나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을 신봉하기로 한 것. 하하, 이쯤해서 앤딩도 멋
지게, 영국의 시인 존 키츠의 ‘나태 칭송시’를 인용하며 마치련다.
오, 아무 성가신 방해도 없는 시간이여,
나는 달이 어떻게 이지러지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네.
부지런히 훈계하는 상식의 목소리까지도!(p216)
|
|
나는 시간개념이 철저한 편이다. 약속시간이나 출근시간, 예배시간, 모임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정해진 시간이 2시라면 머릿속으로 씻고 옷 입고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그려본다. 중·고등학교 때도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강시가 벌떡 일어나듯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에는 시계를 잘못 보신 어머니로 인해 새벽 3시에 스쿨버스를 타러 나간 적도 있었다. 낮잠, 늦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부지런하거나 완벽주의를 표방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그런 것도 있고 성격이 급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온 것인데 내 기준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잣대로 종종 사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 안 바쁜 줄 아나!!, 도대체 왜 저렇게 시간개념이 없는 거야!!’ 라며 혼자 우쭐대고는 했다. 이런 내 시간개념과 약속개념은 아내와의 연애기간과 결혼기간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 그렇게 나대지 않아도 다들 불편하지 않게 잘 돌아가는 것이었다. 5분 10분 늦는 아내를 기다리며 정신수양이 된 탓도 있지만 아내에게는 적어도 내가 타인들에게 했던 비난과 조롱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이후부터 조금씩 바뀐 것 같다.
“게으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p.159) 이 책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는 게으름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차이와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속에서 ‘게으름’을 정의하고 비교하고 있다. 게으름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약속에 대한 개념이 100%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그것 또한 존중해야 한다. 물론, 시간을 제때 지키지 못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큰 피해를 입거나 어이없는 결과를 낳는 일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나의 기준이 오로지 ‘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오늘날 게으르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광고주입니다. 한때 힘을 가졌던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켰고, 근대의 산업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강조했다면 이제 매혹적인 상품을 파는 글로벌 기업들이 근면을 강조하고 강제합니다.” (p.198) 중세유럽의 귀족이나 동양의 귀족, 고려·조선의 양반들은 게을렀다. 하인이나 노예나 노비가 그들의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농사일, 밭일, 집안일에 이르는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 했다. 그래서 멋진 연미복을 차려 입고 파티를 하거나 곰방대를 피우며 술이나 마시고 시를 쓰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인 사람들에게 풍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급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한다. 언론, 광고에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좀 쉬엄쉬엄 해~.”라고 조금 게을러질 것을 권하지 않는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적응하고 최소한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 따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곤하다. 게으름은 고사하고 일각의 쉼 없이 움직이며 사는데도 고단하다. 한국 사람들이 산을 그렇게 좋아하고 요즘 들어 캠핑이 각광을 받는 것도 일상에서 떠나지 않으면 도저히 게을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고 그것에 발맞추지 않으면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촌각을 다투는 직장 생활과 사회생활로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이나마 저 먼데로 나가서 쌓인 여독을 풀고 게으름의 갈증을 푸는 것이다.
“게으름은 누가 보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p.31) 게으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더 스트레스를 준다. 직장에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도(이를테면 예스 블로그 같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거나 상사가 등장할 경우 재빠르게 alt+tab을 눌러 업무와 관련된 화면을 띄운다. 적어도 내게는 업무를 하다가도 내가 좋아하고 가치를 두는 것에서 재미를 얻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더욱 업무에 매진할 때가 있다.(아~ 조금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떳떳하게 “아~! 제가 이러저러 해서 예스24보고 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그(그녀)에게는 나의 딴 짓이 업무를 내팽개친 게으름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그녀)가 볼 때는 게으름일 수 있지만 내게는 절절한 일상이다. 책에서 저자가 여러 번 지적하듯이 ‘당신은 게으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조직을 위해 더 열심히 하라.’ 라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다.
“너무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은 필요하지만, 어려서부터 게으름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과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한 나무가 부러지듯 강한 규율이 부드러운 인간을 만들긴 어렵거든요.” (p.21) 초등학교 시절을 가만히 돌아보면 늘 부지런한 철수와 영희가 나오고 학교 선생 말을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철수와 영희뿐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설화와 민담, 우화들은 모조리 부지런하고 조직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어디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때론 게으르게 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사실 맞는 말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공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 해 전공을 열심히 이수하고 직장에 들어가 산업역군으로 살아가는 일은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쓰고 생 쑈를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실제로 가까운 지인 중 한명의 아버지는 폐차장 사업을 크게 하고 계신다. IMF, 글로벌 경제 위기 등 난관이 많았지만 동남아, 남아메리카, 몽골, 중국 등지의 수출 활로를 개척해 탄탄한 사업 기반을 다지셨다. 내 지인은 누구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대학 시절 단돈 몇 천원 버느라 알바로 전전긍긍할 때 그 녀석은 세계여행을 다녔다.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운동도 잘 하고 몸도 좋았음에도 이상하게 상근예비역으로 동사무소에서 편하게 군 생활을 하더니 전역하고 또 세계여행을 다녔다. 직장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로 쩔쩔매던 내게 늘 밥을 사 주고 술을 사 주고 그러더니 아버지 사업체의 부사장이 되어 있다. 나는 국산 준중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 지인은 내 차를 팔아도 사이드 미러 정도 교체할 수 있을 만한 독일산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적어도 그 친구 보다는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산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이번 추석 연휴 때 프랑스를 다녀왔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 친구보다는 내가 더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지 않는 내 인생을 탓할 뿐이다. 그 친구가 부사장에서 사장이 되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고 치열한 현실과 일상을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천양지차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야만과 후진성으로 상징되면서 근면하고 역동적인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게으른 동양에 대한 침투와 정복을 정당화했습니다.” (p.23)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배 계급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 (p.61)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갖은 애를 쓰며 살지만 그들의 눈에는 ‘게으름’이다. 그래서 더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를 바란다. 옛날 중세시대 이야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이야기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현실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지배자들은 학자와 성직자들과 손잡고 노동을 사랑하고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고 하층민을 부추겼습니다. 끊임없이 근로와 근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애국과 연결했습니다.” (p.70) 서구 자본주의가 종교 개혁에 이은 프르테스탄트의 태동으로 촉발되었다면 사실 그것은 서구의 문제다. 책에서처럼 서구 열강이 인도와 중국, 일본과 조선에 물밀 듯 들어와 목도한 것은 한량 같은 원주민들이었다. 기후적·문화적 특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혁명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발전을 이룬 그들의 눈에 동양은 미개하고 게으르고 교육·계도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절정에 이른 것은 그들의 식민 지배였다.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원주민 들 중 지배계급 내지는 지배자였던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식민 지배를 떠받친 원주민 지배자들은 여전히 게으른 통치자였다. 일하고 애쓰고 죽을 동 살 동 몸부림치는 자들은 그들이 ‘게으른 자들’이라 명명한 피지배자들이었다. 민족, 자유, 해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 몸으로 헌신해 부지런히 일하기만을 원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p.75)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뭐 어차피 나는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니니 가타부타 덧붙일 말은 없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도대체 뭘까?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헌 나라의 어린이가 있어야 하는데 헌 나라의 어린이는 또 뭘까? 나는 헌 한국인인가? 새 한국인인가? 다만, 이 게으름에 대한 혐오와 부지런해야 함에 대한 정서가 서구에서 온 것이라면 적어도 서구처럼 일 년에 2∼3주 정도는 합법적으로 게으를 수 있는 휴가를 줬으면 좋겠다. 대선 주자들 모두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언제나 그런 휴가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
|
게으름에 대한 미학을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너무나도 빠르고 숨쉴틈 없이 돌아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조금 여유를 갖고 살자는 의미가 더 큰 책이다. 애초에 인류사회는 농경문화였다. 그들은 자연에서 먹을것을 얻었고, 먹을 것을 얻기위해 사냥과 채집, 낚시등을 이용했다. 그들은 먹을 만큼의 양만을 자연에게서 획득하였고, 수확과 사냥이 끝나면 휴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비서구세계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들여오면서 휴식은 곧 게으름이라는 인식이 되어버렸고, 이는 그들이 비서구인들을 비판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노동을 거의 종교의 경지에 올려놓은 주체는 바로 자본주의이다. 오늘날의 소비문화는 행복을 정해주고 있다.세계화라는 미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산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를 양산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구매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1차 생산자들은 밤낮으로 일하고 있고, 기업들 역시 이윤을 남기기 위해 24시간 내내 쉴틈 없이 공장을 가동시킨다. 인간에게 휴식이란 게으름을 의미하게 되었고, 게으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점차 부정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서구제국주의 시절 피식민국가에 전염병 처럼 퍼져나갔다. 그들은 피식민자들이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다. 유럽에서 가져온 기독교 윤리로 노동의 가치를 판댄했던 백인들은 자신이 소비할 양만 생산하고 게으름을 즐기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훗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게으름을 비판하는 성향은 그대로 조선인들에게 인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바쁘게 일합니다. 서양의 중세교회는 게으른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며 게으름과 나태를 멀리하라고 가르쳤지만, 오늘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신을 염두에 둘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벌레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됐습니다. 조선시대의 송시열이 일하지 않는 자신을 '좀벌레'라고 자조했으니 인간이 벌레에 비유되는 건 피할 수 없나봅니다. 좀벌레가 아니라 일벌레가 많아진 최근에 나온 유엔보고서는 과로로 죽는 사람이 1년에 200만 명에 달한다고 말합니다 (p.205)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게으른 사람은 자본주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근면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근대 서구사회와 비슷해진 것이다. 반면에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집중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개미처럼 사는 사람을 근면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일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멸시한다. 게으름의 장점은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낸 성과와 실수를 따져보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낼 시간을 준다. 물론 지나친 게으름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가끔 우리의 삶에 여유를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
|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라는 동화책이 있다. 생쥐 프레드릭은 동료들이 부지런히 일할 때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은다. 다행히 동료 생쥐들은 그런 프레드릭을 탓하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고 어둡고 컴컴하고 추위에 떠는 생쥐들은 부지런히 모은 식량을 먹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식량은 거의 떨어져가고 겨울은 남아 있다. 이때 생쥐들은 프레드릭에게 프레드릭이 모은 걸 물어본다. 프레드릭은 추운 동료들을 위해 빛과 색깔, 그리고 시를 들려준다. 게으르지 않았다면 시는 결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를 들으면서 동료들은 힘을 얻는다.
아이가 혹은 내가 생각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면 게으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책은 나태와 게으름을 꾸짖고, 부지런함을 권면하는 많은 나라의 옛날 이야기와 유명인사들의 명언을 보여준다. 게으른 사람에게 미래는 없어보인다. 남들보다 부지런해지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주욱 들려준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여전히 게으르길 즐기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책의 중간 부분에서 부지런함을 권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면 우리가 부지런함을 강요당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부지런함을 권하고 게으름을 질타하는 사람은 대개가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이들이다. 식민지 국민들에게 게으르다 한 사람은 제국주의자의 시선이었으며 주인이 하인을 게으르다 하였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나는 왜 게으른가? 왜 부지런하지 못한가?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주는 부분은 마지막에 나온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림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하지만 게으름을 긍정적으로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생활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함을 권하기 때문에 게으름을 죄악시하게 된 것이다.
게으르다는 것의 힘은 '프레드릭'에서 볼 수 있듯이, 창의성을 갖게 한다. 게으른 사람이 아니면 예술은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화두, 창의력은 바쁜 아이들이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으를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내 아이가 창의력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길 기대한다면 아이에게 게으를 시간을 줘라. 대신 컴퓨터, tv,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고 놀아라라고 해야 한다. |
|
게으름은 사전적(辭典的)으로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을 의미한다. 게으름에 대한 정의 자체에서 이미 어느 정도 ‘나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와 지역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게으름이 나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 이솝우화 중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근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나 처세서는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 것을 권한다. 소위 “멘토”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괴로워하는 청소년들에게 자신들의 과거를 들먹이며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에게 게으르다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나 버릇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게으르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 게으름을 마치 죄(罪)가 있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우리는 게으르다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들보다 치열하지 않고 바쁘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기만 한 것일까? 게으르게 생활하는 것이 나쁘기만 한 걸까?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 앞만 바라보고 쉴새없이 달리는 사회. 현대인들은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염증을 느끼고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형성된 게으름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에게 좀 더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게으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물론 게으름을 찬양하는 책은 아니다. 게으름에 덧씌워진 죄의식을 떨쳐내고 게으름을 통해 진정 우리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은 5장에 걸쳐 근대 서구 산업사회에서 노동이 중요해지면서 게으름은 뭔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게으름은 국제간 권력관계에도 배어들어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규정하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침투와 정복을 정당화했으며, 현대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오늘도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도 문제이지만, 그런 사회 속에서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 개인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개개인들의 몫이다. 근면하고 부지런한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에서 한 템포 쉬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부지런하게 움직인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적당한 일과 휴식은 재충전을 위하여 중요하다. 최근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제는 게으름을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게으름도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항시 근면과 부지런함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다. 내 주위와 사회,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적당한 여유와 휴식은 우리에게 부지런함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게으름이 가지는 미덕을 일깨워준 재미있는 책이었다. |
|
요새야 워낙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간에 공부나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면 결과가 좀 나쁘더라도 다음 기회를 기약받을 수 있다.
정작 나만 해도 직장에서 머리나쁘거나 일을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 즉 게으르게 일을 하거나 꾀를 부리는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입장이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자라면서 부지런함을 권장받았고 게으름을 피해야할 것으로 교육받았지, 그 어디서도 게을러도 괜찮다 혹은 뭐 그럴 수 있다 정도도 들은 적이 없다.
물론 유유자적이니 안빈낙도니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먼 과거의 팔자 좋은 선비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내가 아는 게으름의 개념이 아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게으름을 보았다.
물론 게으름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소위 말해서 '여유있는 행동', 아무 것도 하기 싫어 하는 '귀차니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등의 보편적 의미에서의 '게으름'.
이 책에서는 일단 지배자들의 관점에서는 게으름이 근절해야하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게으름을 죄로 규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경영자 혹은 지배자의 입장이라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일하는 시간 = 결과물 = 돈 이기 때문에 게으름 혹은 시간 낭비는 줄이고 싶을 것이고, 그를 위해 어떻게든 열심히 일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짜냈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내가 분류한 게으름의 몇몇 형태들 중에 귀차니즘이나 일을 미루는 습관 등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유있는 행동 혹은 휴식 등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것이다. 소니나 구글의 경우, 모든 뛰어난 발명들은 정규 근무 시간이 아닌 회사에서 정식으로 제공된 '보장된 휴식' 시간과 가외의 투자 비용에서 발생되었다.
내 개인적인 경우만 보더라도 회사가 근무 여건이 열악한 것을 파악하고 휴식 시간을 좀 더 주는 등 좀 덜 빡빡하게 군다면, 훨씬 좋은 결과물들이 나올텐데 늘 힘들게만 돌리니까 피곤한 상태에서 딱 내가 할 일 만 하게 된다.
게으름 = 생각의 낭비 = 시간 낭비 라는 공식도 나올 수 있겠지만, 게으름 = 시간의 활용 = 창조적인 생각 = 또 다른 결과물 이라는 공식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지 않겠지만, 생각의 전환은 이런 위기의 시대에 더 필요한 법이다.
늘 빡빡하게 성과만 중시하고 조금만 게을러 보이면 능력없는 사람 취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한 템포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게으름의 개념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인 것 같다.
이 책은 위정자들이나 기업가들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
|
|
게으름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개미와 베짱이'다. 어린시절,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아야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성장해가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과연 부지런한 개미만이 최선인가? 부지런한 개미뿐 아니라 노래 잘하고 놀기 잘하는 배짱이도 그의 능력을 무기로 충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수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보아지는 사회의 변화를 느끼며 모든 이야기는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날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책 제목처럼 과연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는지를 사회문화역사적 관점으로 우리들에게 이야기 들려준다. 먼저 이 책의 표지를 들여다보면 해머에 누워 잠들어있는 여인의 모습 밑으로 저자의 이름에 우선 눈이 간다. 이 책의 저자는 '이옥순'씨. 인도여행을 한번이라도 계획해보았거나 다녀왔던 사람이라면 이 분의 저서를 한 번은 읽어보았으리라. 참 간결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결코 깊이가 얕지않은 인도관련서적에 대한 호감도 때문인지 이 책또한 그러하지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게한다. 책장을 넘겨 목차를 살펴보면 게으름의 문화사, 서양의 게으름, 동양의 여유, 식민주의와 게으름, 소비주의와 게으름이라는 다섯개의 큰 파트로 분류되어있는 것을 보며 이 책의 흐름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 기대와 다르지 않게 우리가 흔히 부정적 개념으로 불리우는 '게으름'이라는 단어뒤에 숨어있는 권력과 부의 유지와의 연관성, 산업혁명을 통한 개념의 발전(?)과 함께 식민주의의 정당성 대변, 소비패턴과의 연관성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덮으며 '게으름'이란 단어를 과연 한 줄의 문장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모든 단어들이 그러하겠지만 그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역사적 맥락을 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주 간단한 단어들이라도 함부로 정의를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인식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특히, 마지막 파트인 '소비주의와 게으름'이라는 파트를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걸어온 고난한 역사적 맥락, 특히 근현대사가 주는 명암으로 인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개미와 베짱이'의 최신 버전을 소개하고 있다. 젊었을때 쉬지않고 열심히 일만한 개미는 노년기에 신경통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모든 재산을 치료비로 다 탕진하며 비참한 노년기를 보내지만 노래를 잘하는 베짱이는 그의 실력을 살려 연예인으로 성공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이렇게 바뀐 새로운 버전을 읽으며 정말 세월이 많이 변하기는 했나보다하는 생각과 함께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사회, 아니 우리나라 사회에서 적절한 노동과 쉼의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
게으른 사람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부지런함을 강요당한다. 부지런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게으름 것은 죄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지 않았다. 늘 남보다 천천히, 여유를 부리면서 살았다. 게으름을 내 천성인냥 여기면서 살았다. 하지만 늘 게으른 내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부끄럽고 불편했다. 남보다 뭔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동양과 서양에서의 게으름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고, 지금의 게으름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사람을 게으르면 왜 안되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곰곰히 하게 한다. 어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부지런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으름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나의 속마음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의 게으름이 죄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기독교와 관련이 깊다. 물론 게으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게 하고 그것을 좀더 견고하게 만드는데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서 동양에서 게으름은 여유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서양에 비해 게으름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물론 여기서의 게으름은 여유로움과 기다림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여유자적한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이나 동양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노예, 노동자에게 게으름은 사치라는 사실이다. 부지런히 일하고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회구조 속에서 부지런함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선비들의 모습은 게으름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왕의 모습도 게으르다고 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 크다. 게으름을 망국의 원인으로 생각하게 된 것 역시 우리의 모습을 서양의 잣대에 맞춰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 사회는 성공하거나 부유한 사람들은 조금 천천히 덜 일한다고 그들을 게으르다고 하지 않는다. 어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은 좀더 많은 것을 가지면서 게으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하지 말고 게으르게 놀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일하고 노는 시간의 주체는 자신이므로 시간과 마음을 보다 여유롭게 쓰자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죽을 듯이 일하는 일벌레가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적절하게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게으름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끊임없는 근면의 쳇바퀴 속에서 여유에 대한 마음의 불편함을 씻고, 위안을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친절하고 직접적으로 게을러도 괜찮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이 책의 제목이 의문형이 아니라 ‘게으름은 죄가 아니다’ 라는 단정형 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왜 우리가 게으름에 대해 이러한 죄의식을 갖게 되었는가에 집중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는데 특히 인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 것은 저자가 인도사를 연구한 박사이며 인도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크게 서양, 동양, 식민주의 그리고 소비주의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화사라는 첫 챕터에서 이 모두를 압축하여 설명해준다. 서양의 역사부터 시작되는 챕터의 순서는 역사에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배치로 느껴진다. 서양에서 근대화가 시작되고 노동의 효율이 중요시 됨에 따른 근면의 부각. 게으름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동양에 대해 서양의 주도로 진행된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 더 나아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에 이용되는 근면의 이면. 그리고 게으름은 무능력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흐름과 인과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긍정의 배신’ 이라는 책이 떠오른 것은, 두 책이 각각 다룬 근면과 긍정이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긍정의 배신’ 은 ‘시크릿’ 같은 류의 이루고자 하면 이루어지리라는 긍정의 전도사들에게, 긍정만 강조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불합리한 구조 등의 문제에도 합리적인 비판의 사고를 무디게 하여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구조를 공고화 한다고 항의하는 내용이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주제는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과도하게 주입되는 그 필요성에 대한 부작용. 세뇌 당한 합리적 비판의 칼을 잃어버린 로봇들을 통해 이득을 얻는 지배층에 대한 항의로써 맥락을 같이한다. 내가 근대화 시대의 관념에 머물러도 관계없는 단순 물품 대량 생산 공장의 오너라면 나는 위에서 얘기한 두 책을 금서로 지정했을 것이다. 여유와 게으름, 비판적 사고는 노동의 효율을 떨어뜨리기만 하는 부정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화 시대에 머물러도 좋을 공장이 있을까? 기계와 같은 삶을 긍정으로 버티도록 쥐어짜는 기업이 노동효율만으로 장수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창의적이고 혁식적인 제품이 단 기간에 규모의 경제를 갖춘 제품을 압도한 애플과 노키아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 한다. 이러한 첨단 IT 제품이 아닌 단순한 물품을 찍어내는 공장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고, 여유와 합리적 비판이 허용되는 자유로운 사고가 뒷받침된다면 그 기업은 장기적인 성장을 이루고 단숨에 시장을 선도하는 창의적 제품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근면이 경쟁사회에서 성공하는데 있어 필요조건이라는 것에 여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작은 휴식에도 느껴지는 마음의 불편함에 지친 내게, 이 책이 마음의 짐을 덜어 준 느낌이다. 또한 실패의 원인은 곧 개인의 게으름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근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기회의 불균등, 출발선이 다른 불합리, 편 법으로 앞서가는 경쟁자와 이를 방관하는 심판 등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문제와 동일한 비중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단순히 일찍 일어나기만 하는 벌레는 일찍 일어나는 새에게 잡아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
|
주변의 누구에게 물어도 '게으름'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게으르다고 흉을 보고, 누군가에게 게으른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것을 싫어한다. 어쩌다 여유가 생겨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금새 무언가 할 일을 찾아 하려고 한다. 사람은 게으름을 피우며 살 수 없는 존재인가? 게으름과 여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게으름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짓인가? 이 책은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편한 문체로 확실하게 답해준다. 나는, 게으르다면 게으른 편이다. 느리게 걷는 것을 좋아하고, 멍하니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참 창 밖을 보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책 속에서 '게으른 사람들'을 정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는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다. 느리게 걷고, 생각하고, 보고, 듣는 것은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얻는 것은 마음의 안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사회에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어느 누가 게으름 피우는 것을 싫어할까. 사람이라면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 열심히 일하다가 쉬는 것마저도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왜 우리는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걸까. 책에서는 그 이유를 '게으름을 정의한 지배자'들에 둔다.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자들은 '저 게으른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서 사람답게 살게 해줘야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자국 내에서는 '사람이 가난한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회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들은 게으름이라는 효과적인 수단을 통해 사람들을 강제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게으른 사람들에는 열심히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노동자들도 포함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란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이 일할 시간을 늘리기 위해 많은 것을 이용했다. 차를 많이 마시는 영국이 왜 그렇게 됐는지, 커피는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기호식품이 됐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쓴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정작 게으른 사람들은 지배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이 일을 할 때 자본가들은 편하게 쉬었고, 노예들이 일을 할 때 주인들은 그들을 부리기만 했다. 그들의 쉬는 것은 여유였고, 노동자나 노예들이 쉬는 것은 게으름이었다. 게으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금 게으르게 읽는 게 좋다. 읽으면서 멍하니 생각하고, 다시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몰랐던 게으름에 대해 알아가고. 책에서는 서구권에서 왜 게으름을 배척하기 시작했는지 역사와 문화를 통해 설명한 후, 비서구권에서 어떻게 그 문화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어려워보이는 내용이지만 적절한 예와 인용된 동화, 우화, 시 등이 내용을 훨씬 쉽게 받아들여지게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도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삼십분 정도 더 자는 것 쯤은 나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여유있게 사는 건 더 좋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