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경제 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나태하게 고정되어 있던 한국의 고용 시장에 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던져 주었다. 안일하게 대학을 졸업하면 줄 세우기 하듯 줄을 세워 이른바 명문대 순서대로 취직이 결정되고 군대식으로 짜인 틀에서 평생 고용이 보장되던 시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폐쇄적이지만 안정적인 과거의 제도를 그리워하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면 다시 그런 '행복했던 과거'가 돌아오리라 예상했다. 지금 현재의 상황을 보자면 그 '행복했던 과거'(물론 많은 희생과 억압구조 위에 졸속으로 세워진 우골탑과 같다고 해도)가 다시 정착할 것이라는 확신은 가지기 어렵고 오히려 한국의 노동 시장은 최소한 우리가 흔히 꿈꾸던 방향이 아니라 제3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 위기로 인한 변화에 대한 갈망과 과거에 대한 맹목적 향수, 경제에 관한 전에 없던 관심과 더불어 한국의 노동시장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혼합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벡은 이 책에서 노동의 미래에 대한 10여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만약 사람들이 이제라도 제대로 완전고용사회의 환상을 고수하려 든다면, 사태는 서구의 브라질화로 치달을 것이다'라며 탈국가적인 시민사회와 시민 노동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주창한다. 그는 시민 노동 사회가 도래하면 시민들은 정치성, 자발성, 참여의식 등을 가진 존재로서 협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타인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일상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초국가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시민 노동은 시민 수당에 의해 대가를 지급 받으며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인정을 확보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벡의 의견은 한 이상주의자의 '어떤 대안'일 뿐 '지금 여기'에 대한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 의하면 '시민노동은 시민수당을 통해 비록 정식 급료는 아니지만 일정 보상은 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으며 '시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현재의 생계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지만 '지금 현재' 임금 인상이나 정리해고 반대 등을 주장하며 파업을 단행하다 대부분의 언론으로부터 이기주의자로 몰리는 노조. 정리 해고에 대해 하루하루 불안과 긴장 속에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유지해야만 하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해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각은 차분하고 독특하며 신선하지만 또한 동시에 순진하고 단순하다. 많은 실업자들이 마더 테레사가 되어 세계 도처의 빈민 구호소에 앉아 있거나 혹은 소비자 운동 단체에 들어 기업 생산품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만으로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월급을 받지 못하고 감금 폭행 당한 후 추방되는 외국인 노동자나 지금 당장 정규직보다 더 긴 시간을 일하고 정규직의 절반의 임금을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헐값에 자원봉사 하듯 일해야 하는 어린 청소년 노동자들에게 그의 생각은 긍정적인 '생활의 복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현재의 한국에 그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바다 건너'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제3자를 위한 활동이란 사실은 시민 노동을 하는 사람 자신이 '나는 아직 쓸모가 있는 인간이다'라는 느낌을 받기 위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사회에서 '나는 시민운동가'라는 말은 '나는 실업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시민 운동에 정착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며 주부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시민 단체에 참가하는 것과는 또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일용직 노동자나 비정규직과 같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새로이 노동 현실에 적응해 가는 대다수의 많은 노동자들에게 직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 울리히 벡의 말과는 달리 시민 단체 활동을 하는 운동가들에게는 최소한의 수당도 지급되기는커녕 그들은 생계를 포기하다시피 한 채 사회 운동을 하고 있고 반면 노동 시장은 한없이 유연해져서 유연성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당신을 해고할 수도 있다'는 식의 기업 편의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 앞에 노동자들은 신성한 한 인간이라기 보다 하나의 부품화 되어 오늘 쓰이고 내일은 버려질지도 모르는 위험부담만 안고 있어야 한다. 모든 변화의 방향은 일단 비관적인 것으로 보이며 당장 취업을 걱정하게 되면 그 어떤 장밋빛도 상상되지 않는다. 현실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사회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거나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노동 유목민이라는 말은 가쁜 변화에 맞추어 계절에 쫓기는 유목민들처럼 변화에 쫓겨 한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사람들은 고민하고 피 흘리고 변화한다. 눈을 감고 내일 아침 완전히 낯선 곳에서 눈을 뜨기 보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심지어는 바꾸려고 하기도 한다. 많은 대안을 이야기하고 찢고 새로 꾸리는 사이 변화라는 이름으로 한 사회의 발전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닐까. 물론 누구의 말도 누구의 논리도 '지금 현재'의 우리에 되비치는 것 이상 다른 무엇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내게 있어 모든 것은 '아직'이거나 '이미'이거나 '혹은'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어쩌면 좀 더 순진한 이상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
| 역사는 기술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노동력을 (그것이 육체적 노동이건, 정신적 노동이건) 줄이는 방향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이윤과 생산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 나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예전같으면 안정적으로 일을 못하는 사람은 정말 능력이 없거나, 운이 극도로 않좋은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그러나 현재는 그리고 미래에는 그렇지 않다. 인구는 많다. 그리고 고학력의 숙련된 노동자들도 많다. 결국 이들 중에 노동시장에서 주어지는 일자리에 대한 경쟁은 심해져 갈 것이다. 기업은 얼마든지 노동력은 구할 수 있으므로 (숙련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좀더 기업의 입장에서 책임이 덜하고, 비용절감의 효과가 있는 비정규직을 늘여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벡의 이래 노동사회에 대한 암울한 전망은 이미 우리가 어느정도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암울한 미래들에 관한 이야기가 지나간 후에 등장하는 벡의 해결책은 ‘시민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읽으면 왜 더 암울해 지기만 하는 것일까? 복지주의가 발달한 유럽의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아테네의 정치 체제가 생각났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인남성들에게는 일정한 보수가 지급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폴리스에 모여 정치를 했다.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들을...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들은 시민들이었고, 시민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와 여성과, 포로들이라는 뒷받침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민은 출생신고를 마친 모든 사람이다. 과연 그들의 시민노동을 무엇으로 뒷받침해줄 것인가? 경제적인 부가가치 창출이 미미하고, 계량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노동에 대해 경제적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대가의 정도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벡이 말하는 미래 시민의 삶은 정말 이상적이다. 일주일에 이틀정도는 생계노동을 하고, 또 며칠은 시민노동을 하고, 또 여가도 즐기고, 시민노동의 가치는 평가 절상되어 사회적으로 만족감과 인정을 받고 대가도 지불되고.. 그러나 언제나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사회주의가 이론이 불안정해서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 자체가 불안한 것이라면 일주일에 2,3일 뿐인 생계노동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벡의 라이프스타일모델은 어떤경우에 생계를 유지시킬수 없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를 시민노동의 대가로 어느정도 보조할 수 있다면 시민노동을 또하나의 직업이고 노동시장이다. 과연 이곳은 안정적이고 100% 취언가능한가? 이러나 저러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일 진짜 시민노동에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 상황이 온다면, 비슷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생계형 노동인과 비슷한 노력과 만족도를 가질 수 있도록 그 대가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본다. 만일 시민노동에 가치를 높게 부여해서 그 차이를 노동의 가치의 차로 메꾼다면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힘들고 평가도 낮은 생계형 노동 대신 시민노동에만 주력하려는 계층이 생길 수 있다고 충분히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기반 자체의 위기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생계형 노동을 많이 하는 노동자와 시민노동을 조금더 많이 하는 노동자간의 갈등도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빵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빵을 먹고 나서 시민노동을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벡의 시민노동 모델은 실현성이 의심되는, 이론적 유토피아일 뿐이다. 사회가 이론에 맞게 어느정도 돌아가 주는 것이라면 애시당초 이러한 노동시장의 불안정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가올 새로운 노동형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건 스스로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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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Ulrich Beck 울리히 벡은 우리에게 '위험사회'의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 사회학자이다. 벡은 진보와 변화가 절대적 미덕이었던 1차현대-산업사회와, 위험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더 이상 과거의 해법이 듣지 않는 2차현대를 구분하여, 점증하는 위험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의 시선은 다분히 미래로 향해 있다. 그 새 시대가 짊어질 그림자를 지적한 것이 위험사회이론이라면,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는 미래의 빛, 혹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앞으로의 노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단순히 노동이라는 요소를 원자로 쪼개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수행될 지, 사람들은 노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지 예측하고 진단한다.
20세기 말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진단은 기존의 좌파이론들과 방향을 같이 한다. '브라질화되어가는 서구'라는 말로 축약하여 그는 자본의 지구화에 대한 경계, 신자유주의적 맹목에 대한 비판을 감행한다. 제1세계는 점차 3세계화되고 있다. 유연성이라는 폭력 아래 총체적 불안정성이 확산되면서 세계 곳곳은 '노동유목민들'로 넘쳐난다. 영토적 조직권력의 내부적 약화와 박탈권력의 초국가화 현상은 "노동은 지방적이고 자본은 지구적이다"라는 상황을 불러오고, "지구적으로는 통합되면서 지방적으로는 그 통합이 해체된다"
이러한 불안정성의 정치경제학은 두 가지 경로의 상상력을 가능케한다. 하나는, 서구의 브라질화 즉 미국적 방식의 세계화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이다. 벡의 관심은 두 번째 가능성에 쏠려있다. 그것은 '비관주의적 낙관주의'라는 어색한 이름의 태도. 노동환경과 그 양상은 분명 퍽 달라졌다. 테일러주의에 따른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노동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불안정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노동이 요구되고 있으며, 사용자에 고용되어 정해진 임금을 받는 취업노동에서 불완전고용된 노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과 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이제 완전고용사회는 끝났는가의 질문에 대해 갖가지 입장들은 여러 미래시나리오를 준비한다. 노동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이행이 생산성 혁신을 가져와 완전고용에 도달할 것이라는 고등학생풍의 낙관주의에서부터,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노동환경이 빈부격차가 격심해지는 지구규모의 아파테이트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관주의, 모든 계층을 위한 '승강기효과'대신 얻은 자는 점차 적어지는 반면 더많은 상실자를 밖으로 따돌리는 '회전문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관측까지(p.103) 시나리오들은 여러 장르에 걸쳐있다.
노동세계의 불안이 점증하는 이와 같은 현상은 자칫 빈민의 게토를 초래할 수도 있다. 특별한 기술과 능력이 없는 탓에 계속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계급은 빈곤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에 주목해서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시각도 있다. 벡은 그러한 시각, 앙드레 고르가 제시하는 "시각교체"를 수용하려 한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현실과 경제성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개인의 시간선택의 권리를, 새로운 노동시간 주권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주권'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등장한다. 보다 확장된 시간주권을 이용하여,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노동사회의 안티테제로서의, 정치지향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의식이 강한 정치적 시민사회.이에 벡은 <시민노동모델>을 제안한다. "노동시민에서 시민노동"이라는 명제 아래, 그것은 큰 바탕으로서 '사회'라는 틀 안에 정치성, 자발성, 참여의식 등의 요소가 녹아들어간 개념이다. 시민노동모델은 합의의 잠재력을 통합한다. 그것은 실험적 다양성이 가능해지는 일종의 공적공간이다. 시민노동에서는 ⅰ조직화된 창조적 불복종이 이루어지며 ⅱ자발적인 정치적 사회적 투신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체 결정 내지 자기 실현이 가능해진다. ⅲ또한 시민노동은 프로젝트별로 구속성을 가지며, 협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제3자를 위한 노동으로서 공공 복지 기업의 연출 아래 실행된다.(p.228) 소규모 문화혁명들이 발생하는 시민노동모델에서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그 공간은 자율적 결정에 의한 앙가주망, 자기책임성의 윤리, 도덕적인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게 된다. 이 모델은 국가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국가의 재정지원을 통해 시민노동의 대가인 시민수당을 얻음으로써 정치적 자유를 가능케하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창출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또한 역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요소인 소비사회+정치적 투신활동이 결합되며 새로운 양상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시민노동은 초국가적으로 확대되어 탈국가적 시민사회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반위계적인 사회"이며 국경을 넘는 공통의 위험 아래 정치적 (책임)공동체를 형성한다. 다방면의 네트워크 모순들간의 능란한 접촉을 통해 '반역'과 연대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이곳은 자율적 조직, 능동적인 공동결정방식, 자발적 주동성, 문화적 신뢰성을 강점으로 한다. 그러나 초국가적 세계시민적 민주주의에서는 그러나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확보하기 힘들다. 갈등을 분출하고 해결하는 제도화된 절차들이 미래에는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는 과제로 남겨져 있다.
이 인자한 표정의 사회학자 벡의 생각은 여러모로 불안하고 위험한 구석이 있다. 그의 시민노동모델은 어쩌면 끼니는 걱정하지 않는, 기초적인 생계는 불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당장 사용자와 불리한 임금협상을 지속해야하는 노동조합에게, 손가락을 잃고서도 산업재해처리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해고의 두려움 아래서 식구들의 밥줄인 임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노동자에게 '시민노동'은 그저 그림의 떡이다.
한편 벡의 논의는 자칫 '이상한' 세력에 의해 이용될 여지가 있다. 그는 시민노동모델의 구체적 실현형태로 기업가적 요소와 공공복리의 결합을 제안한다. 이를테면 빌게이츠+마더 테레사의 신기한 도식. 공공의 목적 아래 유연성을 도입하여 효율을 높이자는 이 순진한 생각은 위험하게 변주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 위험한 순진함은 '생산적 복지'라는 정부측의 괴상한 수사를, 임금을 높이는 대신 해고를 요구한 구조조정안을 수용한 지하철노조의 발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벡은 미래사회의 동력으로 시민들의 소비자운동을 강조한다. (2000년 1월 28일자 한겨레신문 17면) 여기서 충분히 상상 [인상깊은구절] "이 글은 '환영상에 입각한 논픽션'의 범주에 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