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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는 세상 '내 인생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사는 세상 '내 인생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용보기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내음이 있다. 그들에겐 빼어난 아름다움은 없어도 대신 질박하고 고아한 맛이 있다. 그들은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시공간 속에 있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한때 수학자들에게 빠져 관련 책을 조금 읽은 적이 있다. 헝가리 출신의 수
"그가 사는 세상 '내 인생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용보기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내음이 있다. 그들에겐 빼어난 아름다움은 없어도 대신 질박하고 고아한 맛이 있다. 그들은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시공간 속에 있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한때 수학자들에게 빠져 관련 책을 조금 읽은 적이 있다. 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폴 에르디시를 다룬『화성에서 온 수학자』와 인도 출신의 물리학자 사이먼 싱이 지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도저함과 흡입력으로 잠을 줄여가며 읽을 만큼 흥미로웠다. 내가 뭘 알아 재미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이었다.


수학을 위해 삶 전체를 재편하거나, 수학사의 노정에서 단지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던 수학자들의 이야기는 하찮은 인간이 때로 얼마나 웅숭깊은 존재인지를 실감케 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감에도 젖게 했다.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잠을 덜 자고 꾹꾹 눌러가며 열심히 읽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점잖게 표현하자면 몰입하거나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한다. 『내 인생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도 그런 점에서 끌리는 책이었다. 생의 한 교차점, 혹은 어느 임계점을 눈 앞에 둔 한 기초의학자가 생리학을 통해 본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답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 안승철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생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런데 안승철이 속한 자리는 좀 독특하다.


"남들이 내 전공을 물어보면 대답이 길어진다. 내과라거나 외과 정도면 쉽게 알아들을텐데 생리학이라고 답하려니 으레 부연 설명을 해야 한다. 생물학의 한 분야도 아니고 의과대학에 있긴 한데 학생만 가르치고 환자는 보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얘기해야 한다. 그럼 처방전을 쓰냐는 질문도 가끔 받는다(처방전을 발행할 수 있으면 나도 편하겠다.)


발음이 비슷하다보니 전화로 얘기할 때는 내가 심리학과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면 "아 그러면 의사는 아니고 교수님이시군요."한다. 옛날에는 나도 의대를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의사는 의사예요"까지 덧붙여야 내 소개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3쪽)


의사이면서 의사가 아닌 사람.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나와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승철은 동물 실험으로 인해 자신의 손에 죽어가는 동물들에 대한 부채감과 그 실험에 대한 막연한 저항감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험을 끝낸 뒤에도 살아 있는 토끼는 죽여야 한다. 난 이 과정을 제일 혐오한다. 오늘처럼 실험 중에 죽어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다. 살아 있는 토끼를 죽일 땐 고농도의 염화칼륨 용액을 사용한다. 남은 마취제를 모두 투여하고 고농도의 염화칼륨을 주입하면 토끼는 전신의 근육을 수축하며 사망한다.

토끼가 죽고 나면 결박하고 있던 끈을 풀고 사체를 수습해야 한다.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때 가끔 토끼 눈에 고인 눈물을 볼 때가 있다. 시신을 들어 비닐 백에 옮기다 보면 눈물이 뚝 떨어져 비닐 백을 적시곤 했다." (81쪽)


"실험을 위해 생명을 빼앗는 것, 어떤 말로도 정당화 하기 어렵다. 인류를 위함이라고 해도 이기주의적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생리학을 전공하니 동물을 죽이는 게 더 마음에 걸린다. 병원균에 대한 백신을 만들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알기 위해 실험을 한다." (120쪽)


사람마다 져야 할 삶의 무게가 있다. 각기 떠안아야 할 짐과 고통의 몫이 있고, 그 무게는 늘 과중하다. 미물이라지만 생명을 앗아야 하는 자는 생명의 근중함으로, 미안함과 무감함 속을 지치도록 배회한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실험을 더 정교하게 해서 헛된 죽음을 최소화하는 것 뿐이다. 이것만이 생명을 빼앗는 마당에 인도주의를 들먹이는, 허울 좋은 미명 속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때로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으리만큼 냉정하게 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일상의 피곤함과 비루함은 발목을 잡는다. 꾸준하게 제출해야 하는 논문과 연구를 지속하기 쉽지 않은 환경들. 여전히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이 실려야 하는 압박감과 세계 수준과의 부분적 격차는 지치게 하지만 그 또한 여정의 한 부분이리라.


우직하고 미련한 사람만이 한 길을 갈 수 있다. 그 길은 탄탄한 대로가 아닌 잡풀이 나거나 앞서간 사람의 흔적이 없는 험로를 헤치며 나가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험로의 양식은 풍족한 음식과 얄량한 돈이 아니다. 포기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열정이고, 그 열정을 지탱케 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다.


이 책을 썼을 당시 안승철은 40대의 중년이었다. 이제 그는 지천명을 넘어섰고, 책이 출간 됐을 당시 '젊은 의학자'라는 소개가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나이에 이르렀다. 머리는 하얗고 책임은 늘었으며, 시간은 없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뒤집으면 그는 도약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의 눈이 어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마음은 청년처럼 푸르렀으면 좋겠다. 그래야 언젠가 신문의 한 지면이 '선천성 귀먹음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기사로 덮일테니까. 그날이 올 때까지 그의 연구실의 불은 언제나 켜져 있어야 한다.

d*********2 2019.06.28. 신고 공감 4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