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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1995년 육사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 계기였다. 군인 신분이 아니기에 꿈꿀 수 없었던 공간이 저자에게 열렸다. 50년 넘게 국토의 허리에 서 있는 철조망을 따라 걷는 일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군의 허락이 떨어진다 하여도 각종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대다수의 장소가 지난 전쟁에서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직접적인 총성이 울려퍼지지만 않을 뿐 남과 북 양자가 긴장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곳이 바로 휴전선 인근이다. 작업은 혹독했다. 하지만 무릅써야 하는 바가 많았기에 중독성이 있었다. 엄격한 신원조회가 몇 개월의 시간을 요했고, 작업은 그보다 더 긴 450일을 필요로 했다. 저자가 군생활을 하던 1970년대에 비한다면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가 군에서도 일어났지만, 1997년은 IMF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군도 어려웠다. 어쩌면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행해진 작업이어서 더욱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년도 더 소요가 된 작업이었다. 자연스레 책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따르게 됐다. 청성부대를 출발해 을지부대까지, 중간에 두 번 들른 곳도 하나 있었지만 총 14개의 부대를 거치며 작업은 행해졌다. 원래 부대를 촬영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역의 특성상 군을 배제하고는 작업의 진척이 어려웠다. 대부분이 협조적이었다. 통일이후 어떻게 변화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무장지대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이 온전히 보전된 지역이어서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산양까지 등장했다. 그렇다고 마냥 자연에 감탄사를 내뱉을 수만은 없었다.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참담한 역사의 기록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청년들이 숱하게 지뢰를 밟고 사망했고, 교전에서 전사했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운이 좋은 걸지도. 누군가 사망했으나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오늘날에도 무명용사는 차가운 땅속에 말없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자연의 일부여야 할 인간이 없어야지만 비로소 자연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 씁쓸했고, 우리 스스로 써내려간 역사가 끔찍했다. 전방의 군인들은 눈이라면 질색을 한다더니 그 말도 맞았다. 연신 삽을 들고 제설작업을 해나갔지만, 몇 차례나 온몸이 눈 속에 파묻히는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 탓에 카메라는 몇 대나 망가뜨렸는지. 이는 마치 너무 욕심을 내어 자연의 진면모를 향해 다가서지는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생각보다 북한은 가까웠다. 북한 소초에서 불과 1km~2km 밖에 떨어지지 아니 한 곳도 많았다. 나무 수풀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 북한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긴장했다. 사실 휴전선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가른 것이었다. 철조망이 아니었더라면 어디서부터 남한 혹은 북한인지 우리로선 인지할 길이 없다. 지도를 보면 이는 더욱 명백히 확인 가능하다. 대성동 마을과 가정동 마을은 위치만 놓고 보았을 때 어디가 남이고 어디가 북인지 알 길이 없다. 비슷한 위치임에도 사이를 가르는 철조망에 의하 하나는 남, 다른 하나는 북으로 귀속됐다.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각자 살기 바빴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지구 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만들어갔다. 저자는 곳곳에 세워진 선전 문구에 대해 말했다. 제 체제의 우월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한 문구들은 거리감을 유발했다. 그들이 수호하려는 체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현재까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니 더더욱 소름끼쳤다. 그 중에는 여인의 모습을 어설프게 그려놓고는 월북을 권유하는 선전물도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이 제 아무리 단아함을 뽐내도 격렬한 어조로 연일 계속되는 대남방송에 마음이 흔들릴 이는 거의 없지 싶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5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분단이 자아낸 양국의 괴리감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북한이 참으로 멀게 느껴졌고, 북측에서도 남측을 유사한 시선을 하고 바라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파괴되지 아니 한 자연 환경을 지니게 됐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위협하는 시간 속에서 완충지대 비무장지대는 제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게 됐다. 이미 고착화 되긴 했으나 영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단이다. 이제는 분단 아닌 통일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논해야 할 시점인데 우리 사회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아니 한 거 같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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