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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몸에 대해 분리하여 생각하다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몽롱할 때가 생긴다. 마치 내가 내 몸을 떠나서 나를 살펴보는 기분, 내가 하는 생각이 어떤 내용인지 더듬으면서 나를 추론하는 기분.
글은 읽기에 쉽지 않다. 쓰인 용어도 내 수준에서는 평범하지 않게 어렵고 낯설었다. 이런 단어를 이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생각은 어떤 지도의 모습으로 그려질까, 고작 그런 생각을 했고, 그래도 몇몇 단어는 익히자 하는 마음으로 새겼다. 이 작가의 글은 매번 이런 즐거움을 준다. 낯선 단어를 익히는 즐거움.
문득 떠오르는 생각. 생각을 많이 하는 태도는 어떤 점에서 좋은 것일까.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왜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일까. 생각도 많이 하면 할수록 생각의 폭과 깊이가 자라는 것일까. 그냥 생각만 무진장 하고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만 한다는 게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일 텐데, 근본부터 다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에는 힘이 있을까, 정녕.
이번에도 뿌듯함보다는 민망하고 쑥스러운 느낌을 더 많이 품고 책을 덮는다. 내가 진중권의 글을 계속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민망하고 쑥스럽지만, 그래도 계속 읽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나를 향한 갸륵한 의무감 같은 것. 하나라도 더 얻는 게 마냥 잃고 있는 것보다는 분명히 나을 테니까.
23 외부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결국 네 안에 있다. 따라서 먼저 네 자신을 알라. 그리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게 행동하라. 신이 존재함을 명심하고, 늘 경건하게 살아라. 31 보헤미안. 이 '창조적 개새끼‘의 존재미학이 엘리트주의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빈곤을 실천한 보헤미안의 라이프스타일은 자본주의라는 욕망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대중에게 또 다른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다. 온몸을 감싼 미시권력의 망 속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이미 존재할 이유가 없는 화석화한 관습과 도덕의 폭력 앞에서 한 줌의 오만함을 갖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47 지금 군중이 지식인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차가운 관찰자의 측면이다. 자신을 이미 계몽된 존재로 여기는 군중은 공공연히 지식인들의 그런 정서가 “재수 없다”고 말한다. 91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골치 아픈 과학보다 재미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현대의 이야기, 음모론은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키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파타피직스의 본질은 ‘허구인 줄 알지만 마치 사실인 척 해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음모론이 이 의제적as if 성격을 넘어 사실의 행세를 할 때, 디지털의 파타피직스는 중세의 ‘황금의 전설’로 전락하게 된다. 141 수사학은 감정의 선을 건드리기 위해 약간의 과장과 왜곡을 허용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도 허용된다. 운전에 비유하자면 주행을 하다가 살짝살짝 상대편 차선을 밟는 것과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수사학이 논리의 차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 경우 수사학은 가령 괴벨스의 그것처럼 아주 고약한 선전선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다시 운전에 비유하자면 가끔 논리의 차선을 벗어나더라도 수사학은 결코 중앙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200-201 프로이트에 따르면, 한때 친숙했으나 억압을 통해 망각된 욕망이 다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낯설어 하면서도 어딘지 친숙하게 느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때 무생물이었으나, 탄생과 더불어 그 사실은 억압되고 망각된다. 하지만 억압되고 망각된다고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은밀한 충동이 존재한다. 한때 친숙했으나 이제는 낯설어진 그 충동은 우리에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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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독립적으로 얻은 정보들이 어느샌가 서로 얽혀 때로 내게 유의미한 지식이나 지혜가 되어주듯,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의 조각들도 지도 위의 좌표처럼 각자의 자리에 있다가도 새로운 길이나 방법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의 생각 전체를 완성시켜주는게 아닐까? 그러니 쓸데없는 것처럼 여거지는 생각들도 그것이 '내것'인 한 소중한 나의 구현임을 느끼게 된다. 생각을 모아모아 모자이크 같은 '나'가 된다.
이 책은 작가가 사회의 여러 현상 들에 대해 그때그때 했던 생각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그가 철학을 전공한 만큼 철학서의 방향성도 많이 느껴졌지만,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이의 글이라는 점도 또한 많이 드러나기에 읽는 내내 공감할 수 있었다.
*책 속 밑줄
"르네 라자르에 따르면 욕망은 대상과 주체의 이항관계가 아니다. 욕망은 삼각형이어서, 우리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욕구하는 것을 욕구한다." // 타인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욕망해야할지 결정할 수 있을까...?
"보들레르는 만보객을 '도시를 체험하기 위해 도시 속을 걷는 자'로 규정했다. 만보객은 구경을 하는 동시에 구경을 당하는 자다. ... 만보객은 제 자신이 도시의 일부가 되면서 동시에 거기에 거리를 취한다." // 도시에서 산책자가 된다는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카메라 렌즈를 통하면 손쉽게 客이 될수 있다.
"팟캐스트 자체에 대재된 편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경우, 거기서 또다른 결핍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욕망이 등장할 것이다. 문명과 마찬가지로 매체 또한 가지 운며을 갖고 있고 그 운명은 물론 평소에 자신의 편향을 인지하고 적절히 관리해나가는 능력에 달려있다." // 역사는 시소게임과도 같다, 아주 쉽게 경도되는... 완전한 균형상태는 너무나도 순간일 뿐.
"감정을 억제하는 데서 영혼의 위대함을 보는 빙켈만의 고전주의 밓ㄱ은 괴테나 쉴러와 같은 대문호를 거치면서 거의 독일의 국민적 미감으로 자리 잡는다." // 독일인의 건조한 정서의 뿌리를 짐작케 한다.
"데이터 프롬세싱은 근본적으로 Yes-No라는 이진논리에 따라 기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어의 시장은 곧 미디어의 시장이 되었다. ...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은 단순한 이진논리의 시장에선 당연히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 이진논리로 호환 가능한 예술이라니... 가능하다면 더이상 예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지?
"신세대 논객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음모록의 특징은 구멍이 없다는 데에 있단다. 하긴, 인간이 신처럼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기 마련이다." // 어째서 제대로된 음모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과 공력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겠다.
"삶에 의미를 주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약을 해야 한다. ... 공약을 통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미학의 실천이다." // 공약이 주는 부담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아무 의견도 갖지 않으려하는 이들에게 존재미학의 실천이라는게 어느정도 설득력을 가질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칸트의 말대로 미에 대한 판단은 미감적 판단이다. 그것은 이성이 개입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루키즘의 문화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시각적, 인상적으로 결정된다. ... 아름다움 앞에서 상징계는 무력해진다. 선천적으로 운이 없고, 후천적으로 돈이 없는 이들에게 이처럼 우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래서 때로는 심하게 우울하다.
"그가 못참은 것을 그 둘의 중간, 즉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이다. 생명의 활동에서 가장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 구간을 정작 헤겔은 혐오스럽게 여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물을 확립된 정체성 안에 묶어놓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강박을 엿보게 된다." //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혐오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오는게 아닐까? 자신이든 대상이든, 내가 가진 개념 안에 쏙 들어오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래서 기피하게 되는것 같다. '된다'는 동사의 역동성이 부담스러운 것도 다 그럴만하지 않은가.
"르네상스 시대에 모든 위대한 발명이 이루이지자, 이어지는 마니 에리스모는 유의미한 창안 없는 기교의 과시로 흘렀다. ... 그리하여 반복을 통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경우, 곧바로 반복의 권태를 우연을 다스리는 재미로 상쇄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개념적으로 홍상수는 가장 위험한 지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 홍상수의 영화를 정말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 '차이와 반복' 꼭지 속에서.
"사실 지도가 지도로서 기능하려면 실물보다 모자란 부분이 있어야 한다. 지도의 효능은 실물보다 떨어지면서도 실물을 대신한다는 '경제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물과 크기가 같은 지도란 일종의 형용모술이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우화는 아마도 근대과학의 인식론적 이상에 대한 비판, 즉 정확성과 엄밀성을 향한 근대의 강박중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 어쨋든 카메라로 찍은 모습이며 항공사진까지 제공되는 그런 지도서비스가 나는 싫다. 내가 무의적으로나마 '경제적'인 인간형이어서 그런건가? 정확성에 대한 집착, 하지만 정답은 늘 지도위가 아닌 그곳에 있는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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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님을 yes24 관심작가로 등록해놓아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문자가 온다. 지난 학기 말 문자가 왔기에 주문해두고 바빠서 못 읽다가 방학 때 읽기 시작했는데 방학도 여전히 진득하게 앉아 책을 읽기에는 노느라 바빠 오래 붙잡고 읽었다. 책 내용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닌데 책 한 권을 읽을 때 짧은 기간 동안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져 오래 읽게 된다. 올 방학에는 문어발식으로 읽기 시작해 방학이 끝나도록 떼지 못한 책이 몇 권이나 된다. 참, 이 책은 문단과 문단 사이를 떼었기에 가독성이 좋았다.
아무튼 책을 읽다보니 진중권님의 예전 책들이 자꾸만 연상되었다. 대표적으로 "아이콘"과 너무 비슷한 느낌이어서 머리말을 찾아보니 이 책처럼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묶은 책이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의 관심사에서 나온 책이다보니 소재도 비슷하고, 글을 풀어가는 논리나 문체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글 한 편 한 편은 재미있지만 새롭다는 느낌은 안 들고 이 책만의 특징이 없다는 느낌이다. 진중권님의 책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 읽고 있는데 그분도 글의 틀이 고정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진중권님 트위터를 팔로우하고 있기도 한데,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분이 짧은 글로 제시했던 의견을 읽곤 한다. 그때 읽었던 의견을 씨네 21에 조금 길게 늘여 기고한 글을 책 한 권에 모은 결과물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내용은 시의성이 중요해서 그때 그때 읽어야 더 재미있는데 씨네 21을 구독하고 있지 않은지라, 아무튼 책으로 묶여 나오는 점은 고맙고 좋다. 그러나 역시 진중권님은 정치나 인물 이야기를 할 때보다 철학, 특히 미학 이야기를 하실 때 더 멋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글들이 논문을 포괄하는 에세이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글처럼 소재는 미시적이지만 글의 형식과 문체만큼은 논문처럼 논리와 근거가 갖추어 있기에 그렇게 소개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저자로서 나 역시 비독서의 미덕을 강조하며, 늘 도서문화의 요체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사는' 데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바야르는 비독서가 가진 정신적 미덕을 간파했지만, 아쉽게도 그 미덕의 바탕에 깔린 물질적 조건에 대한 통찰에 이르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라. 비독서가 아니라면, 즉 사라믇ㄹ이 꼭 읽을 책만 산다면, 도서시장의 규모는 1/10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도서문화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이 인식은 다음과 같은 독자 분류법으로 이어졌다. 우선 '영도(零度)의 독자', 즉 내 책을 사서 읽는 독자다. 이들은 도서문화에 나름 중요한 기여를 한다. 이어서 '+1도의 독자', 즉 내 책을 사서 읽지 않는 독자들인데, 나는 사사로움을 구하지 않는 이들의 고결함을 높이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2도의 독자', 즉 내 책을 산 것을 잊어버리고 또 사는 이들은 "모든 새로움은 망각의 결과"라는 드높은 철학적 통찰로 인해 나의 각별한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도서문화의 진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이너스 등급의 독자들도 있다. '-1도의 독자', 즉 내 책을 남에게 빌려보는 독자. 그리고 '-2도의 독자', 이들은 사회에 무익한 존재들로, 빌려 읽은 주제에 내 책에 악담을 늘어놓는 자들이다. 그저 독자들에게 비독서의 미덕을 권하는 데에 그친다면, 그 역시 위선일 것이기에 나 역시 평소에 비독서를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왔다. 비독서를 통해 논문을 써서 심지어 학회에 발표한 적도 있다." 338-339쪽. 이에 따르면 나는 그의 책을 한 번만 꼬박 꼬박 사서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영도의 독자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가장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았으면서도 충격적이었던 절이었다. 철학자의 원 저작을 읽지 않고 2차, 3차로 나온 글을 짜깁기하거나 추측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해 소논문을 쓰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아트앤스터디에서 매일 업데이트 되고 있는 무료 강의 중 진중권님 강의 "서양미술사"를 하기에 챙겨 보았는데, 자꾸 이 절이 생각났다. 말씀하시는 내용들 중 어떤 부분은 원문을 제대로 읽은 것이고, 어떤 부분은 타인의 말이나 생각을 빌려서 이야기하고 계신 것일까 궁금해졌다. 위와 같은 관행이 공감은 가면서도 비독서가 과연 미덕인지에 대해서는 100%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았다보니 짤막한 글이 43편이나 모여있다. 그 중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도시의 만보객- 뜨거운 참여와 차가운 관찰', '트루맛 쇼- 사실은 만들어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욕망-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 '얼굴은 풍경이다- 고흐의 자화상', 그리고 위에 인용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비독서의 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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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라는 작가의 저서는 일단 저자 소개가 거의 필요 없어서 좋다. 모든 작가가 그러하지만 검색하면 일단 신상파악은 되고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트위터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매체에서 보여지는 진중권의 모습과 책을 통해 만나는 진중권의 모습은 다르다. 이 이상한 불일치 중 호감을 갖게하는 모습은 아마도 책을 통해 만나는 철학적 사유를 그려내는 진중권이다. 마음대로 주체의 분열을 언급해서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철학적 글쓰기 역시 분열적이고 가끔은 포토 몽타주를 보는 듯 하다. 생각의 지도라는 언어로 표상되는 생각의 전형적인 모습을 매핑한다는 시도, 기술 자체가 또한 흥미로웠다. 또한 학술적 글쓰기보다 이러한 글쓰기에 더 익숙해져서 이질감이 없지만 오히려 학술적 글쓰기의 세계를 보면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내놓으려면 다양한 분야의 작가와 사태를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 매핑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각의 생성, 혹은 짜임이 기대치를 높였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내 기준에 맞다. <생각의 지도>는 cine21에 게재되는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의 2번째 책이다. 전작은 <icon>이었다. icon이 떠올리는 아이디어의 간단한 구조를 말해준다면, 매핑이나 콜라주 같은 이미지의 결합을 글쓰기에 적용한다는 상당히 구체화된 방법론을 책 제목으로 삼은 듯 하다. 글들은 재밌게 읽힌다. 아이디어는 있고 나에게는 얻을 것도 많다. 현대 철학자 중 들뢰즈, 푸코, 데리다에 대한 설명도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 있어서 좋다. 저자 역시 좋아한다던 글은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다. 전공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 역시 써먹은 방법인데 이에 대해 죄책감을 덜게 되었다. 물론 철학적 기본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움에 놀라는 사람과 낯섦에 놀라는 사람 모두를 충족시키는 글쓰기였는지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하지만 새로움을 찾아헤매는 독자인 나에게는 재밌는 책 한 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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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 앞에 미인을 보듯이 퍼즐 조각들이 ( 저자가 말한 생각의 매핑 한조각들인거 같은데 ) 미인을 보는거 같으니 가까이서 보면 먼가 빠진듯한 느낌이 든다. 주로 미학적 관점으로 많은 것을 바라보고 개념들중에 복합적인 것에 대해서도 간결하게 정리해 주는 면이있어서 도움이 된다. 진중권 책을 계속 읽다 보니 항상 비숫한 말이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 식상해 지긴 하나 읽기는 편안하고 새로운 미감이 생긴다는게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거 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만든다.
최근에 저자의 사회적 참여중에 겪은 곤란함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수 가 있다. 군중과 하나가되려는 열망 (뜨거운 참여)와 군중의 평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 (차거운 관찰자) 사이의 균형잡기가 몹시 힘들어하고 결국은 차거운 관찰자의 눈으로 많이 보게 되는 경향을 읽을수가 있다
며칠전 타블로 나와서 자기는 음모론 좋아햇었다는 얘기들으면서 음모론이 왜 빠질수 밖에 없나하는 이유를 설명에 구멍이 없이 상상력으로 빠짐없이 채워 넣었으며 사태를 합리적으로 구성하고 제시하기에 쉽게 설득당하게 된다. ( 허나 유사 과학적 설명으로 객관적 서술이나 과학적 기술이 아니다. ) 음모론이 마치 ~처럼 의 성격을 넘어서 사실의 행세를 할때 중세의 `황금의 전설`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되며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트루먼쇼와 매트릭스를 비교분석한 것은 트루먼쇼는 세트너머에 실재가 존재하며 폭로를 통해서 실재에 다가갈수 있다는 권터안더스의 접근이고,, 매트릭스는 가상과 실재가 구분이 안되며 인간의 해방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장 보드리야르 접근이다. 사실은 주어지는것 (datum)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factu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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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에 관한 책은 어렵다 쉽게 다가가기가 힘들고 읽는다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법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그 배경지식이 없기에 문맥과 맥락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없는 문제나 사물에 대해 무슨 말을 들은들 알 수가 있고 흥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문에 관해서는 우선 소양이 있어야 한다 지식과 교양이 있어야 그 토대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연구와 성찰을 독서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산수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중학교의 2차 방정식을 풀 리 만무하다 인문은 단계적인 수준을 밟아야 다음 단계의 좀 더 고차원적인 사색과 독해가 가능하다 소설이야 이해가 되든 재미가 있든 그냥 읽으면 그만이지만 인문은 읽어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을 뜯어보고 씹어먹는 즐거움에서 읽는 것이니까 논문과 에세이가 만난다면? 그 때의 인문학적 대중성의 지향이 이 책의 방향이다 좀더 알기 쉽고 읽기 쉽게 어려운 철학적 테마를 가장 평이하고 즐겁게 써내려간 철학입문서이다 전부 10가지의 카테고리로 묶은 현대와 철학의 만나는 지점의 가장 긴요하고 중대한 주제들에 대한 성찰들이 아주 쉬운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내용이 , 라기 보다는 분량이 좀 짧아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은 시점에 그만 끝나 버리고 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정도로 전문화된 내용을 기초적인 용어와 화법으로 전달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철학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단순히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심도가 있으며 연구적인 성향이 있다 사실 나 같은 생초짜가 알아봤자 뭘 알겠는가 대학에서 철학과 인문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더 잘 알 것 같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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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라고 부제를 달았으나 미학 에세이에 가깝다. 진중권의 현학과 기지를 맛볼 수 있다. 미술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책을 읽고 남는 것이 많진 않다. 조잡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많다. 차라리 책에 소개된 작품을 수록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언어를 착취한다. 즉 매체와 정보기술을 이용해 문장들의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68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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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0일 초판 1쇄 발행.
1. 델포이의 신탁 델포이 신전 입구 "너 자신을 알라" "지나치지 않게" "당신은 존재한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철학은 이렇게 신적 근원을 갖고 있었다. (보헤미안)인종집단을 가리키던 용어가 예술가적 라이프스타일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 것은 이 (문인과 예술가들이 집시들과 이웃하며 살았기)때문이다. 3. 냉담한 멋쟁이 프랑스에서는 영국과 달리 '댄디'가 그저 옷 잘 입는 멋쟁이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를 가진 지성인으로 다시 정의되기에 이른다. 인디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남은 것은 '댄디'라는 이름의 패션과, 워너비 댄디들의 인터넷 동호회뿐. 하지만 존재의 미학으로서, 혹은 욕망의 전략으로서 댄디즘은 그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4. 도시의 만보객 19세기에 파리의 댄디들은 거북이를 끌고 산책에 나서곤 했다. 보들레르는 만보객을 "도시를 체험하기 위해 도시 속을 걷는자"로 규정했다. 6. 토탈 신파 때로 이 유미주의가 괴이함으로 치달을 때도 있다. 언젠가 김선일이 이라크 반군들의 손에 참수당했을 때,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공개됐다. 지인을 통해 듣자하니 그가 아는 일본인이 비디오를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한국인은 어떻게 죽는지를 몰라."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비는 것이 그의 사무라이 감성을 거슬렀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듣고, 지인에게 그 일본인에게 이렇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맞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죽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죽는지를 모른다." 미디어 이론가 권터 안더스가 냉소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9. 뮈토스와 로고스 그리스 에나스 = 뮈토스 어느 이야기 10. 트루맛 쇼 '가상 너머의 사실, 그 역시 또 다른 가상일뿐이다." 이것이 영화 <매트릭스>가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미디어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미디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사실은 주어지는 (datum)게 아니라 만들어지는(Factum) 것이다. 11. 재판이냐 개판이냐 (석궁테러)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테러'이지 '의거'가 아니다. 13. 눈에 뵈는 아무 증거 없어도 광신은 그저 신앙주의의(Fideism)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전도'라는 것의 본질은 불신자를 이 증거 없는 믿음의 상태로 집어넣는 데에 있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있어야 믿고, 종교에서는 믿어야 증거를 본다. 15.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그대는 진리 없이 설득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진리 없이 설득하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나치는 철저히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집권했다. 그리고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을 서득해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다. 수사학은 감정의 선을 건드리기 위해 약간의 과장과 왜곡을 허용한다. 18. 성녀와 마녀사이 힐데가르트(3살부터 비지오를 봤다고 하며 여성의 한계에도 약학,우주론 등 다양한 분야에 저술을 했다함)여성에게 지적 활동을 허용하지 않던 시대에 여성은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오직 '신의 계시'로 포장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게다. 19.전향의 정치학 '전향자'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수백의 추종자를 이끌고 집단 전향한 강철 김영환. 개인의 생각 볒ㄴ화에 '전향'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전향'이라는 말은 그 말로 낙인 찍히는 이보다는 차라리 그 말로 낙인 찍는 이의 정신세계를 더 잘 보여줄 것이다. ->먼저 본 책으로 인해 온화한 분인 줄 알았다. 처음엔 나꼼수 사람인가 너무나 직설어법이 거슬렸던 나로썬 그 계통이라면 책을 제목만으로 선택한 나의 실수이리라. 그런데 글은 온화했고 정보로 가득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구나 싶다. 전향자를 읽기 전까지는 이분의 과격함을 못 느꼈다. 이 글로 보아 누가 돌을 던진다고 쉽게 접힐 분은 아니신것 같다. 정치는 잘 모르기에 어렵지만 우리나라만큼 정치를 많이 걱정하는 민족도 없다하니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20. 한 인간의 멋은 보이는 데서 공약을 내거는 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그에 따르는 부담을 기꺼이 질 때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24. 총을 든 베르세르커(고대 노르웨이 전사집단): 전투를 위해 의도적 장기에 빠지는 관습 有. 아목amok '통제할 수 없는 격노에서 나오는 광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다른것xeno'에 대한 극도의 공포phobia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27. 거울과 선풍기 stade du miroir 자크 라캉 '거울단계'이론: 유아는 자신을 거울 속의 완전한 모습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아'를 즉, 자의식을 획득한다는 얘기다. 32. 감각의 히스테리 '이디오진크라지idosynkasie'=개인성벽: 멀쩡한 것을 역겨워하고 역겨운 것을 선호하는 괴팍한 성벽. 이디오신크라시아에서 온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풀면 '자기만의 고유한 +혼+합'이란 뜻이 된다. 42. 기술적 영상 (같은 고도에서 같은 기술로 찍은 사진인데 다름)NASA의 사진 속에서 지구는 파란 바다와 푸른 대지 위에 하얀 띠구름을 두른 대지 위에 하얀 띠구름을 두른 영롱한 초록별이지만, 러시아 사진속의 지구는 불그스름한 색채를 띤 것이 거의 화성처럼 황량하게 보인다. 기술적 영상이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 말하자면 기술-미학적으로 해석될 영상들뿐이다. ->과연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가 어울리는 책이다. 다른 문제는 부드럽게 글을 쓰셨는데 유독 정치권 관련되는 부분은 과격해지려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양한 생각들이 괜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