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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자본 시리즈’ 제6권 [공포의 집]은 마르크스 [자본] 1권의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중 마지막 부분인 8장과 9장 읽기이다. 8장의 제목은 ‘노동일’이고 9장의 제목은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이다. 앞서 5권에서 잉여가치율은 오늘날 우리가 부가가치라 부르는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임을 분석하고 설명한 저자 고병권은, 이 책에서 잉여가치율은 높이기 위해 노동시간을 한없이 늘리려는 자본의 운동과 노동자의 저항을 다룬다. 마르크스는 그의 [자본] 8장을 ‘노동일’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투쟁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엿보는 마르크스의 글은 마치 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노동일이란 하루의 노동시간을 말한다. 하루의 노동시간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생산하는 시간과 자본가의 잉여가치를 위해 일하는 시간의 합이다. 노동일은 정해질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일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자본가는 상품을 구매한 이상 구매자에게는 그것을 최대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노동자는 상품을 판매한 것보다 더 많이 가져간다면 판매자를 강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권리 대 권리의 충돌이지만, 이름만 다를 뿐 ‘노동시간’이라는 동일한 것을 두고서 대립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일의 눈금은 힘이 결정한다고 말한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노동일의 확장에 대한 자본가의 열망은 노동일 자체보다는 잉여노동에 대한 열망이라고 한다. 잉여노동시간만이 가치를 증식시키기 때문이다. 자본가에게 생산수단을 놀린다는 것은 낭비이다. 자본가와 정치경제학자들은 절제와 금욕, 절약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무엇에 대한 낭비를 대상으로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료를 아끼고, 시간을 아끼고, 임금을 아끼지만 노동자들의 건강과 시간은 아낌없이 낭비한다. 다시 말해 돈을 아끼고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 활동의 자유라는 것은 이윤추구 활동의 자유이지 양심의 자유를 의미하진 않는다. 자본가란 인격화된 자본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8장에서 노동일을 다루면서 영국과 유럽에서 노동일을 두고 벌어졌던 자본과 노동사이의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산업자본주의가 궤도에 올라서면서 자본은 사회가 강요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약이 있다면 있는 한에서, 없다면 없는 한에서 항상 최대한의 증식을 위해 움직였다. 노동일 연장에 대해 법적 규제가 가해진 것은 19세기 들어 공장법을 통해 표준노동일이 정해지면서부터이다. 18세기 후반까지 노동일이 계속 늘어나면서 12시간에 이르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렸지만, 이후 19세기 초반까지 노동에 대한 자본의 무절제한 향연이 벌어지며 14시간, 16시간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고 한다.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시작되면서 1833년 공장법에서 노동일을 15시간으로 규정한 표준노동일이 제정되었고, 그때부터 표준노동일은 힘겨루기의 대상이 되었다. 1850년 공장주와 노동자의 타협이 이루어져 10시간이 될 때까지 수차례의 공장법 개정이 있을 때마다 자본과 노동은 충돌했다. 그럼에도 자본은 법률을 무력화하고, 편법을 찾아내고, 심지어 법률을 위반하고 벌금을 내겠다고 공언했다.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처럼 공장법 개정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힘이 사태를 결정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영국 공장법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이것만큼 자본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자본의 힘을 일정부분 제어한 것은 바로 ‘연대의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17-8세기 유럽 곳곳에는 구빈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애초 빈민과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구빈원은 빈곤의 원인이 낡은 인습과 개인의 병든 심성에 있다고 보고, 하루 14시간의 노동을 통해 사람을 뜯어 고치려 했다. 강제수용소였던 구빈원은 산업자본주의 초기 노동력의 중요한 공급처였고, 당시 사람들은 구빈원을 ‘공포의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노동자의 눈에는 공포의 집이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다.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공장이 탄생되면서 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게 되자 비로소 자신들이 일하는 그곳이 바로 ‘공포의 집’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시리즈 6권의 제목을 [공포의 집]이라 한 것이 아닐까?
1850년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의 타협은 자본이 더 이상의 가치 증식을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만들었다. 잉여가치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율을 올리거나 노동자수를 늘려야 했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자본이 노동일을 연장하여 착취도를 높이거나,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가변자본의 총액을 힘을 동원하여 낮추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하에서 자본은 이를 실천적 방법으로 해결하였다고 한다. 자본의 양질전환이 일어나면서 자본은 노동에 대한 지휘권과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강제관계로 발전을 하고, 생산수단은 타인의 노동을 빨아들이는 수단이 되면서 궁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 1권 제4편에서 다루게 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노동일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이며, 특정한 주의 연장근무를 포함하더라도 주 5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19세기에 비하면 짧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역시 긴 노동일 속에서 혹사당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그 시기 자본과 정치경제학자들의 논리가 19세기 그들의 논리와 너무 흡사한 것을 보며 자본과 권력의 본질은 같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동일이 줄어든 것은 노동자들의 연대에 의한 저항이 큰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이야기하면서 전제한 것이 있다. 유통과정에서의 교환은 등가교환이고,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전제했던 것들이 변함에 따라 일어나는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시리즈의 절반을 넘겼다. 시작이 반이라 했는데 시작한지 오래되어 겨우 반에 이르렀다.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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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강제노동 수용소'에 쓰여진 유명한 문구가 있다. 'Arv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이다. 참 아름다운 문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있어서 '노동(직업)'은 삶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만큼 신성하고 바람직하고 뿌듯한 것이 없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혹독한 강제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루를 더 살 수 있고, 더는 강제노동을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살 가치'가 없으므로 소각장의 연료가 되고 만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은 참뜻은 사람의 가치판단을 '노동력'으로 본다는 것이다. 강제노역을 할 수 없으면 죽음이라니...
18~19세기 자본주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동자의 '가치'를 노동력으로 보는 것 말이다.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남겨주는 것은 '잉여노동'에서 나오는 '잉여가치' 뿐이니,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을 만큼 쥐어짠 다음에 더는 노동할 수 없는 노동자는 가차없이 버림 받았다는 이야기다. 성인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한 셈이다. 오직 자본가들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자본가들은 이런 억압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을 노동자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환경을 조성하기까지 했다. 바로 '구빈원(workhouse)'다. 애초에는 가난한 빈민들에게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빈민구제의 목적을 분명히 했지만, 이는 복지와는 거리가 먼 목적이었다. 이는 거리에 거렁뱅이들이 넘쳐나면 '거리의 풍경'을 해칠 수 있다는 의견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거리에 불결한 빈민들을 싹 제거해서 한 곳으로 치워둔 곳이 '구빈원'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바로 이 '구빈원'에 눈독을 들였다. 아주 값싸게 노동을 제공할 '희생양'들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아직은 아니었다. 왜냐면 이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떡해든 하루를 일 시킬 수 있겠지만, 다음 날이면 출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높으신 양반들을 구워 삶아서 '나태=죄악'이라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라고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근면성실하게 노동을 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모든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공장'으로 향하게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이 작용한 것이다. 물론, 가난한 이들의 '인권'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다. '근면성실'이라는 것이 '하루 24시간 노동'과 같은 뜻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복지'나 '인권'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행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영국의 '공장법'과 같이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을 해친다는 금쪽 같은 규제가 쉽사리 자본가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본가들로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하루 사용권'을 얻었으니 이를 최대한 많이 쓰도록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집요하게 '공장법 철폐'를 주장했다. 잉여노동이 이윤을 창출하니, 이미 치룬 하루치 노동시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 숙원사업이 된 것은 자본가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19세기 이전의 자본가들에게 '인간성'을 찾아보려는 것은 미친짓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이라고 그닥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노동자들에게 '출근'은 지옥행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장'은 <공포의 집>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으리라. 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했을까?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노동력'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노동력'으로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일이 전부였던 거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없다. 만 5세 이상이면 어른과 마찬가지로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그러니 학교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자'도 읽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으며, 발음도, 문법도 엉망인 채로 어른이 되어고 만다. 그렇게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후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또다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14세 이상은 '어른 취급'을 했다. 자본가들은 '10세 이상'은 어른과 다를 바가 없다며 성인연령을 낮추려고 노력했는데, 그 까닭은 어린아이는 법적으로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시킬 수 없지만, 어른은 '제한 노동시간'이 없기 때문에 악착같이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는 건강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혹사만 당하다 건강을 잃으면 바로 내던져버려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거의 대형농장주들은 노예를 소중히 다뤘었다. 노예가 자신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행여 노예가 다쳐서 일을 하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흑인노예무역'이 활발해지자 상황은 확 바뀐다. 노예의 목숨 따위는 중요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혹사시켜 '생산량'을 늘린 다음 노예가 숨을 거두면, 휙 버리고, 다른 노예를 사와서 똑같이 혹사시키는 것이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이 한창이던 시절에 혹인노예를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7년이었다. 산업화가 된 유럽의 노동자들은 어떤 처지였을까? 흑인노예와 별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자본가들은 '무한한 이윤'을 추구한다. 하루에 10억을 버는 자본가가 하루에 100억을 벌게 해줬다고 해서 1000억을 벌게 해주는 것을 마다할 자본가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날에 단 한 푼도 챙기지 못할 부를 어째서 이처럼 탐욕스럽게 바라는 것일까? 이런 까닭에 '자본주의'에 브레이크 따위는 없다. 자본주의가 도덕을 외치고 윤리와 양심을 지키는 일 따위를 바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여전히 자본가들의 배를 불려주는 '잉여가치'로서만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걸까?
마르크스는 멈출 줄 모르는 '자본주의'에 '공산주의'라는 브레이크를 달아주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소련과 중국, 북한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순수함'이 담겨 있지만, 일단 논외로 하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목소리를 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몇 안 되는 실천하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가난한 노동자들의 편에 선 '이론가'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사회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구분해줘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기 위한 '노동자의 단결권'이라고 말이다. 일단은 이렇게 보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론>에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수없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조목조목 예로 들며 '자본주의' 체제속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본가들과 대등하게 맞짱을 뜰 수 있도록 '노동자를 위한 이론'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할 때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래서 대단히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문맹'이라는 점도 작용한 셈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이 노동자들의 새로운 목소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장시간의 노동으로 '과로사'한다면 '장시간 노동에 의한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 말이다.
물론, 자본가들도 항변한다.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투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펄펄 끓는 용광로를 '멈춘다'면, 이는 '낭비'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건강(생명)과 맞바꾼 '절약정신'으로 대단한 이윤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뿐인 생명'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낭비'를 막기 위한 '절약정신'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가들의 '의식수준'이 참으로 끔찍할 뿐이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자본가들의 항변으로 더욱 분명해진 것은 '노동자의 가치'가 소중하기는커녕 '펄펄 끓는 용광로(또는 돌아가는 기계)'만도 못한 가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에서 '아우슈비츠'의 예를 든 까닭이 어느 정도 이해되셨길 바란다. 오늘날의 노동은 신성한 가치이자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만큼 삶의 가치가 소중해졌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행복이 최우선이 된 셈이다. 이제 노동은 생계유지나 부를 쌓는 것을 넘어 '워라벨'이 더 중요해졌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시, 이런 노동자들의 워라벨을 충분히 숙지한 뒤에야 '이윤추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노동자는 <공포의 집> 따위에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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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읽고 있습니다. 자본에 대한 글을 이렇게 깊이있게 오래 읽을 수 있는 건 작가의 편안하고 자세한 배려로 쓰여진 글이 좋아서이겠지요 책을 아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현실을 책을 읽으며 깊이있게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걸 자세히 바라볼 수 있게 정확히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기분입니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면서 한걸음씩 한걸음씩 앞으로 가는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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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집! 이 공포의 집은 제한 없는 이윤 추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따르고 있습니다. 본원적 축적 과정부터 자본주의 팽창시기와 현재 21세기에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자본은 최대 이윤을 위해 최대한의 착취를 향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제 제조업의 현장은 좀 더 저렴한 인건비가 지출되면서도 쓸만 한 노동력이 있는 노동시장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인구와 상당한 교육인력이 있던 인도로부터, 인도의 임금이 상승되니 이젠 베트남으로, 방글라데시로 이동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대한의 이윤을 위한 착취 현장은 공포의 집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의 법치의 혜택도 업는 지역에는 노예가 아직도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못한 점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배재라는 점에 집중한 점에서 맑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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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도 노동자도 모두 동일한 상품교환법칙에 의거해 싸운다는 사실! 따라서 둘다 같은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니 둘다 옳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율배반에 대해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무해하게 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지만,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그런 칸트식의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관심과 노동자의 관심은 별개의 관심이 아니라서 결코 따로 떼어놓을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주장하기를,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에서의 대결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한다고 합니다.이것이 바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의 결과물이라고요.. 마르크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지만 정말 힘의 투쟁 외에는 답이 없는것일까요? 저는 아직은 뭐라고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앞으로 나름의 해답을 찾기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사실 저는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본가들이야말로 더 많이 이 책을 좀 진지하게 읽어주고 심사숙고하고 비판도 하고 해결방법고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칸트식의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정말로 이 경우에 도움이 안될까요? 현실적으로는 마르크스의 말이 백번 옳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 저도 수없이 느꼈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각성과 주체성뿐만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해가 빠져서는 안될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 제가 결론내리기에는 좀 미흡하니 더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