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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의 장자를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대단한 사유의 일단을 소화해 우리의 언어로 제시해 주는 진지함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의 사유는 구만리 창공을 날고 극한의 인지하는 세계에 머문다. 그의 언어는 그런 사유를 포괄한다. 쉽게 사고할 수 있는 법주가 아니다. 우리의 작은 세계를 장자는 확장하여 전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진실로 대단한 공간을 내재해 있는 그의 사고다. 그것이 고형렬의 대종사를 통해 조금 더 분명하게 된다. 진인과 진지는 장자의 고심이 담긴 용어다. 장자에게 진인은 진지의 주인이다. 진인은 어떤 체계 속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진지보다 진인이 먼저이다. 깨우쳐서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깨우친 앎보다 중요하다. 앎이 곧 사람이고 그 사람이 종사다. 최초의 앎은 매우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바로 앎의 시조일 것이다. 그가 대종사가 아닐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절하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 바로 진인이다. 그 진인이 가진 무기가 진지다.
장자는 더 넓은 곳을 궁구한다. 아니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낀다. 그리고 사유의 행동이 이루어진다. 다른 시간과 공간, 즉 자신이 있지 않은 지평선과 능선 너머 먼 곳의 타자들의 삶을 자신이 현실로 꿈꾸는 사유를 장자는 멈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즉 지평 너머 저쪽 하늘에 나타나는 달을 보고 지평 너머 있는 자신과 달의 기이한 거리를 감지하면서 건너갈 생각을 하다가 붕새를 날려 보냈는지도 모른다. 한 편의 보자기에 싸인 나그네가 되어 해가 뜨는 나라로 향했을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생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을까? 그의 이 초월적 사유는 해 뜨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래서 아마 장자가 동방으로 전해져 아시아 동북방 조그만 땅에서 무심의 흰옷 입은 백성들의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고 있다. 우리 민족과 관련된 장자의 사상의 일단을 들어낸다.
장자에게 죽음이란 삶의 연속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해 무심하다. 죽음에 대한 무심은 그 죽음을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극적 수용자이자 삶에 대한 무위지업(無爲之業)의 유희다. 유심이든 무심이든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죽음은 자연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죽음은 어떤 보상을 원하지도 않으며 삶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죽으면 자신의 모든 정신과 육체는 쉰다. 그것을 있는 대로 수용하지 않으면 재앙이고 욕됨이다. 죽음과 삶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죽음은 일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이 인생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가장 자유로운 자가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런 생각은 폭넓은 삶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권력이나 명예, 부 등은 부질없는 일단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공자와 같이 권력을 쫓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리라.
장자는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저승이나 후세란 없는 것만 같다. 그에게는 오직 이 자연만 존재하는 것 같고 이것 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에게는 이 자연만 있고 그 안에 갇혀 있으면서 그것에 충실하고 극복하고 소요하고 즐기고자 한다. 그것은 극단적인 자연에 대한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우주적으로 생각하고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이 되면 개인의 생멸이 문제가 되리라. 하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생들도 그 속에서 미미한 먼지와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무한한 탄생이라는 큰 틀을 만나고 있는 것이리라.
자연이 무한히 생명을 머금고 탄생시켰으므로 장자에겐 환생이 필요하지 않다. 한 번 위대하게 창조된 것은 너무나 위대하여 계속 끊이지 않고 생명을 탄생시킨다. 또한 죽음도 탄생시킬 것이고 우주엔 생명과 죽음이 반반이다. 즉 우주 속에서는 사생이 하나임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변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통찰이 느껴진다. 자연은 그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고, 시간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오고가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태어나고 사멸하는 것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무상의 의미가 순리로 받아드려지는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장자의 세계는 거침이 없다. 단절이 아니라,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놔두고 흘러가게 해야 한다. 구태여 잡을 이유가 없다. 잡을 수도 없다. 그것을 유교에서는 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것이라 우기고, 애닯아 한다는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고 그냥 두면 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장자의 세계를 그의 언어를 통해 인지한다. 그 언어를 이렇게 온전히 수용하여 한글로 재해석 해준 분에게도 감사하다. 사실 장자에게 사람은 강변의 모래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모든 일상들이, 세계가 언어를 통해서 그려진다. 사람의 사유가 언어를 통해 확인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연에게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또 자연이 아무리 넓고 크다 해도 사람이 지닌 언어의 사유보다 클 수는 없다. 사람에게 광막지야와 망연방황의 꿈이 없다면 이 현실세계는 숨 막히는 유용의 한 공간이기만 할 것이다. 장자의 언어가 가진 마력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무한한 세계의 질서를 깨닫고 인생들의 길을 살펴볼 수 있다. 장자를 통해, 그의 <대종사>를 통해, 그의 언어를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침잠해 본다. 그 결과로 무심과 해탈을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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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칠원서>는 편편이 깊고 높은 산이다.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마음에 와 닿는 것도 안개 속과 같다. 어슴푸레 하고 뚜렷하지가 않다. 그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동양화다. 여백이 많고 무욕하며 광활하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다가가야 하는지 막연하다. 이 <덕충부> 역시 갚은 사람의 마음속을 찾아가는 길이자 글이다.
책의 전반부는 왕태와 중니, 신도가와 자산, 숙산무지 이야기로 되어 있고, 후반부는 애태타, 인기지리무신, 옹앙대영, 민자 등의 얘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인물들은 자기 생의 단면을 찾는 장자의 진인들이다. 이들에 의해 실존인물들은 아무 자랑이 되지 못한 채 오히려 축출되고 소외된다. 특히 인격적 감수성이 낮은 자산과 사유사한 중니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다가 침묵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덕충부>의 인물들은 비상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변론과 저항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깊은 의미를 보여준다.
나를 장자의 공간에 머물게 하라. 이 책을 읽으면서 화두로 떠오른 말이 된다. 무애한 공간, 그리고 다함없는 길, 천지의 생성, 자연의 길 등을 따라가는 것이 작은 인간들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으랴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공자의 삶이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두 사람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커다란 두 범주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왕태는 사람을 불러 모으지도 않았고 중니는 평생 동안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왕태에겐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중니는 권력을 다시 얻을 수 없었다. 공부의 질에서 차이가 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이 둘 중에 왕태의 편에 서 있다. 항상 광대무변을 생각하고, 작은 것들에 구애받지 않은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공자의 삶과 생각이 사람의 삶을 지배해 왔다. 장자의 그 위세 좋은 사상이 몽롱한 것이 되고, 인간 뇌구조에서 신비의 한 부분을 차자하는 것이 되고 있음이다. 이는 다시 <중니에게는 사람의 의식 속에 자주 어둠의 얼굴로 출몰하는 소란이 있고 왕태에게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은유적으로 다가오는 침묵의 고요가 있다.>라고 왕태의 삶의 깊이 있게 수용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자연이 하도록 둔 채 일체의 간섭과 참여를 하지 않고자 한 사람이 장자다. 사실 자연이 하는 수고로움을 사람이 나서서 걱정하고 준비하고 대행하는 과오와 오만을 저지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마치 죽음이 자연을 따라가듯이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적 질서 속에 이루어져야 함을 얘기한다. 자연의 질서 속에 인간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인간이 된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상황, 이것이 장자의 세계다. 구태여 세상의 흐름을 미약한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가져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노자의 세계와 장자의 세계를 구별해 보고 있는 부분이다. 장자의 세계에 대해 선호하고 있는 호흡을 가지고 있다. 노자는 여유가 부족하고 단정적이었다고 한다. 장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노자의 무위자연을 더욱 가까이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생각 속에선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가상의 존재들이고, 신비로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허황하다. 이 허황함이 그들의 생각을 역설적으로 크게 보이도록 한다. 거대한 범위와 대단한 영역의 생각의 반경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인지할 수 없는 존재들로 가득하고 우리들에겐 어렵게 느껴진다.
장자의 <칠원서>를 번역해 보여주고 있다. 번역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원문과 비교해 읽어야 제대로 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을 역자가 잘 소화해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책을 읽으면서 역자의 노고를 많이 생각했다. 우선 통독하고 서평을 쓰고 있지만, 더욱 음미하면서 장자의 그 생각을 따라가 보고 싶다. 노자에 대해선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장자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장자에 다가간 느낌이 들어 감사하다. 다음 <칠원서>를 읽을 때는 좀더 정독으로 다가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은 흔적을 남기고, 많은 사람들이 장자의 그 장쾌한 생각 속에 빠져들어 보기를 기원해 본다. 꿈꾸는 자들에겐 큰 꿈의 원형을 보여줄 듯하다. 인간의 근원을 만나볼 수도 있을 듯하다. 역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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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에세이 장자5 덕충부 가까운
마음속에서 사람은 사람의 것들로 존재해야한다. 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밖으로 나타내지 못한다.장자의 덕은 표출불가의 불구성을 지니고
있다.그래서 그들은 마치 세상을 향해 탄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덕충부에 나타나는 첫번째 인물은
왕태이다.
왕태는 문자그대로 풀어보면 추악함의
우두머리 혹은 해방된 사람,짓밟힌 자,아득하게 넓은 사람이란 뜻이된다.근면 성실 등의 말과는 거리가 먼 이름이다. 장자의책의 인물들이 그렇듯
인명사전에 나오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차지한다. 가공인물 또는 이해를 돕기위해 설정한 인물들일 수 도있다. 덕충이란 책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같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대단한 경지에서 나오는 본심이다. 결국 마음의 표현이 얼굴로 표출이 되는데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나타난다. 행동은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지만 공부를 통해 몸에 지속적으로 학습된 단계에서 보여진다.환경적요인,자연에서 부터 볼 수 있다. 왕태는 사람을 불러모으지 않았고 중니는 평생동안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왕태에겐 사람이 모여들었고
중니는 권력을 다시 얻을 수 없었다.덕이란 적이 없어야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정말 지수가 되지 아니 하고선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고단한 마음을 보여주고 또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비춰주는 것이 없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만물이 비춰보는 거울의 물 그것을 만물지수라고 할 수 있다.마음은 시간이 가지 않는다.
장자의 노니는 마음은 다른 한쪽에 멈추어 있는 지수이다.덕충이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공자도 안에 머무는 덕을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개인적인 자질과 덕으로 볼 때 공자는 너무 잘나고 바른말은 잘한 것같다.제자를 무려 삼천여 명을 거느린 공자가 한 나라를 이루지 못한 것도 수많은 목숨을 척결하고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국가는 칼과 피로 건국되는 것인데 공자 자신은 국가를 만들정도의 배포나 무력집단이 없었고 특히 그를 따르는 백성이 없었다.사람이 태어나 일생동안 가지게 되는 몸을 통하여 우주의 전생을 담아내는 것이 가장 지고한 사람의 순수한 꿈일 것이다.몸의 업신여김 그것으로써 뒤꿈치의 무용함을 얻고 숙산은 영원한 올자로 이 지상의 (덕충부)속에 우뚝 서게 되었다.
발보다 존귀한 것은 발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수가 없다. 그 가장 낮은 곳은 신발이 뒤에 감추고서 감싸고 있는 그 뒤꿈치이다.모두가 허무의 존재들이다.꼭 존재가 근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과거의 이유도 미래의 필요도 없다. 잠깐 어둠이고 잠깐 빛이었다. 삶은 물리적 혹은 화학적 작용의 반복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리 놀랄 것 같지도 않다.
사람은 그 어떤 근원에서 비롯되었건 상관없이 오늘 속에 존재한다.그 존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오늘의 날개이고 삶이고자 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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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장자2 제물론 나비는 나비의 꿈을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다만 우리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다보면 그것은 나비가 되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제물론의 시작은 남곽자기이다.장자의 의지를 보인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만물이 인간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지배를 받는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포용하는 것이기에 가능하다.남곽자기는 세상과 천공이 나의 한 의식체와 마음의 눈속에 함께 있다라고 말한다.삼라만상의 모든 객체가 저마다의 근본을 가지고 있고 유독 인간만이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말은 그들의 허울좋은 허상이지만 그 말이 그들을 옮가매는 동아줄같이 다가오기도 한다.
제물이란 욕심에서 시작되는
허상이다.장자의 바람은 올 때도 좋았지만 갈 때도 좋다.생이 올 때도 좋았고 갈 때도 좋듯이 사랑이 올 때도 좋고 갈 때도 좋아야 한다.어떻게
그것의 사라지는 의미를 보았으며 알았을까.장자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홀로의
소요만을 위함이 아니라 만물의 소리에 대응하기 위한 굉대한 소요를 꿈꾼다.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그곳에 존재들이 있다.인간의
조건이다.장자는 조급하게 그 소리의 근원과 현상을 강조하지 않는다.장자를 공자보다 위에 두는 이유는 장자는
중니 (공자의 자)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미래가 보이지 않는 겸병전쟁과 사상투쟁 속에서 중니도 글을 쓸 사이 없이 분주했지만 오히려 광기의
역사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향하는 장자의 고독한 사상이 매력 있었다. 그림자는 있되 그 실체가 없는 저 우주와 자연과 사유의 본체는 무엇일까.자연과 정신조차 언어의 감옥과 불완전한 구조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이다.지구는 매일 한바퀴씩 돌며 십만 팔천 킬로 미터 속도로 허공을 달려간다. 그 언어의 옷을 벗어도 그것의 이름은 없다. 눈의 마음과 마음의 귀로 일야의 변화를 깨닫고 보지만 아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의 장치가 인간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
손과 발밖에 없는 심각한 결핍일 수
있다.장자는
인간을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관계하려는 유기체로만 보지 않는다.비언어적인 존재로서의 우주적 가치를 담은 소우주로 보고자한다. 나는 무위의
나그네이며 바람이다. 그대 아니고도 있는 나를 찾고자한다.짝이 없는 나이다. 거기에 통치와 소유는
불가하다.죽음 앞에 허상들 내가 그의 무엇을 그립게 하고 존경해서 따르게 할 것인가.
시간이여 이 말을 죽이라고 해야만
하는가.달려가게 하는 저 속도의 도구를 생략하고 경계와
시간을 넘어서서 온갖 욕망을 멈추게 하고 자타의 손익을 없애려 한다면 나의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치면서 달려가는 치이다.그러므로 나는 치인의
존재이다.장자는
인간을 구속하는 어떤 도도 말도 인도 염도 용도 거부하는 것 같다.지극한 부지가 아니더라도 그 부지보다 못한 것으로서의
도도 용도 필요가 없다.사실 진인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써 볼만한 마음조차 없다. 이것이 전용일 것이다. 장자에게 만물은 꿈이다.제물론은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걸까. 절대 허무로 들어가는가.그러나 그것은 허무의식은 아니다.전율적이고 지극하고 무극하고 적극적인 우주의
꿈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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