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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이미지를 마음 속으로 그려 보면,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죽음! 그리고 집요하게 '왜' 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요동치게 만든다. 전쟁영화를 애써 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문학은 영화보다 조금은 덜 시각적이란 느낌이 들어서인지 종종(?) 읽게 된다. 그러나 <천사는 침묵했다>와 같은 책을 읽고 나면,덜 시각적이란 말도 공허하게 느껴지게 된다.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그려내는 것 보다 더 참혹하고 고통의 끝을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단시 상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그 시간 속으로,폐허의 시간 속으로 독자를 끝내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천사는 침묵했다>는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그렇게 길지 않은 소설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현장을 그리지도 않는다.그런데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페허가 된 이후의 모습...히틀러의 아우슈비츠 만행이 너무 커 다른 것들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이 있었던 것처럼,이 소설 역시 전쟁의 현장이 아닌,페허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지..인간들은 또 얼마나 잔인할수 있는지에 대한 민낯을 보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항복하던 날 한스는 퀼른으로 돌아온다.왜냐하면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곰베르츠 부인과 얽힌 사연이 그것인데,(그녀의 남편이 그대신 죽음을 택한 것이 이 소설에서 어느 만큼의 비중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전쟁을 겪고 난 후 곰베르츠 부인처럼 자신의 유산을 전쟁으로 인해 굶주린 자들을 위해 기부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돈에 냄새가 날 정도 모으게 되는 기회주의자 피셔 교수가 더 크게 오버랩될 뿐이다. 교수였으나,전쟁이 발발하고 나치당에 가입한 그는 돈을 끓어 모으게 되는데..이 지점은 전쟁을 통해 누가 배를 불리는 가를 보여준다."전쟁 중에는 인생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다.적어도 위험하고 위태롭다는 느낌은 매일 실감했다.그런 위험은 확실한 안전에 둘러싸여 있을수록 더 근사해지게 마련이다.(...)그리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정치적으로 유리한 편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138쪽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책 속에서도 지금의 상황를 대입하다 보니...피셔같은 이들과 곰베르츠 부인 같은 사람들이 함께 교차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거다..그러나 지금의 상황도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전쟁의 상황 그리고 과정에서 인간은 가장 적나하게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다. ![]()
『"당신을 정말 사랑해...." 그가 말했다. "알아"그녀가 말했다."나도 당신을 정말 사랑해..." (...) 그는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고 그녀를 바짝 끌어당기고서 잠이 들었다.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꼭 대고 누른 채,두 사람은 잠을 자면서 따뜻한 입김을 다정한 마음처럼 주고받았다....』 /171쪽
어느 지점에서 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벤샨의 그림이 계속 따라왔다.페허위에 아이들이 해맑게 놀던 그림이...그랬고,탐욕스러워 보이는 피셔교수가 연상되는 그림이 보이기도 하고..그러나 한스와 레이나를 떠올릴 그림을 찾고 싶었다. 내가 상상한 레이나의 이미지보다 그림 속 그녀가 조금은 더 건강해 보이긴 하나.지금은 페허위에 있으나 언제가 함께,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미지로는 벤샨의 '봄'이란 그림이 딱 인 듯 해서.. <천사는 침묵했다> 제목에서 전해져 오는 기운은 냉소적이다 싶은 느낌도 들지만,소설을 읽는 순간,꼭 염세적인 느낌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인간적이구나 싶은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신이 사랑을 창조한거라면...?천사는 결코 침묵한게 아닐수도...) 무튼 한스는 레기나를 통해,레기나는 한스를 통해 페허위에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모습은 저절로 상상이 되서 가픔 아팠지만,오히려,천사의 침묵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사랑'을 통해 레이나와 한스는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악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선에 봉사한다는 신부의 말이 궤변으로만 들리지 않은 까닭도 그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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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지음 | 임홍배 옮김 | [창비]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
“지금 돌이켜보니 그 첫째날 오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전쟁 내내 겪은 일보다 더 힘들었다.”(43면)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처음에 한스는 알지 못했지만, 도시에 몰래 들어온 날은 1945년 5월 8일이었다. 이 날은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독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1985년에 사망한 저자 하인리히 뵐의 유고작이다. 하인리히 뵐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의 참상을 온 몸으로 겪고, 전시에 탈영하면 총살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수차례 탈영을 감행했다. 그의 인생 역정을 고려하면 한스의 삶을 뒤바꾼 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결코 한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전쟁에서 입은 외상보다도 한스와 같이 전방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혹은 후방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입게 된 황폐해진 심리적인 상처, 내상의 단면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목격했던 생존자들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한스가 고통스럽게 떠올린 이 문장은 전후 생존자들이 새롭게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암시한다.
저자 하인리히 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49년 이전에 집필되었고, 50년이 다 되어 1992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전후 독일 사회가 입은 상처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소설의 초고를 읽은 편집자의 반응처럼 독일인들은 전후 오랜시간동안 생활의 터전이 완파된 전쟁의 상흔을 직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전쟁터의 참상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스가 탈영 후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마주친 얼굴이 사람이 아닌, 서 있는 석조 천사상이었다는 사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참상을 간접적이면서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전쟁의 폐허를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는 식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통은 폐허 위에 자라난 풀을 보고 건물이 파괴된 시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식물학의 문제였다.”(108면)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인적의 발길이 뜸해지면 어디에서나 풀들이 자라기 시작함을 보여주며 폭격으로 사라진 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한스는 뵐의 아바타이다. 저자는 전쟁 전후 겪은 삶의 국면을 소설에 반영했다. 한스가 서점 관리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상황으로 나오듯 뵐은 전쟁 전에 도서 판매 수습 사원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전쟁 직후 출생한 아들이 오래지 않아 사망했던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에서 레기나의 아들이 총알에 희생된 설정으로 되살아 난 듯하다. 목숨을 걸고 탈영을 시도한 것 역시 소설 속 인물인 한스와 작가 하인리히 뵐의 공통점이다. 한스가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죽기로 결심한 누군가가 나타나 대신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한스처럼 탈영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전쟁이 남긴 황폐함의 모습을 문학으로 남겼다. 그 공로로 하인리히 뵐은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또 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김지하 시인의 구명 운동으로 우리와 인연이 있기도 하다. 구소련에서 추방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의 풍경들: 저항과 포용
소설을 읽으며 주목한 부분은 폐허를 마주하게 된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세계다. 하인리히 뵐은 이들의 내면을 다양한 층위에서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감지되는 세계상을 전한다. 폭격으로 타오른 도시의 불빛이 너무나 강하여 건물 입구의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대목이나, 폐허가 된 도시의 재와 오물 냄새처럼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하며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한편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경험을 한 생존자들에게 도시 파괴의 충격은 오히려 일차적인 감각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6개월 된 아이가 미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은 사건 앞에서 슬픔조차 느낄 수 없었던 레기나의 모습이나, 창 밖으로 보이는 불타버린 도시의 폐허를 가리기 위해 창문과 커튼을 닫고 어둠 속에서 사는 모습은 결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설은 이렇듯 감각과 무감각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요동하는 생존자들의 분열적인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은 전후 생존자들이 이제부터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의 필수 조건이었다. 이런 구도는 세상을 그나마 무덤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대비하며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징집 명령이 담긴 엽서를 받기 전의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병이 되면서 이름을 버린 자의 모습과 대비된다. 곧 한스가 군인이 되기 전,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스와 군인이 된 후 제복을 입고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 자의 분열적인 모습을 병치시켜 바라볼 수 있다. 전시 상황의 군인, 곧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기계 부품과도 같은 존재, 비인간화되는 상황에 맞서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스가 탈영한 것도 결국 전쟁에 반대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저항 행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으며 무감각해져버린 생존자들에게 전후 새롭게 감지되는 감각에 대한 환기는 인간다운 삶으로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운명처럼 불쑥 나타난 한스의 등장으로 레기나는 잃어버렸던 감각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폐허 속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분열적인 구도와 이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망각과 기억행위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후 독일 사회의 생존자들에게는 폐허가 된 세계를 회피하고 싶은 집단의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의식과 회피의 결과는 과거 세계에 대한 집단의 망각 현상으로 이어진다. 하인리히 뵐이 이 소설을 집필한 행위는 현실을 마주대하고 집단의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기억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뵐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독일 작가 W.G. 제발트는 자신의 강연을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다’고 언급했다. 제발트 역시 문학을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한다. 이 소설은 독일 영토에 가한 연합국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6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발트는 일본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사망했던 희생자의 3배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했는데도, 독일 사회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희생자들을 추도하지 않는 모습에 더 경악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억할 기회마저 포기해버린 듯한 독일 사회, 희생자를 애도하지 못하는 독일 사회의 무능력에 대한 저항으로 문학을 선택한 셈이다. 그런 제발트이기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만이 유일하게 다시 폐허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본 모두를 사로잡았던 그 경악의 깊이에 근접하는 표상을 전해준다” 라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레기나가 집안을 청소한는 장면이었다. 레기나가 한스와 결혼을 약속한 후 ‘질서와 청결함을 추구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은 대대적인 폭격과 아이의 죽음으로 마비된 감각과 피폐해진 삶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였다. 벽에서 석회가루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과 목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한스와의 만남과 결합을 계기로 그녀가 잊고 있던, 익숙하던 것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기나가 잊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삶을 소망하는 몸부림으로도 읽혔다. 한편 레기나는 7시간 넘게 청소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바닥의 얼룩과 끊임없이 벽에서 석회가루가 떨어지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은 충동,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몸부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레기나는 바닥의 얼룩이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것’임을 알고 있던 것처럼, 나치가 구축해놓은 공고한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기나의 청소행위는 전쟁 전의 정상적인 삶,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사회의 모순들
소설을 막 읽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 숱한 가족을 잃은 공간에서 생존자들이 그저 덤덤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도무지 슬퍼할 수조차 없어.”(75면),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야. 이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냐”(76면). 아이가 죽었지만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레기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스가 나타난 이후 레기나의 삶에 차차 변화가 찾아온다. 한스와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비로소 울게 되었던 것이다. 레기나가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마비되고 상실되었던 인간다운 삶의 징후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레기나는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 그리고 한스는 성당의 사제로부터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를 받아온 저녁에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포도주는 예수가 흘린 피의 상징이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두 사람이 앞으로 삶을 함께 나누겠다는 피의 서약이기도 하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한 레기나는 행복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는다. 레기나를 안고 있던 한스가 레기나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서야 눈물이 ‘땀처럼 짜고 따뜻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결합을 계기로 생존자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삶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으로서 혼자 삶을 구하는 일조차 힘겨운 전후 독일의 폐허 속에서 한스가 레기나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은 소설의 한 사건으로서만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분열된 세계를 극복하는 저항 행위임과 동시에 전쟁 전에 누리던 일상의 삶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이 사건은 내게 소설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큰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한스의 독백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158면)
청혼하기로 결심한 일은 한스가 앞으로 평생 레기나를 보면서, ‘매일 매일, 수천 번 주어지는 숙제’처럼 수많은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는 일을 의미했다. 이 책임을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든 암시장이든 어떤 일이든지 감내하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랑(긍정)하고자 하는 운명애의 철학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스와 레기나의 결합은 전쟁의 참상, 폐허에 굴복하지 않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 레기나와 한스가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를 몇 가지 주목해볼 수 있다. 하나는 마멀레이드와 같은 음식이었다. 한스가 징집 명령에 응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날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음식은 빵과 버터, 쿠키와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였다. 빵과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는 한스를 만난 후 그를 위해 레기나가 준비해준 ‘커피와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으로 이어진다. 레기나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값나가는 물건인 카메라를 팔아 한스를 위해 신분증을 구해온다. 신분증을 받은 한스는 외출하여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 돈을 구하여 복귀한 한스를 보면서 레기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한스에게 건넨다. 마멀레이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레기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삶이 이어지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한스와 레기나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요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레기나가 한스에게 갑자기 반말 했을 때, 한스는 ‘이루말할 수 없는 뭉클함’을 느낀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말이다. 레기나의 반말은 무감각의 세계를 깨뜨려 한스를 정상적인 감각의 세계로 되돌리는 망치 같은 역할을 해준다. 전쟁 전에 익숙하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로서 말이다. 오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전쟁 동안 타지에서 일하고 돌아온 레기나가 지붕 처마의 물받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들은 이야기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리하지 않은 채 처마에 6년 간 매달려 있던 홈통은 도시에 가해진 대대적인 폭격에도 여전히 그대로 였던 것이다. 레기나는 전쟁 전의 일상을 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통해 기억해낸다. 레기나의 반말과 마멀레이드는 폐허에 나겨진 두 사람에게 인간다운 감각을 환기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치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사랑과 결합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희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독일 사회에는 생존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 또한 가로놓여있었다. 곰페르츠 부인이 죽은 이후 그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피셔 박사와 시아버지 곰페르츠가 보인 행보는 전후 독일 사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한다. 곰페르츠 부인의 장례식에서 두 사람은 검은 진창에 넘어져 있던 대리석 천사상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두 사람의 무게로 천사상은 진창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장면은 도시가 폭격으로 초토화 된 모습, 교회와 전체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부정, 두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목격했을 천사상이 가라앉으며 과거의 진실이 망각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와 같은 이들은 과거가 빨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자들일 것이다. 문학은 이에 대한 저항행위로서의 기능할 수 있음을 고민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레기나와 한스가 폐허 속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동조 세력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레기나는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 하는데, 수혈의 대상이 다름아닌 피셔 박사의 딸이라는 설정 역시 또 다른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대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생존자들에게 짐을 지우지만, 나치 동조 세력들에게 과거는 그대로 잊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 사회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과 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임을 경고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전쟁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W.G. 제발트가 말한 ‘시대의 증언’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한 셈이다. 무엇보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에서 마비와 인간적인 감각, 전쟁의 비인간화와 인간다움의 가능성 사이를 요동하는 전후 독일 사회의 분열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한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고통은 감각의 환기, 감각적 묘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 난다. 폐허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생존자들의 기억을 관통하는 매질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결합을 통해 분열적인 세계를 극복하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두 인물은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을 그대로 끌어안음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전후 불가항력적으로 경악의 깊이에 압도당한 생존자들의 마비상태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의 몸무게로 인해 진창 속으로 가라앉는 대리석 천사상처럼 시대의 상처와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 남을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이 주로 전쟁 후 떠돌게 된 독일계 유대인들의 삶을 따라가며 이들에게 깊이 패인 전쟁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천사는 침묵했다》는 《이민자들》의 독일인 버전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다만 뵐의 소설에 나오는 독일인들은 《이민자들》의 인물들이 마주한 상황처럼 고향을 벗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고향을 상실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검은 진창 위에 넘어진 천사상이 점점 가라 앉던 모습처럼, 상처를 입고 무감각해진 모습으로 삶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상실한 독일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제발트가 전후 희생된 독일인들에 대해서 애도 하지 않는 독일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은 자신의 소설에서 적극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두 작품 모두 전쟁의 참상보다는 전후 사회를 직시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인리히 뵐이 전쟁 직후 써내려나간 이 소설은 작가가 전후 독일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 전해주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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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았던 어제,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다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잠시 신호대기 중이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보시던 엄마는 차가 멈춰 있는 동안은 말이 없으시더니 차가 출발하자 조용히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왜 전쟁기념관이라고 했을까? 나는 항상 저 말이 이상했어.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 건가? 무슨 좋은 날처럼?” 나는 대답으로 적당한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운전만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쟁은 기념해야할 게 아니니까.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쇠에 생긴 녹은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치운다. 자전거 어딘가에 작은 녹이 슬었을 때, 그걸 내버려두면 결국 자전거 전신이 다 녹이 슬어 버린다. 녹슬어 폐물이 된 자전거처럼 전쟁은 녹이 되어 우리를 먹어 치워왔다. 전쟁은 사람에게서 나서 사람을 먹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말 수만 마디로 전쟁의 포악함을 설명한들 그것을 직접 겪어보는 단 몇 초의 순간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세우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들을 꾸준히 쓰고 발표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과 기억 속에 전쟁의 이러저러함을 간직하려 한다. 우리는 저토록 무서운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전쟁이 정말 두려운 이유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후에 남겨지는 것들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남고 싶지만, 살아남은 이후에 겪어야 할 일들이 더욱 혹독한 게 전쟁 아닌가. 심하게 녹이 슨 자전거는 아무리 닦아도 녹슨 흉물로 남듯이, 전쟁이라는 녹이 삼킨 후에 남겨진 폐허란 어떻게 바라보아도 폐허일 뿐 새로운 시작이니 희망이니 평화니 하는 빛나는 것들로 감히 덧칠할 수 없다. 그 폐허는 하인리히 뵐이 [천사는 침묵했다] 속에서 묘사한 청소하는 장면과 같다.
그녀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고투를 계속했고, 물 양동이를 부지런히 날랐다. 속으로는 무의미한 짓거리라는 걸 알았다. 청소를 할수록 지저분한 얼룩이 드러났고, 부스러기가 자꾸만 새로 떨어져내렸다. (중략)
전쟁 중에 아기를 잃은 레기나는 전쟁의 포화로 석회먼지를 뒤집어쓴 침실을 청소하려 나섰다. 그러나 양동이로 끝없이 물을 퍼나르며 침실 바닥으로 떨어진 먼지와 쓰레기들을 치웠지만 깨끗한 물을 퍼서 들어올 때마다 기이함을 느꼈다. 청소하지 않은 바닥은 고르게 어두운 색으로, 청소한 바닥은 도리어 얼룩덜룩해져서 추레하고 볼썽 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이 고역을 끝낸 후에 남는 건 녹초가 된 몸과 무의미한 짓거리를 했다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폐허는 치우고 치우고 또 치워도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 오물이다. 폐허가 된 마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스 슈니츨러는 서점 관리인 자격증에 합격하고 휴가를 즐기던 중에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그와 어머니가 함께 살던 집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주택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한가한 휴일의 그 날, 한스의 인생은 한스와는 상의도 없이 전혀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었다. 학교와 책 밖에 몰랐던 한스는 참전 중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아내와는 제대로 된 신혼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열차 폭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도, 가족도, 그가 알던 풍경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너진 건물, 불타서 식은 재, 석회가루와 돌 부스러기, 축축한 오물 그리고 냄새였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한스의 마음 속에서 비극은 현재진행 중이었다. 아니, 한스의 마음 뿐 아니라 모두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비극이 진행 중이었다. 하인리히 뵐은 전쟁 자체의 폭력을 고발하는 대신 전쟁 후에 남겨진 폐허의 이면을 면밀히 묘사함으로써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하게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다. 보통 사람들의 비극을 묘사하는 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건 오물 냄새다. 하인리히 뵐은 눈으로 그려지는 풍경 속에 눈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냄새를 입혀 전쟁 후의 폐허를 전달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면 신을 찾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신을 부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소식 앞에 신은 대체 무얼하고 있냐고 원망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 신의 말은 죽었고 그 침묵의 크기만큼 전쟁은 소란하다. 어쩌면 사람을 먹어치우는 전쟁이 그토록 시끄러운 탓에 신은 그 자신조차도 원치 않는 침묵 속에 빠지는 건지도 모른다. [천사는 침묵했다]에는 신을 머리를 진창에 처박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치당에 들어가 부역한 피셔 박사는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안전 속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지식인이다. 전쟁 중에 ‘인생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던 인물이며 전쟁이 끝난 후로는 만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서 역겨울 정도라고 독백한다. 그러나 억세게 운수가 좋은 이 사람 역시 오물 냄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태를 통해 구축한 재물을 넣어둔 금고를 여닫을 때마다 그는 돈에서 냄새를 맡는다. 사창가라는 개념이 떠오르는 냄새, 피 냄새, 오물 냄새.
이런 오물 냄새 속에서 한스는 레기나를 만나 서로의 아픔을 동감하며 두 번째 사랑을 결심하는 한편 나치 부역자인 피셔 박사는 천사를 짓밟고 선채로 승승장구한다. 폐허가 된 사람들과 청산되지 못한 전쟁의 흔적, 건물의 잔해더미에서 돋은 풀포기 같은 사랑. [천사는 침묵했다]는 전쟁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 그 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미약한 뿌리를 간신히 내린 풀꽃 같은 희망도 있지만 천사를 진창에 틀어박고 자신들은 고고하고 역겨운 삶을 이어가는 적폐도 있다. 비애로 가득한 전쟁의 참담함보다 우리가 더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이상으로 파괴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천사를 침묵했다]를 통해 청산해야 할 것은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그의 작가적 양심은 무척이나 단호하고 날카로웠고 이는 그의 작품과 사회 활동에 잘 드러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천사는 침묵했다] 말미에 실린 임홍배 교수의 작품해설은 작가 하인리히 뵐의 활동과 그의 작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 초반에 전후의 폐허문학을 돌이켜보면서 하인리히 뵐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언명한바 있다. 전후 냉전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았던 뵐은 독일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뵐의 문학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탐색은 그만큼 더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뵐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평생에 걸쳐 탐색하는 데에 빌린 도구는 문학이었다. 사람의 존재는 언어라는 형체를 입고, 이 언어가 직조되어 완성된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살아있다. 생물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생물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과 유형의 생물이 공존하여 생태계가 더욱 건강하고 보다 오래 존속된다는 개념이다. 문학의 생태계에도 생물 다양성이 적용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류의 문학이 공존하는 세계는 보다 건강한 언어들의 세상이지 않을까. 전세계의 다양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굴, 재평가하여 한국 문학계에 공급하고,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다시 그리려는 창비세계문학의 시도는 바로 이 생물 다양성의 개념과 통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려 했던 뵐의 작가적 지향점 역시 이러한 시도와 통한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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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069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천사는 왜 말이 없었을까. 뵐은 독일이 항복하던 바로 그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고향을 마주하게 된 탈영병 한스의 눈에 비친 도시는 거의 비현실적이다. 묘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데, 비현실적으로 처참하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주요 도시들은 실제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서 읽기를, 당시 연합군에 의한 폭격으로 드레스덴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만 해도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죽은 것보다 많다고 했다. 불타올라 잿더미만 남은 폐허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했기에, 고통을 견뎌야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 레기나가 죽은 자신의 아기를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보듯.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고, 먹지도 못한 채 연명하다보니 피로해서 겉잡을 수 없이 하품을 한다. 한스를 질겁하게 만드는 “절망적인 고역의 사슬”도 다름아닌, 끼니를 먹어야 한다는 문제다. “삼십년, 사십년 내내 매일 먹어야만 할 것이다. 매일 적어도 한번씩은. 수천번의 식사가 숙제처럼 부과되어 있고, 그 숙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 앞으로도 이런 끔찍한 싸움을 수천번은 더 치러야 할 것이다.” (p.149) 반면, 돈 버는 게 너무 쉬워서 권태에 빠진 인물도 있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치 당원이 된 피셔 박사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승승장구한다. 빵 한덩이가 없어 사람들이 굶어죽는 마당에 추기경을 위시한 가톨릭 교회가 (가뜩이나 종이가 귀한 시대에) 종교잡지를 복간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너무도 아이러니하다.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삶인가, 아니면 일반 민중들에겐 지독한 사치품이 되어버린 종이 텍스트인가? 작품 마지막에 곰페르츠와 피셔의 무게에 짓눌려 진흙 속으로 점점 파묻혀가는 천사상은 땅에 바싹 붙어 몸을 숨긴 병사에 비유되고 있다. 천사상은 추도사를 읽는 주교가 아무리 말을 걸어와도 대답이 없다. 기독교 정신을 들먹이면서 동시에 신을 모독하는 부류의 인물들이 천사상으로부터 대체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일까? 천사상은 수많은 병사들, 민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창에서 뒹굴지라도 기만자들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고향 도시로 돌아온 한스를 제일 처음 맞이했던 석고상, 그리고 나중에 다시 한 번 그를 배웅했던 그 천사 석고상은 고통스럽기는 하나 말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석고상에 대한 묘사가 미묘하게 변화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산업화된 성물 제작의 산물로서 죽은 것처럼 보이던 석고상이 첫만남에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면,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여전히 고통스러울지언정 정확히 한스를 향해 미소 짓는 듯 보인다. 시스템으로서의 종교가 민중을 외면하는 그 순간에도 신성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변함없이 함께하는 것이다. 구원은 교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버텨내고 이겨내고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찾아진다. 이렇게 의지할 데 없고 더이상 믿음을 갖기도 어려운 시대에도 한스와 레기나는 어쨌거나 계속 살아갈 것이다.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준다면 더욱 좋겠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전혀 허세가 없고 너무나 진솔하다. 어쩌면 다소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뵐의 소설을 읽으면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날들이 분명히 있고, 그래서 한번씩은 꼭 손이 간다.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