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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위인만화 13. 김수환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된 추기경
어른이 될수록, 친구가 된다는 것, 특히 나보다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둠어 안을 수 있는 친구가 된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체감하게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고자 했던 위대한 사람이기도 했지요.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한국의 역사에 동참한 ‘우리 시대의 양심’이자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에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민족사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은 카톨릭 교회의 최고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최고 어른으로서 종파와 계층을 초월해 널리 존경받았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고, 어려움에 처한 지식인, 학생,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은 1968년 무진박해 때 충청남도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했습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수환의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서중하는 배우자의 신앙만 믿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행상 등으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자녀 교육에는 엄격했고, 곧고 바른 성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남에게는 너그럽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소박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생활방식은 바로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33년, 열두 살이 된 김수환은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하여 처음 사제로서의 첫걸음을 떼게 되는데요. 난생 처음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김수환은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 신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 신부가 되기 싫은 소년이기도 했네요.
김수환은 어릴 적 읍내 시장에 가게를 차려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소년이었지요. 그런 김수환이 참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이끌어 준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인 공베르 신부는 어린 김수환이 사제가 되는 것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용기를 주었던 분입니다. 공베르 신부는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미소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이말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것에 대해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지요.
동성 상업 학교 교장이었던 장면 박사도 김수환 추기경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늘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게페르트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의 길을 가는 데 큰 영향을 준 분입니다. 1941년,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 상지 대학교에서 게페르트 신부를 처음 만났습니다. 게페르트 신부는 착하고 성실한 학생 김수환을 아껴 주었고, 제자 김수환도 덕망있는 게페르트 신부를 존경하였지요.
추기경이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으로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고위 성직자입니다. 추기경은 일상적으로 추기경단의 일원으로서 교황에게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조언합니다. 또한 교황이 서거했을때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4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거리낌 없이 만나고 강제철거로 거리에 나앉은 빈민들의 사정을 들어주었습니다. 또한 농민과 저소득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 책을 통해 사랑과 정의가 함께하는 사회, 화해와 일치 그리고 순리가 통하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랐던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을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공감하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