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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셉 엘 맨키비츠 감독이 1972년에 만든 영화 <발자국 Sleuth>을 보면서 나오는 이가 많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온갖 풍경을 다 담았다고 잘 된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칼국수나 막창 따위 한 가지 먹을거리를 팔지만 자리가 모자라 손님이 기다리는 가게를 보는 듯했다. 그런 가게는 온갖 것을 다 판다고 걸어놓은 가게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저렇게나 많이 만들어 팔다니...
이 영화는 영국 사내 둘이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데도 감칠맛이 넘쳤다. 두 사내가 서로 사랑한다며 잡으려 애쓰는 아낙네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지만, 마치 곁에 있는 듯이 그이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2. 탐정소설을 써서 이름이 났고 돈도 많이 번 앤드류 와이크(로렌스 올리비에)가 쇠날 저녁 6시에 마일로 틴들(마이클 케인)을 집으로 부른다.
늙은 앤드류는 묻는다. "자네가 내 아내와 같이 살고 싶어한다고 알고 있지만, 마침 마가렛이 다른 피붙이 집으로 가서 집을 비운 터라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네. 그 말이 맞는가?" 젊은 마일로는 거침없이 말한다. "예, 물론 선생님이 허락해주신다면..."
제 아내와 헤어져 달라고 하는 젊은이한테 성을 내거나 시샘을 할 것도 같은데, 앤드류는 곧장 나아간다. "안될 게 뭔가? (자네는) 사람도 좋아보이고, 무척 젊기도 하고, 말도 반듯하고..."
그렇지만 걱정이 된다는 듯 앤드류가 말을 붙인다. "참을 수 없이 피곤하게 하고, 가식적이고, 흥청망청 낭비하고, 자기 탐닉에, 교활하기까지 한 그이를...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큰 집에, 더 빠른 자동차에다, 도우미 두 사람은 있어야 좋아할 텐데..."
마일로는 돈 걱정부터 하는 앤드류를 젊은이답게 사랑이 있으면 안 될 게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글쎄요. 전 돈이 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렁뱅이도 아닙니다. 런던의 미용실은 잘 되고 있으며, 브라이튼에 있는 가게도 이제 적자에서 벗어났습니다...우리는 견디어낼 것입니다."
단단히 싸울 것으로 보인 두 사내가 오히려 서로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오늘 저녁 자네를 부른 것은 이와 같은 작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일세..." 그러면서 앤드류가 마일로를 붙잡고 털어놓는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서재 안 어딘가에 작은 금고가 있다네. 그 안에 값비싼 것들이 들어 있는데, 보험에 들어 있어. 이것들을 자네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훔쳐서 감쪽같이 사라지게. 그럼 자네와 마가렛은 그걸 팔아서 쓰고, 나는 보험금을 받아 테아와 같이 살면 되거든."
앤드류는 마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있는 듯 말한다. 25만 파운드 값어치가 되는 것이라 아는 장물아비한테 팔아도 17만 파운드는 챙길 수 있다며.
이젠 마일로가 하느냐 마느냐만 남았다. 옷차림이나 모습을 삐에로처럼 꾸며서 앤드류 혼자 있는 집에서 발자국만 남기지 않고 가져가면 끝이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마일로는 더 망설이지 않는다. 앤드류가 꾸민 대로 하려고 옷을 갈아 입고 나선다.
3.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앤드류가 사는 큰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었다. 그래서 연극 같은 느낌도 들 것 같았지만, 넓은 집이고 다른 느낌을 주는 곳으로 옮겨가는 탓에 연극 무대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앤드류와 마일로가 만나서 짜고 금고를 털게 되는 이야기까지 한 갈래라면, 마일로가 사라진 다음 경찰인 플로도 경감이 찾아와서 앤드류를 몰아세우는 꼭지들이 두 번째 갈래이며, 다시 앤드류와 마일로가 맞서게 되는 대목들이 세 번째 갈래로 나온다.
첫 번째 갈래는 마무리 꼭지에서 생각을 뒤집는 일이 벌어져 깜짝 놀랐고, 두 번째는 탐정소설을 쓰는 이와 경찰이 맞서서 창과 방패가 겨루는 모습을 짐작했으나 생각보다는 싱겁게 드러나는 듯해서 짜임새가 조금 헐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갈래에서 다시 가슴을 졸이게 하고 불꽃이 튀어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이런 짜임새라면 별은 다섯을 주고 싶다.
앤드류의 집 안에 있는 물건들도 눈길을 끌어갔다. 1층에 있는 뱃사람이나 원숭이 모습, 그림이나 사진들. 집 밖에 있던, 나무 덤불로 만든 미로...
4. 1940년에 만든 영화 <레베카 Rebecca>에서 말쑥한 젊은이로 나왔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 영화를 찍을 때 예순여섯 살의 늙은이가 되었지만, 조금 살이 찐 모습으로 쉬지 않고 카랑카랑한 말을 늘어놓으며 '연기란 이런 것이다'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집 안에서 '나인볼' 당구를 칠 때도 입으로 부르는 빛깔의 공을 어김없이 쳐나간다. 마지막으로 검은 공을 네 벽에 다 부딪쳐서 구멍에 들어가게 할 때는 그 때까지 보았던 영화 속 이야기는 잊고 당구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폴 뉴먼과 탐 크루즈가 나오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1986년에 만든 영화인 <컬러 오브 머니 The Color of Money>를 내가 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 마일로를 '골치 아픈 결혼보다 범죄를 택한 좀도둑'으로 몰아세울 때도, "찰스 1세는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셔츠를 두 개나 껴입지. '내가 만일 추워서 떤다면 적들은 내가 두려워서 떤다고 할 거야' 난 그런 비난을 받지 않겠어 했지" 하며, 단호한 늙은이 노릇을 능글맞으면서도 사나운 짐승이 먹이를 내리누르듯 매몰차게 해낸다.
감독은 두 사내의 이야기 속에 온갖 것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 감독의 바람을 로렌스 올리비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물 흐르듯이 잘 엮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사람인 마일로를 비꼬는 것이나, 미용실을 드나드는 그 나라 아낙네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며, 탐정소설을 갖고서 경찰들을 빗대는 말들이나, 세금이 많아서 돈을 많이 모을 수 없는 것을 투덜거리는 것까지. 탐정소설이 귀족들의 심심풀이 노리개일 뿐이라는 얘기는 마일로의 입을 빌렸지만.
이에 맞선 젊은이인 마일로 노릇의 마이클 케인도 맞수다웠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을 꿰뚫어보는 듯한 앤드류 노릇의 로렌스 올리비에에 맞서 처음에는 눌리는 듯했지만, 기가 꺾이거나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맞섰다. 1층 큰 거실을 끝에서 끝까지 오가면서.
앤드류가 좋아한다던 테아를 말할 때도 거침이 없다. "제가 듣기로는 잘 길들여진 지프와 같이 섹시하고 단정한 금발머리라 하더군요." 금고를 훔쳐가서 서로 좋은 길로 가자고 하는 앤드류한테 대들 듯 말한다. "그건 탐정소설일 뿐이라구요. 이것은 사실이고 현실이에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핏줄이지만 이제는 영국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걸 앤드류한테 당당하게 말한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는 당신한테 패배자이지만, 나부터는 아니에요. 마일로 집안이 이겨요."
로렌스 올리비에가 크게 울부짖으며 으르릉거리는 범이라면, 마이클 케인은 그에 맞서 뚝심으로 버티는 곰이라고 할까? 138분을 두 사람만으로 끌고간 감독의 끈기도 놀라웠지만, 서로 지지 않으려 온몸으로 치고 받는 모습은 칼이나 총을 들고 싸우는 영화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골랐다면, 이 영화의 맛은 아마도 많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자네가 미워. 자네의 알랑거리는 뺀질이 겉모습도. 무엇보다도 내가 싫은 것은 푸른 눈을 가진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란 거야. 살금살금 어리석은 아낙네들을 꼬드기는 미용쟁이.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촌뜨기!"
영화 속에서 늙어가는 앤드류가 제 아내를 빼앗아가려는 젊고 싱싱한 마일로한테 하고 싶은 말이지만, 영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아닐까? 자꾸만 제 밥그릇과 옆지기를 넘보려는 듯해서 미리 금을 그어두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는지...
만든 지 마흔 해가 지난 영화여서 그런지 디뷔디는 화면이나 소리가 그저 그렇다. 우리말 옮김은 그리 좋지 않다. 옮긴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옮기기 싫은 대목은 영어로 옮겨놓았다. 군데군데서 한글과 영어를 같이 볼 때엔 뭐 이런 거지 같게 옮겼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름난 영화이며 뛰어난 배우들이 나오는 것이라 그들의 뒷얘기를 보고 싶었으나 덤에는 없었다. 그저 예고편 하나만 있는 디뷔디였다. 오래 기다린 끝에 나온 녀석이라 덥석 사고 말았지만 아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