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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읽은 독자에게 큰나무의 가지치기처럼 뻗어 나가는 섬세한 이야기 맛을 선사한다. 병상에서 어머니와의 소원한 관계, 떠나온 고향, 인생을 조망하는 굵직한 선 아래로 이웃 주민과 마을과 가족의 세세한 이야기를 한편의 수채화처럼 색을 곱게 입혀 다채롭게 만든다. 여전히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을 거듭 다시 찾는 발걸음에서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결의와 고갈되지 않는 연민을 만날 수 있다.
1. 계시
소설을 읽고 “그냥 말을 하지 왜 가슴에 묻어두죠?”라는 갑갑증을 호소하는 이들을 가끔 본다. 비-문학적이라고 칭해도 좋을 독자 부류들이다. 소설과 심리학, 인간을 둘러싼 고민이 좋아 파고들다 보면 인간마다 비밀과 거짓말 혹은 침묵을 가졌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이 그를 불편하게 가두는 감옥이거나 공허하게 만드는 구멍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떤 이의 삶에선 웅숭깊음이 떠지는 우물이거나 심연의 바다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심리학이나 문학, 철학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현실적인 평가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 안의 어른아이를 비추며 소통 가능한 지점을 마련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서로를 마침내 알아보는 언어화에 이르게 한다. 어른아이(비밀)를 끌어안고 살다가 어느 계기에 다른 이에게 터놓게 됨으로써 마침내 이해받음과 동시에 순간이지만 절대 자유를 맛보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이를 먹고 어느 정도 객관화할 거리가 생겨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눈빛이, 비록 완전한 진심이 아닐지라도 무척 인간적이다. 젊은 날 부정했던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현상도 늘그막 생을 붙잡을 한 가닥 지푸라기가 되어준다면 기꺼이 잡아 볼 일이다.
2. 풍차
두번째 단편에서도 소설가로 성공한 루시 바턴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이 언급된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랜 주제이기도 한 미움과 용서, 그 애증 관계를 다룬다. 특히, 나를 품고 세상에 내보낸 어머니와의 갈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궁과 생의 맨홀로 남아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어머니라는 영단어 Mother에는 알 수 없는 타자 other가 내포되어 있다. 근원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인 것이다.
딸은 늙어감에 따른 신체적 쇠락과 정신적 붕괴 앞에 어린 시절의 잣대를 그대로 가져다가 엄마를 재단할 수 없다. 그녀 또한 사회의 옳은 표본대로 반듯이 살아오지 않고 관외이자 번외였기에 엄마에 대한 평가에 몰인정하게 굴 수 없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피부였다. 자신의 인생을 공유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76; 본문 강조)
물론 죽었어도 삶의 빛이자 등대이자 버팀목으로 자리한 ‘달’ 같은 사람도 있다. 의식하지 않은 사이 내 ”피부“이자 일부가 되어 나를 보호하고, 내 말을 먼저 청해 듣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 밖의 평가나 오해와 달리 함께함이 좋고 유의미한 사람의 자리는 굳건한 의자와 같다.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향수에 은근히 젖고 지금의 삶보다 자꾸 과거나 출발점으로 눈이 돌아간다. 과거와 옛 기억과 사람과 공간을 공유한 사람끼리의 마주함이자 겹침이 발생한다. 과연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고향에서의 옛날이야기가 하나의 공유점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같이 이야기할 소재와 기회를 놓치고 바람처럼 살다가는지.. 인간의 존귀함은 역사성, 즉 왔다감을 넘어 여전히 그럼에도 이어지는 오늘의 몸과 시간 안에 있기에 기억과 다시-말하기의 창조적인 힘은 위대하다.
얽히고설킨 타래를 성숙한 어른의 손길로 풀어보는 노력과 자세, 그리고 삶의 첫사랑보다 마지막 사랑의 가능성도 은근히 열어두며 ‘곁’사람의 자리를 고쳐 쓴다. 루시 바턴의 여자조카와 오빠를 통해 이 또한 살아남아 삶을 지속했기에 가능한 부분임을 피력한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즉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목소리가 지피는 모닥불은 과거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을 한자리에 모아 달리 재생한다. 재점화의 손길만이 유한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의 삶을 위로하며 가치를 세운다.
3. 금간
개인적인 기분 탓인지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린다의 삶이 금간 상태로 너무나 위태롭게 끝난다. 딸과 게스트룸 여성 이용자에게 그녀는 남편의 성범죄를 알면서도 묵과하여 무지하고 양심과 사태 파악과 성인지감수성이 없다는 힐난을 듣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린다는 그의 곁에 남아야 하기에 다른 여성들을 탓하며 불면증과 우울증 뒤에 숨어 현재의 분노를 방치한다. 그녀가 이토록 꼼짝달싹 못하는 데는 어른아이가 몸 안에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어서다. 그녀의 기억에는 감정에 솔직해져 마음을 따르다가 아버지의 집과 공동체의 안전한 울타리에서 영구 제명된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다. 남편이나 방문객들의 예술적 성취나 명성과 달리 그녀의 삶은 남편에게 붙어 떨어질지 모른다. 세트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녀가 이렇게 된 데에는 자기 본위에 충실해 살았다가 마녀로 낙인찍힌 어머니의 몸에 대한 기억이 중심에 있다. 철저히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 어떤 이해와 보호도 없이 거리의 ‘떠도는’ 여자로의 전락에 대한 두려움이 상흔으로 패여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바가 전부이고, 그 안에서 버둥거린다. 완전하고 영원한 집이나 가정은 거의 없음에도 그런 환상을 갖고, 스스로를 옥죄고 가둔다. 다른 여자들과의 연대도 어려우니 혼자되기의 두려움이 지배한다. 안타깝지만 그녀는 철저히 혼자이며 고집스럽게 그냥 그렇게 떠밀려갈 수밖에 없다. 자기 삶도 아닌 남(편)의 삶에 기대어 부유할 뿐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가엾은 린다가 스스로 터져버리는 폭탄물만은 제발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과 반복 속에 그녀는 사람들의 민낯과 실체를 보았을 테고 자신을 던져 진실을 들추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묵과도 그녀의 선택인 만큼 그와 사는 동안 그에 따른 책임(고립)을 져야 할 것이다.
4. 엄지 치기 이론
<엄지 치기 이론>은 통각이 심하고, 갑자기 떨어지는 온도와 낙엽처럼 쓸쓸한 뒷모습을 아득히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마지막 생의 모습은 어떨 것 같습니까? 라고 묻기 때문이다. 찰리가 느끼는 죄의식과 도둑놈이라는 가책은 과연 그만의 것일까. 왜 그는 아들처럼 가족과 어울리는 남편이자 부드러운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호텔에서 콜컬과의 관계에나 환상을 품고 의지해온 것인지 상세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아내와 불화했고 이제 사람들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참전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깊은 잠을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실수로 엄지를 내리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 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 - 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 - 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137; 본문 강조)
그는 오늘 진짜 절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내연녀가 마지막으로 큰 것을 요구하고 관계가 막을 내릴 것을 예감한다. 끝의 예감은 틀리지 않고, 머물 안식의 공간을 찾지 못한 그는 민박집을 자신이 들어갈 최종 관으로 준비한다. ‘인격’을 운운하는 여자는 그를 목돈이 필요할 때 지갑 삼을 남자로 찍어 접근했던 잠정적 진실 앞에, 그는 휘청대거나 쓰러지지 않고 무심한 척 굴지만, 엄지 치기처럼 격렬한 고통이 한밤중에 그를 덮칠 것이 예상된다.
하지만 창문 왼쪽으로 보이는 단풍나무 꼭대기에는 나뭇가지들이 분홍색이 감도는 노란 잎 두 장을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11월까지 붙어 있었을까? 찬란한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나무 바로 뒤에서 비치고 있었다. (128; 필자 강조)
찰리는 어떻게 그런 추방당하고 단절된 삶에 매달려 버텨온 것일까. 이제 중력과 예비됨에 자신을 내맡긴 채 심장마비나 뇌졸증을 기다린다. 열여덟의 첫사랑과 심던 구근의 기억이 그의 마지막에 초록빛을 더해 그래도 덜 쓸쓸하다. 우리가 순수하게 진짜였던 시간으로 그는 되돌아간다.
5. 미미시피 메리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갈등이나 문제없는 가정이 실재하지 않고, 특히 오직 하나의 사랑만 남기기란 스스로 앞의 것을 지우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에는 빛을 잃고 사라지며, 실타래를 푸는 과정에서 몰랐던 부분을 조금 더 알게 되며 놓쳤던 진실의 파편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둠과 미지와 알 수 없음의 항해 한 가운데 불을 밝힌 작은 배가 보이는 순간이다. 많은 분노와 침묵과 쏟아냄(소리침) 뒤에 어렵사리 떠오르는 진실. 전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런 순간의 감동과 여운은 진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마지막에 떠올리며 마음이 환해지는 웃음이 있다면 괜찮은 사이인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엄마와 특별한 사이였던 막내딸은 엄마의 돌연 사라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마도 노년의 부모를 언제든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소유와 집착의 마음이 컸을 것이다. 같이 하고 싶은 마음과 잠을 재워주던 어린 날 엄마의 모습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만큼 미움도 커지고 마음이 닫힌다/다친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배반을 탓하며 누군가의 고정된 희생을 바라는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마음이 남아있다.
어렵사리 찾아간 타지에서, 죽음의 자리이기도 한 침대와 엄마가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된 딸은 여자로서의 엄마의 삶을 “개척자”로 재호명한다. 엄마는 이탈리아라는 공간과 장소, 문화 이동을 통해 조건이나 남의 시선 따위 살피지 않고 마음가는대로 투명하게 살 수 있었다. 유럽권 문화는 자아존중감이 뿌리 깊어 현상을 자기 말로 옮기고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바다가 보이고, 비록 낡았지만 높은 천장과 열린 창들 사이로 지난날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며 잔잔하게 퍼지는 사랑은 전 남편을 향한 그리움으로 변해 인간적인 연민과 안부 인사를 자극한다. 엄마의 불륜을 인간적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인식의 전환(이해와 용서)이 싹튼다.
6. 동생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만, 그 평온함과 결속이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다시 말해 가을의 햇살에 무르익을 확률은 높지 않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딛고 자수성가를 했든, 고향을 지켰든 저마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나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지만, 그곳은 일순 과거로 나를 끌고 가 어린 나를 비춘다. 괴롭고 감당하기 힘든 되돌림이다. 심하게 감거나 돌리면 줄이 끊어지고, 그렇게 돌린 시간의 재생은 매끄럽지 못하다. 이래저래 튕기며 우리는 팽팽함을 견디지 못해 감정적으로 무너진다.
많은 가족이 옛이야기를 함께 공유할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관계가 종료되는데 삼남매는 과거의 그림자를 거두고 ‘햇살 아래’ 그들의 과거와 오늘을 교차 응시한다. 사람을 품었던 집만이 덩그러니 과거를 증언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오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엉성한 대로 그렇게 ‘꿰어’지는 현재를 맥없이 바라볼 뿐이다. 뚱뚱하고 립스틱을 짙게 바른 언니는 외려 씩씩하고 당당한데, 유명작가로 성공한 동생은 한없이 작고 약하다. 잔뜩 당긴 고무줄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늘어짐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동생의 하얀 차는 아직 더 남은 이야기의 가능성, 즉 백지를 상징하며 앞으로 쓰일 “진실한 문장”을 고대하게 만든다.
7. 도티의 민박집
민박집이나 하숙집 운영은 여성이 사적/공적 영역의 경계에서 할 수 있는 노동이자 다양한 사람을 대적하는 사업 수완을 요구한다. 살림과 청소라는 집안일의 확장판이지만 이를 통해 자기만의 수입을 얻는다. 이혼한 도티도 홀로 삶을 영위할 수단으로 ‘집’을 활용한다.
앞서 읽은 소설에서 찰리의 결말이 궁금했던 터라 잔뜩 긴장하고 읽었다. 짧게 머무는 뜨내기 관계는 다시 못 만날 것을 전제로 하기에 철저히 이용당하거나 특별한 연결로 남게 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는 두 가지로 선명하게 나뉘는데 이때 상처와 배반, 모욕은 다른 좋은 사람과의 추억으로 씻어내고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이 일을 지속하면서 내가 상처받거나 다치지 않고 망가지지 않는 방안이자 묘책인 것이다.
더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배경으로 밀려난 노년의 의사 부부를 통해, 퇴직 후 과잉 저택(“셸리의 페니스”)은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영을 투영한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뒷담화가 과하게 분리되고 다른 경우, 사실을 알게 되면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때때로 도티처럼 상대의 생각과 입을 단속시킬 수 없을뿐더러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음에도 성기가 들어간 욕설을 듣고 수치심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통의 메아리”를 알아듣고 손잡아주며 구원하는 뜻깊은 날도 있다.
8. 눈의 빛에 눈멀다
가족이더라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결정적인 순간 앎을 포기하고 눈더미로 덮을 때가 있다. 자유롭게 무대를 떠돌며 살던 여인은 할머니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가 있는 고향을 재방문한다. 이전과 달리 고향집은 턱없이 작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참을 수 없는 연민”을 부추긴다. 암암리에 알고 있던 사실, 아버지의 동성애 성 정체성과 그로 인해 수치심으로 얼룩졌던 과거사를 가족들은 열어 보인다. 서로 교유하지 못하게 가로막던 해묵은 침묵의 장막이 걷힌다.
어린 애니는 아버지가 가족이 아닌 다른 것에 더 눈길을 주고 마음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줄곧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가정’이 제일 소중하다는 아버지의 말과 꽉 잡은 손은 눈 덮인 들판의 반짝임과 함께 눈부신 이미지로 그녀에게 남는다. 가족구성원, 특히 부모와 형제자매를 처음부터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주어진 가족은 날씨처럼 “피할 수 없는 식구”인 것이다. 아버지가 딸의 숲속 출입을 막은 이유가 밝혀지고, 불현듯 주인공은 유별난 삶을 그만 접고 “평범해지고 싶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내 집과 남편과 아이들과 정원이 있는 삶은 가까운 듯 멀리에 있다.
9. 선물
앞의 소설을 읽은 독자는 민박집 도티 아주머니에게는 사업가로 성공한 오빠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크리스마스 캐롤> 공연을 본다. 종일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고 끼니도 거른 채 가족과 함께한 자리이다. 그는 왜 허기진 상태를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는지 답답하다. 이해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침묵으로 감수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을 터놓을 정도로 가깝지 않은 거리감을 대신한 설정일까.
날이 선 그는 공연에 도통 집중할 수 없고, 주연배우의 형편없는 연기에 짜증이 난다. 무대에 청춘을 바치고 동성애자로 살아오면서 온갖 오해와 질타를 받아 지친 영혼이 눈앞에 서있음을 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손녀가 두고 온 조랑말 인형을 찾으러 간 곳에서 우연히 배우와 독대한다. 어둠 속에서 주인공은 부자인 삶에서 오는 수치심과 딸아이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똑바로 보게 된다.
겉은 남부러울 게 없지만, 그는 가난한 지난날을 홀로 집어삼키며(아내는 남편의 극빈한 출신을 자식들이 모르길 원한다) 외롭고 고갈된 상태이다. 문양은 다르지만, 이들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데칼코마니인 셈이다. “다정한 말”이 더이상 오가지 않는 권태로운 일상 속에 낯선 배우의 강요(“당신은 누구죠?”)로 털어놓는 속내의 결과,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 그는 외형적으로 화려한 경지에 오르지만, 그의 본성은 사업가 기질(속임)과 달리 선하고 양심적인 사람에 가까운 것이다. 혼자 지내는 동생의 크리스마스에 가닿는 마음 줄기처럼 그에게도 다시 딛고 일어설 굳건한 땅과 함께 다 늙은 어른이지만 손에 쥘 ‘스노볼’이 절실했던 것이다.
나가며
작가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왜 그렇게 과거에 연연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얽매이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 고향에 관한 이야기에 천착하는데 이것이 지속 가능한 문학 주제일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선택권 없이 무방비 상태로 왔다가 가족이라는 작은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 작가의 말대로, 먼저 흡수하고 배움은 나중에 따라오기도 하지만, 성장과 함께 보는 눈과 맺는 관계망도 넓고 깊어진다. 나이 먹어서도 망원경 하나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작지만 소중한 우리네 인생을 지도처럼 펼쳐 보인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편안한 안식처나 말벗 한 명 제대로 갖기 힘들다. 그런 외로움과 소외와 단절과 실패 사이로 서로가 인간미를 발하는 섬광의 순간을, 서로의 삶에 대한 암묵적인 이해와 기도하는 마음과 끄덕임(수긍과 응원)을 포착해 전한다. 겨우 사느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가 걸어온 길, 저만치 멀어진 처음 출발선, 그리고 혼자인 듯 함께 이뤄나가는 꿈의 조력과 연대를 루시 바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꾸준히 다시 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처럼, 매일 같으나 다른 일기를 쓰듯 작가는 소설로 삶의 본질과 준엄한 의미를 성실히 고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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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소설. 타인에게 상처입히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도 종국에는 버티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타인에게 올바른 판단과 괜찮은 조언을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묵묵히 들어주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요즘, 이 책을 읽고 타인에게 결국 필요한 건 옆에 있어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책에도 말했듯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정말로 그렇다.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얼른 읽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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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내게 소중한 작가가 되었다. 두 번째로 펼치게 된 작품은 제목마저도 주목하게 만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로 몰입했다 빠져나왔다를 아홉 번 반복하면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는데 그 아홉 번이 한 순간에 지나간다. 아마도 작가는 씨실과 날실을 불규칙하게 교차시키거나 종횡으로 시간을 타고 넘으며 하나씩 풀어 들려 주기 위해 이야기 전체를 치밀하게 조직했을 것이다. 한 인물이 다른 꼭지에서 등장할 때면 이전에 만났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삶 속으로 한 발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들여다보고 들어보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에 있던 같은 색 실을 찾아내게 된다. 인물들의 슬픔이나 염려가, 희망이나 위로가 내게로 와서는 묵직하게 머무는 이유다.
작은 타운에서 평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이미 성장했고 중년을 넘어서 다 자란 어른들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 우리는 자라게 되는 것이, 어른스러워지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런 척 할 뿐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 받아서 각 개인은 눈물을 머금은 ‘어른 아이’로 덩치는 커졌지만 그 내면에 우는 아이를 지닌 채 안간힘 쓰고 있음을 발견한다. 패티와 안젤리나는 어머니들이 떠났다는 공동의 상처로 친구가 되었다,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늘 붙잡혀 있던 안젤리나의 남편은 ‘네 엄마랑 살아랏!’ 말을 남기고 그 마저도 그녀를 떠나버린다.(들어주고 떠나지 않는 내 남편에게 잊기전에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다)
패티 역시 어머니로 인해 여린 감수성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지만 늙고 사그라든 노년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그녀다. 계부의 폭행에 오래 시달렸던 세바스찬은 패티와 결혼 후 너무 짧은 행복만을 누릴 수 있었다. ‘가정-그전에는 그들 모두 호수 위의 보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은 사라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뭔가로 변해버렸다.(75쪽)’ 유년의 상처가 날카로운 손톱이 되어 내내도록 삶을 할퀸다.
베트남전 외상후 장애로 토미의 형은 죽음에 이르고 켄 바턴이나 찰리 매콜리는 고통에 흔들린다. 찰리는 고통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결핍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절망한다. 바턴의 세 자녀가 다시 모이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현명하고 강하고 의연했던 루시 바턴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공항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 오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중년의 주름살이 생긴 중년의 얼굴이었음에도 그들의 얼굴은 아주 어리고 슬퍼 보였다.(304쪽)’ 고 애니는 말한다. 첫 번째 잘못된 단추를 찾아내서 비난하고 공격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비틀리고 버려진 시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따스함과 희망을 말한다. 슬픔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듯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꿋꿋이 버티는 것 만으로도 박수 받을 일이다. 이에 더해 불완전함과 상처가 간직한 아주 약간의 이해와 힌트, 공감이 당면한 현재로서의 최선을 선택하게 한다. 바턴 삼남매가 만나고 ‘비키, 지금 보면 우리가 그렇게 나쁘게 된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246쪽)’라며 동생 곁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햇볕 속에 앉아 있던 찰리와 패티, 도티의 민박집에서 서로 위로받았던 찰리와 도티, 앤젤리나가 이탈리아에서 만난 어머니의 개척자같은 아름다움, 애니 에플비가 ‘열정’이라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장면 그리고 극한위기 가운데 얻은 에이블의 ‘모든 것은 가능하다’는 통찰까지 자연스럽게 증명해낸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선택하고 취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며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을 통해서 나아갈 방향까지 그려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자유와 안식을 누릴 시간이다.
-우리 모두 너나 없이 엉망이야. 앤젤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랑은 불완전해. 앤젤리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75쪽) -그가 눈을 떴고,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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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은 후 오랜만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작을 읽었다. 그녀의 소설인지 모르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란 제목을 접하면 자기계발서인가 싶은 작품.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 앰개시를 무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인공들을 연작 소설로 펼쳐냈다. 아홉 편으로 이루어진 단편 목차에는 ‘무엇이든 가능하다’가 없어서 그 의미가 무엇일지, 읽는 내내 기분좋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고군분투 孤軍奮鬪. 우리 각자는 인생에서 자신만의 고군분투를 거친다. 소설에서는 삼십대 후반부터 중년, 노년의 인물들이 인생의 전투를 맞이하고 대처하는 모습을 그린다. 누군가는 피해 다니다가 큰 파국을 맞고, 누군가는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하며, 누군가는 그 경계에서 주저하며 서성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유년과 청년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간다.
‘올리브 키터리지’보다 내게는 훨씬 재미와 몰입감이 있었다. 불쑥 등장하는 비극적인 사건에 깜짝 놀라고, 오랫동안 오해했던 일과 사람을 비로소 이해하는 순간에 뭉클했다. 판단하고 평가한다면서 누군가를 낙인찍어 버리고, 반성과 자책을 한다는 게 평생 죄책감을 이고 사는 사람들. 장난처럼 즐기려던 한순간의 일탈이 걷잡을 수 없는 범죄로 귀결된 이들. 한 도시를 배경으로 제한된 커뮤니티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가지고 스트라우트는 미국적인 이야기를 완성했다. 연약하고 어리석고 위선적이며 기만적인 캐릭터들.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면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고 거리를 둘 수 없었던 건 전적으로 작가의 세심하고 예리한 표현력 덕분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Anything is possible’ 라는 희망적인 선언은 이야기들 속에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차츰차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을 주었다. 연작 소설들에서 어떤 이야기는 냉소적이고 어떤 이야기는 여지를 남기며 어떤 사람들은 극적인 구원의 피니쉬 라인에 끝내 당도했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사람도 있지만, 묵묵히 사려깊게 곁에서 도운 사람들-가족, 이웃-의 선한 개입으로 회복되는 인물이 더 많았다.
같은 인간이기에 서로를 연민할 수 있었고 인내와 용서를 통한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자신만의 싸움은 결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고 스트라우트는 전하고 있었다.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와 반복되는 고통에 놓인 사람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가능하다’고 바라본 엔딩은 바로 이 소망이었다. As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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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이책은 아홉개의 단편들로 엮여져 있으며 그 단편 단편은 루시 바턴이 언급되어 고리를 이루고 있다. 마치 90년대 MBC에서 하덙 "테마게임" 이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스타일. 대부분 지지리 궁상 맞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다가도 사랑을 받을수 있다는 내용.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그거슨......바로 사랑!!! 희망아닐까???? 일찌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믿음, 소망, 사랑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셨다. 사랑은 인류의 근원이라 할수 있기 때문에 그런말을 하셨을터... 그렇다 우리 모두 사랑을 하자.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불금인 오늘밤 이태원으로 갈것이다. 그곳에서 나약해져가는 젊음에게 외칠것이다. "HEY GIRL~ 누구랑 오셨어요!!!!!" "몇살이에요?" "나가서 한잔 더 하실래요? 오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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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내 이름은 루시 바튼에 이어서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입니다 첫 번째 책을 읽고 반하게 됐는데 이번 책도 실망을 안 시키네요 이번에도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 있는 문장이 너무 공감가고, 좋았습니다 제일 좋았던 부분 발췌를 남겨봅니다 <에이블에게 삶이 수수께끼인 부분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린 후에도 그것을 지닌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환각지 같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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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첫 책.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항상 인생에서 모순되는 순간들을 발견하거나 마주할 때면 쉽게 비난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흘러가고 지나서야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될뿐. 그것도 쉽지 않다. 각자의 연민이 있기에 타인을 이해하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 <무엇이든 가능하다> 책을 읽고 나는 세상을 일관된 시선으로 보고 평면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또 느꼈다. 결국 나 포함 입체적이고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다 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는 사람을 오히려 알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또, 타인이 무심코 한 말이 아주 오래도록 상처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 나도 피해자이면서 아마 가해자가 되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비난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일관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애초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평면적인 관점에서 누군가를 이해 못한다고 말하거나 생각하지는 말아야지, 라고 또 다짐했다. 최은영 작가님의 추천사처럼 우리는 불완전함 속에서 사랑하며 살아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타인을 비난하기보다 이해하기가 더 쉬운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치유를 말하는 책이었다면 이 책은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상처와 폭력과 고통이 있어도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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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스트라우트는 언제나 우리 삶의 근원에 자리한 외로움과 인간의 존재 조건이 지닌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이 책에서 작가는 한층 더 예리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내적인 갈등을 조명한다. 삶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온 남자는 인생의 말년에 어쩌면 진실은 지금껏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 무너지고, 부유하고 풍족한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배우자의 추악한 비밀은 끝없는 번민과 고통을 낳으며, 또다른 이는 전쟁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저지른 끔찍한 일들로 인해 순수에 대한 혐오와 동경을 모두 지닌 채 방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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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계시」, 「풍차」, 「금 간」, 「엄지 치기 이론」, 「미시시피 메리」, 「동생」, 「도티의 민박집」, 「눈의 빛에 눈멀다」, 「선물」이라는 아홉 편의 단편 소설로 채워진 소설집이자 연작 소설집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이미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훌륭한 연작 소설집을 발표한 바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내처 두루두루 읽기 시작한 곳이 바로 그 연작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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