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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내면 깊숙한 곳에 자신만의 작업장을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든 마음대로 그곳에 들어가 자유와 고독의 성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몽테뉴
세 개의 의자
당신의 동반자는 누구인가요? 이렇게 말해보니 어느 유행가사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습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사랑하며 사는 게 훨씬 좋으니까요. 사랑하며 싸우거나 화날 때가 있더라도 사랑하는 게 좋다는 노래. 각박한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유행가를 부르면서 비교적 삶을 쉽게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당신의 동반자는 바로 “사랑”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나에게 동반자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몇 발자국이라도 사랑에 가까워지려고 할 때 나의 발걸음은 정반대로 몇 발자국이라도 멀어지려고 했습니다. 이유인즉,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빌리자면 ‘고독’ 만큼 좋은 동반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흔히 외롭다고 하여 외로움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독이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릴 때 외로움은 혼자만의 슬픔에 빠집니다.
윌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를 따라 숲 속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복잡한 도시주의자가 아닌 단순한 자연주의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도시주의가 킬링(Killing)이라면 자연주의는 힐링(Healing)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우울한 사람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끝없이 마음이 약해져 숲 속에서 고독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온갖 상처로 헐거워진 마음 위로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오두막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올리비에 르모의 『자발적 고독』을 흥미롭게 만나면서 소로의 오두막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소로의 오두막 내부는 소박합니다.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 방 안을 하나하나 채우고 있습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순간, 의자를 다시 봤습니다. 놀랍게도 의자가 세 개가 있었습니다. 의자가 한 개 있으면 몰랐을 텐데 세 개나 있으니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는 고독, 다른 하나는 우정, 마지막은 사회를 위한 의자”였습니다.
거짓된 고독
고독은 여러 가지입니다. 세상과 복잡한 인연을 끊고 자연으로 떠나는 고독이 있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은둔하는 고독이 있고, 세상과 동고동락하는 고독이 있습니다. 고독이 혼자만의 즐거움을 가꾸는 마음의 텃밭이라고 하면 사람보다는 꽃과 나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요. 우리는 꽃과 나비와 말싸움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을 해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독은 제로섬 게임 같습니다. 만약에 제로섬 게임을 자신과 하는 것이라면 고독은 지하생활자가 되고 맙니다. 때로는 사람을 혐오한다는 따가운 소리를 듣게 됩니다.
고독은 삶의 고단함에서 벗어나는 혼자만의 치유 방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홀로 있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인간으로 끊임없이 생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곧 개인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치열한 숨 가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니 홀로 있음으로 해서 예전과는 다르게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행을 떠나보면 이상한 걸 발견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멀어질수록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 고독과 가까워지니까요. 고독은 어떠한 규칙에서 벗어나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은 자유입니다. 굳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고독보다 더 좋은 천국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홀로 있음이 ‘거짓된 고독’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된 고독이란 홀로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고립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사회에서 규칙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잘하고도 억압적인 규칙이 우리의 삶을 파놉티콘처럼 감시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금방이라도 질식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신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고독은 심폐소생술처럼 아픈 마음을 다시 가슴 뛰게 합니다. 문제는 홀로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개인주의자’라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사회로부터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것을 느낄수록 고독에 대한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고독한 사람이 홀로 있음을 선택한 만큼, 사회로부터의 도망이 최선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발적 고독』을 읽으면서 진짜 고독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이 서로 리듬감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게 되면 고독의 장점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사회와 몇 발자국 거리를 두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를 좀 더 관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회의 불합리한 모순들을 관찰하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세계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회를 관찰하는 우리에게 아무리 돈이 많이 있다고 해도 내면의 자유인 고독이 없다고 하면 정말이지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자유
만약에 하나뿐인 지구가 사람들만 사는 곳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自然)이 없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은 공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공기 없이 살 수 없음에도 정작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공기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만을 위한 삶의 결과 지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절망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괴물이라니.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책임 대신 자기계발을 하라고 하지만 이것으로 사회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자발적 고독』을 통해 ‘고독한 산책자’가 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정의로운 인간과 고독한 산책자는 서로 공감하기 힘듭니다. 아무래도 고독한 사람은 사회의 무능력자내지 반항아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인간은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고독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 고독한 사람의 진면목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고독한 사람이 자연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는 것은 자연을 감탄의 대상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완벽한 자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어떻게 정의롭게 살 수 있는지를 관찰하게 되며 다시 사회로 한 발자국 다가섭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한 자유의 미덕이며 양심적 인간으로 사는 탁월한 지혜가 아닐까요
되돌아보면 웰빙(Well-bing) 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재밌게 사는 방법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며,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삶이 불투명하다보니 우리 마음 또한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회복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내면의 나침반, 고독을 사용해보라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삶에서 잠시 옆으로 한발자국씩 물러난 마음에 오두막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두막에다 세 개의 의자를 놓아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서도 함께 있으려는 마음. 오두막의 세 의자는 고독의 거대한 삼각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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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끝과 구월의 시작점에서 읽던 소설들을 멈추고 철학서를 선택했다. 제목 ‘자발적 고독’은 스무살 이후 줄곧 쫓고 매달려온 개인적인 로망이기도 하다. 이십대에는 낭만적이고 철든 느낌을 주던 표현이, 이제 사십대 중반인 내게 대입하려니 여름에서 가을로 홱 넘어간 듯 가슴이 시리고 마음이 씁쓸해진다. 여럿이 함께 유연하게 어울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아직도 자발적 고독을 탐하다니. 그러면서도 가히 나답다 싶다. 오랜만에 쉬어가는 시간을 나에게 주는 안식년으로, 자발적 고독으로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이 큰가보다.
가족 중 한사람이 타인의 언행에 무너져 내렸기에 나는 의연 중에 나를 지키는 것이 삶의 첫 번째 책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면서도 남의 시선이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 지금까지 초연해지는 연습을 무던히 해온 듯싶다.
<자발적 고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호숫가 오두막살이를 가장 중심에 둔다. 고독과 사회, 두 상극 사이에 우정을 슬그머니 배치한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책상이 창문과 마주해 있고 건너편 창문가에는 침대가 놓인다. 그리고 여기 저기 놓인 의자 세 개가 소로가 머물던 오두막의 재연이다. 사회로부터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찾아간 곳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새로운 힘을 얻었을 것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방금 떠나온 사회를 다시 낯설게 면밀히 관찰하며 비판의식의 날을 세우고, 일어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혹자는 월든 호수에서의 2년이, 인근 어머니 집을 드나들며 쿠키를 즐겼던 그가 과연 자발적 고독의 아이콘이자 미국적 고립 신화가 되어도 되는지 의구심을 품는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자연으로의 ‘옆으로 이동하기’는 다시 돌아오기를 가정한 것이었다. 문명과 현실 사회를 잘 살아내기 위한 자연으로의 잠시 회귀였던 셈이다. 저자는 소로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을 반박하며 소로의 편에 선다.
고독과 고립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귀족사회가 말하는 ‘인간혐오자’는 지금 상통하는 의미와 다름을 확인했다. 과거에는 귀족의 무리와 어울려 사교활동을 하지 않는 자, 즉 한쪽의 시선에서 지극히 이방인인 상대를 칭하는 호칭이었다. 따가운 눈초리와 매서운 입방아를 등지고 단독자로서의 사색과 고독을 택했던 사람(루소, 몽테뉴 등)은 당시에는 기벽을 지닌 반사회적이고 비사교적인 몰상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으나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앞서 온 귀인이다. 자신의 소신과 신념대로 고즈넉한 홀로 있음을 택했으니 말이다.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가게 ‘뒷방’으로 언급되는 자연 속에서 혼자 있는 공간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와 모험가, 작가 등이 남성 위주라는 점이 다소 아쉽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과거에 세속의 삶을 떠나 세상 끝점인 남극이나 북극으로 향했던 사람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인내하고 살아낼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 자신을 풀어놓고, 어디까지 가고 참아낼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춥고 허기지고 외로운 극기로 자신을 내몬다. 이런 모험과 극기, 낭만은 남성이나 익숙한 남성성과 맞닿아있다.
시끄럽게 볶아대는 세상은 사람을 전체로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로그아웃’이 웬만한 의지가 아니고선 어렵다. 오롯이 나를 향하는 시간,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홀연히 벗어나 자유롭게 ‘깊은 숨’을 내쉴 틈이 마련되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고독한 자들은 떠밀리는 시간의 회오리에서 탈출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경험했던 잔잔한 리듬과 평온한 박동을 되찾는다. 내 순연한 의지와 노력 없이는 거칠고 인색한 사회나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오기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초월적인 이념을 막연히 추구해왔다. <자발적 고독>은 ‘민주주의’란 홀로 철저히 지각 있는 개인이 다른 이와 연대할 때 비로소 완성돼 빛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누가 봐도 헌법 정신과 정의로움보다는 실리와 효용가치를 더 높이 산다. 현재 힘을 쥔 자들이 소위 말하는 범법행위를 골고루 누려와 그것의 옳지 않음의 심각성이나 시민의 극심한 박탈감을 헤아리지 못하는 듯하다. 그나마 제대로 깨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도 기득권의 한명일 뿐 지극히 낮은 곳의 정서와 공분(의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속해본 적 없고, 겪어보지 못한 ‘양심’은 그러니 아래로부터 일어나 밝혀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이 품는 우주란 어찌 보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여기 우리가 믿고 의지할 중요한 단서이자 개념이자 이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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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서재에서 세상으로 나가면서 자신에게 익숙한 나라를 떠나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나라로 들어선다... 세상과의 교류는 생각을 가다듬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학자들은 세상과 교류함으로써 마음을 열고 탄력적이고 유연하고 힘 있는 태도를 갖춰, 겉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들을 설득한다. (98)
몽테뉴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은 걸으면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다고 한다. 걷는 사람은 험담을 잊고 자연이 그려낸 그림 같은 풍경에 담긴 사소한 부분에 집중하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한다. 숲은 소로의 뒷방이었다. (156)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걷거나 숨을 쉬어줄 수 없다. 숨이 가빠지지 않는 리듬, 근육을 약화시키지 않고 단련시키는 템포, 절대로 영혼을 마비시키지 않으면서 달래주는 걸음걸이를 찾아야 한다. 영혼과 육체의 시너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24)
대피소(산장 쉼터)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관이고, 민주적인 공간이다. 아무도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만이 중요하다. 대피소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유로운 가운데 우애만이 싹튼다... 땀 흘리며 산을 오르면 모두가 평등해진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대피소에서는 다들 너그러워진다. 자연스럽게 그곳의 통솔자 역할을 맡는 사람도 폭군이 아니고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주인이다... 저 높은 곳에서 관찰 지점은 하나뿐이다. 마을로 다시 내려오면서 산꼭대기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높은 곳에서 형성된 민주주의적 공간은 기쁜 마음으로 되돌아 나오는 건설적인 망명지이다. (227)
고독과 사회는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 이어져야 한다. 고독은 사람들을 만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사회는 우리 자신을 대면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니 서로가 서로의 해독제가 되어 고독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해주고, 군중은 고독으로 인한 권태를 달래준다. 정신을 지속적으로 긴장시키고 있어서는 안 된다. 기분 전환하도록 해줘야 한다. (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