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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혼인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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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젊은이들은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하여 3포세대라 불린다고 한다. 공정하지도, 그리고 정의롭지도 못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청년들은 인간의 가장 소박한 욕구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이 결혼이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집안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사회의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의 앞날이 심히 불안스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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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젊은이들은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하여 3포세대라 불린다고 한다. 공정하지도, 그리고 정의롭지도 못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청년들은 인간의 가장 소박한 욕구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이 결혼이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집안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사회의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의 앞날이 심히 불안스럽기까지 하다. 예전에는 학교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요즘에 들어 선택이 되어버린 것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더 역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결혼만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혼수문제라든지, 고부간 갈등 등의 사유로 높아진 이혼율은 혼자 사는 사람이 흔한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간통죄 폐지와 더불어, 결혼의 개념을 이성간의 결합에서 이성을 제외함으로써 동성간의 결혼도 합법화시킨 미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우리로 하여금 결혼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가 아닌 조선시대의 결혼은 어떠했을까? 우선 결혼 대신에 혼인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결혼이란 서얼이나 함경도 야인과 관련될 때, 사대부들에게서는 혼인자체가 문제가 될 때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혼인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사회적으로 공인해 주는 제도로써의 역할을 했다. 당시의 혼인은, 지금도 일부 계층에서는 그러하지만, 남녀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두 성씨나 정치집단 상호간의 경제적인 교환과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혹은 구축된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특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기에 혼인 당사자의 의사와 입장은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혼인을 치르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혼인의 예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고 사회도 바르게 유지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혼인의 형식을 제도화하였다. , ()라는 틀로 체계화 하여 혼인적령기나 혼인대상 등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혼인적령기는 시대에 따라 혹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자는 15, 여자는 14세로 정하였고, 신분내혼(身分內婚)을 원칙으로 했다. 신분이 다른 양천(良賤)간은 물론 적서(嫡庶), 동성(同姓)간의 혼인도 금지했다. 특히 동성간의 혼인금지는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결과이며, 첩은 혼인의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하여 신분내혼의 원칙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반의 신분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어서 양반임을 확인해 줄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각 고을 단위로 향안이라는 명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부계, 모계는 물론 처의 가계가 적어도 4~5대에 걸쳐 신분적 하자가 없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혼인이 중요해 질 수밖에 없었고, 특정가문과 문중끼리 혼인을 주고 받는 혼반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혼인이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큰 정치사회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서옥제에서 유래된 우리의 전통혼인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을 유교식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남귀여가혼은 남자가 장가가는 방식을 말한다. 장가간다는 말에서 장가(丈家)는 장인의 집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전통시대에는 아들, 딸 차별이 없었으며, 재산도 똑같이 상속되었고, 더욱이 제사를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사회였다. 중국의 혼속인 여자가 시집가는 친영례로 바꾸었지만, 조선초기에는 혼란과 반발이 심했다. 결국 유학이 정치이념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로 파고든 16세기경 친영례가 대세로 굳어져 우리의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다만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해 자기집에서 치르던 혼례를,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혼례 후 신랑집에서 사는 절충식으로 되었지만 말이다. 이는 공동체중심사회에서 개별 문중 중심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영례(親迎禮)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혼인절차로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의 육례(六禮)를 말한다. 남송의 주자는 이것이 너무 번거롭다 하여 사례(四禮), 즉 의혼(議婚), 납채, 납폐(納幣), 친영으로 줄였지만 기본적인 틀은 육례와 다르지 않았고, 조선왕조에서는 이를 근거로 삼았지만 형식을 같았을 뿐 내용은 크게 달랐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혼인의 풍속이 바뀌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자중심의 세상이 본격화되면서 딸은 출가외인이 되었고, 외가는 세대가 조금만 지나면 남남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 들어 또다시 풍속이 바뀌는 것 같다. 딸들의 입김이 세어지면서 친가보다는 외가 쪽으로 가까워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몸 속에 들어있는 남귀여가혼의 DNA가 전통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오늘이다. 조선시대 혼인관계를 알아가면서 미래의 결혼은 어떠할지 상상해본다.

k*****1 2015.11.09. 신고 공감 6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