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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워』, 『재평가』
등의 토니 주트는 프랑스의 현대 지식인 세 명을 조명하고 있다. -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
알베르 카뮈야 소설 『이방인』, 『페스트』를 쓴 작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레옹 블룸, 레몽 아롱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낯선 이름이다. 카뮈도 사실은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것, 그런 소설들을 썼다는
것으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 그의 소설들을 읽은 사람은 훨씬 적을 뿐 아니라(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책이 왜 나왔겠는가),
그가 지식인으로서 어떤 궤적의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레옹 블룸이나 레몽 아롱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개인적으로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읽었지만 『페스트』는 읽지 못했고, 『이방인』도
참 오래 전에 읽었다. 그러나 그의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은
읽었다.)
우리에게 낯선 이 세 명의 프랑스 지식인을 두고 토니 주트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우선은 왜 프랑스냐는 것부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토니 주트는 유대인으로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공부를 했으며, 미국에서도 교수 생활을 했고
마감을 했다. 그리고 그의 전공 분야라고 한다면 동유럽사라고 할 수 있다.) 토니 주트가 보이에(사실은 내가 보기에도) 프랑스는 매력적인 지적 풍토를 가진 나라이며, 그런 지적 풍토를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연관 지어 보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이다. 프랑스는
‘혁명’이 일어난 곳이고,
그 ‘혁명’의 정신을 수출한 나라다. 또한 그러한 역사에 대한 기억을 지닌 나라이다. 하지만 20세기 양차 대전 사이에 지속적으로 쇠락해 간 나라이며, 그 쇠락을
지켜보는 지식인이 있던 나라이다.
그런데 정작 토니 주트가 고른 이 세 명의 지식인이 사실은 공통분모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토니 블룸은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선보인 인물이지만, 그래도 대중에게
가장 많이 기억되는 것은 그가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인민정부의 수반으로 정권을
잡았었지만 결국엔 정치의 불안을 야기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카뮈는
2차세계대전 이후 소설가로서 드높은 명성을 누리고, 영향력을 가졌었지만, 자신의 출생지인 알제리에 대한 분쟁 때 침묵을 택함으로써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었다. 레몽 아롱은 이 둘과도 달리 철학자이다. 마르크스(이 책에서는 ‘맑스’라고
쓰고 있지만,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를 읽었으되
결국엔 우파적 색채를 띠었던 철학자가 바로 레몽 아롱이라는 사람이다.
이런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인물(활동했던 시기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얘기할 만한 가치가 무엇이 있을까? 토니 주트는 그것을 바로 ‘책임(감)(responsibility)’라고 하고 있다. 즉, 그들이 처했던 상황도 다루고, 가지고 있던 신념도 다르고, 또한 개인적 성향도 달랐지만, 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던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동안의 세간의 평가가 그들이 정치적으로 무책임했다는 것이지만, 토니 주트는 실은 그런 그들의 행동과 글들이 도덕적 책임감의 발로였다는 것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소신과 사회적 발언의 무게에 대해 도덕적으로 고민했으며 자신의 생각과 반하는
행동과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사회주의에 대한 소신으로, 조국에
대한 책임으로 비시정권에 끝까지 저항했으며, 또 한 사람은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현실에 불같이 참여했으
알제리 문제와 같이 첨예하고 자신이 한 쪽을 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맞서, 아닌 걸 아니라고 했다.
한 편에 서서 끝까지 주장하는 것도 용기였으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용기였다.
잘 몰랐었지만, 그들의 주장과 행동은 현대 프랑스의 첨예한 쟁점들이었다. 토니 주트는 바로 이 세 사람의 지식인을 통해 그 쟁점들에서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나아가 지식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은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시기고 지식인은 존재하지만
그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 말이다. 지금과 같이 ‘지식’을 파는 역할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서 처한 위치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사회에 대한 발언에
고민하고 사회가 처한 위치를 고민하던 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