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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카라얀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었는데, 올 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 800페이지에 달하는 베토벤 전기를 읽고 난 뒤에 내친김에 본문만 1200여 페이지나 되어 두 권으로 분철된 이 책도 함께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몇몇 음악전문 서적이나 잡지들을 통해 카라얀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1984년 내한했던 카라얀에 대한 뒷이야기들이 담겼던 월간 객석에 실린 내용들이었다. 하도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이지만 아직까지 기억나는 일화는 카라얀의 부인이 잃어버린 핸드백을 관객 중 한 사람이 찾아주면서 우연히 그 핸드백을 열어보았을 때 나온 의외의 물품들에 대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6년전에 오스트리아로 떠난 가족여행 때 잘츠부르크에서 문이 굳게 잠겨있던 카랴안의 생가 안쪽에 서 있던 그의 동상을 카메라에 담아 오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특히 그의 음악적 자질과 리더십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라모폰지 평론가 출신으로 사실 카라얀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카라얀과의 대화"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저자가 그 책을 위해 어떻게 카라얀과 인터뷰를 했는지에 대해서 여기 평전에서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평전은 카라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라 연대기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카라얀의 어린 시절 전쟁 경험에 대한 공포가 평생 따라다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카라얀은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의사로 해당 지역의 위생담당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잘츠부르크에서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산속에 있는 그룬들제 호수 서안에 가족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카라얀은 어린 시절부터 형에게 잠재적인 경쟁의식을 가지고 피아노와 각종 기계들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가족이 사는 집은 잘츠부르크의 실내악 애호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카라얀은 어린 시절 하루 4시간씩 진지하고 과묵하게 피아노 연습을 했으며, 소리와 리듬에 집착하는 감각이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더 뛰어났다고 한다. 그 외 여가 시간에는 아버지를 따라 산을 걷거나 오르거나 스키를 타거나 요트를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뛰어난 터치와 안정된 연주 자세, 조숙한 음악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음색을 보여준다는 평을 들으며 피아노 신동으로 유명해진 카라얀은 8살때부터 10년 동안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프란츠 레트빈카,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 프란츠 자우어에게 음악을 배웠는데, 카라얀을 지휘자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였다고 한다. 파움가르트너는 30살에 모차르테움 음악원 원장에 임명된 사람으로 1920년대에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탄생시킨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카라얀을 데리고 다녔으며 초기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일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아노에서 지휘로 전공을 바꾼 이유로 이 책에서는 피아노만으로는 카라얀이 음악적으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와 함께 손목에 생긴 건초염 때문이라 언급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을 졸업하고 빈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카라얀은 독립적인 전기기술자가 된 형처럼 기술 전공에 미련을 두어 기술전문대학에 지원하려 했지만 음악공부를 계속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스무 살인 1929년에 지휘자로 공식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지휘의 세계로 이끈 파움가르트너는 카라얀의 탁월한 지휘 능력 중 어떤 부분은 운동 능력에서 발전한 것이라 평하고 있다. 처음 지휘자로서 경력을 쌓은 곳은 울름 오페라단이었는데, 놀랍게도 객원 지휘자 같은 임시직이 아닌 정규직 부악장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카라얀은 토스카니니를 꽤나 추종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그의 연주회에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울름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면서 단원들로부터 냉혹한 지휘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카라얀은 밀어붙이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오케스트라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한편 이 책의 중반부의 대부분은 카라얀의 나치당 입당 전력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사실 그를 평생 따라다닌 악마의 꼬리표 같은 것이었기에 1946년 카라얀에 대한 나치 청산위원회 심리 기록을 이 책을 통해 최초로 공개하면서까지 공을 들여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카라얀에게는 나치당 입당과 관련된 두 번의 기록이 있는데, 1933년 잘츠부르크에 있을 때 나치당 입당을 권유 받고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류 불충분으로 이 입당은 효력을 상실했는데, 이 당시 울름 오페라단에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직위와 극장 조직 전체의 지위가 갑자기 불안정해졌기에 그걸 모면할 방편으로 가입하게 된 것이라 한다. 1933년 여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정식으로 데뷔했고 찬사를 받았지만 그를 안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퇴임 압박을 받아 결국 1934년 스스로 울름에서의 직위를 포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낙담한 카라얀은 직업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오케스트라를 쉽게 찾을 수 없었는데, 그래도 아헨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에 응해 결국 1935년 27살의 나이에 그 오케스트라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독일에서 가장 젊은 음악감독이 된 셈인데, 이 때 그 임용의 승인권을 아헨 시 당국과 베를린 제국음악원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카라얀의 아헨 오케스트라 음악 총감독 임명 사흘 전 아헨 시 사무관이 나치당원이 아닌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통보했고, 결국 그는 나치당에 입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라얀은 히틀러에 동조를 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순수하게 음악적인 행사가 아니면 정치적 행사는 가능한 피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조부모 중 한 쪽이 유대인인 아니타와 재혼을 하게 되면서 나치 당국에 불순분자로 찍혀 여러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카라얀은 1938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베를린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하였고 첫 번째 레코딩 음반도 녹음했다고 한다. 그의 베를린 데뷔를 눈 여겨 본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운영자인 티티옌은 1939년 카라얀을 그 극장의 지휘자로 끌어들이고,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도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붙게 된 명성이 바로 "기적의 카라얀"이었다고 한다. 불과 서른 살의 카라얀이 1934년 반강제적으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 직을 사임했던 오십대의 푸르트벵글러와 대비되면서 그 유명한 푸르트벵글러와의 불화도 시작된다. 두 지휘자 사이의 전쟁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일화들이 많은데, 신문 광고에 "카라얀 연주회 표 구함, 푸르트벵글러 표 두 장으로 교환해 드림", "카라얀 사인을 구해 주시면 양파 5개를 드림"과 같은 문구를 내걸었을 만큼 치열했다고 한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나치당의 눈 밖에 난 카라얀은 군에 징집될 뻔했지만 방공감시원 근무로 전시 업무를 배정받았고 아헨 오케스트라의 총감독 자리도 해고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자 카라얀은 음악을 듣고 공부할 여유가 생겼는데, 이 때 녹음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 레코드를 엄청 많이 수집 했었던 독일 기업 지멘스의 후계자 에른스트 폰 지멘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카라얀 자신이 가기를 원했던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 자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베를린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여행 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국으로 다가가며 베를린도 소련의 침공으로 위태위태하던 1945년 초, 용케도 이탈리아 방송 오케스트라의 초청장으로 여행 허가를 받아낸 카라얀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해 종전이 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고 한다. 푸르트뱅글러 역시 그 시기에 스위스 베른에서 숨어 지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어수선하던 때 영국 EMI의 대리인이자 계약담당자인 월터 레그가 카라얀과 빈에서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 레그는 카라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평생 동지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는 이 당시 런던의 최신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아를 창설하고 운영하면서 이 악단에서 활약할 솔로이스트와 지휘자를 탐색 중이었다고 한다. 카라얀과 레그는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고 이후 수많은 공연과 역사적인 음반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1946년 봄과 초여름, 빈과 잘츠부르크를 오가며 카라얀이 활동을 시작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 청산 위원회는 그가 중심적인 역할은 맡을 수 없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도 다시 빈으로 돌아와 빈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얻기 위해 로비를 벌였지만 그 역시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활동이 금지된다. 이후에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 모두 나치와의 부역에 무죄를 선고받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는데,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다고 한다. 하지만 푸르트뱅글러는 1954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리허설 도중 귀가 거의 안 들려 지휘를 포기하고 난 후 불과 9주만에 죽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데, 그 중에 그의 미국 방문과 관련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원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그에게 음악 총감독 자리를 제안했지만 고사했고, 대신 시카고를 방문해 시카고 심포니를 직접 지휘를 했었는데, 나치 부역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소동과 반발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카라얀도 1948년 늦여름과 가을에 남아메리카로 외국 순회공연을 가면서 빈 필하모닉과의 관계가 냉각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바흐 음악제에서의 지휘를 통해 카라얀은 빈 악우협회 합창단을 훈련시켜 청중들이 경탄할 정도의 뛰어난 수준으로 올려놓았고, 1951년에는 베토벤, 버르토크,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의 곡들을 녹음하며 자신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한다. 결국 푸르트뱅글러 사후인 1955년에 카라얀은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 추대되었다. 물론 기나긴 협상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 중에 미국 순회공연도 있었지만 큰 고비는 없었다고 한다. 또한 잘츠부르크에 새 축제 극장을 건립하면서 1955년 말부터 카라얀을 잘츠부르크 음악제 예술 감독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사실 평전의 첫 번째 책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두 번째 책의 시작은 1957년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이 된 카라얀이 빈 필하모닉과 다시 협연을 수행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 책에서 카라얀의 경력 사항 외에도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카라얀은 노래하듯 오케스트라의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매끄럽게 연주하는 것) 기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구사했고, 특유의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에 대해서도 눈으로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에 자신은 악보를 외운 다음에 자신이 본 것을 잊으려 노력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카라얀은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어떤 연주자가 호흡에 문제가 있다면 카라얀은 정말로 먼저 느낄 수 있고,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템포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라얀 지휘의 특징은 연주자 개개인이 서로 반복하기보다는 대화할 수 있도록 조화를 이루어 내는데 있다고 한다. 즉, 연주자들이 서로의 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카라얀이 어떻게 음반을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일단 음반을 손에 넣어 자기 것이 되면 그것을 반복해 들음으로써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비판적이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 먼저 그 음악을 이해하고 그러고 나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려 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 밖에도 카라얀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던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에 대한 일화, 마리아 칼라스와의 인연,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의 오랜 우정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무슨 일을 하던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몰두했던 카라얀 모습 속에 배울 점이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