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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님(‘임’이 표준어이지만 ‘님’으로 표기한다)이 부재하는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지 시대를 의미하지만, 꼭 그런 방식으로 이 시를 읽을 이유는 없다. 님이 침묵하는 것을 깨달음의 부재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를 내면적 깨달음을 향한 목마름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해석은 한용운이 ‘스님’이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시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님은 갔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사랑하는 나의 님”을 떠나보내고 탄식하는 시적 화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님은 ‘나’를 “차마 떨치고 갔”다. ‘차마’라는 시어가 님에게 붙는 말인지, 화자에게 붙는 말인지 논란이 있지만, 시의 문맥을 따른다면 님을 보내는 화자의 심리를 표현하는 시어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물론 ‘차마’라는 말이 주체의 행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다. ‘님은 차마 나를 떨쳐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처럼 ‘차마’는 님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시에 나온 ‘차마’는 “떨치고 갔습니다.”라는 시구와 어울려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강화하고 있다. 요컨대 시인은 님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차마’라는 시어에 실어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님의 부재가 “날카로운 첫 키스”라는 감각으로 시적 화자의 몸에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나 “꽃다운 님의 얼굴” 또한 감각으로 남은 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바, 이것은 이 시의 화자가 그만큼 님이라는 존재와 한 몸처럼 이어진 관계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돌려 말하면 님과 화자는 헤어져도 헤어질 수 없는 역설적 관계이다.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님이 떠난 상황은 그래서 시인을 끝없는 혼란에 빠뜨린다. 님이 떠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시인의 몸에 흔적으로 남은 감각이 님이 떠난 상황을 자꾸 부정하게 만든다. 떠났는데 떠나지 않은 역설은 이렇게 시인의 몸에 남은 감각을 통해 펼쳐진다.
관념으로 느끼는 님과 감각으로 느끼는 님은 다르다는 걸 먼저 이해해야 한다. 관념 속의 님은 떠나든, 떠나지 않든 상관없다. 관념으로 다시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각으로 느끼는 님은 경우가 다르다. 감각으로 남은 님은 오직 한 사람이다. 감각은 ‘그 님’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으로 느끼는 님이 떠나면 남은 사람은 괴로움의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기고 떠난 님은 다른 님으로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님’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라고 적고 있다. 님의 부재는 이렇게 시인을 새로운 슬픔에 빠뜨린다. 슬픔이 슬픔을 낳는 이런 애상의 시학을 한용운 시인은 어떻게 돌파하고 있을까
시인은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이다. 하나뿐인 님과 이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눈물이 원천이 되는 일은 삼가야 된다. 사랑을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엇보다 이 점을 두려워한다. 님과 헤어져도 님과 했던 사랑의 마음은 지속되어야 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 행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님과 헤어지는 건 작은 슬픔이다. 하지만 님과 했던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는 건 큰 슬픔이다. 작은 슬픔을 넘어서려고 큰 슬픔에 빠져들 수는 없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사랑의 진실을 시인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님이 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 또한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시인의 마음은 여전히 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의 제목은 그러므로 ‘침묵하는 님’이라는 의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님의 침묵은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의 생각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님의 침묵은 ‘침묵하는 님’의 상태, 곧 깨달은 자의 상태를 열망하는 사람의 한계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시인은 여전히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격정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님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님은 지금 고요한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 님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의 격정이 깊어질수록 님은 더 깊은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한용운 시인이 ‘님의 침묵’에 담긴 이 진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다만 님이 침묵하는 세계로 가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려고 했다. 그 길이 독립운동이든, 깨달음의 세계든, 아니면 사랑하는 님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길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 모든 길들은 ‘님의 침묵’이라는 또 다른 사랑의 길과 어김없이 통하고 있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결국은 ‘님의 침묵’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걸 시인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2. 당신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는 임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그리움은 대상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정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부재하는 임을 표현하는 대상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 끝에는 항상 물음표가 붙어 있다. 제목처럼 그 대상들이 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임은 이곳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 있지 않은 그 임이 시인은 여전히 보고 싶다. 이곳에 있지 않은 임을 어찌 하면 볼 수 있을까? 시인은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서 임을 발견한다. 임은 온갖 사물들에 내재되어 있다. 임을 ‘임’으로 한정하지 않으면 온갖 장소에 임이 있다. 어디에나 임이 있으므로 시인은 어디에서나 임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을 임으로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동잎은 임이 아니다. “누구의 발자취”에 드러나는 대로 오동잎은 임이 내보이는 흔적=비유일 뿐이다. 그러나 그 오동잎에서 시인은 임을 발견한다. 돌려 말하면 오동잎이라는 대상을 ‘통해’ 시인은 임을 상상한다.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또한 오동잎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을 나타낸다. ‘누구’는 분명 임을 가리키는 시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확정되지 않은 잉여로 임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시어이기도 하다. 이곳에 없는 임을 ‘누구’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임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대상을 나열한다고 해서 임이 이곳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오동잎은 오동잎이고, 푸른 하늘은 푸른 하늘이다. 오동잎이 임이 되고 푸른 하늘이 임이 된다면,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 또한 임이 될 수 있다. ‘누구’라는 시어는 이렇게 어느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 임의 모습을 에둘러 드러낸다. 오동잎은 푸른 하늘로 이어지고, 푸른 하늘은 알 수 없는 향기,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 저녁놀로 이어진다. 그 대상들은 임의 발자취일 수도 있고, 얼굴일 수도 있으며, 입김일 수도 있다. 어느 때는 노래가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시(詩)가 되기도 한다. 임만 ‘임’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임이 되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시인은 임이 부재하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임이 부재하는 시대에 시인은 어디에나 임이 있다고 선언한다. 오동잎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푸른 하늘도 저녁놀도 마찬가지다. 임이 부재하는 시기가 아니라 임이 넘쳐나는 시기이다. 하지만 수많은 임들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하지만, 시인이 갈망하는 ‘그 임’은 그런 대상들 속에서 씨앗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씨앗은 땅속에 있으면 의미가 없다. 땅을 뚫고 지상으로 나와야 씨앗은 씨앗으로서 제 할 일을 한 것이 된다. 저녁놀에서 시인은 “누구의 시(詩)”를 발견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씨앗으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저녁놀이 임이 쓴 시가 되려면 그 씨앗의 상태를 벗어나 우리가 사는 이 세계로 가지를 뻗치고 잎을 드리워야 한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어나온 작은 시냇물 소리를 “누구의 노래”에 한정하지 않고 누구나 듣는 노래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인은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쓰고 있다. 현실에서 타고남은 재는 기름이 될 수 없다. 시인이 이 점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역설을 통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상황을 상상한다. 기름은 자신을 태워 불꽃을 만든다. 재가 된 기름은 이런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없다. 그러니 타고남은 재는 기름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을 상상한다. 그 일이 현실에 실현될 수 있는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임이 부재하는 시대에는 어떻게든 임을 상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상상을 해야 불꽃이 꺼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무엇보다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역설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시인은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이 상상이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밖에 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상상을 한다고, 달리 말하면 시를 쓴다고 이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는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상상을 하는 일일 따름이다. 그 상상으로 시인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 되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약한 등불”이라는 시구는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한다. 힘의 논리로 따진다면 문학처럼 약한 형식이 또 있을까? 시는 상상으로 “누구의 밤”을 지킨다.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그 역설로 시인은 부재하는 임을 끊임없이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
임은 어디에나 있다. 오동잎이 진다고 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작은 시내는 여전히 흐르고, 저녁이 오면 서녘 하늘은 어김없이 노을로 물든다. 시 제목은 “알 수 없어요”지만 시인은 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저녁놀은 임이 쓴 시이다. 작은 시냇물이 내보내는 소리는 임이 부르는 노래이다. 이곳저곳에 임이 있으니 시인의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꺼질 리 없다.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역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진다. 이곳에 없는 임을 시인은 어디에나 있는 임으로 바라본다. 임은 시인의 마음에 있다. ‘누구’는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안에 있는 이 마음이 임을 낳고 임을 기른다. 마음이 곧 임이 되는 역설적 진리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분명히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