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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버지니아 울프 (지음) ㅣ 오진숙 (옮김) ㅣ 솔출판사 (펴냄)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저자 자신인 듯하다가도 그녀의 친구로 설정된 메리 시튼이였다가 다시 불분명한 '나'로 이어진다. 총 6장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과 과거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 여성에 대한 한계 그리고 현시점에서 여성이 가야 할 길에 대한 깊은 고찰 등이 담겨 있다. 그녀는 독백하듯 아니면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듯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울프의 작품들 중 가장 직접적으로 그녀의 메시지를 이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 과거에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차별을 받고 있었는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지금은 과거와는 꽤 다른 환경이다. 그만큼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다고 보이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명절날이나, 한쪽의 성이 다른 쪽의 성을 폭행했을 때, 그때 여성이 당하는 사회적 편견과 시선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래서 울프의 책들이 더 의미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가 이야기하는 것은 가부장적 제도에 대한 비판과 여성도 남성들과 똑같이 경제적 독립과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작가가 탄생된 연유도 탄탄한 경제력과 교육이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들은 모든 권한이 아버지 혹은 남편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가부장의 결정에 의해 요람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이 결정지어지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집안끼리 맺는 권력의 수단으로 혹은 대를 이어줄 수태의 기능만으로 여성을 바라본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여성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의 여성들은 심각한 성차별, 성 학대, 명예 살인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가 혹은 메리 시튼이 펼쳐든 책 속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시각 특히 열등하다. 지능이 낮다. 등의 평가를 읽을 때는 그녀 가슴속에 분노가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남성이란 비이성적, 무절제적, 파괴적, 공격적 등 그들 역시도 단점이 있는데, 왜 한 성이 다른 성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비난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읽은 대다수의 소설 속 여성의 위치는 왜 늘 비슷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지... 역사 속 인물들 중 전문적인 직종에서 왜 남성 성만 중시되어야 하는지... 그녀는 문학을 통해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들려주고 있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도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여성이 다른 여성의 밑거름이 되어줘야 할 어떤 의무 같은 것도 있음을 암시하는 듯도 했다. 울프의 주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그 호소력이 짙다. 결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 시키고자 했던 여성들, 취집이란 말이 유통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울프의 시대로부터 현대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위상을 어느 정도 올려놨을까? 조금 있으면 명절이다. 명절 이후 들려오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적인 전통 관습에 대한 볼멘소리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의 미투 운동 역시도 여성 해방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부분이 명백히 존재한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고 선언한 듯,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독립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일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의 명확한 자기 인식과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란 단순히는 생존을 위한 밥벌이가 되겠지만, 기본적인 밥벌이가 안정궤도에 들어서면 자아실현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재 아내, 딸, 엄마라는 다양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나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나? 아니면 내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나? 그렇다고 해서 울프는 남성성에 대해 비하하거나 두 성 중 어느 한쪽의 성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두 성이 가지는 약점을 강화하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 같기도 했다. 울프의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녀의 페미니즘 사상은 문학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는 점이다. 물론 독자들마다 울프의 메시지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주로 언급되는 이야기들의 반복 패턴과 울프 시대의 암울했던 전쟁 그리고 중산층 이하의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이 있었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녀는 정식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당시 여성들의 삶에 비추어보면 꽤 혜택을 받은 여성임에는 틀림없다. 울프는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낮아 보인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의 규정에서 보이듯 나이가 어린 여자에 대한 시각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파시즘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한 문장 정도 언급될 정도로 울프의 생각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여성과 작가 그리고 대문호라는 카테고리에 그녀의 생각이 응집되어 있고, 갇혀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울프를 통해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지만 울프를 통해 그녀의 한계도 알게 되는 듯하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의 생각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소설이다. 울프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자기만의 방 외 다른 작품을 먼저 만난 이후에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녀의 페미니즘 생각이 전 작품 감상에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듯해서 이런 소견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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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를 접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보았을 문구 '자기만의 방'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가 왜이렇게 유명해졌을까?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자기만의 방'이 아닐까 한다. 결혼하기 전 포털사이트 웹툰에서 본 내용이 기억난다. 부부와 자녀가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남편은 TV앞 쇼파에 앉고 자녀는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는데 엄마는 자기 자리를 찾다 머쓱해하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제 자리인양. 막연하게 쓸쓸하다 생각했는데 , 결혼을 하고 보니 그 내용이 새로이 다가온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가 여성과 픽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답을 하기까지 생각의 변화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수필이라고 보면 된다. 울프의 여타 소설에 비해 쉽게 읽힌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녹록치 않다. 한 줄 한 줄 힘주어 눌러 쓴 글같다.
여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다면적으로 이야기 하고싶었던 듯 화자를 바꾼다. 하지만 결국은 울프 자신이다. 그래서 자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 나는 (나를 메리 비튼, 메리 시튼, 메리 카마이클 혹은 여러분이 원하시는 어떤 이름으로든 불러주십시오 -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12쪽
울프는 남성을 비판하고 여성을 옹호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제 삼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뭔가 정복하고 지배해야만 하는 가장에게는 사실상 인류의 절반인 수많은 사람들이 본디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지요. 이것이 실제로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52쪽
여성은 이 모든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원래 크기보다 두 배로 확대 반사시켜주는 , 마술적이고도 입맛에 맞는 능력을 소유한 거울로서 이바지해왔지요. 이 능력이 없다면 아마 이 지구는 여전히 늪과 정글 상태였을 것입니다. 온갖 전쟁의 영광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과 무솔리니가 그렇게 힘주어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한 이유이지요. 여 성들이 열등하지 않다면 자신들이 더이상 확대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그렇게 종종 여성이 남성에게 필숩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주지요. 53쪽
즉, 그들로 하여금 계속 다른 사람들의 전답과 재산을 원하게 하고, 개척지와 깃발, 전함과 독가스를 만들게 하며, 스스로의 목숨과 자식들의 목숨을 헌납하라고 몰아대는 소유에의 본능과 획득에의 열망을 - 그들의 가슴 안에 묵게 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지요. 57쪽
무수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남성의 소유에의 본능과 획득에의 열망때문에 세계가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여성이 보호받는 위치에 있으며 이 것이 부당함을 토로한다.
여성이라는 것이 보 호받는 직업이기를 그만두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현관문을 열며 나는 생각하였지요. 59쪽
가끔 엘리자베스나 메리 같은 여왕이나 귀부인 등의 여성 개인이 언급되지요. 그러나 두뇌와 성품 외에는 자신의 명령에 의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중산층 여성들은, 종합적으로 그 역사가의 과거관을 구성해주고 있는 그 위대한 운동들 중의 어떤 것에도 결단코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일화집에서도 여성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64쪽
심지어 남성이 느끼는 부당함과 여성이 느끼는 부당함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키츠와 플로베르 그리고 다른 천재적인 남자들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은 그녀의 경우에는 무관심이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하는 식으로, 즉 "당신이 원한다면 쓰십시오. 나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까"라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지요. 세상은 너털웃음과 함께 "뭘 쓴다고? 당신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소?"라고 말하였지요. 75쪽
여성들의 글을 읽은 후에 읽는 남성들의 글은 참으로 직설적이고 참으로 솔직하였지요. 그것은 그러한 마음의 자유와 인격의 자유분방함과 자신감을 나타내주지요. 우리는 결코 방해받은 적도 반대를 받아본 적도 없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은 아무 데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태어나서부터 누려온 이 잘 길러지고 잘 교육받은 자유로은 마음의 현존 속에서 안녕을 감지하게 됩니다. 138쪽
울프의 지적에는 공격이라기보다는 자조가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능력있고 인성이 출중한 여성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되었으며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받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러 가는 동안 집에 남겨져 있던 울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이고 있습니다.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 픽션 속의 모든 위대한 여자들은 다른 성에 의해 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보 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상하였지요. 그런데 그것은 여성의 삶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요. 115쪽
이 얼마나 통찰력있는 문장인가! 가슴깊이 파고드는 문장이었다. 여러번 곱씹을 수록 문장 안에 담긴 울프의 삶과 당시대 여인들 그리고 현재까지 여인들의 삶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울프는 이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여성이 일단 글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경제적 독립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만일 소설이나 시를 쓰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연 오백 파운드와 문에 자물쇠가 달린 방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결론, 그 진부한 결론에 자신이 어떻게 하여 도달하였는지를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온 셈입니다. 145쪽
하지만 이는 결론이라기보다는 시작이라고 봐야한다. 여성에게는 경제적 독립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은 그냥 글을 쓰면 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역사가 없다. 하지만 여성은 글을 쓰기 위해서 일단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가 먼저 주어진다. 그 후에 남성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허니 그 방법이 남성과 같을 수 없었을 거다.
울프가 글을 난해하게 쓴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기존의 질서로 (여성이 배제된 구조) 울프든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었던 거다. 자기만의 방을 읽고 나니 울프의 혜안,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성이 더 대단하다 느껴진다. 울프를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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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은 1928년 케임브리지 여자 단과대학에서 여성과 픽션 이라는 주제로 부탁한 강연회를 위해서 씌어진 글을 수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비평서이자 에세이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의 남성의 심리와 여성이 처한 현실의 문제, 여성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는 여성의 참다운 본성이니, 픽션의 참다운 특성이니 하는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두는 셈이다.p10
사색에 빠져 옥스브리지 잔디밭을 거닐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다가와 이 길은 오로지 대학 연구원들과 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고 여자는 자갈길을 걸어라였다. 윌리엄 새커리의 원고를 읽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가려 하자, 그녀 앞에 나타난 관리인은 학교 도서관에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지녔을 경우에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두 번의 거절을 통해 여성이 처한 사회적 불평등을 묘사한 저자는 한 개인이 최소한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소설 작품 속엔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얼마나 많은 책이 여성에 대하여 쓰고 있는지 대부분 작가가 남성인 것에 대하여 저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숙모 메리 비튼은 봄베이에서 말을 타고 바람 쐬러 나갔다 말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한 변호사의 편지가 우편함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계속하여 오백 파운드의 유산을 받도록 해놓았다. 이전에는 신문사 잡무직이나 결혼식에 대해 기사를 쓰며 돈을 벌었다.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조화를 만들고,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며 몇 파운드의 돈을 벌었다. 1918년 이전 여성에게 열려 있는 주된 일거리였다.
저자는 왜 여성들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시를 쓰지 않았는가에 대해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육아원을 채 벗어나기도 전인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에 자신이 좋아하든 싫든 간에 결혼을 했다. 그들 중 누군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썼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노신사가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여성도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지닐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천부적 재능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란 고생하고 교육도 못 받고 노예같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프랑스, 영국에서도 여성 시인들이 소설가에 선행한다.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제인 오스틴 등 그들은 글을 쓸 때에 모두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중산층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주로 소설을 쓴 이유는 그들이 주로 거실에서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시보다 집중력이 덜 요구되는 소설이 적합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빌렛, 에마, 폭풍의 언덕, 미들마치 와 같은 모든 훌륭한 소설들이 인생 경험이 없는 여성들에 의하여, 존경스런 집의 공동 거실에서 너무 가난하여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쓸 종이를 한꺼번에 사들일 여유가 없었던 여성들에 의하여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한다. 조지 엘리엇은 많은 시련 후에 탈출을 하였다. 기혼 남자와 사는 죄를 짓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루이스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면서 조지 엘리엇에 대해 악평을 퍼뜨렸다.
순수한 가부장제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비판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고수한다는 것은 엄청난 천재성과 성실성을 필요로 했을 것임에도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은 해냈다. 그들은 남자들 처럼이 아니라 여성들이 쓰는 것처럼 썼다. 저자는 아무리 방대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온갖 종류의 책을 써보라고 부탁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을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고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을 보고 몽상에 잠기며 충분한 돈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여성의 픽션 예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울프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적 구별을 공고히 하거나 여성으로서의 특수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의 깊고 풍성한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실 울프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 머리를 쥐어짜며 읽어야 했다. 여전히 정리가 안되지만 그녀의 작품에 빠져든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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