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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순신 장군. 그 옆에는 그의 멘토이자 동지인 정걸 장군이 있었다는데 이 책을 접하고 나서야 그런 분이 계신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삶이 어땠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정걸과 이순신의 첫 만남은 정걸이 경상우수사일때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하던 1580년으로 추정된다. 그때 정걸의 나이는 67세, 이순신의 나이는 36세. 31살 차이다. 당시에 조혼의 관습이 있던 시절이라 정걸이 거의 할아버지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전노장과 새파란 신참의 만남이 어땠을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첫 눈에 서로를 알아봤을 지 내심 궁금해진다. 31세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둘은 깊은 인연을 맺었고, 정걸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면서 배우고 깨달았던 모든 것들을 이순신에게 전수해 줬으리라 추정된다. 이후 정걸은 창원부사를 거쳐 수도 한양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떨어져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정걸이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그때 정걸의 나이 79세. 평균 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난 현대라고 해도 그 나이에 무장으로서 복무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지경인데 하물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더 대단했으랴!! 마치 삼국지의 황충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역사기록에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불패 신화를 만들었던 거북선과 판옥선의 건조에 정걸이 깊게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철익전, 화전이라 불리는 화포 무기 개발의 업적도 세웠고 이순신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후 해전에서의 공과 이순신의 추천으로 충청수사로 부임하여 그 유명한 행주 대첩 막바지에 화살 2만개를 공급하여 육지에서의 승리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후 그의 기록은 충청수사로 부임했던 1595년을 마지막으로 찾을 수 없고, 후손들이 전하는 얘기로 1595년 무렵 고향 흥양으로 돌아온 후 후학 양성과 치수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훗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공을 세운 신하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그 공을 치하했는데 그 어디서도 정걸 장군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이순신이 직접 선조에게 공훈을 내려달라고도 했다는데 이름을 찾을 수 없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인물의 방해 때문이었을까.. 아래의 장군의 묘비와 모셔진 안동사 건물사진을 보면 이러한 씁쓸함이 더 커질 따름이다. 최근의 한일 무역전쟁을 보면서 내부적으로 친일이니 극일이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는데, 친일파들을 색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게 정걸 장군처럼 나라를 위해 자기 한 목숨 초개처럼 바친 분들의 공이 잊혀지지 않고 널리 회자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이 더 간절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