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매종도의 유골도 없었고 책장이나 서고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낡은 침상 만이 뿌연 먼지 속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매종도가 남기고 간 것은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호는 워낙 넓고 기인들이 많으니 종남파 제자 외에도 그 열석진을 푸는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진산월은 모옥의 뒤를 돌아가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작은 봉분이 있었다. -일대종사 매종도지묘- 머리를 부숴버릴 듯한 강렬한 충격을 주는 글귀가 적힌 작은 비석이 봉분 앞에 있었다. 과연 이곳은 매종도의 거처임이 분명했고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매종도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진산월의 우려대로 자신보다 먼저 매종도의 선거를 찾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비석 자체가 무척 오래되어 푸르스름한 이끼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을 세운지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매종도의 비학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리라. 진산월은 너무도 허탈해져서 봉분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잡은 줄로만 알았던 종남파 부흥의 끈은 이로써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문파 제자도 몇 사람 남지 않은 지금의 종남파가 과연 화산파와 형산파 같은 거대문파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당장 종남파를 호시탐탐 노리는 초가보조차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종남파 부흥의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사부의 무덤 앞에 서자 진산월은 끝 모를 슬픔과 외로움에 휩싸여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비석을 끌어안으며 소리죽여 오열했다. 진산월은 사부의 유명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울었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형제들이 불쌍해서 울었다. 사부의 무덤에서 내려온 진산월은 종남파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어 누관으로 향했다. 누관은 예로부터 종남산에서 제일절경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다. 종남산은 모두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봉우리들은 남오대라 불렀다. 서안의 남쪽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라는 뜻이었다. 누관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중봉에 위치해 있었다. 진산월은 누관의 명승을 감상하며 울적한 마음을 씻어낼 생각으로 한동안 누관의 명승을 감상하면서 깜빡 졸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던 진산월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앉아 있던 곳은 중봉의 정상에서 십 여장 아래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였는데 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세워 놓은 듯한 돌무더기가 있었고 돌무더기 형상이 사람의 얼굴과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돌무더기의 위쪽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사람의 동공을 연상케 했다. 돌무더기의 형상은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 보았을 때만 사람의 모습을 닮았고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돌무더기로 다가가 보았다. 별 생각 없이 돌무더기를 만지던 그의 손이 구멍으로 향했다. 양쪽으로 하나씩 뚫려 있어서 무심코 구멍에 손을 집어 넣었는데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구멍 속에는 사리가 있었고 반대쪽 구멍 속에는 양피지 조각이 있었다. -진리를 얻고 싶은 자, 파하라!- 진산월이 돌무더기를 박살내니 돌무더기가 무너졌고 그 자리에 하나의 작은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보니 돌무더기는 그 동혈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혈은 완만하게 아래로 경사지어 있었고 가까이 가자 동혈 속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옴을 느낀 진산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동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혈이 끝나고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한 쪽에 돌로 만든 침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백골 한 구가 누워 있었다. 백골은 가슴에 한 자루 검을 안은 자세로 돌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검집을 자세히 보니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문양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용의 얼굴은 자연스레 검의 손잡이가 되었고 용의 꼬리는 검을 감싸 안은 검집이 되었다. 용의 수염은 검실이 되었고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는 손잡이에 박힌 구슬이 되어 있었다. 구름은 그 자체로 검집을 둘러싼 멋진 문양이었다. 진산월은 여의주 밑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여 있는 두 개의 글자를 발견했다. -용영- 그 글자를 읽는 순간 안색이 대변하더니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 진산월이 사조의 유체를 뵈옵니다." 소리쳤다. 백골을 향해 삼고구배를 올리는 진산월의 표정에는 격동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용영검은 종남파에서 오랫동안 비전되어 오던 신검 중 하나였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용영검은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용영검이 그 주인과 함께 이백 년 전에 신비스럽게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용영검의 주인이야말로 종남 오선 중의 일인이며 천하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 한다는 혈선 정립병이었던 것이다. 종남 오선의 명성은 정립병과 매종도가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이곳에서 정립병의 유골을 정리하던 중 유골의 밑에서 두툼한 책자를 발견했다. -혈선비록- 진산월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종남파에서 실전되었던 각종 비기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정립병이 남긴 혈선비록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내가 누운 침상을 뒤집어 보아라.- 말대로 진산월은 돌침상을 들어 올렸다. 그 곳에는 곽일산과 정립병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초식 도해만도 백이십 개가 넘었다. 진산월은 배가 고프면 석실의 한쪽 구석에 있는 벽곡단을 먹었고 목이 마르면 석실 바닥을 흐르는 지하수를 마셨다. 벽곡단은 커다란 항아리로 세 개나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곽일산이 만들어둔 벽곡단은 사백 년이나 지나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일부는 곰팡이가 피기도 했으나 특수한 방법으로 조제를 했는지 썩거나 상하지 않아서 먹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역한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 때는 동굴 벽에 있는 이끼와 함게 먹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진산월이 중봉의 석실에 들어온 지 정확히 삼 년 만에 진산월은 손에 들고 있는 유운검결의 미완성 비급을 내려다 보고 "이제부터 네 이름은 검정중원이다."라고 말했다. 검을 찬 모든 무사들에게 꿈과 동경을 심어준 무적의 검초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유운검법 십팔초를 단숨에 관통할 수 있다면 능히 검으로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 곽일산의 자신에 찬 음성이 진산월의 귓전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