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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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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태조 이덕일 다산북스/2018.7.3.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우리의 보배 중 하나라 할 만하다. 그러나 기록을 한자로 하였기에 한글세대가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동안 제대로 된 한글번역본이 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한글로 번역된 것도 식민사학에 물들어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민족의 못난 구석이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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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태조

이덕일

다산북스/2018.7.3.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우리의 보배 중 하나라 할 만하다. 그러나 기록을 한자로 하였기에 한글세대가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동안 제대로 된 한글번역본이 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한글로 번역된 것도 식민사학에 물들어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민족의 못난 구석이나 치부를 드러내는 내용으로 왜곡 번역되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번에 식민사학에서 벗어난 역사관을 갖고 번역된 <조선왕조 실록 1>권이 출간 되었다. 저자는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왕 독살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조선 왕을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등이 있다.

 

“조선 초의 사대주의와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는 분명 다르다. 태종 이방원에게 친명사대는 국체를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태종이 안남(베트남)에 들어선 새 왕조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일전을 대비해 서울 남산에 산성을 쌓은 것처럼, 조선 초의 사대주의는 국체 보존을 위한 실용적 사대주의였다. 중화 사대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조반정 이후 서인, 노론의 이념적 사대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조선 초기의 자주성은 인조반정 세력들의 집권 이후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점점 약해졌고, 급기야 숙종 때 백두산정계비를 통해 압록강 북쪽 강역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도 간도(지금의 연변 지역)는 조선 강역이었다. 조선의 최대 강역이 지금처럼 압록강-두만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악의적 왜곡 때문이다. 이런 왜곡을 이번 기회에 최대한 바로잡으려 노력했다.(pp.12-13)” 이와 같이 우리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책이 <조선왕조 실록 1> 태조 편이라고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강조한다. 1권의 내용은 태조 이성계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 쌍성에서 원나라 천호장겸 다루가치의 직을 수행하던 부친 이자춘을 따라 고려왕실에 귀순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울 때까지의 일을 1부 흔들리는 왕토에서, 2부 머나먼 개국의 길, 3부 개국군주라는 자리 등 3부로 정리되어 있다.

 

이성계 일가가 살던 두만강 북쪽 쌍성은 고려 땅이 아니라 원나라 땅이었다. 이자춘은 울루스부카라는 몽골 이름을 가진 원나라 관리였다. 이성계 집안이 원나라에서 산 것은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목조)부터다. 이안사가 집안의 고향이었던 전주를 떠난 것은 스무 살 무렵 한 관기를 사랑했는데, 그 관기가 숙청을 거부하고 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음모에 말려들면서 가솔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다시 만주 지역으로 유랑하게 되었다. 그 때 만주 지역을 다스리던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옷치긴 왕가로부터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받은 것이 100년 전인 고종 42년(1255)으로 이안사는 원나라에 귀부했고, 이후 90여 년 동안 이성계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원나라 벼슬아치로 살아왔다.

 

이성계가 부친 이자춘을 따라 고려에 왔을 때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의 오빠인 기철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순제는 네 명의 황후를 두었지만 아들은 기철의 누이 기황후만 낳았다. 그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원나라 태자가 되었으니 기철은 공민왕이 우습게보았다. 그러나 과욕을 부린 기철 일당은 공민왕에 의해 주륙당했다. 그리고 공민왕은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옛 고려 강역을 수복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지점이다. 고려 초부터 공험진에서 삼척까지는 동계로, 고려의 강역이었다. 현재 <민족문화백과사전>은 동계에 대해 ‘대체로 함경도 이남으로부터 강원도 삼척 이북의 지역이 해당한다’라고 설명한다. <고려사>「지리지」에 ‘공험진부터 삼척’까지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함경도 이남’으로 축소시킨 것이다.(p.68)”라고 식민사학의 잘못을 지적한다. 어쨌든 고려가 옛 강역을 수복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우뚝 서게 된 것이었다.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잘 알았던 공민왕은 새로 일어난 명나라를 택했다. 그래서 반원친명이란 단일 노선을 걸었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신돈을 중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치며 고려 중흥을 위해 노려했으나, 구가세족들의 참소에 넘어가 신돈을 제거했다. 또한 반원친명 노선을 추구한 결과, 친명파가 양산되었고, 신돈을 제거한 구가세족들은 다시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기반인 토지제도가 무너지자 당연히 군사제도도 함께 무너졌다. 홍건적이나 왜구가 쳐들어와도 물리칠 군사가 없었다. 백성들은 안으로는 귀족과 부원배, 밖으로 외적의 침탈에 고통 받아야 했다. 공민왕의 고려 왕실은 늦게라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그 자신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중국이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지고 주원장이 명을 세운 후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때를 틈타, 공민왕은 고려 땅을 침범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이성계와 조민수를 대원수로 세워 명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도전의 부추김으로 역성혁명을 꿈꾸며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한다. 이성계는 원나라 사람으로 나고 자랐다. 이것이 고려에서 나고 자란 최영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외적들을 물리치며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던 두 무장이, 결국 고려의 몰락이라는 위기 앞에서는 태도가 크게 달랐던 것도, 서로 다른 인생을 걷게 되었던 것도 모두 그 차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정도전과 이성계 일파는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왜곡하여 왕위에서 쫓아내고, 고려의 유신들을 힘으로 정리한 후 조선을 세우게 된다. 문제는 태자를 이성계가 아끼는 강씨 소생 열한 살 소년 방석을 세자로 결정한 것이었다. “고려의 비극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것처럼, 태조 이성계의 비극도 자기 집안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집안을 왕가로 만들었지만 끝내 가(家)의 개념을 탈피하지 못했다. 왕가는 사가와 다르다. 왕가는 천하에 책임을 지는 공가다. 그러나 그는 어린 방석을 후사로 삼아, 창업에도 큰 공을 세운 장성한 다른 왕자들의 불만을 샀다.(p.361)” 결국 그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이성계는 자식들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만든 왕좌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맞았다.

 

태조 이성계는 만백성의 존경을 받던 상승의 무장임에도 나이 어린 떠돌이 지식인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자세, 이것이 이성계를 개국시조로 만든 가장 큰 자산이었다. 그는 늘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주변의 인망을 얻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지혜는 누구 못지않게 수많은 역사서를 섭렵한데서 나온 지식의 산물이었다. 과거사인 역사 공부를 통해 현재사인 시대를 통찰하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바로 이런 섬김의 리더십과 시대를 읽는 지혜로 창업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냈다.(p.360)” 이렇게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하였다. 우리의 현실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만큼이나 복잡한 주변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복잡한 세계정세 속에서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때라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 실록 1>을 통하여 고려말 원나라의 쇠퇴와 홍건적을 비롯한 각 지방의 반란으로 중국의 혼란과 왜구의 준동 등에 대한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이후 한양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새 왕조가 개국하고 도읍을 정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님에도 그 비중을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개국 후 이성계의 활동에 대한 기술이 소략하였다.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역시 준비과정 설명 없이 너무 간단히 기술했다. 그러나 민족사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실록 번역이라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옛 기록과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밝혀야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만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하여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자하는 민족사관을 갖는 독자가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k******4 2023.08.27. 신고 공감 14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