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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읽고 나서 아침과 저녁이란 제목이 상당히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아침은 다가오는 것, 저녁은 사라져 가는 것 그런 의미로 제목을 읽을 때 별로 어색하지가 않다. 2023년 노벨 문학상 작가 욘 포세의 작품,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죽음 이후의 일들을 그린 내용을 다루고 있어 조금은 낯설고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신비로운 세계를 정물화처럼 보여주는 솜씨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한 사람의 탄생과 죽음을 적고 있다. 탄생은 아버지의 시각으로 그려나가고 있고 죽음은 본인의 시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탄생은 그런대로 우리가 자각하면서 만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아이들의 탄생을 통해 더러 보고 느끼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죽음의 장면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비가시적인 세계이니까 그리는 사람도 그 현장을 목격하는 사람도 신비적인 요소가 곁들여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글의 내용은 몸을 떠난 영혼이 일상을 살아가는 듯이 그려나간다. 하루의 일과를 보내고 있는 듯, 스스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런 삶에서 인물들의 모습은 역동적이지만 정물화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영상처럼 느껴진다. 그러기에 내용에 아프거나 슬픔 등의 감정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책을 보듯이 인물의 생활을 따라가게 한다.
저자의 성장 과정에서 있었던 공간이 글의 배경이 많이 되고 있다. 노르웨이의 해안 마을, 바람과 파도, 늙은 어부의 삶, 그곳에 머물고 있는 많은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 등이 글의 재료가 되고 있다. 작은 마을이 지니는 이미지도 작품에 그대로 녹아 흐른다. 문체는 구어체를 사용하면서 쉽게 친근해질 수 있게 이끌어나간다. 반복과 열거 등이 글의 많은 부분에 등장하면서 내용의 흐름을 이끌어 나간다. 문장 상으론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내용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면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글을 따라가게 하는데 조금 힘들게 만든다.
오늘은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는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요한네스는 생각해보지만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으니까. 다른 것은 단지 그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페테르를 만났고 지금은 페테르와 그의 게망을 걷으러 바다로 나가고 있다는 것뿐, 그리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 그랬지, 무엇보다 연금 수령자가 된 후로 더 이상 생계를 위한 낚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어, 그냥 나가고 싶을 때만 나가게 된 후로는, 그래 물론 페테르와 더 자주 어망을 걷으러 바다로 나갔었지.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이 흐른 아침 모든 것이 이토록 크고 선명하게 눈앞에 보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군.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p75
사후 세계를 이야기로 구성했다. 영혼이 만나는 일상을 적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게다. 이야기에서 현재 상황을 제거하면 기이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독자들은 등장인물이 선명하게 느끼는 내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무슨 내용인지 따라가다 보면 혼미한 상황에 처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나는 일들을 적고 있다.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이한 세상이다. 독자들에게 그 세상 속에 몰입하도록 한다. 따라가지 않으려 하면 이야기도 거리를 둔다. 등장인물도 독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따라오게 하면서 그가 만나는 세계에 동조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일상이다.
그 일상이 독자가 보기엔 비가시적으로 다가온다. 흔히 삶과 죽음에서 얘기되던 실체가 없는 영혼들의 이야긴데, 이야기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믿지 않는다면 언어를 만날 이유도 없다. 믿어 주니 영혼들의 길도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독자들은 또 하나의 길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의 효용성을 가지면 되리라 생각된다. 그 진위의 내용에는 의문을 달지 않아도 좋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세상이고, 삶의 한 영역을 넓혀나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책이 기이한 세상을 만나게 한다. 저자는 이야기에서 죽음 이후의 길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영혼이 길을 떠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육신은 벗어놓고 기존의 지인들과 사물은 그대로 두고 이미 떠난 지인을 불러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난 일상들을 일깨워 보여준다. 그것은 현재의 모습이 변화한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이미 떠난 사람들을 불러와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든지, 지난 아득한 시간의 일을 재생한다든지 하는 일은 현실속의 인물들에게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생각의 차이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선택과 판단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이런 생각에서 종교가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한다.
왔다가 가는 것, 이것은 생명의 분명한 길이다. 인간들이 늘 궁구하는 세계이고 아직도 궁구하고 있는 일이다. 이 글도 그런 철학적인 문제를 줄거리가 있는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으면서 독자들에게 삶을 궁구하게 한다. 또한 삶의 요소를 생각해 보게 만들면서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인지하게 한다. 긍정적으로, 밝게 채색하면서 주어지는 것들을 수용하는 자세가 삶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쉽지 않은 주제를 통찰과 선험적인 지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퉁해 저자의 다른 책들을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곧 기회가 닿으리라 마음에 새겨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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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월의 다섯 번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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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올라이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출산을 앞둔 마르타의 방에선 비명소리가 들렸고 늙은 산파 안나는 올라이를 진정시켰다. 잠깐의 고요함이 지나고 마르타는 아들 요한네스를 낳았다.
"그래 그런 거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다 잘 될 거야, 올라이가 말한다"
자식을 얻은 올라이는 기뻤고, 요한네스가 어부가 되길 바랐다. 요한네스는 자신과 같은 길과 인생을 걸을 것이라 상상한다.
침대에서 일어난 요한네스는 어느 때와 같이 커피를 마신다. 빵을 먹고 담배를 피운 후 밖으로 나가 창고에 들린다. 그는 이제 손자도 있는 어엿한 할아버지다. 그는 모든 행동과 장소마다 먼저 떠나간 부인 에르나를 생각한다. 창고 안에서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다시 들어가지만 부르는 것은 없었고, 달라보이는 물건들만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보는 것들이 모두 이전과 달라있었다. 창고에는 에르나와 자신이 쓰던 물건들이 있었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그리고 저 위 창고 다락에는, 오랜 세월 모인 많은 물건이 있다"
평생을 어부로 산 그는 평소처럼 배를 몰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가는 길에 마을의 집과 풍경을 보며 많은 것을 주고받으며 살아갔던 이웃들과 친구 페테르를 생각한다. 그런데 해변에 도착하니 죽은 친구 페테르가 서있었다. 요한네스는 놀라 두 눈을 의심하며 페테르에게 돌을 던져보는데, 돌멩이는 그의 몸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평소와 같이 말을 걸며 담뱃불을 붙여주며 옛날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둘은 물고기를 잡으러 배에 올라 서쪽 바다로 향한다.
한때는 힘센 장정이었던 요한네스가 늙은 모습을 보며 페테르는 한탄한다.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늙고 쇠약한 모습을 바라본다. 서로가 서로의 늙음을 바라본다. 계속 낚싯대를 던지지만 배 밑바닥 일 미터쯤 아래서 계속 멈춘다.
"우린 더이상 한창때가 아니지"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늙는다는 건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일까. 더이상 얻는 것은 없는데 하나씩 잃어간다.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지만 느껴야 하는 것. 그저 그런 것.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 (...) 그런데 이제 그녀는 영영 가고 없다 (...) 그래 그런 거지, 요한네스는 말한다" 늙어가며 하나 둘 떠나간다. 젊음도 물론이요, 주변 것들까지. 그리고 기억이든 물건이든 흔적만이 남는다.
낚시가 되지 않아 다시 집으로 향한다. 요한네스는 부두로 올라 집으로 향한다. 페테르의 배는 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에르나만 집에 있다면, 그럼 더 바랄게 없을 텐데"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에르나가 마중을 나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 사라진 에르나는 집에 도착하니 주방에 있었고, 평소와 같이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해변에서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룬 에르나는 7명의 자식을 낳고 열심히, 또 행복하게 살았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딸 싱네를 발견하고 그녀를 부르지만 싱네는 그를 통과해간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느낀 싱네는 아버지가 걱정돼 집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요한네스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다가와 죽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둘은 고깃배를 타고 저 먼바다, 저 세상 너머로 가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 요한네스는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며 말한다. "아래는 궂은일이 생겼구먼"
표면적으로는 삶의 마지막 날에 유령이 되어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 죽음을 느끼지 못한 주인공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한네스는 분명 죽어 무언가 달라짐을 느꼈지만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는 평소와 같이 살다가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 것도 잘 몰랐을 것이다. 요한네스는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어부로서 살았고, 물려받고 또 물려주며 가정을 만들어갔다. 기대를 받고 태어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들을 겪고, 떠나가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맞는 인생이 그려진다.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저 그런 인생의 순리다. 그렇기에 늙음에 대한 한탄이라기보단 늙음에 대한 인사로 보인다. 배를 타며 자신이 살던 곳을 희미하게 떠나보내는 것처럼 인생의 막바지에서 삶은 희미하게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아침 그리고 저녁>만의 특징은 대부분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장들은 쉼표로 끝나 잠시 쉬어갈 뿐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아침과 저녁은 이어지고 삶의 시작과 끝은 흘러간다. 마침표가 등장하는 문장은 해설에서 말하듯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문장, 요한네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일상이다." 나의 의지에서 이어져 나에게서 끝나는 행위엔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러나 타자(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 세상 또한 포함된다)와 연결되는 순간순간은 정확함과 끝을 모를, 멜랑꼴리함으로 채워진다. 이것이 욘 포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다.
욘 포세는 구체적인 행위와 감정을 설명하기보단 서사의 힘으로 이야기를 밀고 간다. 작중 친구 페테르의 말에 따르면 저 너머 세계에는 말조차 없다.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그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과정을 겪고, 세월의 고약함을 느낀다. 남겨진 사람은 떠나간 존재의 공허를 몸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되살린다. 삶은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삶의 기대와 안정 속 파편들, 또 지나가는 작고 작은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리운 과거의 나와, 그리운 사람들에게 바치는 한 인생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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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받아 구매했다. 1부는 요한네스의 탄생을, 2부는 요한네스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그린다. 책을 다 읽고 제목이 지닌 의미를 생각했다. 아침 그리고 저녁. 태어남 그리고 죽음. 쉼표 때문에 침묵이 소설을 이끄는 느낌이다. 읽으면서 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지내는 요한네스,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매일 똑같은 일상 속 불현듯 찾아온 죽음 앞에서 난 무엇을 떠올릴까. 좋은 경험을 많이 만들고 싶다. 몇 개월 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매일 각성하지 않으니 사소하고 더러운 생각에 묻혔다. 뒤돌았을 때 좋은 추억을 많이 갖고 가는구나, 삶이 참 좋았구나, 약간의 아쉬움만 남긴 채 떠나고 싶다. 내 마음이 부정적이고 거친 생각에 휘둘릴 때마다 이 책을 꺼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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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을 직접 진행하지 않고 멤버로 참석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최근에는 다른 모임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던 중 관심갖고 있던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다는 곳이 있어서 회비를 내고 참석했다. 그 책은 바로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학원 일과 사적인 일로 두꺼운 책은 읽을 시간이 없었는데 다행히 이 책은 150쪽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장편소설이라 부담없이 읽기 좋았다. 제일 먼저 접하게 된 건 즐겨 듣는 팟캐스트 '서담서담'. 서미란 피디가 극찬을 해서 어떤 책이길래 그럴까 궁금했다.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 듣는 것과 직접 읽어보는 것은 달랐다. 한 문장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요하네스가 평범하게 태어나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다.
책은 주인공 요하네스의 삶과 죽음을 아침과 저녁으로 표현했다. 그가 탄생한 시간은 저녁이었고, 죽은 시간은 아침이었다. 어찌 보면 삶과 죽음은 아침과 저녁처럼 그리 멀지 않다. 문장에는 쉼표가 수없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반드시 찍어야 할 문장에서만 마침표를 찍는다. 불필요한 수식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주어와 동사로 단순하게 쓴 문장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삶이 평범하게 흘러가듯 문장도 그렇게 흘러간다. 요하네스의 탄생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조용한 어촌 마을. 거창한 사건이나 성취, 극적인 사고도 없는 한 평범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평생 일곱 명의 자녀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매일 고기를 잡으며 고단한 일상을 살아왔다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녀가 장성하여 이제 맘 편히 노년을 즐기려고 보니 절친한 동네 친구와 아내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고 조용한 집에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한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도, 삶과 죽음은 숭고하고 가치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랑을 하고 일을 하고 성실하게 살다간 인생은 특별할 것 없어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가장 보고싶은 사람이 마중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요하네스가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친구가 다정하게 그를 맞이한다. 독서모임에서 마중 나올 것 같은 사람을 얘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배우자나 부모님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우리 비키가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필사] 15-16쪽 아이가 이제 곧 나온다, 마르타, 아이의 어머니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43쪽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133쪽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135쪽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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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산파 안나가 올라이에게 더운물을 더 달라고 말한다. 올라이는 더운물을 대야에 떠 담으러 가면서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오늘 사내아이 요한네스가 태어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뱃속에 머물러 나오지 못했던 끔찍한 일을 당했다.(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일로 인해 돌아가신 듯하다) 그의 아내 마르타에게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신이 그토록 매정할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자애로운 신 못지않게 사탄 역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올라이는 의심해본 적이 없다, 세상은 좀더 미약한 신이나 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자애로운 신 역시 존재하니까, 그렇다, 올라이는 부엌 식탁 머리의 자기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신의 보살핌을 받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태껏, 그는 잘살아왔다 그리고 아내와 딸 마그다를 너무도 사랑했다, 아니 그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마그다가 있는 한 그들은 부러울 게 없었다, 그 아이가 있음을 신에게 감사해야 마땅했다, 그래 그들 부부의 생각은 그랬다, 마르타도 올라이도, 그러다가 마르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신이 그들에게 자식을 하나 더 보내줄 것임이 자명해졌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사라지자 그들은 신의 축복에 감사드렸다, 또 한 아이, 그리고 이번에는 틀림없이 사내아이가, 작은 요하네스가 태어날 것이다, 올라이는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날 그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올라이는 부엌 식탁 머리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생각한다, 이번에는 아들일 거야, 아들이 확실해, 확실치 않은 건 단지, 아이가 살아서 이 세상에 테어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이 험한 세상에, 문제는 그것뿐이다, 올리아는 생각했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태어나준다면, 뭐라고 부를지는 망설일 필요도 없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는 마르타에게 말해두었다, 뱃속의 아이는 요한네스라 부르겠다고, 올라이의 아버지처럼,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 어울리네, 그녀는 말했다, 어린 요한네스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갖게 되는구나, 올라이는 생각한다, (p. 13~ 15) 요한네스는 무사히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새 노인이 되어 손주들도 여럿 있다. 아침이면 몸이 뻣뻣하고 찌뿌듯하다. 오늘은 웬일로 가볍다. 몸뿐만 아니라 물건들도 다르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르다, 평소와 다름없는 물건들인데 왠지 귀해 보이며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묵직해 보인다, 여느 때보다 훨씬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 같으면서 전혀 무게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게 마음에 드느냐 하면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고와 다락은 당연히 평소와 다를 게 없으니까, 다르게 보고 경험하는 것이 있다면 단지 그 자신일 텐데 그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p. 44)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이 그런 날이니까. 어쩐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요하네스는 생각한다. (p. 58) 그러다가 저녁에 이른다. 아침 그리고 저녁, ‘그리고’ 라는 접속 부사에 많은 것들이 담긴 소설이다. 작가 욘 포세는 이 접속사를 좋아하는지 글 안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마침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쉼표를 쓰거나, 아예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마치 마침표는 읽는 이의 몫이라는 듯. 이야기도 그렇다. 직접 알려 주는 게 별로 없다. 에둘러 말하고 있어서 행간을 잘 살펴야 한다. 그에 비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명백히 드러낸다. 올라이와 요한네스, 그리고 구두장이 야코프를 통해 강조한다. 그래 구두장이 야코프는 사람이 좋고 믿음도 강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못 낼 만큼, 그랬고말고,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었다, 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무슨 수로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지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신 말이에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말이 옳았던 거야,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그 점에서 그는 구두장이 야코프와 생각이 같다, 여하튼 구두장이 야코프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무신론자 비슷하게 비쳤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구두장이 야코프는 친절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주고도 돈을 거의 받지 않았다, 길모퉁이 작은 공방에서 일하던 좋은 사람, 구두장이 야코프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가고 없다, 그렇다, 머지않아 이곳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라고는 없게 될 것이다,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p. 51~ 52)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은 멀리 떨어져 있어 끔찍한 일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얼핏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자애롭고 선한 사람들은 곁에 많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요한네스도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 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한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 (p. 135) 요한네스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마지막에 누이를 찾을 때 절실히 느꼈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왜 아버지 올라이와 원만치 않았는지도. 그는 아버지가 이룩했던 홀맨에서 더이상 살 수 없어 외진 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막내 싱내와 어린 올라이가 태어났다고. 친구 페테르와 오랜 세월 함께하고, 구두장이 야코프에게 도움도 받으며 외졌던 곳을 다르게 바꾸어 놓은 듯.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동사가 있다. 생각한다.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자애롭고 선한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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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작은어촌에서 태어난 요하네스의 출생과 삶,죽음을 담백하게 그렸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성실한 남자의 인생을 충분히 이야기 한다. 행복은 늘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는걸 보여준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 목숨보다 소중한 자녀들. 말 안해도, 다 알아듣는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 그리고 시간이 흐른고... 노년의 쓸쓸함,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 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거기 있다. 죽음에 대한 간결하고, 친절한 안내서 같은 책이다. 절제된 이야기지만, 절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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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의 시작과 끝을 압축적이고 매우 독특한 단문의 신비주의적 문체에 담아 담담하게 그려낸 책이다. 아주 오랜만에 독특한 문체의 소설은 처음이라서 새로웠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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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짧은 소설에 번역가의 말처럼 한 인간의 '삶'의 원형을 닮아 낼 수 있을까?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듯, 요한네스의 탄생과 죽음을 그려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아침과 저녁이듯 삶의 시작 탄생과 끝인 죽음을 그림으로써 삶 그 자체를 드러낸다. 욘포세의 실험적(그는 스스로 실험적인 문체를 시도한 적이 없다고 한다)인 문체는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효과적이다. 마침표를 써내지 않는 그의 문장에선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 마침표가 없는 생명의 순환이 느껴진다. 과거형, 현재완료형이 아닌 현재형 문장은 삶의 '지금, 이 순간'을 강조하는 듯 하다. 삶의 시작과 끝은 서로 이어져 있고 현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책이다. 특정 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위대함의 유일한 지표인 것은 아니나, 노벨문학상 수상이 허투가 아님을 보여준 듯 하다. 그의 다른 작품도 너무 궁금해진다. 다른 분들도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소설이다. 분량이 짧아 부담스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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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단편 소설이 아닌 이상(사실, 단편 소설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짧은 소설은 작가의 역량이랑 조금 상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만큼 긴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끌고 갈 능력이 없다는...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작가들도 인간이다보니 책상머리에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뭔가를 써내려나가는 것이 쉽지 않겠지. 첫 챕터를 읽을 때에는....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지만, 나도 임신을 해서 출산을 한 번 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여성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니 나는 할 수가 없겠지. 하지만, 내 몸을 통해서 또 한 생명을 만들어 내는...그 과정과 느낌이 정말 궁금했다. (물론, 이 때까지만해도 책이 이렇게 결론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미리 정해두고,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는 올라이의 초조한 모습을보니, 나는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저런 초조함과 설레임이 있었을까....나는 과연 그런 기대와 축복 속에서 태어났을까...그런 기대와 축복은 삶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자책이나 미안함 혹은 무관심이나 외로움 같은 것으로 변질 될 수 있을까하는. (나는 요즘 종종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움 보다는...뭐랄까, 막상 살아보니,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텐데...왜 그렇게 아집과 남루함과 외로움으로 일관된 삶을 사셨을까 하는...그런 연민이 맞을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번째 챕터를 읽었는데... 사실 많이 당황스러웠다. 애면글면 살아간다하더라도, 가장 아름다웠을 것 같은 이야기는 모두 건너뛰고 곧바로 죽음의 이야기가 나오니.하지만, 당황스러움도 잠시. 괜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쓸쓸함은... 뭐랄까...지금의 기쁨이나 슬픔들이 모두 한낱 꿈 같고 덧없어...나의 즐거움이나 불안도...그저 바람을 훅 불면 날아갈 수 있는 편린같은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먹먹했다. (어제 늦은 밤까지 이 책을 읽고 잠이 들었었는데, 꿈속에서 아주 오래전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 혹은 조금 친분이 있던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 했고 소소한 즐거움의 시간을 가졌었다. 이 책의 여운이 꿈속으로 따라들어온 것인가.) 여하튼 다시 책 이야기로 넘어가면... 요한네스와 서로 머리를 잘라주곤 했던 절친 페테르가 두번째 챕터에 함께한다. 별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마지막 즈음에 그가 가장 친했었기에 마중나왔다지. 어느 날 나에게 그런 시간이 다가온다면...나는 가족도 친구도 필요없고...그냥 내가 기르던 개가 나를 마중나왔으면 좋겠다. 너무 보고 싶었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미안했다는 말을 하는 대신....그냥 조용히 개를 한 번 꼭 안아주고, 터덜 터덜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 그럴수만 있다면...정말 나의 저녁은 낮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임. 책은 나쁘지 않다. 사실 좋은 책은 글도 중요하겠지만, 읽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더 좋을 수도 덜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겐 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항상 죽음과 삶에 관심이 많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겠는가...항상 고민하며 살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을 때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은느낌이였는데, 다 읽고나서 확인해보니 의외로 많은 희곡을써서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뭐 그랬다고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