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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밝은 방』은 많은 사람이 읽었지만 끝까지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진의 본질을 더듬는 이 마지막 저작은 겹겹의 상호텍스트가 포개진 양피지 같아서, 하나의 체계로 깔끔하게 정리하려 들면 오히려 빠져나간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영문학자 낸시 쇼크로스는 바로 그 난해함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 책은 『밝은 방』 자체의 해설서라기보다, 바르트가 30년에 걸쳐 사진을 어떻게 사유해왔는지 그 궤적 전체를 복원해 마지막 책에 이르는 길을 놓아주는 지도다. 핵심은 바르트의 입장이 극적으로 뒤집힌다는 데 있다. 쇼크로스는 그 변화를 시기별로 추적한다. 1950년대의 바르트는 철저한 기호학자였다. 『신화론』에서 그는 사진을 해독 가능한 기호로 보았고, 사진이 꾸며낸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러운 것처럼 둔갑시키는 위험한 매체라고 경계했다. 사진은 분석하고 폭로해야 할 대상이었지, 매혹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1960년대를 지나며 그는 사진이 사물이 거기 있었다는 의식을 강렬하게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1970년대의 『기호의 제국』과 『S/Z』에 이르면 입장이 상전벽해처럼 바뀐다. 기호학에 환멸을 느낀 그는 더 이상 기의를 해명하려 애쓰지 않고, 의미로부터 해방되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글쓰기 스타일도 분석적 논문에서 단상과 조각의 형식으로 옮겨간다. 사진을 혐오하던 기호학자가 사진에 탐닉하는 사람으로, 의미를 해독하려던 학자가 의미가 면제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으로 변해간 것이다. 책은 이 변화를 다섯 개의 상호텍스트로 나누어 분석한다. 1장은 『밝은 방』 이전 바르트의 사진론을, 2장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발명 초기에 구가한 신화를 다룬다. 쇼크로스는 다게르와 탤벗이라는 사진술의 두 창시자를 대비시키며, 과학과 예술의 협력을 지지한 탤벗이 아니라 예술과 환영과 오락의 세계를 대변한 다게르 쪽에 바르트가 가담했다고 짚는다. 바르트에게 사진의 힘은 살아 있는 한 영혼을 이미지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3장은 보들레르와 바르트를 나란히 놓는다. 보들레르가 사진이 예술의 아우라를 감소시킨다고 우려하며 사진을 예술 바깥으로 밀어냈다면, 바르트는 사진에서 발견되는 마법을 예술가의 마법이 아니라 시간의 경계를 넘어 살아남는 빛의 마법으로 읽는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밝은 방』의 그 난해한 형식 자체가 바르트의 사유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밝힌다. 1970년대의 바르트는 에세이와 소설의 성격을 겸비한 제3의 형식, 곧 모든 환원적 체계에서 벗어난 글쓰기를 추구했다. 『밝은 방』이 두 부, 각각 24개의 절로 쪼개져 있고 절에서 절로의 이동이 무작위적이고 비약적인 것은 결함이 아니라 의도다. 문장과 문장을 논리로 단단히 묶지 않고 그 연결 고리를 일부러 건너뜀으로써, 해부하고 분석하는 작업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쇼크로스는 이 단장 형식이 사진을 바라보는 바르트의 태도와 같은 결을 이룬다고 본다. 단장이 결정적 해석 없이 단상을 흩뿌리듯, 사진 역시 의미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이 열리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5장은 이 책에서 가장 독창적인 분석이다. 쇼크로스는 『밝은 방』의 핵심 개념인 푼크툼, 곧 사진이 보는 이를 찌르는 그 지점을 시간의 문제로 재해석한다. 바르트가 시간이야말로 사진의 푼크툼이라고 했을 때, 그 인식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처럼 객관적 시간과 객관적 관찰자를 부정한 현대 물리학의 시간관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물리적 시간을 틀어막는다. 바로 그렇게 시간을 고정하기 때문에 사진은 완전히 시간을 벗어난 영원처럼 보인다. 사진이란 시간의 그림이라는 이 통찰을 자연과학의 언어로 뒷받침하는 솜씨가 이 책의 지적 야심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의 미덕은 정통한 문학 비평의 방식으로 바르트를 읽는다는 데 있다. 사진 이론서들이 흔히 『밝은 방』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라는 개념 쌍만 떼어내 쓰는 데 반해, 쇼크로스는 그 개념이 나오기까지 바르트의 사유가 걸어온 30년의 여정 전체를 복원한다. 덕분에 독자는 『밝은 방』을 고립된 걸작이 아니라, 한 사상가가 평생에 걸쳐 기호학에서 벗어나 의미 너머로 나아간 긴 궤적의 종착점으로 읽게 된다. 조주연의 번역과 해제도 믿을 만하다. 그린버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대 미술 강의』를 쓴 미학자답게, 옮긴이 해제는 이 책을 사진 이론사 전체의 흐름 속에 정확히 자리매김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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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사진/낸시 쇼크로스/조주연/글항아리/2019(2022) 롤랑 바르트(1915-1980)는 프랑스 구조주의 -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로 흔히 소쉬르에 이어 기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철학자이다. 그는 사진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썼는데, 이전에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대해 글을 남긴 이후 가장 의미있는 글을 남긴 철학자라고 평가받는다고. 바르트가 사진에 대한 글을 쓸 때는 모더니즘이 쇠퇴하고 미국 중심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부각되었으며 회화와 조각이 주춤한 사이 사진계가 예술로서의 진지한 모색과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공교롭게도 딱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물론 사진은 이전의 예술과는 달리 대중문화에서 꽃피었고 또한 예술이라고 해도 팝아트와 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르이긴 했지만. 바르트 이후 사진에 대한 진지하고 심도있는 비평이 많아졌고, 사진 자체도 다양하게 활로를 모색하면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되기도 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에서는 사진이 예전과 같이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경하여 이전의 사진의 가치?를 전복해 버리기 때문.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의견도 자신의 철학적 견지를 발전 시키는 과정에서 달라지는 면모를 보이는데, 가장 마지막에 발표된 책이 바로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 이라는 짧은 책이다. 이 책은 물론 국내에도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는데 솔직히 읽었다고 해도 읽었다고 할 수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는데, 말하자면 그 문제적? 책인 <밝은 방>에 대한 주석서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은 짧은 서문에 이어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에필로그가 있다. 1장은 기호를 넘어서는 사진 - 이 장에서 저자는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연구한 맥락과 앞으로 이어질 장에서 언급될 여러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신화적, 기호학적, 구조주의적 연구 등등. 여기에는 기표와 기의, 에크리쥐르와 에크리방스, 상호 텍스트, 노에마... 같은 철학용어들이 당연히 등장한다.20세기 후반 철학계와 예술계에는 자포니즘 시대를 한참 지났음에도 일본 예술의 영향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바르트 역시 이에 영감을 받고 자신의 철학 체계에 그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2장 사진의 신화 - 사실상 사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일정 부분 담고 있는데 이전에 읽었던 사진의 역사 에서 읽었던 내용이 그야말로 잘 추려져 있었다. 바르트는 과학적인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사진을 완성시킨 이들이 사실상 화학자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진이 시간을 붙드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기에 시간에 대한 고민도 해는데 이 역시 20세기 상대론적인 시간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베그르송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예술은 외시적 메시지와 내포적 메시지가 있으며 사진은 명백하게 외시적 메시지가 강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포적 메시지가 분명 있으니... 3장 상응 : 샤를 보를레르(1821-1867) 다게레오 타입, 칼로 타입, 콜로디온 습판법 등 사진 기술이 배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던 그 시절에 시와 미술 비평으로 이름을 날랐던 문인이다. 그는 사진에 대해 예술과는 다르다고 다소 폄하하는 논지의 글을 썼으나 실상 그 역시 사진을 남겼고 어머니의 사진을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내막을 자세히 뜯어 보면 보들레르가 질색한 것은 사진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었다고. 즉 사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믿는, 자신 주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그런 대중의 태도 말이다. 어찌 보면 그의 생각은 지금 시대에 오히려 의미가 있기도 한데, 지금은 사진도 믿을 수 없는 시대이니. 물론 바르트나 이후의 수전 손택은 코드 없는(매우 직접적인) 메시지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와는 다른 맥락이다. 4장 밝은 방의 맬락 - 제 3의 형식. 바르트는 사진에 대해 전기에는 의미론적으로 후기에는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제 3의 형식을 찾아가게 되는데... 과연 그 자신에게서나 학계에서나 독자에게서나 성공이었을까. 사실 의문스럽다. 5장 시간 : 사진의 푼크툼. - 말이 어려운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본래 라틴어인데 바르트가 자신만의 철학 체계 내에서 새롭게 쓴 용어. 스투디움하고 반대되는 의미인데 일단 스투디움은 사진에 대한 일상적 의미 즉 사회 문화적 맥락속에서의 의미이거나 혹은 사진 작가의 촬영 의도라고 볼 수 있단다. 예를 들어 전쟁 사진을 본다고 했을 때 그 사진이 찍힌 장소, 시간, 인물 등 기본 정보?가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되니까. 반대로 푼크툼은 이와는 달리 예상치 못하게 그 사진을 본 한 개인에게 강렬한 감정적 충격을 주는 것을 말한다. 푼크툼의 뜻이 찌름, 찔림. 개인마다 지식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진을 보았을 때 연상되는 것이 다르기 마련. 따라서 이것은 보편적인 맥락이 아니고 사진을 찍은 이의 의도도 아니다. 이 부분의 내용에서 저는 바르트가 말하고자 했던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엉뚱한 부분이 와닿았는데, 바로 사진으로 인해 역사가 새롭게 탄생했다고. 사진이 탄생한 이후의 역사는 증언과 회상이 아니라 사진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분석을 과거에 부과했다고. 역사가 사회과학이 되고 자연과학이 되었다고. 사진은 그런 피지컬한 존재가 되었다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사진과 포스트 모던의 일견 모순된 관계에 대해 설명. 바르트는 유럽인이라 굳이 포스트 모던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고집했다고. 용어야 어쨌든 포스트 모더니즘 사진 이론에서도 사진을 독자적인 매체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문호적 맬락에 따라 의미작용이 달라지는 가변적인 매체로 보았다 하니 이것은 바르트가 전기에 내세웠던 의미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고. 하지만... 후기 존재론에서 언급한 사진의 본질적인 힘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한다고. 물론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알듯 모를 듯. 펴면 좀 알겠다가도 덮으면 다시 깜깜해 지는 철학책. 표지에 실린 사진이 맘에 들어서 읽게 되었다는. 과연 프랑스 철학 공부를 언제 제대로 할 기회가 있을려는지.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