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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독서하는가? 또 무엇을 위해 책을 모으는가? 독자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봐야 한다. 어떤 행위의 목적을 생각해본다는 건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불꽃같은 의욕이 솟구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문장 한 줄 읽는 것도 지치는 날이 오고, 모든게 회의로 치닫는 시절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 독자는 항상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준비해둬야 열정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인생 전체를 책과 함께 할 수 있다.
나에게 책읽기와 장서(藏書)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젊은 시절 책은 구원 그 자체였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어떤 이들은 한 권의 책으로 구원받는다. 성서나 그외 경전들이 그렇다. 내게 구원은 이 세상에 태어난, 혹은 태어날 모든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열을 두자면 성서는 세상 그 어떤 책보다 가치 있다. 지금도 성서 외에는 신앙에 방해물이 된다는 이유로 전혀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였다. 성서를 포함해, 세상 모든 책을 나는 구원의 도구라 생각했다. 좀 과장해서 그 많은 책을 읽기 위해, 나는 살아야했고 결국 책은 살아갈 이유와 동기를 부여했다.
둘째, 한번 읽은 책은 반드시 보관하는 버릇을 갖게 됐다. 장서는 취미라기보다는 독서의 부산물과 같다. 지금껏 내가 읽어온 책 모두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자 생의 이력이다. 서재가 손때가 묻은 책들로 가득 들어찬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와 동시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포만감을 선물한다. 평생 읽은 책으로 원대한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은 꿈이자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세상의 모든 독서가들이 나와 같은 기억과 이상을 공유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 <책 읽는 사람들>을 읽은 후, 유명한 독서가나 무명에 가까운 나같은 이나 그 시작과 과정이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망구엘은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의 직함은 다양하다. 소설가, 작가, 편집자, 번역가 등. 더군다나 그는 세계시민이었다. 남미의 불운한 정치적 환경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조국을 탈출해, 유럽의 여러나라와 미국, 캐나다 등으로 삶의 영토를 바꿔왔다. 여러 매체에 기고한 책과 독서, 인물과 자신의 삶을 다룬 글을 묶어낸 <책 읽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가 전념해 온 독서와 책에 대한 열망의 후기다. 난 그가 다양한 직함 가운데 `독자'로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시절 해외를 방랑하며 궁핍한 삶을 살아가던 그는 상금 욕심에 문학상에 소설 한 편을 응모해 당선되지만, 자신에게 작가보다는 독자로서의 삶이 맞다고 생각해 소설가의 길과 멀어진다.
한 편의 소설을 분석하며 그에 연관된 소설의 목록을 쉴새없이 토해내는 글쓰기에서 우린 독자로서 탁월한 망구엘의 재능을 확인하게 된다. 일평생 무수한 책들을 읽고, 그 후기를 적고,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 소장한 책과 독서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십수 편의 글들을 읽으며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주제는 `이상적인 독자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창작과 고뇌의 상징인 작가는 독서의 세계에서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는게 정당한 걸까? 독서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가? 육십 평생 세계를 떠돌며 세계시민으로서 책을 읽어온 망구엘의 답은 의외였다.
"이상적인 독자란?"이란 타이틀을 단 글에서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짧고 다양하게 변주해 나간다. 망구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독자에 대한 답을 몇 가지 옮겨보자.
" 이상적인 독자는 창작의 순간보다 앞서 존재한다 " "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절개해서 껍질을 들어내고 골수까지 파들어가, 동맥과 정맥을 일일이 추적해서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번역가다. 이상적인 독자는 박제사가 아니다." " 이상적인 독자는 책을 덮을 때마다, 자신이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더 불행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이상적인 독자는 돈키호테의 윤리관, 보바리 부인의 열망, 바스 여장부의 욕정, 오디세우스의 모험정신, 홀든 콜필드의 기개를, 적어도 이야기를 읽는 동안에는 공유한다." " 이상적인 독자는 밟아 다져진 길을 걷는다. `훌륭한 독자, 뛰어난 독자,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독자는 다시 읽는 사람이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로빈슨 크루소는 이상적인 독자가 아니었다. 그가 성경을 읽은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상적인 독자는 의문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 알베르토 망구엘 125~127 쪽, <책 읽는 사람들>
그는 책읽는 사람들의 능동성을 강조한다. 주어진 텍스트에 오직 만족하는 것은 망구엘이 생각하는 독서가 아니다. 독서는 취미가 될 수 없다. 개인소개란에서 취미를 독서로 기재하는 것은 이제 넌센스가 돼야 옳다. 책과 독서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가닿는 그의 결말은 놀랍도록 요즘의 내 생각과 비슷했다. 책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재료이고, 독서가 그 행위라는 것 말이다. 취미는 개인의 향락에 머물지만, 독서는 향락을 넘어선다. 독서는 이 세상을 지배했던 정치적 잔혹 행위를 `기억'하는 도구가 되며, 온갖 위협과 광기의 `피난처'가 된다. 독서는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도운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할 때, 누구에게도 인도받지 못한다는 당혹감이 밀려올 때, 우리는 글이 쓰인 곳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 독서가 갖는 위로의 힘이다.
18세기엔 노예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 돼 있었다. 심지어 노예는 성경도 읽어선 안 되었다. 왜 그랬을까? 성경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소책자'도 읽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노예 지배자들, 즉 권력자들이 독자를 두려워했다는 증거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시민의 무지를 은근히 희망한다. 시민의 무지는 쉽게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 국가는 대놓고 국민 독서 운동을 거창하게 진행하지만, 매년 독서율이 급격히 변동했다는 뉴스는 들어본적이 없다. 시민이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고자 한다면 먼저 독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무지한 유권자를 사랑하며, `책읽는 유권자'를 두려워 한다. 책이 작게는 개인을 구원하는 것을 넘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
"이상적인 도서관에서 독자의 역할은 기존의 질서를 뒤짚는 것이다" 143쪽
그간 독자로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시간 `쓰는 일'에 대한 선망과 희망을 가져왔다. 위대한 작가는 있어도 위대한 독자는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읽는 일보다는 쓰는 일이 더 품위 있고, 인정받는 일이란 편견 때문이다. 한 편의 글을 쓰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고달픈 과정이다. 몇 페이지의 글을 쓰기 위해 우린 수십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한다. 망구엘은 글을 짓기 위해 꼬박 이틀 밤을 새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그 날 이후 편안한 독자의 길로 되돌아왔다고 회고한다. 그가 훗날 소설 한 편으로 문학상을 거머쥐고도,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이유다. 그는 독자로서 책과 맞서는 짜릿하고 풍부한 경험을 더 사랑했기에 자족하는 독서가가 될 수 있었던 게다.
이 책은 놀랍도록 깊고 확장적인 독서의 힘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망구엘은 우리 시대의 정치인과 혁명가(체게바라)를 검토하고, 문학과 독서에 대한 영감을 주었던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의 기억을 되살린다. 단테와 피노키오 그리고 돈키호테의 작품과 인물들을 샅샅이 살피며, 어린 시절 읽어냈던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 편의 세계관에서 독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성실히 책을 읽어온 그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정치사를 가장 정확히 꿰뚫어보고, 서양 고전을 통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삶을 인문적으로 고찰할 능력을 뽐낸다. 그는 문필가로서보다 평범한 독서가로서 자신의 이력을 더 사랑하며, 이 책을 읽는 누구에게나 인문주의자 망구엘의 삶을 선망하게 한다.
책읽는 사람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며, 세상의 지식을 흡수해서 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린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자기발견의 여정에 들어서는 법이다. 그 어떤 취미와 사물도 책처럼 영혼에 직접 가닿지 못한다. 책읽는 사람은 `우리의 역사가 불의(不義)가 지배했던 긴 밤의 역사'임을 알고 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상을 읽으며,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읽어내는 조타수가 된다. 그래 책이 개인을 넘어, 사회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게다. 정치적 망명객으로 살며 일평생 세계를 떠돌았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곁에 책이 있었기에, 품위와 행복을 지키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왔다. 책이 가진 힘, 독서가 가진 위력을 그의 삶이 증거한다.
2013.1.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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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 알베르토 망구엘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그저, 우연히 알게 된 후에 '밤의 도서관'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통해 알베르토 망구엘이 현존하는 최고의 독서가라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다. 그런 사람들중에서도 엄청난 독서가들이 있다. 하루에 한 권은 가볍게 읽는 사람들.
1년에 한 권을 읽기도 버거울 수도 있는 사람에 비하면 하루에 한 권이상 읽는 사람들은 별종의 사람이라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특기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렇다 해도 하루에 한 권이상을 읽다니 나로써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2~3일에 한 권을 읽는 나도 적게 읽는 편이 아니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독서가라고 하여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칭타칭 책 읽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인데 책 읽는 것으로 유명하기 위해서는 나름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근거로 할 수는 없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알게 된다. 아니면, 나처럼 아예 읽은 책을 리뷰로 올리면서 검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책을 많이 읽고 책을 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책을 읽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좀 과하다 싶게 자신을 올리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1년에 150권을 겨우 읽는 내 입장에서 보면 1년에 최소한 300권은 읽는 사람들이라 감히 논평(?)하기에는 두렵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 수준이라는 것이 높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그 정도의 엄청난 책을 읽어도 깨닫고 느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또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면에서 세계 최고의 독서가라고 호칭받는 알베르토 망구엘은 모든 것을 거머진 독서가이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깊이와 넓이와 폭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단계로 책을 쓰고 싶어 진다. 모든 독자가 저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지속적으로 들어가다보니 쌓이고 쌓여서 분출되고 글이라는 형식으로 나와 글이 쌓이면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알베르토 망구엘 역시도 그런 과정을 거친 듯 한데 쌓아 놓은 책이 장난이 아니다보니 분출하는 글의 내용도 쉽지 않다. 분명히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 책을 읽기 때문에 무엇인가 국내의 저자들보다 좀 더 있어 보인다는 사대주의는 어느정도 있을 듯 하다. 그렇다해도 책에서 언급되는 다른 서적들이나 글을 읽어보면 단순히 번역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가 분명히 있다. 사실, 이 말은 글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번역이 잘못되어 글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책읽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쓴 글들이 아니라 저자가 여러 곳에 기고하고 강평한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한 것이라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중심은 없다보니 매 장이 끝나면서 끊긴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을때는 몰랐는데 한참 읽다보니 맥락이 좀 끊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지막에 역자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확실했다.
아무래도 책이라는 것은 전체의 주제라는 것이 있어 그 주제에 대해 관통하는 요소들이 있게 마련인데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쓴 글을 모아 편집하다보니 책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있을지라도 줄거리 맥락이 연결이 되지 않아 조금은 더디게 읽게된다.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동안 읽게되었다.
이 책의 매 챕터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내용중에 일부를 발췌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단순히 아이들이 보는 동화라고 하기에는 힘들정도의 난해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소설이라 볼 수 있고 그런 의미들을 몇몇 책에서 읽기는 했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읽기로 결심을 했다.
독서가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예외없이 인문서적들을 읽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실용서적만으로 그 경지에 이르거나 실용서적을 바탕으로 독서가라는 칭호를 받거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나마, 있는 책들도 실용서적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정도로 그치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독서가들의 범주까지는 이야기하는 책을 본 적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밤의 도서관'을 읽고 대단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읽는 사람들'까지 읽게 되었는데 이 번 책은 좀 별로였다. 이유없이 계속해서 도서관에 갈때마다 - 그것도 여러 도서관 - 꼭 이 책이 눈에 들어와 이번에 읽게 되었는데 그저 대단한 독서가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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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 이 책의 저자가 알베르토 망구엘이 아니었다면 특별한 기회가 되지 않는 한 이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냥 책을 읽으면 되는데 뭐 새삼스럽게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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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책읽기’ 자체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 책 읽는 사람이 줄었다고 하는 진단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느끼게 된다. 얼마나 책을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방식을 가지고, 또 그 방식으로 책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또 전하는 현상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읽는 사람들』은 제목 자체로도 그런 ‘책읽기’에 관한 책이다. 소개에 ‘세계 최고의 독서가’라고 했지만, 과연 ‘세계 최고’라는 것을 ‘독서가’에 붙일 수 있는 타이틀인지, 그리고 그가 ‘세계 최고’라는 것은 어떤 경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책을 읽고, 책에 대해서 쓰고, 그 책과 관련하여 역사를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또한 ‘세계 최고’라는 유일무이한 표현을 쓸 수 없을 지 언정, ‘세계적인’ 쯤은 써도 괜찮을 법하다는 것이다. 독서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그것은 세상과의 소통인 동시에 자신으로의 망명이다. 그리고 망구엘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소통이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의 망명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바가 드물다. 아마 책읽기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야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은데, 그런 경험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장정일의 『독서 일기』, 고종석의 『책 읽기, 책일기』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꽤 오래 전 일. 다시 책읽기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책읽기를 다시 생각하고, 내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반성하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그리고 또 다시 스스로 자랑스럽게 한다. 망구엘이 주목하고, 사랑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책들은 별난 책들, 또 최근의 책들이 아니다. 『돈키호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노키오』 같은 책들. 분명하게 읽어봤거나, 혹은 분명하게 들어왔던 책들, 아니면 그렇다고 생각하는 책들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는 그 책들을 읽었을까? 『피노키오』는 짧은 동화책 정도로 읽고 말았으며, 거기에 담긴 사회 비판에 대해서는 절대 생각해본 바가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었거나, 혹은 들었어도 그 세계에 대해 오묘한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돈키호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독서란 쉽지 않은 것이다. 독서란 독자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독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다고 했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괜찮은 문제가 아니다. 알베르토 망구엘도 여러번 인용하고, 옮긴이(강주현)도 인용하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해석의 한계는 상식의 한계와 일치한다.”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어지는 말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책읽기는 욕망인가? 욕망의 억제인가 독서는 위험하다. 독서는 텍스트를 기초로 해부하고, 다시 만들어 나의 것을 만드는 행위이다. 독서 자체는, 따라서, 상상의 힘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지배하는 (그게 어떤 것이든) 권력에 대한 반성을 한 축으로 삼고 있다 (또 한 축은 그 권력의 메시지의 전파다). 그러므로 독서는 의문과 사색을 동반하고, 사색과 의문은 권력에 대한 사색과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독서는 위험하다. 아니 그럴 수 있겠는가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는 어린이를 위한 여덟 권의 소중한 책으로 꾸며진 비밀 도서관이 있었다. 그 책들은 매일 밤 다른 것에 은밀히 감추어졌다.” (295쪽) 그리고 이런 메모를 해보았다. ‘나의 밑줄은 이 책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메모도.’ (193쪽의 메모) -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연하며 똑같은 텍스트를 수천 권씩 쏟아낸 반면에, 독자는 저마다 책에 낙서와 얼룩 등 온갖 종류의 표식을 남김으로써 각자의 책을 차별화한다. 따라서 읽힌 책들 중에는 똑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193쪽) (2012.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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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표지에는 '<책 읽는 사람들>은 '독서의 기술'에 관한 명상록' 이라는 추천글이 있다. 책을 다 읽고나서도 나는 이 말이 무슨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책을 읽는 행위에 마치 어떤 조직화된 기술이 필요한 것처럼 표현된 이 말 자체에 이미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독서는 텍스트로 들어가, 개인적인 역량을 총동원해서 텍스트를 탐구하고 재창조해 다시 회수하는 능력(328쪽)'이라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주장이 단순히 '기술'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는 '기교'가 아니라는 부정과, 독서라는 행위가 숙련될 수 있는 기술로 폄하된 것 같아 그에 따른 불쾌함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라는 기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저 읽는다는 단순한 행위는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해독하는 기술로서 배우고 익혀 숙련할 수 있는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그런 단순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기 위한 '스스로 깨달음', '자발적 배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망구엘의 이 책에서 확인한 것이다.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뭔가를 읽는 동물이며, 독서를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독서하는 능력이 우리 인간이란 종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것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려 한다. 풍경, 하늘, 타인의 얼굴에서는 물론이고 우리가 창조해 낸 이미지와 글에서도 이야깃거리르 찾아내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만이 아니라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까지 읽는다. 또 그림과 건물까지 읽고 해석하려 한다. (7쪽)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알베르토 망구엘이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과 강연록 등 39편의 글을 '독서'라는 매개로 묶어 출판한 책이니 만큼 책에서 전체적인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다. 1부의 첫장, '체 게바라의 죽음' 부터 꽤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만큼 망구엘의 글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오오, 조국도 이념도 아닌 인간애에 겨워 게릴라가 된 투사라니.
그런데 1부 첫장을 읽고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체'의 죽음이 과연 책읽는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글을 읽는 즐거움, 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또 확실하지 않은 이유로 어떤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고, 경이로움이나 섬뜩한 기운, 또는 포근한 감정을 느닷없이 느끼는 즐거움도 있다. (9쪽)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독서의 기술'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책이 인간이라는 종에게 필요한 이유 즉,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평범한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상식적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에 만족하는 수동적이며 억눌린 성인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책읽기에 관한 주장이다. 불의가 지배하는 긴 밤의 역사 속에서 비판하고, 때로는 경계를 넘을 줄 아는 상상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설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책 읽기라는 것을 주장인 것이다. 깊이가 있어 사색이 필요한 세계, 그것이 독서의 세계다.
책을 읽는 즐거움에 관해서라면 이보다 더 잘쓴 글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즐거운 책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직접적인 감각적 즐거움 외에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세세한 기쁨, 책을 읽고 글을 써서 밥벌이 하기를 원했던 꿈까지 어쩌면 그렇게 나와 꼭 같은지 이 망구엘 할아버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지금은 한마디로, '부럽다!'
헨리 제임스라는 사람은 한 작가의 전작에서 비밀 암호처럼 반복되는 주제를 가리켜 '카펫의 무늬'라고 칭했다 하는데, 망구엘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늬는 아마도 '책'이라는 씨실과 '읽는다'는 날실로 짜인 '독서'라는 무늬가 될 것이다. 그저 종이와 잉크로 된 인쇄물인 책, 즉 물질을 넘어 내용과 내용 사이를 흐르는 강과 같은 무늬를 조심스럽게 짜넣는 망구엘식 카펫. 그리고 나는 망구엘이 짜놓은 카펫의 기호를 내 나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 나만의 무늬를 바로 나의 카펫에 새기고 있다.
책을 덮고, '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어도 좋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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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세계 최고의 독서가가 말하는 책 읽기의 즐거움이란 무엇일지 너무나 기대되고, 궁금했던 책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볼때 읽을 사람들은 다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일년 평균 한 사람이 읽는 독서량의 몇 배, 때로는 몇 십배를 읽는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제법 많은 책을 읽는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새로운 책이 쏟아져 나오고, 이전에 나온 책들까지 생각하면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너무나 많다 것을 안다.
개인적으로 이 책처럼 누군가의 독서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을 좋아한다. 간혹 내가 읽은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러면 저자는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고, 또 내가 읽어 보질 못한 책에 대해서는 그 책이 어떤 이야기를 내게 건낼지, 나의 독서 취향에 맞는지도 상당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인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저자 약력을 보니 상당히 저명한 인물인것 만은 확실해 보인다. 책의 유용함은 이룰 말할수 없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전 시대를 아우르는 누군가의 지혜를 책 한권만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괜히 나온게 아니다.
총 6부에 걸쳐서 진행되는 다양한 책 이야기는 책의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저자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피노키오의 모험』『보물섬』『돈키호테』『오디세이아』『신곡』등이 그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어울어져 있어서 이 책은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책에 대한 감상평만을 쓰고 있다면 이 책은 그냥 읽기만 하면 될테지만 알베르토 망구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책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런 특별한 의미가 담긴 책이 언급되는 부분은 좀더 주의깊게 읽게 된다.
거장은 확실히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다르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또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조금은 배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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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좀 한다는 사람들도 이 사람 앞에서는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망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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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은 ‘진실의 견인’(pp. 41~54)이란 글에서 아르메니아인의 대량학살을 부인하는 터키 정부와 그것을 고발하는 흐란트 딘크가 살해당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안데르센의 <임금님의 새 옷>,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거울 나라의 엘리스>를 넘나들고, 루이스 보르헤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한 사회에서 잔혹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아니 잔혹한 행위가 반복되더라도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지 않도록, ‘기억의 의무(duty of memory)’가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글과 단어는 정곡을 찌르면서도 현란하기 까지 합니다. 그는 어떤 사실이 나중에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어도 처음 입력된 정보의 힘이 워낙 커서 진실이 아닌 사실을 진실로 기억하는 것을 ‘기억의 견인(perseverance of memory)’이고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일 수도 있지만 사생아를 낳을 수도 있다”(p. 51)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억의 견인’보다 더 강력한 견인은 ‘진실의 견인(perseverance of truth)’이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터키 정부가 잔혹행위를 은폐하려고 하는 반면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잔혹행위를 인정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일본이 우리나라,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을 부인하고 역사왜곡을 해서라도 은폐하려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저자의 말에 조금은 위안을 받으며 우리의 국가관, 인생관이 어떠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작가, 사람들이 그를 ‘책의 세헤라자데’, 혹은 ‘독서계의 돈 후안’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들을 제대로 읽어내야 망구엘과 같은 글들을 쓸 수 있는 것일까요? 그는 수많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수많은 책들을 언급하면서 독자를 그 주제에 푹 빠져들게 합니다. 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 철학자 플라톤의 글과 안데르센의 동화와 루이스 캐롤의 책을 연결시킬 수 있다니! 그는 체 게바라 이야기를 하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과 성경 마태복음10장 34, 35절을 연결해서 언급합니다. 망구엘이 「책읽는 사람들」에서 언급한 책들은 너무나 많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목들도 흥미롭습니다. ‘세이렌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피노키오는 글 읽기를 어떻게 배웠을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컴퓨터,’ 등등. 망구엘에게서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고 도전받았습니다. 망구엘의 다른 책들을 찾아봅니다. <독서의 역사>, <밤의 도서관>, <독서일기>, <나의 그림읽기>,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등 주로 독서와 관련된 책들입니다. 그의 책들을 모조리 구입해서, 거기에 언급된 책들은 모조리 읽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그와 함께 독서의 세계로 풍덩 빠지고 싶습니다. 그는 ‘책의 세헤라자데, 독서계의 돈 후안’ 맞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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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들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
아! 무슨 말로 서평을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합니다. 지금 내 심정은 감히 내가?라는 딱 한마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뜻 합니다.
그렇잖아요,,, 알베르트 망구엘이 누구입니까? 세계에서 자타 공인 가장 책을 많이 읽어온 사람,,, 독서 인생 60년간 무려 3만 권 이상의 책을 스페인어·프랑스어·영어·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읽어온 분이 아닙니까?
"내 기억은 나 자신보다 책 자체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하다며 최초로 기억하는 책이 2~3세였을 때 자신의 침대 위 선반에 가득 꽂혀 있던 책들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알베르토 망구엘은 (페이지 312에 이 말이 나오는데요,,, 아,,나는 대체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답니까?)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한 독서가이지요,,,
그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우리는 아마 그를 <독서의 달인>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편집자, 작가로도 활동 중인 그는 그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가" 로 자신을 소개하고 싶어합니다. 독서가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그가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제목 -책 읽는 사람들-을 가지고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책의 저자와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멋진 책! 이 매력적인 책이 나를 유혹할 땐 무조건 넘어가고 보는 것이 미덕이겠지요? 이제 겨우 책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조금 알아가는 내가 -사실 아직도 의무적인 책 읽기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 최고 독서가의 독서법을 공유할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책을 손에 쥐자마자 습관대로 목차부터 훑어 보았습니다. 알베르트 망구엘이 쓴 39가지의 에세이가 8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펼쳐지고 있더군요. 저처럼 독서가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아직 찾지못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재대로 된 독서일까? 위대한 책을 위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글이 아닌 독서를 통한 ‘창조적인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등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자신에게 던져보았을 것 같은 질문이 책에는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책 속으로 가보니
비망록
한 편의 글이 세상을 바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아니어도 지혜로 발전할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는 그 무언가가 책 속에 있다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말은 우리가 왜 독서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거짓 없이 쓰인 글을 읽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순간이 올 때면 저는 종이 위에 인쇄된 문자를 통해 작가와 은유를 교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은밀한 기쁨을 통해 우리는 성장해 가는 것 아닐 까요?
이상적인 독자
이 책은 총 8부로 나누어 주제별로 독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나는 그중에서 3부 이상적인 독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더군요.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피노키오는 글 읽기를 배운 후에도 단어는 읽지만, 글을 소화하지는 못한 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읽기만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피노키오식 독서법을 빗대어 언어의 모호한 특징을 찾지 못한 수박 겉핥기식 독서는 어떤 책도 진정으로 자신의 책이 될 수 없을 것이라며 비판합니다. 비단 피노키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책을 읽다가 속으로 뜨끔한 독자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 상식을 교육제도를 통해 습득함으로써 -피노키오가 글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이- 사회가 공유하는 어휘의 비밀을 풀어왔습니다.
우리에게 글을 가르치고 의미를 가르친 사회는 우리가 성장한 후에도 편협한 어휘로 가득한 세계 속에 우리를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우리도 그 울타리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있다고 여기며 자기 생각과 감정, 상상력을 우리 주변의 세상만 보고 키워갑니다.
이상적인 독서가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진정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 해석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꼭두각시에게 자기발견이라는 최종적인 상태로 -페이지 143에서 인용- 나아갈 수 있는 독서가가 될 수는 없을까요?
이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 아우그스티누스의 컴퓨터
요즘 독서계는 전자혁명 속에 탄생한 전자책과 전통적 종이 책이 힘겨루기 싸움을 벌이는 중입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
종이 책으로 첫 독서를 시작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전자책에 대해선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는 방대한 정보와 기억을 자랑하는 전자책이 결국에는 독자들을 흡수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바로 그 장점 때문에 전자책은 페이지조차 의미 없이 존재하면서 앞뒤 구분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쉼 없이 수정되고 첨가되면서 전자책은 우리를 변화와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것입니다. 결국 나도 그 소용돌이 속에 언젠가는 휘말려 가겠죠,,,,
그런데 나는 아직은 종이 책이 더 좋습니다. 이 책 역시 페이지를 일일이 손으로 넘기며 한 장씩 마지막 장까지 읽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어느새 왼쪽 부분이 점점 더 두꺼워 지면서 점점 오른쪽 부분이 더 얇아져 오는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쯤,, 아,, 벌써 이만 큼이나 읽었어? 하며 느끼는 기쁨과 이젠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아쉬운 감정을 동시에 누리면서 말입니다. 아직은 종이책이 나에게 주는 이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군요.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나에게도 만약 신이 내린 편집의 손을 가진 편집자가 있다면 나라고 책을 출간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아마 책의 제목으로는 베스트 셀러 작가 되기가 세상에서 가장 쉬웠어요.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네,,, 말도 안 되는 상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요. 그냥 책을 읽다가 그 비밀 나도 한번 공유해 보면 안 되나 싶더라고요,,, 하하하
이상적인 도서관
누구나 자신만의 도서관을 꿈꿉니다. 그곳이 어디든 그 도서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서관이자 가장 신성한 도서관일 테지요.
참고로 알베르토 망구엘은 자신의 도서관에서 지금까지 평생 단 한 권의 책을 추방했다고 합니다. 브렛 이스턴 앨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가 그것입니다. 가학적인 고통에 대한 외설적인 묘사가 책꽂이 전부에 전염될 것 같았기 때문이랍니다. 뭐,,아무튼 각자에겐 제각기 사연을 가진 도서관이 있는 법이니까요,,,,
미래의 도서관에 가면 어떤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나의 도서관에 보관될 그 책들이 내가 어떤 삶을 꿈꾸고 살아왔는지 말해 줄 겁니다. 내 미래의 도서관에서 행복한 나를 발견 할 수 있기를,,,,
나는 누구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이 아닌 인간 망구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최고의 독서가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나 봅니다.
덕분에 지금껏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여러 모습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혁명가가 될 뻔한 망구엘
1970년 11월 온건한 무정부주의자가 된 망구엘,
롤링 스톤즈 팬인 망구엘이 콘서트에서 자신이 만든 벨트를 맨 믹 재거를 보고 감격했던 망구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소설을 썼던 망구엘,,,
편견에 의해 배척된 집단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말하는 망구엘,,,등등 다양한 망구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책에 소개된 망구엘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 그는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는 단 한 사람일 뿐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다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포장할 가면을 하나 둘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가면은 늘어갔고 가면은 쌓여만 갔습니다.
가면 속에 나를 가두고 다양한 정체성으로 변장하는 동안
그 가면은 나도 모르게 나의 뼈와 살에 달라붙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진짜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렀지요.
책을 열심히 읽다 보면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요?
책 읽는 사람 나에게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독서를 하다가 내가 지금 왜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하며 헤맬 겁니다. 그럴 때마다 이 책이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는데 왜 그리도 이 책이 든든해 보이던지요,,,
책 읽는 사람들을 읽고 독자가 담아가는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독서 경험입니다. 그가 쓴 39개의 에세이를 손에 들고 독서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 무엇이지 어렴풋이 알 듯 하기도 하고 덤으로 삶의 위안까지 얻게 되는 행운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친 우리는 책 읽기=글 읽기가 아니라는 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새로운 독서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독서는 예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임을 예감하면서 말이죠,,,
딱 한 줄만 기억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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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를 읽고는 책에 대한 박식함과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읽으면서 마냥 행복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기에 '책 읽는 사람들'은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이 읽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그의 광범위한 독서력과 깊이 있는 창조적 해석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전작인 '독서일기'가 작가의 개인적인 독서를 보여줬다면 '책 읽는 사람들'에서는 독서를 통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부에서 8부까지 작가가 독서를 통해서 겪었던 행복감과 슬픔, 좌절감, 위로를 통해 받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내고 있어 진솔한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의 경우는 대부분의 막내들이 그렇듯 위의 오빠들을 통해서 다른 또래들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인지 비교적 일찍부터 책에 대한 사랑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화책은 물론이고 오빠들이 읽었던 다양한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 이해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의 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기분이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몰래 오빠들 책을 더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두 오빠의 취향이 현저하게 달랐기에 골라 읽는 재미가 솔솔 했었다. 큰 오빠는 고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세계 고전을 많이 갖고 있었고 작은 오빠는 현대 작가들의 소설과 중국의 무협지를 좋아해서 김용의 무협지 시리즈는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같이.(오빠 몰래) 그러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나름의 독서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의 나의 독서 취향을 만들게 되었다.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책을 읽을 때, 시간을 들여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독서를 통해 사회, 역사,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나는 선택권이 있고 다양한 책을 통해서, 좋은 명작을 통해서, 흥미진진한 책을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오래된 편견부터 해마다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있는 새로운 편견을 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고 예의바른 대화만으로는 위로 받을 수 없었던 어떠한 감정을 깊이 있는 한 줄의 텍스트를 통해서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이 그만큼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부터 느린 독서는커녕 페이지 수를 정해놓고 읽을 정도로 숙제하듯이 읽어나갔던 시간들을 최근 몇 년간을 보냈기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책은 많이 읽었는데, 읽은 책의 작가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만큼 빠르게, 빠르게 신간에만 심취했었고 이해하며 읽었다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신간을 제일 많이 읽은 데 괜한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이젠 정말 정신을 차려야지 한다. 여러 번 이야기하고는 실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창피하지만 정말, 정말 이젠 느린 독서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한다.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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