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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무인도에 가지고 갈 때 가져갈 책은 무엇이라든가, 성경 말고 이 책 한 권을 택한다면 어떤 책인가 하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식상하든말든 상관없다. 난 주저없이 바로 이 책 ‘도르트강해’를 가지고 간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굳이 평점을 메긴다면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일곱 개 정도라고 말하겠다. 신앙 생활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아주 귀한 책을 만났다! 너무 감격스럽고, 이 책을 펴준 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개혁주의가 이렇게 달콤하고도 은혜로운 귀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나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은혜로운 교리가 딱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교리들이 설교로 되어있어 딱딱하지 않고 너무 친근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스스로 TULIP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교리가 이리 달콤하고 은혜로웠었는지 책 읽는 내내 놀라며 진수를 맛보았다. 게다가 교리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끌어간다. “조금 더 하나님께 순종했어야 하는데...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했어야 하는데...” 이러한 생각들은 너무 정당한 생각들 같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긍휼의 마음으로 무릎꿇고 울부짖기 보다는 바리새인과 같이 끝임없이 자기 의를 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을 읽는 내내 “바로 이게 진리구나! 바로 이게 진짜 복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비참함으로부터 구원하는 복음. 기쁜 소식! 이 책은 개혁주의에 대한 각종 오해와 의심, 불안함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준다. 예를 든다면 이런 질문들이다. 1. 내가 택한 자일까? 내가 만약 택한 자가 아니라면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 될텐데... 2. 내가 전도하려는 저 분이 택한 자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전도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텐데... 3. 나는 택한 자야. 그러니까 안심이야. 이제부터는 조금 느슨하게 신앙생활해도 되겠군. 혹은, 나는 유기된 자가 아닐까? 나의 삶이 이런걸 보면.... 개혁주의에 대한 이런 오해들이나 의문들은 신앙 생활에 적잖은 방해물이 된다. 아직 많은 개혁주의 평신도들이 위와 같은 오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르트 신조 강해를 통해 이런 오해와 질문들을 아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음은 정말 커다란 유익이다. 그것이 어떻게 해결될는지는 여기에 자세히 쓰기는 힘드니 책을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어쨌건 이 책을 통해 진정한 복음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크나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크나큰 유익을 얻었음을 고백한다. 특히, 가장 큰 유익은 ‘내가 과연 선택된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의 초청, 생명수를 값없이 먹으라는 그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는 신자의 모습이 바로 ‘선택된 자’라는 증명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께로 가기를 원하고 믿기를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넌 아쉽지만 유기된 자”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설교는 바로 이런 설교가 아닐까? 기복적 설교, 출처불분명하고 억지로 만든 예화 가득한 설교, 세속적 설교, 성경의 본래 의미와 동떨어진 교훈만 찾는 설교, 제목만 걸어놓고 본인 생각만 말하는 설교, 웃기는 이야기를 묶어서 회중을 빵빵 터뜨리는 설교..... 이런 설교들이 판치는 시대에 진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선택과 그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찬양하며, 그 앞에 회개하며 엎드리게 하는 설교! 바로 그 해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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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신조는 형식적으로는 17세기 네델란드 개혁교회에서 예정론을 부정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결과로 생긴 것으로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신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죄로 타락한 인간의 중생과 회심에 관한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도르트 신조야 말로 구원에 관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전 세계 교회에 공식적으로 공포한 은혜의 신조인 것입니다. 이러한 선진들의 ‘선물’, 도르트 신조를 프롱크 목사님께서 목회적인 관점에서 따뜻하게 풀어 설교한 것을 묶은 것이 이 책, [도르트 신조 강해] 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가르치는 TULIP 교리! 그러나 때론 숙명론으로, 때론 목회와 전도에 방해되는 교리로도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러한 오해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조에 관한 책은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불신자, 초신자들에게 더 큰 유익이 있을 줄 압니다. 신조와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에게로의 초청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위로가 있으며,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당시 누구라도 가질 만한 궁금증과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서 치밀하게 연구하지만,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헛된 호기심을 버리고 겸손히 우리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평안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사역을 행하시는 방식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들의 구조를 마음으로 믿고 사랑함을 알고 경험하는 것에 신자들은 만족하며 안식을 누린다. (도르트 신조 3/4장 13항)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바람의 효과들을 봅니다. 바람이 나무에 불 때 나무가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중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중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의 삶에서 그 결과를 봅니다. (중략) 이(구원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때 타락한 죄인은 이 놀라운 구원의 길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십니다. “저는 낮아집니다. 저는 낮아지고 주님은 높임을 받으시나이다. 오 그리스도여!” (p. 333, 335) 이러한 자세는 중생에 대해서 너무나 치밀하게 구분하려는 오늘날 일부 개혁주의자들과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은 따뜻하고 목회적인 책이지만 또한 아주 분명하게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나 칼빈주의 5대(TULIP)교리를 생각할 때 당연히 떠오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이단인가?" 혹은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가?"와 같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이 자칫 우리를 곁길로 빠지게 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제 생각엔, 분명히 아르미니우스의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며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고 우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참란함 그 자체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error)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오류나 오류는 오류이고 또한 분명히 진리의 성령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쉽사리, 가볍게 그들을 정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겁게 성경을 따라 무엇이 오류인지를 객관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참 교리가 무엇임을 밝혀 교회의 지체들, 특별히 연약한 지체들에게 가르치고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자는 시종일관 이러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물러섬이 없으면서도 청중(독자)들에 대해선 신중함과 배려가 묻어나는 저자의 이러한 자세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설교에서뿐만이 아니라 역자가 직접 만들어 매 설교 끝에 실은 ‘더 깊은 공부와 나눔을 위한 문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통해서 독자는 각 장의 설교를 잘 이해했는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으며, 설교의 전체적인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도르트 신조와 함께 유기적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우리에겐 큰 유익입니다. 또한 설교의 내용과 관련된 성경구절과 관련 신앙고백까지도 각주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자의 아주 귀한 섬김이 있는 책입니다. 이러한 각주는 원서에도 없는 것입니다.
신생출판사답지 않게 책의 디자인 및 편집도 너무나 말끔하고 좋습니다. 첫 번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번역도 상당히 매끄럽습니다. ‘그 책의 사람들’과 역자, 신조 감수를 해주신 김병훈 교수님… 모두가 너무나 귀하고 어려운 일을 해내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생출판사에서, 그것도 아직 한 권의 책도 번역한 적이 없는 비신학 전공자 역자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이러한 귀한 책이 나오게 된 것에 대해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귀한 책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비록 이 책을 한 번 읽고 서평을 쓰지만, 앞으로 몇 번이라도 곱씹어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어찌 보면 프롱크 목사님의 칼날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보다는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도르트 신조를 통해 주위의 형제들을 찌르기보다는 ‘내 안의 적’의 찾아 그것을 먼저 도려내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서평을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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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런 묵상이 되었다. 성경이 다른 어떤 책의 글보다, 다른 어떤 위대한 사람의 말보다, 나의 지식과 감정보다 신뢰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말이다.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성경을 그렇게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도르트 신조에서 말하는 것이 내 생각에 틀린 것 같지만 위의 전제 때문에 맞다고 생각해 하는 말은 아니다. 성경적이기 때문에 믿고 신뢰할 수 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 -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 5대 교리에 반해 하나님의 주권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무게를 더 둔 알미니안 주의의 교리를 보며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보다 인간의 선택에 힘이 더 들어갈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적 해석이 있음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과 함께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책을 통해 왜 알미니안 주의의 주장이 틀리고 칼빈의 5대 교리가 맞는지를 확인하며 너무 좋았다. 생각없이 믿게 되면 빠지게 될 수 있는 오류들이 하나씩 제거된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의 부족함이 많아 여기서 이야기 하는 바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참 귀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 예전 수련회에서 전도사님이 알미니안 주의에서 주장하는 글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 주장에서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맞는지 분별해 내지 못했다. 그저 별 어려움 없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비성경적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알미니안 주의의 주장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이 짧게 진행되는 것이어서 깊이 다루진 못했고 그때의 나도 다른 청년들과 같은 상황이여서 그저 듣는 것에 급급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들었다면 그 시간을 더 좋은 시간으로 보냈을꺼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배우지 않는 이상은 많은 성도들은 그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감정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을 믿고 만다. 그렇게 되면 알미니안 주의의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식대로 해석해버리는..... 이 책을 통해 공부해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프롱크 목사님의 각 설교가 끝날 때 마다 그 설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공부와 나눔을 할 수 있도록 질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 것을 통해 각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수 있고 자신이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모임에서 사용하면 유용할 듯 싶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9:16)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언제나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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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에 무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단 하나의 절대 진리를 거부한다. 상대적 진리를 부르짖는다. 네가 가진 생각만 참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도 참이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에 대한 심각한 무지다. 진리에 있어 상대적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진리는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아도 똑같이 보인다. 이렇게 봤을 때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봤을 때 저렇게 보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물론 장님과 코끼리와 관련된 예화와 같이 만지는 사람에 따라 진리를 다르게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석자가 잘못 해석 했을 따름이지 진리가 변했기 때문은 아니다. 진리가 상대적일 수 있는 경우는 이와 같이 해석자가 오류를 범했을 때 뿐이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인식 했을 때에만 진리다. 다르게 인식을 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상대적 진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그가 가진 생각은 단지 그만의 생각(혹은 견해)일 뿐 진리가 될 수 없다.
사람들에게 만약 진리가 존재하다면, 오직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것만이 진리다. (그들에게 있어)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은 내 영혼의 기쁨을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저 오늘 하루를 즐기며 살기를 원한다. 따라서 나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이 진리다. 사람들에게 내일은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내일을 위함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은 보상을 얻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오늘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찾는다. 만약 내 수고에 보상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곧 진리이다. 단 하나의 절대 진리는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참)진리는 나와 상관이 없다.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진리에 무관심한 오늘의 세대에게 단 하나의 진리를 부르짖는 우리(그리스도인들)는 바보들이다. 절대 진리만을 고집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사람들이다. 하나만 옳다며 다른 것을 거부하는 우리는 배타적인 광신도들이다. 이제 우리는 믿지 않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까지도 받는다. 우리는 현재 (어떠한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에 놓여 있다.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의) 극렬한 거부를 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개독이라는 오명을 받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몰아 세워도 우리는 진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좀더 유연해질 수는 없는가?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받더라도 진리에 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절대 타협할 수 없다.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그 답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 하셨다. 진리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대적한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 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렸다. 그분을 거부했다. 우리는 자의로 하나님을 모욕했다.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우리 갈 길로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걸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대신 지도록 하셨다. 그 아들을 통해 다시 품기로 한 자들을 구원 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손길을 뿌리친 우리를 다시 거두셨다. 우리(참 그리스도인)가 진리를 고수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도르트 신조 강해' 본서는 이상의 사항을 간명하게, 그러나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인이 함축하고, 극히 일부분만 언급한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본서 '도르트 신조 강해'에서는 명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런 이 책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개혁주의자요, 둘째는 비개혁주의자, 그리고 셋째는 비그리스도인이다. 첫째 개혁주의자. 본서는 저자인 코르넬리스 프롱크 목사가 자신이 시무하는 한 자유개혁교회에서 했던 설교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본서는 개혁주의자, 그중에서도 설교가 행해졌던 그 교회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용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다. 책으로 출간된 본서의 대상자는 그것으로 국한 되지 않는다. 책으로 출간 되었기에 그 대상자의 범위가 확대된, 이 책의 또 다른 대상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 비개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본서가 전하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인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봤어도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혹은 5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나 그 이상, 아니면 전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본서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불신자들은 본서의 내용을 들어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고, 설령 들어볼 기회가 있어도 무관심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의 불신자들에게 본서의 내용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말장난으로 비춰질 것이다. 어쨌든 책으로 출간된 이상, 본서의 대상자는 불신자에게까지 확대 되었다.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책의 대상자가 어떻게 세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개혁주의자(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와 '칼빈주의자'는 같은 의미로 혼용되어 사용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혁주의자'는 '칼빈주의자'를 포괄하는 좀더 넓은 의미로 구분 된다. 여기서는 둘을 같은 의미로 축소하여 '개혁주의자'로 통칭하여 사용 할 것이다.)들에게 있어 '칼빈주의 5대 강령'(이하 5대 강령)은 고백할 수밖에 없고, 유지/전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귀한 유산이다. 그것은 성경 66권의 요약본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내용에 있어 무척 중요한 사항들을 간명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르트 신조'라 불리기도 하는 '5대 강령'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근본을 명확히 전하고 있다. 성경의 전부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의 핵심을 논하고 있다. 본서는 그러한 '5대 강령'을 충실히 강해하고 있다. '5대 강령'의 내용을 제함 없이, 왜곡 없이 성실히 , 그러면서도 풍성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인 개혁주의자들은 본서를 필독해야 한다. '5대 강령'의 탄생 배경은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잘 모르는 이들의 수고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다. 17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복음의 가르침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한때 개혁파 신학자였지만 그 길에서 벗어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를 혼란케 하는 '알미니안 신학'을 탄생시킨 '야코뷔스 아르미니스[Jacobus Arminius, 1560.10.10 ~ 1609.10.19]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개혁주의의 가르침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모였고,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그때와 같이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개혁신학을 거부한다. 그들은 특히 '5대 강령'에 대해서 크게 몸서리를 친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거나 단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한 것이라고 항론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5대 강령'은 어떠한 변론에도 거부의 대상이 된다. 본서가 이처럼 개혁신학과 '5대 강령'을 오해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설득하여 돌이키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서를 통해 최소한 그들에게 '5대 강령'이 무엇이고, 무엇을 말하는지는 충분히 전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5대 강령'에 대해 아예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봤어도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에 무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들은 진리를 거부할까? 그들은 그 자신들의 죄 가운데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죄 가운데 갇혀 있기 때문에 진리와 멀어져 있다. 그들의 죄가 진리로 향하는 눈과 귀를 막고, 발걸음을 자꾸만 돌이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스스로 진리로 향할 수 없다. 그들은 절대로 진리를 그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계속적으로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계속 진리를 거부하며 조롱 할 것이다.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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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말씀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겠다고 생각한 건 교인이라고 살아온지 25년 가까이 지난 이후다. 그 전까지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와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교재를 이용한 공과가 전부였다. 그런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난 당연히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절반 이상 교회를 나가며 나름 열심있는 신자라 생각하며 살았다. 나름 학생부 임원, 교사, 리더, 찬양인도자 등등 각종의 타이틀을 달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칭찬받고 앞서가는 신앙인이라 자부하며 지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성경공부를 시작하자 내 바닥은 금새 드러났고, 하나님의 언약이나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막연히 이렇지 않을까 하는 위험한 생각들로만 가득했다. 그래도 난 바른 말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님의 은혜로 가질 수 있었고 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 늦게나마 바른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은혜를 계속 누리고 있다. 특히나 마이북을 비롯한 온라인을 통해 많은 바른신앙의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분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양서를 추천받아 조금씩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누리며 지낼 수 있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소식을 듣고 나오자마자 나 뿐만 아니라 주변 목사님들께도 서둘러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선물들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너무나 불편했기 때문이다. 처음 몇 설교를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선택, 유기, 예정에 대한 교리들이 당연하고 원래 그런 것이라 여겼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나름 최근 몇년 동안 양서들을 접하고 바른 설교들을 들으면서 내 나름대로 바른 신앙의 지식들을 축척했다고 자부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설교들이 반복적이고 세부적으로 지속되면서 내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굳어져버렸던 악한 인간의 습성들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워낙 부족했고 체험이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내게 남아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것들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이 내 선물을 받고 읽으신 분들도 그렇지 않을런지 걱정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난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것들이 그른 것임을 알고 불편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록 내 연약함과 내 죄성은 여전히 내 의를 드러내길 원하고 있으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거저주시는 은혜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과 예정과 유기에 대해 내 마음의 바닥까지 모조리 긁어내어주는 책이 있을까 싶다. 이 부분을 다시금 깊이 짚어주고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책을 읽게 되어 기쁘다. 이 불편함이 은혜요 감사이고 기쁨이다. --------------------------------------------------------------------------------------------- 또 다른 얘기를 나누고 싶다. 현재 교회는 말씀대로 살지 않아 세상에서도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난을 받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만 돌려 아무 행함이 없다 비난을 한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의도적으로 행함을 통해 공로를 쌓지 않고 은혜 받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함으로 표현한다. 교회는 행함을 통해 손가락질을 피하려고 해선 안된다. 은혜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 은혜는 우리의 행함을 절로 이끌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끝에 나온 문장으로 마무리 하겠다. "너희는 틀렸고, 우리가 옳다. 우리가 너희보다 많이 배워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때문이다." 이건 개혁주의자들만을 위한 글이 아니다. 이건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글이다. 이 책 또한 개혁주의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건 모든 신자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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