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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2018년 등단한 시인 서한영교의 책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페미니즘 - 정확히는 성차별 문제를 인식한 것은 열아홉 살이던 2001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저자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귀한 아들' 대접받으며 밥은 물론 빨래나 설거지 한 번 해보지 않고 남녀 간에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문학 소년이었던 저자는 '읽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시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창작과비평사 온라인 게시판에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가 올라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정란 시인을 두고 "암똥개", "벌린 x"등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끔찍한 시를 썼는지 궁금해 상황을 알아봤다. 상황은 이러했다. 한 술자리에서 막 등단한 여성 시인이 박남철 시인으로부터 성희롱과 구타를 당했다. 이후 박남철 시인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편집자, 학생 등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 문인과 문학 출판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한국 문단에 패거리 권력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대형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남성 문인들을 위주로 한 권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문단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전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었다. 남성은 권력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한 여성 시인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폭언을 일삼아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난 뒤로 세계가 뒤틀렸다. (16쪽) 그 이후로 저자는 많은 것들이 불편해졌다. 왜 집안일은 엄마가 다 하는 걸까. 왜 아내들은 바쁜 아침에 남편 아침밥을 차려야 할까. 시장에 가면 왜 온통 할머니와 아주머니들뿐일까. 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은 죄다 남자들일까. 왜 여자 선생님들은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하면 학교에서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왜 여자들은 귀갓길 택시 안에서 불안해하는 걸까. 왜 여자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할까. 왜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거나 짧은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자들한테 '밝히는 애'라느니 "아예 나 먹어주세요, 광고를 하는구나." 같은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 뒤로 저자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IF>라는 페미니즘 잡지를 구독하고, 대학에서는 총여학생회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어머니 성을 붙여서 서한영교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탐독하고, 여성 단체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수강했다. 위안부 문제를 위한 활동도 했다. 감동도 컸지만 괴로움도 컸다. '남녀', '부모'처럼 남성을 우선시하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습관도 고쳐야 했고, 가끔 누가 너무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와도 외모 평가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참아야 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남성 공동체로부터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밀려드는 압박과 차별도 상당했다. 그런 저자가 더욱 적극적인 페미니스트가 된 건 지금의 아내 덕분이다. 저자의 아내는 시각장애인이다. 비장애인-페미니스트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아내의 몫까지 해내고 싶었지만, 남편이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과 출산, 육아는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더 컸다. 그럴수록 저자는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세상에 나오고 무럭무럭 자라는 전 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빠도 엄마도 아이도 집사람. 집에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고, 아빠의 역할은 돈을 벌어오는 것만이 아니란 걸 실천으로 증명했다. 공동육아를 하는 저자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무능력하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저자를 가리켜 '맘충'이라고도 했다. 저자는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 사회는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 여성적인 것, 남성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전부 불편해하고 부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처 입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사회가 규정한 남성 규범이 일치하지 않는 남자들은 전부 상처 입는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연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아가 힘들어진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나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 "다른 세상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자크 메스린)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본다. (291쪽)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될 수 있다 해도 여자만큼 절실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진지하게 성찰해 온 저자를 보면서 남자도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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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존재론적 결단이다. (42)
다른 세상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자크 메스린
저자의 네 글자 이름을 보고 여성 페미니스트라고 단정지었다. 내 머릿속에 이름 네 글자는 여성(의 평등 의식)으로 박혀 있고 앎이 그 수준이었는데 서한영교님을 통해 수정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차례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편견과 잘못된 지식을 내려놓아야 했다. 또한 실천하지 않는 앎의 무력함과 쓸모없음을 다시금 되새겼다.
예상과 다른 그의 성별에 솔직히 읽는 내내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무줄의 관성대로 나는 원래 내 생각 패턴과 질서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감수하는 출산과 육아 노동을 넘보며 마치 훔치는 것처럼 경계했다. 아무리 엄마의 자리에 있으려 해도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읽어 나갔다. 그의 말이 많아질수록 ‘애인’의 입장과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의 말에 가려진 진짜 말이 따로 있을 거라는 미심쩍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상관없이 그의 글은 충분히 훌륭했다. 시인을 꿈꾼다는 그가 어쩐지 동시나 동화로 다시 말 걸어올 것 같다. 어느 순간 차분하고 단아한 어투와 문체와 “글썽거림”이 어린이 정서를 담는데 어울리겠다는 확신이 든다. 사실 나는 이전에 없던 말로 현상을 정확히 구체적으로 포획하는 낱말을 사랑한다. 관성적으로 써온 익숙한 말을 뒤집어보고 새롭게 단장하는 손길을 애정한다. 요새 나는 갓 지은 듯한 모국어의 ‘말맛’과 생생한 어감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나의 욕구를 세심히 충족시키는 책이다.
늦은 밤 그날(이해치 초과)을 소화 시키지 못해 체증에 시달릴 때면 티브이를 기웃거린다. 나에게 벗어나 다른 이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만났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짧은 여정이 되어준다. 어제는 남성 파트너와 춤을 추는데 마음과 몸이 열리지 않는 사연이 소개되었다. 전문가는 여성이 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 그런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장면을 보는데 나는 어떤지 (돌)보게 되었다. ‘너는 낯선 복장으로 모르는 남자와 접촉이 있는 춤을 기꺼이 출 수 있니?’ 아니 그렇게 춤춰볼 생각이나 해봤니? 지극히 이차원적인 삶.
삶은 거듭 나아짐, 즉 일상의 감각을 되살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런 생각 중에 모험하고 결심을 실천하려 애쓰는 자를 목격한 것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애인과 살며 자식을 원하는 애인의 뜻대로 살아보는, 기꺼이 반응하는 사람은 문장력을 넘어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의 에너지와 흔들리며 다시 자신을 추스르는 성찰이 좋았다. 자꾸 이것저것 재며 물러서고 포기하고 변명하며 생생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나에게 없는 점이 그에게 가득했다.
기존의 가장의 역할에서 벗어나 ‘집사람’으로서 다른 집사람(가족)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려는 최선의 몸짓이 진정한 (지)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사회적 품’을 넓히며 성장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차곡차곡 쌓인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고 변호하며 자기 스타일을 확보해나가는 모습이 일정 부분, 성인 같다. 한쪽으로 기운 한국사회의 편중됨과 위험요소들을 바로잡으려는 응시와 사유와 실천이 무모하도록 아름답다.
왜 그렇게 그가 무모하고 아름답기를 원하는지 리뷰를 쓰는 지금 알겠다. 그렇다면 그는 그가 그리는 세계를 응축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실화’화)하고 있다는 소리일 게다. 갑자기 그가 너무 부럽다. 자신의 이상과 삶과 그 간격을 남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받는다는 게 쉽지 않다. 그와 나는 언어로만 만났기에 그 과정이 더 투명했어야 할 텐데 그는 진정 듣고 싶은 인정을 받은 셈이다. 대단히 잘 살고live 있으니 힘내요~ 그리고 기회 되면 오늘날의 당신을 있게 한 애인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주세요.
#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운명이란 끊임없이 실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평생 거듭” 해야만 하는 실패 속에 있어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24)
# 아가, 너에게 들려주기 위해 요즘 나는 세상의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하려고 몸을 쫑긋 세우며 지내고 있단다. (58)
# 언어를 돌보기 위해 혀를 멈추면서, 내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늘도 탐색해본다. (92)
# 삶에 리듬이 실리면 슬픔도 견딜 만해지고, 분노도 견딜만해진다. (113)
# 인식은 시선을 만든다. 시선은 태도를 만든다. 태도는 가치를 만든다. (168)
# 내 삶의 국면에 따라 세계의 문제를 사유하는 강도와 온도는 달라진다. (174)
# 서로서로 잘 지내자는 말 같다. 부부. (207)
# 자기성찰 모드로 진입하여 잡초 솎듯 내 안에서 자란 못난 남자(사람) 하나를 뽑아낸다. 얼마쯤 뽑아내야 할까. 아마 죽기 전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222)
# 육아를 하면서 나는 나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다. 대신 이전의 나를 찢고 나올 나를 기다린다. 나를 강제하는 파시즘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본연의 나라는 거짓말에서 벗어나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타자인 아이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나는, 집사람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에게 오고 있다. (270)
[오탈자 205쪽] 체셔 토끼 - 체셔 고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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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도 페미니스트, 책 장르도 사회정치분야에 속하는 책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한 남자의 연애, 결혼, 육아, 현재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편안한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각장애인 부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함께 기르고, 현재에 오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 노력과 생각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여성, 남성, 장애인, 비장애인등 여러가지 주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로써 하나하나 실천해나가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여성인 내가 반성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남자들의 기득권 사회를 살아왔다고는하지만 차별을 받았거나 억울한 적은 없었는데 알게모르게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래왔고, 그랬었고, 그런것이니까 그게 다 맞는것인줄 알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별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연애, 결혼, 육아, 회사일을 들으면서 그 안에 얼마나 많이 이상하고 부당한 것들이 녹아있었는지 놀라기도 하고, 이렇게나 의식못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혼자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그럼에고 불구하고 꿋꿋한 모습이 엄청 대단했다 아마 "서로"가 살아갈 세상은 조금 더 좋아졌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이 가득담겨있는 거겠지.
학문적인 내용이나 원론, 정의같은 것들을 펼쳐놓았으면 어렵거나 지루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에세이같은 느낌으로다가 술술 읽을 수 있었고, "육아"에 대한 부분에서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고, 가끔 등장하는 책 속의 짧은 인용구도 읽는데 도움되기도 하고, 흥미로웠다.
주변에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한 후 육아를 전담하고, 부인이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집안 대소사 및 집안일을 잘 나누어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육아에 대해서도 공동책임으로 잘 하고 있는 부부들도 많다. 또 남성, 여성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기존과는 다르게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다. 많은 부분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고, 바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나부터도 생각지도 못한, 당연시 여겼던 것들부터 조금씩 다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야겠다.
읽으면서 페미니스트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녹아있는 글들이 참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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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한영교
이 책은, 저자가 학창 시절을 거쳐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쓴 기록이다. 사실 초반을 제외하면, 한 아빠의 육아 일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그게 페미니스트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저자가 문학 소년, 그중에서 특히 시를 좋아하고 썼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학창 시절 그가 알게 된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된 사건, 남자다움을 강조하며 거칠고 폭력적인 언어를 입에 달고 사는 주변 지인들, 여성에 관해 원색적이고 외설적인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 등을 통해, 그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된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그의 사회에 관한 생각은 한층 더 깊어졌다. 여자친구가 시력을 잃어가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그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은근하면서 노골적인 차별적인 시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임신한 아내를 돌보기 위해 육아 휴직을 한다. 하지만 그건 거의 퇴사였다고 할 수 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아내와 함께 공동 육아를 하면서, 그는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유모차를 끌고 길을 나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고, 맘충이라는 비난을 듣고, 또 프리랜서로 면접을 보러 가면 남자가 육아를 한다고 한심하다는 시선을 받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그는 가정주부라는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심각한 내용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부분은 언어유희로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특히 아기에 관한 부분은 말랑말랑하면서 훈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피곤함 그리고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각오가 잘 드러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점은 괜찮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꽤 있었다. 부부 사이에 집안일을 어떻게 나누는가라든지 매주 하는 가족회의에 대한 것은 나중에 나도 결혼하면 적용해보면 좋을 거 같았다. 물론 그 전에 결혼할 사람과 충분히 대화를 나눠야 하겠지만 말이다.
‘역지사지 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의 한자 성어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역지사지라는 말이 이토록 절실하게 와닿은 적이 없었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경험해보고 동시에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분명히 어린 아이들을 그런 소양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기본 목적인 것 같은데, 요즘의 교육기관은 그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을 강제로 주입하는 이분법적인 교육이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서로를 존중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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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며칠 전에 친한 언니네 집에 놀러갔다가, 그 언니가 요즘 즐겨 본다고 유튜브 동영상을 보여줬다. 미니멀 유목민 박작가라는 유튜버. 내가 신문기사에서 보고 책으로도 읽었던 작가였다. 그런데, 그 언니가 재밌다고 보여준 동영상에는 게스트로 박작가의 매형이 나왔는데, 나는 오히려 매형에 눈이 꽂혔다. 왠지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던 듯. 그 때 내가 느꼈던 매력이란, 우선 자유로워 보였고, 얼굴에 천진난만한 즐거움이 가득했으며, 그러면서도 멋졌다. 말하는 것에서 뭔가 편견이나 아집 같은 게 없어보였다. 아무튼, 이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와서, 작가라길래 이름을 알아두었다가 검색해 보았더니, 이 책이 나왔다. 그래서 얼른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게 되었다. 역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박작가의 책에서 자기 누나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는데, 그 분의 남편인 것. 아무튼 책 내용은 스포일 수 있으니(리뷰를 쓰면서 스포를 걱정하다니... 나도 웃김. ㅋㅋ) 일단 패스하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일단 나는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을 어느정도 느끼게 되었다.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 올 한 해 해야할 일들 때문에 우울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위로가 된 것 같다. 삶을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덮자마자 운동하러 나갔다. ㅎㅎ
그리고, 인문학 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샘솟듯 생겨났다. 이 분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그런지 여러 작가들과 책을 인용하는데, 그 가운데 읽고 싶은 책들이 생겼고, 그것들을 찾아보다가 다른 책들도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독서에 대한 의욕을 불러 일으켰으니 좋은 책이라 하겠다.
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다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겠다 시를 살아내겠다.
는 작가의 말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역시 삶은 다르게 살기로 한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법이다.
또 한 가지, 집에서 육아를 하면서 우울증이 왔는데 너무 힘들어 자기를 도와주는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휴식하라'고 했다고...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를 위해 산책하기, 여행하기, 땀흘리기를 처방하셨다. 그런데, 다른 건 당시 다 불가능해서 달리기를 했단다. 땀 흘리기 위해. 시간만 나면 나가서 달리기를 했다고... 이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핑~~. 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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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잘 봐준다 하더라도 하트를 느낌표나 물음표처럼 묘하게 비틀어놓은 듯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또다른 집사람이 잘 구분할 수 있도록 강렬한 대비를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한 해석일지라도 틀리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애인'과 같이 '살기' 시작했고 아이를 낳았다. 둘 모두 집사람으로서 살림을 했고 생명을 길렀다. 그 시간들을 글로 적었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 말한다.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폭력을 온전히 겪을 수 없는 남성이라서다.
저자는 문단에서의 한 사건 이후 남성으로 살아왔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 이상한 세계에서 너무도 편히 지냈다는 사실이 불편했고, 여성들은 그 세계 속에서 계속 상해가고 있는데 남성인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자신의 미세한 언어들을 점검했으며, 여성들과 두루두루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세계를 몇 번씩 반복해 뒤집어나갔다고 했다.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이자 직접적인 성차별의 수혜자의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나에게 부과된 남성, 학생, 노동자 같은 사회적 이름에 대한 이해가 곧 나에 대한 이해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 여성 혐오가 기본으로 깔린 세상에서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는 것. 공부를 했다고 하면서도 남성으로서 내 여자를 지켜야(=단속해야) 한다는 몹쓸 가부장적 무의식이 있었다고 하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는 10년 간 만나고 헤어졌던 '미인'과 '연인'의 관계를 맺었고 '애인'으로 정착시켰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한다'는 니체의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할 만큼 연인을 통해서 구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면서 '혼인'을 했다. 다시는 입지 않을 웨딩드레스 대신 관 속에 누울 때도 입을 수 있는 '기억의 옷'을 입은 채로, 감정의 질서를 넘어선 존재의 결단이었다. 남성-공적 영역/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고 서로를 '집사람'이라 불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합리적으로 예측된 확률보다 불확실한 우연을 맞이하는 사랑의 기적'은 아이를 품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로 이어졌다. 말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자장가를 두고 '삶에 숨어 있는 영원한 BGM'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 역할을 준비하면서 사회의 이상한 기준과 비난을 새로이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에 대한 합리적 관리(행복, 건강, 경쟁력)를 하는 것이 마땅히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정확하게 잘 수행하려는 사람들에게 헬리콥터맘, 몬스터 패런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엄마들에게 모조리 맡겨놓고 그런 엄마들에게 맘충이라고 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느꼈다. 저자는 말한다. '부모 노릇을 점점 어렵게 만들어 과도하게 안전/질병/실패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회 자체에 오히려 헬리콥터 사회, 몬스터 사회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나. 그리고 이런 몹쓸 이름들은 왜 꼭 여성들에게만 붙나(p.62).' 가사노동과 정서노동을 분담한 만큼 출산도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육아 경험담을 검색하더라도 자기 키워드 밖의 정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어서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었다고 했다.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각자의 바다만 있었다(p.97).' 전문과와 의사의 소견에 모든 결정을 맡기지 않고 차라리 주변의 조언과 오래된 지혜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과 동료와 지지 집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곁이 두꺼울수록 크게 넘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곁의 두께를 충분히 확보하면 무엇을 하건 안정감이 든다(p.77-78).' 적어도 100일은 충분히 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회사는 그의 요청에 퇴사라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남성 주부의 본격적인 돌봄.
'수술실에 들어간 당신을 기다리며 벼락 모양으로 혼자 병실에 앉아 남편이라는 이름으로는 죄짓지 않겠다고 다짐'한 저자는 수술을 마친 애인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려다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아이를 마주하면서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질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자주 깨닫게 되었고, 그 돌봄의 세계감을 통해 함부로 취급되고 있는 생물들의 비명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사사로운 문제가 발생하면서 서로에 대해 여유가 없어졌음을 감지하기도 했고, '그 여유라는 것은 상대방을 헤아리고 있을 때에나 나오는 것이어서 이는 곧 서로를 보살피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도 같았다'는 것을 직면하기도 했다.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집사람 회의를 열게 된 계기였다.
구체적인 돌봄을 몸으로 살아내면서 1만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인류의 모국어 '밥 먹자'를 생각했고, '어머니의 수고만으로 차려지는 집밥을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돌봄은 돌아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고, 돌아버리는 것임을 경험했다. '발바닥의 세계를 혓바닥으로 탐구'하는 아기와 함께 4대문(현관문, 창문, 베란다 문, 냉장고 문) 안에 갇혀서 퇴화되는 기분을 느꼈고, 아이를 그리워하고 싶어했다. 아이와 전혀 분리되지 못했으므로 '아이를 그리워하고 싶다'고 쓴 부분에서는 지난 시간이 떠올라 울컥했다. 육아가 삶의 한계를 다루는 기예임을 요가를 하면서 깨달았고, 육아는 나를 위하지 않고 나의 이름을 지우며 나로 수렴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리고 저자는 고백한다. '시를 쓰는 대신 시를 살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을 아름답게만 포장하고 싶지 않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이지, 한 사람의 희생이 담보로 되는 돌봄은 거부하고 싶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성장하고 싶어서다. 한편 최근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날카로워진 말과 행동을 '마음이 뾰족해졌다'고 표현하는 경우를 많이 봤고 식상하게 느껴졌는데, 이 책에서 모서리에 대해 공감되는 문장을 만나 반가웠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애인은 나를 격렬히 앓고 있는 중이었다. 왜 나는 항상 누군가 찔려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나를 알아차리는 걸까. 내 모서리는 왜 항상 뾰족하기만 한 것인지. 달라져야 했다.' 투명하게 자기를 되돌아보는 태도, 자기를 박박 긁어낸 시간들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을 써준 두 번째 페미니스트에게 감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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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아내, 두 번째 페미니스트ㅡ 눈이 멀어가는 애인의 곁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시인 #서한영교 (취)약한 아내를 선택함으로 그는 '금남의 세계-돌봄'에 진입할 수 있었고 100일간 아기를 품에서 키우며 육아의 시간을 통해 '마술적 마주침'(지젝)이 일어나는 실존의 세계에 들어가 생명의 질감을 새롭게 배우고 서로를 정성스레 아끼며 용감무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를 살아내고 있는 그의 기억, 기도, 기록들을 보며 나는 과연 맡은 과제와 책임에 열렬히 응답하고 있는지_ 반성하게 하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다른 세상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자크 메스린) #사랑은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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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이라고 할까, 유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게 하지만 유행에 민감해지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인간 가치관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을 보면 유행이나 시류에 둔감한 나에게도 이 '페미니스트'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아주 뜨거운 화제인 것은 분명하다. 아직 페미니스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자주 접하다보면 아마 관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성별로 따지만 남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이다. 얼마전 하나의 사건을 보는 여자와 남자의 시각 차이를 크게 느낀 사건이 있었다. 남자 A는 여자 B를 눈여겨 보며 주위를 멤돌다 주변인 C에게 포착되어 알려지게 되는데 문제는 이 사건을 두고 남자와 여자의 시각이 확연하게 차이를 보였다. 여자는 이유없이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끼는 반면 남자는 호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아직 어떤 나쁜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지켜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 사건을 두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느끼는 그 공포감과 불안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여자는 남자 A의 행동이 스토킹과도 같은 행동이라고,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그정도는 아니라며 농담처럼 넘겼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시각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데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여성 원룸 강간미수' 사건을 보면 이런 시각적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의 저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의 세계라고 하며 이해 가능하지 않다고 말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축척해 온 젠더의식 속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이며 가해자였다. 10년을 넘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저자지만 이제 조금 페미니스트를 실천할 수 있는 단계이지 언제든 몸속에서 남성 이데올로기나 남성성을 과시하는 듯한 폭력적인 면모가 튀어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성이 참여하는 결혼, 임신, 육아 등에 관한 이야기다. 한 여자를 사랑했고 동거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임신과 출산, 육아가 주내용이다. 부부에게 임신으로 아이가 생겼지만 두 사람은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저자가 더 많이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전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가면서 저자는 아직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태어나고 20년 넘게 자라면서 어떻게 여성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노력하려고 하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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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이에 따라서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이면서 페미니스트라니,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에 대해 궁금했었지만, 이 책은 사랑 많고 부족한 - 세상에 부족하지 않은 부모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에 대한 의문은 뒤로 삼키고 - 아빠의 육아 분투기로 읽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성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온몸을 바쳐 육아를 하는,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데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집사람'으로서 '작은 집사람'을 양육하는 서한영교의 이야기였습니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는 육아를 배울 수 없다. -p. 187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상을 주장하며 과격한 언어를 쏟아내는 대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한껏 자신의 노력을 쏟고 있는 그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화되어있고 각자의 성 역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게 사실입니다. 능력의 차이, 힘의 차이에 따른 활동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이런 일을 하면 안 되고 여자는 저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아니 거의 신념에 가까운 것들에 싸여서 자라온 우리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걸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다른 책에서 다룬 내용이지만, 남자가 칭찬이랍시고 던지는 말이 사실은 여성 비하일 수도 있습니다. 항의를 하면 예민하게 구는 꼴이 되고요. 저자 서한영교는 그 프레임에서 나오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세상은 프레임 안에 있기에 녹록지 않습니다. 나무의 진화는 뿌리, 높이, 두께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나무의 수종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젠더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여성, 남성,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등등. 분화된 다양한 젠더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는 진보가 아니라 진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196 페미니스트이면서 시각장애인 아내와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그의 주업은 '육아'입니다. 시인이기도 하고, 에디터 일을 하는 등 최소한의 벌이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라면 돈을 많이 벌어오고 아내에게 집안일을 모두 맡기는 게 당연한 것인 이 세상에서는 한심한 사람이고, 도태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가난을 슬퍼할지언정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은, 모두가 함께하는 그 생활에 대해 감사할 거라는걸요. 언젠가 아이가 아빠는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보면 응, 애쓰고 있어,라고 씩씩하게 대답해줄 날을 기다려본다. -p.227 과격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세상을 싫어하는 저는. 아이를 젠더 프레임에 가두지 않기 위해 애쓰며 키웠습니다. 생각이 갇히는 게 싫었습니다. 잘 한 것 같아요. 제 아이는 의외로 무척 고지식 한 녀석이라, 만일 제가 프레임을 씌웠더라면 평생 그 안에서 살 뻔했거든요. 무척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를 씌울 뻔했어요. 남자로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여성 페미니스트보다 더 힘든 길인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있는, 그리고 노력하는 그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나는 다시 탄생했다. 내 안의 여성-유령과 함께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 누군가에게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다시 선언하며 책임을 다하려는 두 번째 사람으로.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으려 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서...... -p.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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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7. 서한영교 『두 번째 페미니스트』 저자 서한영교는 카프카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얼어붙은 호수”를 깨부수기 위해서 카프카가 선택한 것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 같은 한 권의 책으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기듯 우리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애인과 함께 “얼어붙은 호수”를 깨부술 수 있는 도끼 같은 책을 한 권 꼭 쓰고 싶다. - 카프카를 인용한 이 문단은 기어코 시인 서한영교의 품에서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세상으로 선보여야만 했던 지독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뉜 현실 속에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 고마운 도움의 손길마저 사실은 비장애인의 우월함과 장애인의 특수성이 동시에 담기고 있음을 저자 서한영교는 잘 알고 있고, 또한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 시인이며 이 책의 저자인 서한영교는 그러한 현실을 마다않고 눈이 멀어가는 애인의 곁에서 ‘남성 아내’가 되어간다. 눈이 멀어간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일까. 과연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이 상황을 글로 풀어보자면, 한편으론 비장애인의 세상에서 장애인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과정이고 ?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일종의 새로 태어남과도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애인을 돌봄으로써 때론 아내가 되어야 했고, 때론 엄마가 되어야 했던 서한영교에게 애인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과정들은 일종의 간접 출산과도 같다. 서한영교가 시인이기 때문일까, 또는 그러한 삶을 택했고 그러한 삶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의 문장은 계산되지 않고, 그의 문장은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문장은 오롯이 그와 일상의 일부로서 표현된다. <애인은 시각장/애인이에요>편을 보면 “어머니, 제가 요즘 만나는 사람은 시각장애인이에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는 장애인이 되어가는 애인의 삶에 속하여, 비장애인이 만든 문명의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엔 장애인을 위한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대체 왜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으로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책을 반쯤 읽을 무렵, 이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자가 이 책을 페미니스트로 표현한 이유를 마침내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아내를 돌봄으로, 아이를 돌봄으로, ‘생명의 질감’을 육체로 직접 느끼게 된 ‘남성 아내’였기에 이 책의 제목에 굳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저자와 그녀는 자발적 협력을 통한 생활사의 분담을 통해 서로의 거릴 좁혀간다. 그러나 그는 책에서 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폭력을 온전히 겪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문장 앞에서 늘 머뭇거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누군가에게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다시 선언하며 책임을 다하려는 두 번째 사람으로.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으려 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읽은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결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남성 고발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 책에는 실존이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현실적으로 그가 접했던 생활사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함으로써 『두 번째 페미니스트』에 인간의 본질을 써냈다. 살아나아가야 하는,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현실적 금남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도와준, 무엇보다 산문을 통하여 실존을 접하게 도와준 저자 서한영교님과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더 기대 이상이었던 문학 출판 브랜드 아르테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