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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을 때 무대가 되는 장소가 잘 아는 곳이면 소설의 흐름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매튜 펄의 <단테클럽>은 1865년 미국의 보스턴을 무대로 하여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을 뒤쫓고 있습니다. 주요 무대가 되는 하버드대학교와 롱펠로우의 집 그리고 시내의 보스턴커먼과 올드 코너 등, 지난 6월에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를 다녀오면서 돌아보았던 장소(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0647)들이 등장하고 있어서인지 작가의 설명이 금새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도 제가 소개하는 보스턴 시가지를 둘어보시면 <단테클럽>에 대한 관심이 커지실 것 같습니다.
연쇄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은 사건마다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공통점이 있다거나 심지어는 다음 번 사건을 예고하는 사인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점을 유추해서 범인을 좁혀 들어갈 수 있어야 읽는 재미도 더하기 마련인데, <단체클럽>의 경우에서는 특이한 사건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보스턴 지역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힐리판사와 톨벗목사가 잇달아 살해되는 동안 시인 롱펠로우를 중심으로 하여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 단테클럽과 하버드대학의 집행위원회를 대변하는 매닝교수의 갈등에 대하여 따로 설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경찰이 주도하는 사건수사와 단테클럽이 어떻게 연결되어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도 관전포인트일 수 있습니다.
단테클럽은 롱펠로우교수를 비롯하여 번역이 끝나면 출판을 담당할 필즈, 원전해석에 참여하고 있는 단테를 강의하는 로웰교수, 그리고 의과대학의 홈즈교수, 그리고 그린 목사겸 교수 등이 핵심멤버입니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후주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읽어나가면서 후주를 읽는 것이 불편한 독자들은 먼저 후주를 읽어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를 갖추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찰이 오리무중인 범인의 종적을 뒤쫓고 있는 동안 단테클럽은 <신곡>의 번역을 통하여 미국 독서계에 불어닥칠 수 있는 단테열풍을 타고 가톨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질 것을 우려하는 유니테리언계 기독교 인사들이 <신곡>의 번역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그리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이들 가운데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전을 전공하는 매닝교수의 입장에서 현대어란 값싼 모방이나 조악한 왜곡에 지나지 않아서 스페인인이나 독일인과 마찬가지고 이탈리아인들 역시 나사 풀린 정치적 열정과 육체적 욕망, 그리고 타락한 유럽의 도덕성 부재를 대변한다고 여겨 외국의 독이 문학으로 위장해서 미국에 퍼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신곡>의 번역을 중지시키려는 노력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별도의 구조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톨즈목사의 주검에 대한 부검에 홈즈가 참여하면서 그를 살해한 방식이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는 성직매매자에 대한 처벌, ‘발꿈치에서 발끝까지(Dai calcagni a le punte)'을 따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고 결국은 단테클럽이 경찰수사와 별도로 사건수사에 착수하게 되면서 연쇄살인사건이 <신곡>의 지옥편과 연관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연히 범인은 오리무중인 상태라서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부풀리고 있습니다.
단테가 지옥에서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목에 따른 콘트라파소(contrapasso), 즉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단테클럽>에 등장하는 희생자들 역시 롱펠로우의 번역이 진행되는 과정과 흡사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는 점이 전율을 느끼게 하는 점입니다. 어느새 살인자는 <신곡>에 나오는 루시퍼로 불리게 되는데, 루시퍼(Lucifer)는 신곡의 지옥편 가운데 가장 깊은 ‘반역 지옥’에 머물고 있는 악마 중의 악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단테클럽은 진행하고 있는 단테의 <신곡>의 번역작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뒤쫓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범인의 그림자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단 1부는 범인의 그림자 끝도 밟아보지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문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데다가, 보스턴 문단과 뉴욕 문단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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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펄의 <단테 클럽> 은 19세기중엽 미국내에서 단테의 <신곡> 을 간행하는 중에 발생하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보스턴시내가 공포 분위기로 휩쓸려 가고 단테 연구가들인 롱펠로, 홈스, 로웰, 필즈등 소위 단테 클럽 회원들은 이 살인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닌 단테의 신곡을 그대로 본따 자행하는 행위임을 알게되고 이를 단초로 범인의 행방을 추적한다는 추리스리럴 작품입니다. 여기에 그냥 단순하게 추리스릴러 계통으로 흐를수 있는 내러티브에다 에이브러햄 링퀀의 노예해방선언 그리고 이를 원인으로 발생하는 남북전쟁의 여파등 역사적 사건과 흐름을 접목시키므로서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좀더 매력적인 장르로 독자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는 역사적인 팩트에 좀더 무게감을 살리고자 생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상당히 많이 포진시켰고 사건의 해결사인 단테클럽 회원들 역시 실존 인물들로 인물묘사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고증을 걸쳤다고 하네요. 특히나 이탈리어 강사인 바키의 경우 작품의 시대적 배경전에 사망한 인물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독자들의 눈을 헷갈리게 하는 역활을 하면서 팩트와 픽션을 넘나들게 됩니다.
<단테 클럽> 는 분명 팩션이지만 등장 인물들의 신빙성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묘사나 행동거지등이 팩트적인 요소가 강하다 보니 마치 실화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하네요. 그리고 작가는 남북전쟁이후 미국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전쟁의 후유증과 미국 엘리트집단내에 자리잡고 있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신곡> 과 절묘하게 배합하여 당시 시대적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미국의 화려한 발전상 이면엔 극심한 인종의 차별, 이민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 프로테스탄트교의 비뚤어진 교의와 소수 엘리트 집단의 행보등 아메리카 성장사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역사추리물을 넘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팁으로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단테의 <신곡> 을 한번 펼쳐보는 기회가 된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누구나 한번쯤 읽어봐야할 고전중에 고전이지만 운문으로 쓰여진 <신곡> 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저 같은 문외한들에게는 한계가 있어 몇페이만 넘기고 대충 삽화만 보다가 접었던 책이었더는데 이번 <단테 클럽> 을 읽으면서 다시 돌아보는 <신곡> 은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곡> 에서 말하는 콘트라파소의 형태인 중립주의자, 성직매매자, 분열주의자, 배반자등과 관련된 형별과 그 사유에 대한 얄팍하나마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반적으로 내러티브의 진행 속도나 그 속도감에 발맞추어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시대적 배경등이 잘맞아 떨어져 다소 방대한 분량이지만 무리없이 읽혀 나갑니다. 단지 너무나 많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하고 이 인물들에 대한 주석을 병행해서 읽어나가다 보면 약간의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물론 작가는 팩트적인 요소를 띄울려고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고 상당부분에서 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이지만 뭐 단테 클럽의 주 멤버들만 기억하고 넘어가더라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이네요. 무엇보다 화려하게만 알았던 미국사 역시 숱한 음영이 드리웠던 점철의 역사라는 사실, 그 와중에 단테 클럽의 멤버들 처럼 열린 패러다임을 추구했던 인물들이 이었기에 지금의 미국이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들구요. 모처럼 팩트와 픽션의 세계를 넘나느든 대작을 만나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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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길 반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속의 평정을 깨는, 아니 눌러두었던 마음에 금이 가는 소리에 괴로웠다. 다 내려놓고 떠나보냈다고 믿었던 울분과 패배감이 깨진 얼음 사이로 밀어닥쳤다. 살면서 느낀 찌꺼기 감정들이 정화되지 못한 채 응어리가 되어 그곳에 응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단테의 <신곡>과의 연관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삶 자체가 지옥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것과 싸워야겠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밀려드는 열등감과 무기력에 화가 나고 피곤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건지 이유를 알아야했다. 아마도 소설을 이끄는 단테 클럽의 멤버들이 하나같이 보스턴 브라민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롱펠로우를 신격화하고 빛으로 포장하는 점이었다. 나에게 <단테 클럽>은 미국문학개론서의 5장처럼 느껴졌다. 미국 동부는 지금까지도 미국 지성과 보수적인 혈통을 지향하는 곳이다. 19세기 중반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유럽에 맞설 미국적인 철학과 정신 확립이 중요했던 시기이다. 사건의 배경이 된 1865년은 남북전쟁 후 흩어진 민심과 바닥난 도덕성을 바로 잡을 정신적 리더가 절실히 요구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연설, 강연, 잡지 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 예찬이라는 시편으로 유명한 롱펠로우는 아내를 잃음으로써 활발했던 시작을 중단하고 단테 번역에 몰두한다. 아내를 잃음은 시의 수호천사의 상실이자 인생의 길을 잃은 고아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유폐하고 번역에서 위로를 찾긴 했지만 아내의 죽음은 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아픈 충격이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어둠과 분노를 토해내지는 않지만 그의 평정은 책을 읽고 풀어가는 과정 속에 되찾아지는 것임이 드러난다. 어떤 면에서 단테를 알고 30년째 이어온 만남이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과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비로소 진짜 지옥편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는 미국의 정신과 미국적 문화를 구성하는데 기여할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번역을 완수한다. 이미 영국판 <신곡>이 있는데도 단테 클럽은 미국 문인의 번역을 사수한다. 번역은 단순히 나랏말로 작품을 옮기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번역은 번역자가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제2의 창조영역으로 번역자의 철학과 사상 등이 은연중에 개입될 수밖에 없다. 단테 클럽의 회원들은 가장 미국적인 단테 읽기와 해석을 미국 독자 대중에게 전파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매닝은 단테라는 불온한 사상이 미국에 감염될 위험뿐 아니라 특정 학파가 함께 낼 목소리의 힘이 더 두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그래도 인간적으로 감정이 있게 그려지는 인물은 홈스와 로웰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어디까지는 롱펠로우의 특별함을 못 박기 위한 조연들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단테 클럽 회원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괴롭고 처절했을 것이다. 미국적인 정신이나 지적 열망에 매혹되어 따라가면 편했을 텐데 나에게 그들은 너무 멀리 있는, 지금으로 치면 상위 2%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오히려 제니슨, 바키, 단 틸 같은 인물들이 실제 더 많이 보아온 인간 같았다. 아무리 그들이 지적이고 세상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새 시대의 이상적인 동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태생적인 혜택을 지극히 넘치게 받고 있었다. 그래서 홈스의 주니어(아들)가 아버지를 뛰어넘는 역사를 쓸 것처럼 몰아가는 것도 반갑지만은 않았다. 소수 특권층에서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를 거듭 생산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앞이 까마득해졌다. 요즘에 스펙이라고 부르는 것 중에 최고치를 그들은 몸에 두르고 치장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시대적 배경지식과 연구가 투철한 역사소설이라 해도 전지적 관점에서 서사를 일말의 의심 없이 몰아가거나 남성 인물만 뚜렷하게 그려낼 때면 작위적으로 느껴져 아쉽다. 어떤 시대에 대한 앎의 매력과 화신적 구현이라는 장점을 그르치며 감정이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곡히 들어찬 상세한 설명들이 픽션이라는 느낌보다는 의문을 제시할 여지를 차단하는 문학사 같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힐리의 부인이나 로웰의 딸, 혼혈경찰 레이 등을 다룰 때 작가는 마무리 봉합 능력이 미흡하다. 무엇보다 우월한 그들이 찾아낸 연쇄살인범이, 즉 그들의 루시퍼가 다름 아닌 난독증 퇴역 군인인 것이다. 이 살인자는 남북전쟁의 잔상을 상징하는 듯 가명 단 틸로 이 소설에 존재한다. 전쟁에서 찾지 못했던 대의명분을 정신분열증의 상태로 단테 클럽 사수로 지켜내려 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조율하지 못한 그는 왜곡되게 정보를 읽고 행동을 감행한다. 이때 소름이 돋는 이유가 독자 대중의 경우 이런 파편적인 앎과 자기식의 해석과 오역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어떤 안내 없이 읽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폭력성의 합리화)로 인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단편적인 지식에 대한 맹신과 광신도적 자세는 지적 호기심과 구별하기 어렵다. 마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별 차이가 없게 느껴지는 두 종류의 파리들처럼 말이다. 식인성 파리, 즉 맹독성과 파괴력을 가진 파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실제 파리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단 틸이 아닐 자신이 있냐고. 나는 독서행위 속에 내가 단 틸이면서 식인성 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은 인간 안에 도사리는 극도의 악마성, 즉 괴물성을 서사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이 괴물성을 통해 반드시 뭔가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 괴물성이 추구하는 바가 뭔지 독자로 하여금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허무하게도 범인은 단 틸이고 그를 죽음으로 응징하는 자는 매닝이다. 단테 클럽의 어떤 회원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보스턴의 위험물들은 제거된다. 지옥편은 단테 탄생 600주년 기념에 맞춰 첫 미국인 번역판을 완성하고, 하버드의 집행위원장은 에머슨이 인계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상하게도, <단테 클럽>을 읽으며 느낀 불편함의 원인을 파악할수록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응시했다는 깨달음 때문인지 마음이 개일 수 있었다. 비록 무엇과 싸워야 할지 그 정체를 지금까지도 구체화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 작품 속에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제인 오스틴 클럽>에서 느끼는 독자 대중의 행복과 책읽기의 의미를 이 소설에서는 발견할 수 없어 박탈감과 상실감에 빠졌던 것 같다. 그리고 롱펠로우와 그의 군단이 사수하는 미국적 <신곡> 지옥편 탄생에서 예전에 바이어트의 <소유>에서 느꼈던 끝모를 문화자본축적의 야망과 전쟁을 겹쳐봤던 것 같다. 작품에 드리워진 엘리트주의와 함께 무엇과 지금 이 순간 싸워야 할지, 또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복합적인 감정에 나는 이 소설이 힘들었나보다. 어떤 답을 제시하지 않는 문학텍스트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내 나갈 길을 결정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심하게 흔들릴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단테 클럽을 통해 의무적 또는 표면적 읽기와는 다른 삶의 깊이와 정신을 녹여내는 진정한 번역의 차이를, 피와 펜의 간극을 간접경험할 수 있었다. 읽는 내내 불편했던 나는 함께 읽고 같이 토론한 사람들의 말에서 위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 작품이 읽을 만함을 역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어두운 숲에 두 번 들어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한 번은 우리 인생길 반고비에 들어선 날에, 한 번은 우리가 다시 그 날을 돌아볼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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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클럽은 1865년 미국의 보스턴에서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를 필두로 한 5명의 출판 관계자들이 알리기에리 단테의 이태리 판 『신곡』을 영문으로 완역하기 위해 창설한 번역 모임입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고 변화가 감지되면 기존 학계나 사회는 새로운 물결의 급격한 유입에 우려를 표하며 거부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상대적인 보수파가 생겨나는 현상. 이 소설의 단테 클럽도 마찬가지 『신곡』이 번역되면서 파급될 어떤 변화에 대해 우려한 반대 세력으로부터 갖가지 형태의 압력을 받습니다. 당시 미국의 문학적 보수주의가 『신곡』의 번역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것. 그런데 소설은, 단테 클럽을 둘러싼 개인과 단체의 갈등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의 갈등, 인종차별주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분리주의 등 포괄적인 부분을 함께 다룹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분리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스턴 최고위직 판사가 수천 마리의 구더기와 파리 떼에 잠식당한 채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괴이하고 끔직한 형태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살인 형태가 아직 번역 작업 중인 미발표 교정본 「지옥편」과 흡사하단 점에서 단테 클럽 일행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단테 클럽의 회원인 시인 롱펠로, 시인 홈스, 편집자 필즈, 역사학자 그린, 시인 로웰이 그들의 ‘루시퍼’가 누구인가를 추리하기 위해 의기투합합니다.
『삼총사』에서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라고 외치고, 『삼국지』에서 ‘한 날 한 시에 죽기로’라고 도원결의 하듯이 단테 클럽 회원들은 『신곡』에 나왔던 시구를 인용하여 그들 모두의 뜻이 같음을 확인합니다. 소설이 보인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습니다.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시를 읊고서 술잔을 들고 건배하는 장면일 뿐인데, 묘한 감동이 생겨나 동심의 물결이 세차게 파도침을 느꼈습니다.
소설은 대단한 리얼리티를 보입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에서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한 대립과 갈등이 온전히 녹아 있습니다. 단테 클럽 회원들뿐만 아니라 사건에 관여한 주변 인물들 또한 실존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소설의 리얼리티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소설이 언급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프로필이 소설의 미주에서 꽤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유심히 읽어보는 것도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데 크게 작용하리라 봅니다.
미스터리적인 면에서 봐도 소설 『단테 클럽』은 만족스럽습니다. 적당한 추리와 적당한 반전, 사건이 번지고 의심이 증폭되는 내러티브,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과 조화롭게 만나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보인 치밀함까지 모두 훌륭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역사학자 그린이, 자신은 단테의 이야기가 실재한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저 또한 이런 소설의 이야기는 1865년 보스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 믿고 싶을 정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립과 갈등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신의 허락을 받고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동행해 끔찍한 지옥을 관광하는 단테. 『신곡』은 신의 뜻으로 쓰여 졌고 단테는 자신을 여행자일 뿐이라 말하지만, 사실 단테는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단테가 살던 당시 세상도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경고의 메시지. 매튜 펄의 추리소설 『단테 클럽』도 세상을 말하고, 세상을 향하고 있는 일종의 경고로 보여 집니다.
“존경하는 총장 각하, 문학을 여흥거리나 강의실에서 억지로 암기해야 하는 엉터리 시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에 깃들인 인간적이고 고상한 에너지 때문에 문학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비로소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은, 국가란 오직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고차원적 의미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을 죽어 버린 이름에서 살아 있는 권력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1권, 81쪽)
“단테의 지옥은 지하 세계의 일부이면서 우리 세계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그에 맞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지옥의 깊이를 느끼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1권, 109쪽)
“단테가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묻지 말고, 인간이 단테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영원히 가혹하고 가차 없는 장소인 게 빤한데도 스스로 단테의 영토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말일세.” (1권, 177쪽)
“누가 벌을 받고 누구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결정한 사람은 단테야. 그 조치를 취한 사람은 그 시인이야. 하지만 그는 자신을 여행자로 만듦으로써 우리가 그 사실을 잊도록 했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테도 신의 작품을 바라고는 순수한 목격자라고 생각하도록 한 거지.” (2권, 59쪽)
“쏴 보시지. 어떻게 되든 간에 네놈은 이길 수 없어. 네 놈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거나 아니면 우리가 네놈을 지옥으로 보낼 거다.” (2권, 89쪽)
“홈스, 자네는 늘 단테의 이야기가 위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항상 단테가 직접 여행을 했다고 믿었어. 하느님이 그에게 그 여행을 허락하셨고, 또 시를 통해 여행하도록 허락하셨다고 믿었네.” (2권,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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