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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겹쳐질 수 있다면
"시와 겹쳐질 수 있다면" 내용보기
때때로 소설과 시를 읽다가 소설가와 시인을 생각한다. 책날개의 사진을 통해 이런 사람이 이런 소설을 쓰다니 놀라기도 하고, 필명이 아닌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들의 문장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나의 문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내가 마주한 글들이 얼마나 많은 수정과 얼마나 많은 삭제 뒤에 태어난 것들인지 말이다. 그러다 그것은
"시와 겹쳐질 수 있다면" 내용보기

 때때로 소설과 시를 읽다가 소설가와 시인을 생각한다. 책날개의 사진을 통해 이런 사람이 이런 소설을 쓰다니 놀라기도 하고, 필명이 아닌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들의 문장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나의 문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내가 마주한 글들이 얼마나 많은 수정과 얼마나 많은 삭제 뒤에 태어난 것들인지 말이다. 그러다 그것은 그들이 몫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 된다.

 

 어쩌면 시를 읽는 건 비밀스런 그들의 무언가에 가깝고자 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시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서 말이다. 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시를 많이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언제부터인지 책을 주문할 때마다 시집을 함께 주문한다. 가을이라 국화를 닮은 표지가 반가운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는 시에 대한 시인의 욕망이 고스란히 녹아 든 시집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시에서 언급하는 당신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시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시를 사랑한다는 고백인 것이다. 시와 겹쳐지고 싶은, 시와 하나가 되고 싶은 시인의 바람이 느껴진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그 깊은 뜻을 알 수는 없을 터.  그저 내 마음이 닿는 시를 따라 읽을 뿐이다.

 

 <손에서 발까지>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손에서 발까지 걸어갔어요

 이런, 내 손과 내 발인 줄 몰랐는데 말이죠

 당신 손은 언제나 내 손만한 심장을 꽉 쥐고 있군요

 내 발이 계속 더듬는 이유죠

 내 손보다 더 큰 접시가 놓인 밥상 위에서

 우리는 접시보다 못한 곳이 되어버리죠

 내 입에서 뛰쳐나온 사랑의 밀어가

 당신의 방패에 멋지게 꽂힙니다

 접시가 흘러넘칩니다

 우리가 자꾸 비만이 되는 이유죠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배에서 등까지 걸어갔어요

 삽시간에 와락 안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엔 무얼 하죠?

 걸어가기에는 당신은 꽤 비좁군요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막 내 오른손에 도착한 곳이 당신인가요

 당신에게서 당신까지

 매일 한 시간 십 분씩만 걸어갈게요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당신은 이미 건강할 거예요  - 15쪽

 

 <생각보다 가벼운 상자>

 

 뚜껑을 닫자마자 상자입니다 결코 입을 다물 수 없는 ‘상

자’ 를 불러봅니다…… 상자아아아, 목젖에서부터 열려 있

는 둥근 모음에 침이 고입니다 각이 진 모서리가 사과처럼

사각거립니다 사각거리는 상자가 침을 질질 흘립니다 사각

사각 모서리를 갉아먹으며 상자가 젖고 있습니다 옷이 젖

을까봐 한껏 상자에서 떨어져 상자를 들고 가는 당신 상자

는 난처합니다 상자는 불편합니다 상자는 내성적입니다 당

신은 구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자의 능력입니

다 상자가 줄줄 비를 내립니다 상자는 상자를 빠져나갑니다

그것은 상자의 기분입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가벼운 상자를

툭 던지듯이 놓는군요 ‘상자’ 가 새어나옵니다 당신의 목젖

에서부터 당신의 치아 사이로 새어나오는 상자는 닫혀 있습

니다 뚜겅을 열자마자 상자가 아닌 ‘상자’ 는 닫혀 있습니다 - 61쪽

 

 내게는 당신도 상자도 모두 시의 다른 이름이다. 당신을 향한 몸짓은 아름답다. 천천히 전부를 알고 싶은 간절함이 보인다. 매일 한 시간 십 분씩만 걸어갈게요,라니. 얼른 가서 안고 싶을 턴데. 이미 당신에게 도착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일정한 간격으로 다가가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시라는 상자를 열였지만 또 다른 시의 상자는 닫혀 있다니, 시인은 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시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우리가 난해한 시 앞에 무너지듯이. 그래도 시인은 계속 닫힌 상자를 열  것이고, 그 속에 담긴 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나무>

 

 나는 최초의 나로부터 도주하고 있다

 최초의 나를 연장하기 위해

 나는 최초의 나의 의심에 의심을 달고 있다

 환멸에 환멸을 더하고

 눈물에 눈물을 더하고

 깔깔깔 웃음에 웃음을 더하면

 뻔한 정오가 천 개의 빛으로 넘쳤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이

 최초의 나를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이

 최초의 나를 연장하기 위해서라면

 최초의 나를 지지하기 위해서라면

 맨 처음 가계도를 그리던 날부터

 나는 까마득히 도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도주하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연장하는 것이 이토록 감동이라는 것을

 알기는 알았을 테지만

 모르고도 나는 도주를 수단으로 살아왔다

 치를 떨 때마다

 내게 매달린 잎사귀들이 새파랗게 질리고

 치를 떨 때마다 나를 배반했지만

 나는 미덕의 반대편을 선호했으니

 그것이 내 도주로의 필수코스였으니

 최초의 나로 무성하기 위해

 나는 최후의 나를 지연시키고 있다  - 42~43쪽

 

 <내 생각의 내장은>

 

 내 생각의 내장은 해변처럼 꾸물거리지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버리기가 아깝지

 예스라고 말하면 노가 끌어당겨

 진실로 말하면 거짓이 끌어당겨

 솔직히 말하면 항문으로도 할 수 있네

 내 생각의 내장은 꼬여 있지

 내 생각의 결론은 입에서 항문으로 오락가락하지

 그래서 내 생각의 내장은 꿈틀거리지

 있다고 말하면 없다가 뒤따라오지

 좋아라고 말하면 싫어가 뒤따라오지

 내 생각은 비워지지 않지

 쏟아지지 않지

 꼬리에 머리를 물고 오지

 가설 뒤의 가설처럼 밀려오지

 내 생각은 항상 거울을 마련하지

 내 생각은 네 생각을 마주하지

 네 생각과 내 생각 사이가 너무 멀어서

 나는 중간에 딴 생각을 하지

 나는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지

 생각 속에 물고기가 알을 낳도록 생각하지

 끝이라고 생각하면 시작되지 - 75쪽

 

 최초의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일 것이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일은 끊임없이 시를 쓰는 행위라 생각한다. 엉켜진 생각들을 풀어 쓰고 또 쓰는 일은 끝이 없음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건 우리 앞에 놓여진 생도 마찬가지다. 울퉁불퉁 평탄하지 않은 삶, 고비를 넘었다고 안도하면 바로 나타나는 숨겨졌던 고비들. 살아가기 위해, 시인도 우리도 최후의 나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최후의 나를 만나기가 두려운지도 모른다.

 

 <물심양면>

 

 내게 네 앞에서 반하는 동시에

 뒤까지 반하는 건 일루전이다

 지금 나는 오해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있다

 착각하기 위하여 읽어주면 좋겠다

 이해받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돌아와보면

 물심양면이 늘 궁색했다

 심지어 양손을 비비기까지 했으니

 네 태도는 또 어떻고

 낮이 밤을 모른 채

 밤을 불러들이고

 봄이 겨울을 모르는 채

 겨울을 따라갔다

 너는 앞과 뒤가 동일한 괴물은 아니지?

 물론 나도

 네 앞을 보고 있으면

 모르는 네 뒤가 따라온다

 즐겁다 때로는 괴롭다

 그런 후에도 네 뒤에 반하거나 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착각으로 오해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 91쪽

 

 <등록>

 

 나에게 씨를 뿌려서 씨의 얼굴을 펼친다 너에게 못을 박아

서 못의 얼굴을 매단다 우리는 깜빡 식목을 끝낸 사람처럼

최선의 예의로 물을 뿌렸던가 그러고 나면 누가 누구를 간

절해한다 누가 누구를 간절히 소모한다 우리는 유월의 야채

밭처럼 만사가 병렬적이다 병렬적으로 사랑하고 병렬적으

로 이별한다 뭉턱 한 소쿠리의 야채가 솎아지고 단 하루 만

에 부쩍 한 움큼의 야채가 불어나는 야채밭의 기교를 기꺼

이 받아들인다 누가 누구를 상처냈나 누가 누구를 배반했나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간절함이 작용한다면 아무 일이 있어

도 없었던 듯이 흘러간다 사라진 너를 위하여 사라질 너를

준비하는 병렬적인 나 사라진 나를 위하여 사라질 나를 대

신하는 병렬적인 나 우리는 고맙게도 유월의 야채밭처럼 절

대적이지 않다 다음 뒤에 다음이 온다 씨를 거두어서 씨의

얼굴을 치우거나 못을 뽑아서 못의 얼굴을 거두거나 - 62쪽

 

 너라는 시, 하나의 씨앗을 심어 싹이 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절망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설사 싹을 틔우지 않더라도 실망하는 대신 다시 씨를 뿌리면 된다는 걸 시인은 알고 있는 듯, 조말선의 시는 체념한 듯 보이지만 강렬한 신념을 보여준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싹은 과감하게 거두고 고집스럽게 수 천, 수 만 개의 씨를 뿌릴 게 분명하다. 이토록 강한 의지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다시 궁금해진다. 그리고 다시 이런 시에서 확인한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어떤 위치에서도 변함없이 시와 겹쳐지기 위해 계속해서 시에게 다가가는 시인의 모습을 말이다. 단단하게, 단호하게, 그렇게!!

 

 <입장들>

 

 우리 사이에 유리창이 있다

 나는 당신을 들여본다

 당신은 나를 내다본다

 아닐 수도 있다면

 안과 밖의 문제에 부딪혀서

 위치를 바꾼다

 나는 부분을 본다

 유리창의 사정에서 말한 것이라면

 입장을 바꾸어서

 당신이 사려 깊은 태도로 안을 본다면

 나는 이제 사냥이라도 떠나고 싶은 표정을 짓는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유리창은 열지 않는다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유리창은 깨지 않는다

 입장을 바꾸어도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어른어른 나는 겹쳐져 있다

 오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손차양을 만들어

 나에게 겹쳐져 있는 당신을 의심한다 - 14쪽

r*********s 2012.10.26. 신고 공감 1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