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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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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봄, 여름, 가을 잊어진 세월/양지바른 분지 잡초의 떼는/무성케도 이루어 쓰러져갔다.//무너진 살림살이 해마다 쌓여/마흔아홉 두께의 비옥한 층을 입었을 때,/그곳에선 육신 같은 미끈한 줄기가/아름다운 향기를 사지에 뿌리며/하늘거리는 요화처럼 돋아나고 있었다.//한그루 불전을 꽃피우기 위하야/선사 오천년은 묻히어갔고.//한그루 피어난 성서의 지층에는/구십구억 창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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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봄, 여름, 가을 잊어진 세월/양지바른 분지 잡초의 떼는/무성케도 이루어 쓰러져갔다.//무너진 살림살이 해마다 쌓여/마흔아홉 두께의 비옥한 층을 입었을 때,/그곳에선 육신 같은 미끈한 줄기가/아름다운 향기를 사지에 뿌리며/하늘거리는 요화처럼 돋아나고 있었다.//한그루 불전을 꽃피우기 위하야/선사 오천년은 묻히어갔고.//한그루 피어난 성서의 지층에는/구십구억 창세 인민의/몸부림 든 사상이 썩어 있었다.//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무삼 꽃이 내일날 피어날 것인가.//잡초의 무성을 나래 밑에 거느리며/칠천년 늙어온 몇그루 고목,//당신네 말씀도, 지혜의 법열도,/문명의 행복도, 그대네 작업도,/늘어붙어 지층 이룰 갑충의 무덤.//정신을 장식한 백화만상이여/몇만년 풀밭 이룬 인종의 가을이여,//흐무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무삼 꽃이 내일날엔 피어날 것인가.//우주 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은/태양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태양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의 강은/우주 밖 창을 열고 춤춰 흘러갈 것인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 후화’ 전문>

 

시인 신동엽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껍데기는 가라>는 시이다. 4.19혁명에 직접 뛰어들기도 하고 4.19를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여 ‘사월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 그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 그리고 4.19정신을 역사의 알맹이로 보았다고 한다. 1930년 충남부여에서 태어난 신동엽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그리고 1969년 향년 40세에 간암으로 타계하기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껍데기는 가라>를 비롯하여 <아사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진달래 산천>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시들을 남겼다.

 

이 책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시인의 서거 5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시 50편과 그림을 함께 실은 시그림집이다. 강경구 등 6명의 화가가 시인의 시 33편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34편의 그림은 온전히 이해하기가 조금은 힘들었지만 시인의 시를 다른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표제작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서 쟁기꾼은 농부를 말하는 것 일게다. 소 뒤에 쟁기를 달고 논과 밭을 갈아엎는 사람을 쟁기꾼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넓은 곳은 트랙터가, 좁은 곳은 관리기를 이용하여 갈아엎지만, 예전에는 소와 쟁기가 했기에 쟁기꾼이 한해 농사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봄이 되면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했기 때문이다. 그런 쟁기꾼이 하는 이야기가 서화, 1화에서 6화까지 그리고 후화로 이어진다. 8편의 시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책에는 후화 1편만 실려있다.) 나는 그 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제대로 할 수는 없지만 이 시가 발표되고 7년 후인 1966년에 쓴 <사월은 갈아엎는 달>이란 시가 바로 이 시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고향은/강 언덕에 있었다./해마다 봄이 오면/피어나는 가난.//지금도/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무너진 토방 가선/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미치고 싶었다./사월이 오면/산천은 껍질을 찢고/속잎은 돋아나는데,/사월이 오면/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우리네 조국에도/어느 머언 심저, 분명/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미치고 싶었다./사월이 오면/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강산을 덮어, 화창한/진달래는 피어나는데,/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보리를 뿌리면/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갈아엎는 달./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일어서는 달. <‘사월은 갈아엎는 달’ 전문>

 

흔히 우리는 신동엽을 저항시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4.19혁명, 그리고 5.16군사쿠데타까지 겪으면서 쓴 그의 시에는 상처와 얼룩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시인이 희망했던 인간적인 삶은 아직도 우리 곁에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쟁기꾼은 논밭을 갈아엎으며 이야기했지만 억압과 차별을 넘어 꿈꾸었던 세상은 그가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에도 오지 않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직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세상에 가득 찬 껍데기들이 모두 사라지는 그 날까지 시인의 시는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숨 쉬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연>

 

서럽게

이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마지막연>

k*****1 2019.10.02. 신고 공감 10 댓글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