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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가 주는 희망 누군가 그립거나 마음이 힘들 때면 한 권의 시집을 펼쳐든다. 그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는 아름답고 영혼을 맑게 하며 지친 삶에 위로를 준다.’라는 이유를 댈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시는 소설과 긴 에세이가 주는 독서의 즐거움과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다. 긴 문장을 읽어낼 만큼의 인내와 집중이 흔들릴 때 일상에 지쳐 피곤해진 눈이 한 곳을 지속적으로 응시하기가 힘들 때 그럴 때면 짧은 시간에 읽어 낼 수 있는 시집에 손이 간다. (결국 지친 삶에 위로를 준다는 것과 같은 말인가?) 시집은 처음부터 읽어내려 갈 필요도 없고,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저 마음이 가는 곳에 잠시 멈추기만 하면 된다. 헛발질 하며 허공을 빙빙 도는 시계 바늘을 잠시 멈추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다시 삶의 시계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시인이 나를 위해 이 시를 써준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적어도 이 한 편의 시는 내 편이라는 믿음으로... 그것이 시가 주는 위로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한 편의 시를 읽고 나서 느낌을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잠시 전까지도 시 속에 나를 투영하면서 시가 주는 울림과 떨림에 공감의 하트를 꾹 눌렀지만, 딱히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망설여지는 그런 느낌. 그래서인지 일반 독자들이 쓰는 시평이나 시 감상문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가끔 시집의 끝부분에 있는 평론가들의 시평을 읽을 때가 있다. 분명 나는 그 시를 읽고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는데, 시평을 읽고 나면 전혀 다른 해석에 당황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 느낌도 저렇게 어려워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수학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들끼리도 보는 시각이 다를 것이므로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는 김왕노 시인의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에 수록된 시들이다.
‘할머니의 미소’와 ‘늙은 개의 미소’ 를 보며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던 시인이 부럽다.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에서 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 다시 천 년을 위해 한 발 두 발 나아가는 그리움. 그리움이란 수천 년이 흘러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것일까?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 누구나 그 낙과가 내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또한 내가 낙과가 된 것이 미친 돌개바람의 탓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미친 돌개바람의 탓 이전에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이라고.
나의 서천은 어디일까? 나도 서천으로 가고 싶다. 나도 서천으로 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