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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홉스봄이라고 부르는 그를 15 년쯤 전만 해도 홉스봄이라 부를지, 홉스바움이라 부를지 한국 학계에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깊이 있고, 박식하고, 통찰력 있는 서술 덕에 홉스봄의 저술은 맑스주의 역사학에 관심 있는 자들에게 필독서였는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나 더이상 그의 저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이 책의 원저 『Change the World: Reflections on Marx and Marxism』는 홉스봄의 발표 및 미발표 논문 모음으로 그가 죽기 1년 전 출판되었는데 한글 번역판은 그가 죽고 2주 뒤인 2012년 10월 중순에 나왔으니 그 시기도 절묘하다. 한글판은 원서의 제목을 부제까지 그대로 따랐다. 그렇지만 표지 그림은 원서와 한글판이 다르다. 원서에는 러시아 혁명을 묘사한 듯한 그림과 체 게바라 초상을 각각 상단과 하단을에 배치한데 비해, 한글판에는 마르크스와 그 후의 공산주의자들 아홉 명의 초상을 실었다. 그런데 표지와 제목이 책 내용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이 책은 원서의 표지에 실린 러시아 혁명이나 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도, 한글판 표지에 실린 (마르크스와 그람시를 제외한) 7인의 공산주의자의 이야기도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어떠한 간접적인 암시도 없다. 부제대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과 사상사를 다루는데, 홉스봄은 이들의 사상과 생애를 모두 다루려 하지 않았고 역자 후기에 소개된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사상이 역사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2부는 마르크스 사후부터 200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의 부침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간단한 역사를 다룬 챕터가 맨 마지막에 추가된다. 책을 읽다 보면 구성이 신약성경과 유사하다. 1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같고, 2부는 사도행전 같다. 마르크스주의에 애정이 있을 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족보’부터 따지면서 언젠가 다시 올 마르크스주의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1부는 4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을 좀 더 닮았다. 2부에 나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파가 사도행전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에게는 열두 제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비록 일찍이 1880년대부터 “마르크스의 이름과 연계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극적인 성장을 보이긴 했지만(p. 223), 적어도 이 책에 나타난 바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경로로 각국에 전파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성경과의 유사성은 책의 구성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가 보여준 성장과 파급력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20세기 사회혁명의 본질적인 국제적 원리”가 되었으며 그에게서 비롯된 여러 버전들은 “그 절정기에는 대략 인구의 3분의 1이 살고 있는 나라들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과거의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과 “무함마드를 가능한 예외로 한다면 누구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비교할 만한 규모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p. 354)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재림을 조심스레 예견하는 마지막 챕터들의 입장도 성경과 비슷하다.
마르크스주의의 퇴조에 관한 홉스봄의 분석은 명확하지는 않다. 홉스봄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마르크스주의의 퇴조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탓으로 단순히 치부하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후퇴는 구래의 급진적 좌파 내에서 생겨났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판형에 내재하는, 자동적 역사적 발전과 혁명적 행동의 역할 사이의 충돌로 인해서 생겨났다(p. 403).”고 본다. 홉스봄 자신이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공산주의로의 전환이 역사발전의 필연법칙이라면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기론자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내적인 충돌에 더하여 외부적 요인도 물론 존재한다. “대다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타자에 의한 그들의 전통적인 방시과 목표의 의도적인 폐지, 노동자에 근거한 사회민주주의의 동시적 위기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지적인 담론에서 거의 완전하게 주변화되는 20년[80, 90년대]을 설명하기는 아마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p. 407).” 이 책이 노 교수의 역작이자 유작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책은 아니라는 것이 책을 읽은 뒤의 솔직한 소견이다. 홉스봄의 다른 저작들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대중서들을 몇 권 읽고 난 뒤에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이 다른 책들의 부족한 부분을 훌륭히 보완해준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은 건조하고 딱딱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대중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홉스봄의 방대한 연구가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고 마르크스주의 100년을 개괄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홉스봄이 마지막 저서라는 점만으로도 이 책이 갖는 무게와 의의는 충분히 크다.
[덧붙임] 번역은 썩 좋지 못하다. 대부분의 문장을 한없이 직역한 탓에 읽기가 매우 거북하다. 직역 옹호자들은 흔히 원서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 직역을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어불성설을 여기서 반박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고, 다만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직역투를 택한 것 같지도 않다는 점만 지적해두겠다. 왜냐하면 원서에 나온 문장을 역자가 편의로 두어 문장으로 자른 곳이 많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문장인데도 무슨 원칙 때문인지 두 문장으로 자르기도 했고, 어떤 곳에서는 원서에 없던 괄호를 넣기도 했다. 모든 전치사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고 모든 명사는 명사로 모든 부사는 부사로 번역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문장들이 어색하다. 전문 지식과 아울러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과 최소한의 한글 실력을 갖춘 역자가 번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언어의 비호환성이 독해에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흔히 말하듯이, 영어와 달리 한글은 문장이 길어지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반면 영어는 핵심을 문장 앞부분에 언급하고 부가적인 내용을 추가하는 형태로 문장이 구성되므로, 한 문장이 10줄을 넘어가더라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구멍을 메우는 내용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조금 안다는 독자에게도 꽤나 새롭고 어려울 법한 책이다. 따라서 홉스봄이 즐겨쓴 만연체 문장을 한글로 옮긴 번역서를 읽다보면 열 줄쯤 밑에 서술어가 나올 때까지는 이 문장이 과연 ‘~이다’로 끝날지 ‘~이 아니다’로 끝날지 추측할 수 없어서 도대체 어떤 자세로 문장을 읽어야 할지 모호하다. 그러니 영어가 조금이라도 되는 사람은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번역서보다는 원서를 읽을 것을 권한다. 그 편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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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현재의 시대에 있어 맑시즘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맑시즘에 기초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지 20년도 넘었고, 사회주의의 변형태라 볼 만한 중국식 사회주의나 북한의 사회주의는 철저한 통제에 기반하여 자본의 본질을 더욱 추종하는 자본주의로 변화되거나, 권력세습에 몰두한 변질된 독재사회로 남았을 뿐, 시대적인 영감을 세상에 부여하는 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분배의 공정한 재구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실험적 시도에 주목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맑스의 자본론이 보여주는 역사적 시나리오와 권력의 순환관점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시도는 매우 온건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면이 있다.
현실사회주의도 결국은 정치적 현실이었다. 맑스의 자본론은 그런 점에서 맑스자신이 예상해 본 일종의 시나리오였고, 때문에 곳곳에서 오류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현실사회주의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중과 우대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계급독재와 계획경제 아래에서 고통만 수반했을 뿐이다. 폴란드 사회주의를 그린 만화 '마르지'에서 표현되는 계획경제 배급시스템은 물자부족과 역할관계에 있어 비인간성만 만들어내었을 뿐이라 묘사한다. 맑스는 노동자의 역할에 있어 전세계적 규모를 강조하였지만, 그런 바탕아래 구성된 인터내셔널은 베트남의 호치민이 이야기했듯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하에 고통받는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기만 했다. 시나리오의 불안정성은 자본의 악의적 본성마저도 극복하지 못했다. 맑스는 자본의 축적이 공황기를 거쳐 전세계 노동자들의 대혁명을 통해 계급의 전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본의 공황뒤에 찾아온 것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었고, 자본은 계급의 전복없이 다시금 제모습을 찾아 이윤을 찾아 구르기 시작했다. 현실사회주의는 붕괴했다. 냉전이라는 정치적 구도가 사라진 이후 자본은 이윤율 추구와 경쟁의 심화과정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자 했지만, 미국발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그 과정은 점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맑시즘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는데 관심의 주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맑시즘을 세계경제의 근본적 대안으로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과 권력을 유지하는데 잠시의 양보와 보폭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라본 것이었다. 이 쯤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현실안에서도 실험으로만 끝나버렸고 현재에 와서는 근본적 변혁의 수단이 아닌 체제유지수단으로서 주목되고 있는 맑시즘은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에릭 홉스봄도 맑시즘을 대안이 아닌 시대적 참고사항으로 제시하고 있음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비관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자본주의건 맑스식 사회주의건 간에 자본의 끊임없는 순환과 생산을 전제로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존관점에서 환경이 대두되고 있고, 심각한 환경의 훼손이 명백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대두되는 환경론 앞에서 맑스의 자본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이 사회주의적 체제로 변환된다 해서 환경론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맑스의 자본론이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이는 어떤 변화와 응용으로 이 시대의 문제에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일까? 에릭 홉스봄은 90이 넘는 인생 자체가 맑스주의 역사의 증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통찰은 무척 넓고 깊고 광활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사상의 역사적 이해가 풍부하지 않으면 읽기가 어렵다. 최소한의 기본지식을 갖추고 수준을 만들어놓아야만 그나마 쉽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부족하기만 한 사상과 개념적 이해수준을 가지고 이런 수준의 독후감이나 끄적거리고 있다니, 난 대체 뭘 얼마나 이해하고 이렇게 써댄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