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렴풋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겪는 과정이 당시 나로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겪을 수 있었던 것이기에 이 작품을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뒤로 『데미안』은 꽤 오랜시간 잊혀지게 되었다. 끝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난해한 책이라는 인상이 머릿속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대에 들어선 지금 나는 다시 『데미안』을 읽게 되었다. 열 다섯살 때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놀랍게도 우리가 사춘기를 겪던 그 시기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p. 6 中에서 - 언제 읽어도 『데미안』의 이 첫 구절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을 42세가 되던 1919년에 『데미안 :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 시절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작품은 그의 또 다른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자전적인 내용을 반영하여 쓰여진 것으로서 일종의 회고 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늠자가 된다. 사춘기 시절의 방황을 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성장통이었음을 이해하고, 또 그것이 많은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이 작품이 출간된 1919년은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지 1년이 지난 비참한 상황 속에서 독일 청년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였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야기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에밀 싱클레어의 열 번째 생일이 지났을 무렵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엄청난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클레어가 겪으며 방황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놀랍게도 우리가 사춘기 시절에 겪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한 거짓말로 인하여 프란츠 크로머에게 협박을 당하는 과정은 그 시기에 일탈 내지는 평범한 것과는 다른 길을 걸어보려는 시도로 볼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추궁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내심 즐기는 그의 모습은 그가 속한 세계와 별개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자각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이니까. 유년기를 지탱하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니까. 운명의 핵심적인 길은 이런 보이지 않는 체험들이 그려간다. - p. 27 中에서 -
이러한 에밀 싱클레어의 회고는 '일탈'로 보여지는 행위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사춘기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부모님에 대한 반항과 거짓말은 사춘기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기존에 속해 있던 세계 말고도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과 기존 세계에 대한 균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춘기를 떠올리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또 부모가 된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자녀의 사춘기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데미안』을 읽으면서 이 지극히 당연한 생각과 감정이 어쩌면 우리는 에밀 싱클레어와는 달리 또 다른 세계를 아예 염두에 두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즉,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길을 묵묵히 가야 했고, 그 과정이 힘들어서 잠깐 반항하기도 하지만 결국 기성세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 길로 다시 복귀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에밀 싱클레어의 복잡한 내면의 갈등과 방황을 우리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그토록 막스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갈망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납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수긍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거나 또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던 그 시기의 방황을 에밀 싱클레어의 감정에 이입하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하여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또 다른 세계의 형상을 조금씩 구체화하게 된다. 데미안은 성경의 내용을 기존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싱클레어를 일깨우게 된다. 『데미안』에는 유독 카인의 이야기와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과 같이 성경의 내용이 다수 인용된다. 당시 유럽이 여전히 종교가 삶의 지침으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부분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에덴 동산에서 금단의 열매인 사과를 먹었던 것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대목들은 파격을 넘어서서 이단에 가까운 것인데, 이는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일깨우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어린 영혼의 샘물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졌다. 오랫동안 카인, 형제 살해, 표식에 관한 문제들이 나의 모든 인식, 의심, 비판의 출발점이 되었다. - p. 46 中에서 - 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은 악인으로 간주하는 상황에서 데미안은 오히려 카인이 강자이며 우월한 자라 말하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곁에 있던 두 도둑 중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자신만의 길을 고수한 인물이라 말한다. 싱클레어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데미안의 이야기는 그의 안에 어렴풋이 존재하던 '어두운 세계' 아니 '다른 세계'를 재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데미안의 그러한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로 대변되는 '빛의 세계'를 단번에 꿰뚫어 보면서 경멸하는 순간 그 스스로 자신 역시 표식을 새긴 카인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그저 기존의 관점에 대한 반발로 현실을 부정하려는 것일까? 종교에 대한 그의 다른 해석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반항처럼 보일 수 있지만,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오히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아가서 데미안은 자신이 속한 이외의 것에 대한 포용을 강조하며 기존의 체제가 편협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것들도 있어. 그 나머지 것들을 모조리 악마적인 것으로 취급하니까 이쪽 세상의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지.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性)을 아예 묵살하거나 악마적이라고 단죄하다니! - p. 81 中에서 -
데미안 덕분에 싱클레어는 결국 의식을 남들과 다르게 갖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데미안에 의해 눈뜨게 된 사유 세계로 입문함과 동시에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데미안』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이 작품에서 데미안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만, 오히려 싱클레어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더없이 현실적으로 보이게 된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그가 점점 반항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든지 그러한 반항을 누군가에 대한 사랑으로 순화시키는 과정은 인생에 있어서 사춘기와 첫사랑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데미안 이외에도 알폰스 벡과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직접 사귄 적은 없지만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은 싱클레어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존재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p. 123 中에서 - 『데미안』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 문구는 싱클레어가 비상하는 새를 그린 그림에 대한 답례로 데미안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해하고자 하면 상당히 간단한 내용이지만, 과연 새가 나오기 위하여 알을 깨뜨린 것처럼 우리는 세계를 깨뜨리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싱클레어 역시 그랬다. 아브락사스가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는 뜻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바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찾던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과거 목사가 되기를 염원했던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 역시 상당히 의미가 있는 장면이다. 피스토리우스 역시 '아브락사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싱클레어는 그를 통하여 데미안이 보낸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고 또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 (중략) 이 인식의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곧바로 인간이 되지." - p. 143 中에서 - 피스토리우스의 조언은 왜 세계를 깨뜨리고 신이자 악마인 아브락사스를 숭배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앞서 데미안이 말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포용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과 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불어 세계를 깨뜨리고 하늘을 나는 자들이 땅만 걸어다니는 사람보다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이지만, 어떤 열쇠나 방향키도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음도 함께 지적한다. 이러한 깊은 깨우침을 전달하는 피스토리우스이지만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려는 그가 도리어 기존의 종교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싱클레어의 여정은 계속 이어지게 되고 다시 데미안과 재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직접 만나게 된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과 같이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도록 살아가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싱클레어는 어느 정도 성숙한 자아의 단계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바람이 누런 구름과 회색 구름과 파란 하늘을 뒤섞어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거대한 새가 시퍼런 혼돈을 찢고 나와 큰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모습이었다. - p. 211 中에서 - 시종일관 『데미안』에서 새는 개인의 자아를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싱클레어가 우연히 하늘에서 본 이 장면은 내면적인 개인의 자아 성찰이 외부 환경과 완전히 별개로 동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개인의 자아에 관하여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지만, 작품 막바지에 꿈을 통하여 세계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예견하는 부분 역시 싱클레어가 하늘에서 본 새가 의미하는 바와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데미안은 장교로 이후 싱클레어 역시 사병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싱클레어는 전장에서 그동안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통하여 깨달은 바를 떠올리다가 포격으로 인하여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거기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이제 싱클레어와의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로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하고 다음날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토록 갈망하였던 데미안이 야전병원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오히려 자신과 데미안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가끔 열쇠를 발견해서 내 자신의 깊은 곳으로,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형상들이 졸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어두운 거울 위로 몸을 굽혀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젠 완전히 내 친구, 나의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은 모습이다. - p. 228 中에서 -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에서 데미안을 발견하게 된 싱클레어. 하지만 이런 장면은 이미 앞에서도 등장하였다. 오로지 마음 속에만 사랑의 대상이었던 베아트리체를 그린 그림에 대한 싱클레어의 인식 변화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점차 그 얼굴이 베아트리체나 데미안이 아니라 나라고 느껴졌다. 나와 닮아서가 아니라(닮을 필요도 없었다) 내 삶을 결정짓는 것, 내면의 나, 나의 운명, 나의 신(선이든 악이든)이었기 때문이다. - p. 112 中에서 - 이런 장면들은 어쩌면 데미안이라는 존재는 바로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점점 성장하면서 나중에 데미안이 떠난 순간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자신의 얼굴에서 데미안을 볼 수 있었다고 되뇌이는 부분은 드디어 그가 원하던 성숙한 자아의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품 모두 헤세의 자전적인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데미안』의 싱클레어와는 달리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는 주어진 길을 따라다가다 변화된 새로운 길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싱클레어는 무수한 고민과 방황,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조금씩 성장하여 나중에는 그토록 갈망하던 데미안과 같이 성숙한 자아의 단계로 올라섰으니 두 작품의 인물은 상당히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셈이다. 아무래도 『데미안』이 인생에 있어서 성숙기에 들어선 헤세가 전쟁의 패전이라는 시련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비슷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당시의 내가 여전히 알 속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정도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알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온 상태라고 자신있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깨뜨려야 할 세계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성공 이외의 것은 실패라는 단어로 이단 취급을 받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결과야 어떻든 어떤 점에서는 그러한 길에 적응하려는 것이 더욱 편할 수도 있다. 굳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민하느니 현실에 정진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알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혹시 그러한 편안함이 다른 세계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시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한번쯤 생각해 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
|
책이든, 어떤 말이든, 친구나 사람이든, 내게 힘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때가 따로 있다. 그런 일은 내 의지나, 상대의 의지, 혹은 책이나, 어떤 말의 의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의 의지의 작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데미안>을 중1 때 처음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데미안>을 우리 반 아이가 보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었다. 그 때 그런 말들(악마에 관한 이야기라는 둥,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라는 둥 등등)을 무시하고 읽었는데 읽으면서 그 친구가 말한 것들은 특별하게 생각되지는 않았고, 읽은 후 <데미안>에 대해 어떤 기억도 남지 않았다. tvN 책 읽어드립니다를 시청한 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23쪽) 신에게 이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신을 말하기에 충분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톨릭 신자로서 큰 일 날 소리일지 몰라도 현재의 나는 신성과 악마성 모든 것이 신께 있고, 그 모든 것이 신에게서 나왔다고 믿는다. 사도신경의 처음, '전능하신 천주 성부 ... ' 에서 '전능하신'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언제나 간과하거나 각자의 잣대로만 생각하는 것같다. '전능'한 신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어. ..."(75쪽) 오직 신의 의지만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별 놀라운 생각은 아니다. 신은 없다고 믿거나, 신이 존재한다고 믿거나 하는 것처럼 이 우주에는 신의 의지만이 존재하며 신은 신성과 악마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조물주라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시대다. 지금은 그래 네 멋대로 믿어라라는 분위기의 시대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의 존재가 아브락사스인지 아닌지 보다는 앞의 문장이 더 많이 거론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반세기를 가깝게 살아온 지금, 되돌아 보면, 삶은 깨짐의 연속인 것같다. 내 스스로 깨뜨리고 태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던 껍질에 균열이 일어나기도 하는, 안주하려해도 안주할 수 없는 깨짐이 반복되는 것이 삶같다. 나의 의지로 언제나 평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오만을 깨뜨리는 책이다. 중2인 조카는 할머니, 고모(나), 엄마, 아빠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살고 있다. 머리가 좋은 이 아이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세상을 두려워하며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어때? 재밌어? 하고 물으니 학교를 재미로 다녀?라고 답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내게 선한 거짓말은 할 수도 있는 거야 라고 가르치고, 다섯 살 때는 내가 뭘 사주거나 하면, 나는 고모에게 무엇을 해줘야 되? 하고 물었던 아이다. 숫자를 빨리 깨치더니 글자는 자기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서는 자기 이름 석자만 배우고는 글자에 무신경하길래 나는 이 아이가 난독증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더랬다. 부모가 자유롭게 키우니 학생으로서 할 최소한의 공부만 하고서는 컴퓨터 게임만 하루 온 종일 한지 몇 년 이다. 중2에 이제는 키가 나보다도 큰데도 제 방에서 안 자고 할머니를 껴안고 잔다. 변성기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가 가서 아빠 목소리를 낸다. 어느 영미시에서 5살 꼬마도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세상을 느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려는 사춘기를 스스로 막는 것처럼 보인다. '질풍노도'를 아무렇지 않은 듯 표내지 않으려면 그게 더 힘들텐데 말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안 좋아해서 이 책을 권한다고 읽어줄리 없지만,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을 생각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부딪치고 공감하다 일치하는 것처럼, 자시의 내면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이제는 스스로 받아드려주기를 바란다.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남을 수 없고, 난 우리 조카가 멋지게 성장해서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읽어주기만 한다면, 지금의 조카에게 꼭 필요한 <데미안>이라는 생각이다. |
|
너무나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읽어보려고 책을 펴면 무슨 이야기 인지 왜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 않던 책이다 아마 그건 고등학생때? 쯤 인것같다.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책이다보니 읽으려고 했지만 잘 읽히지 않던 책 청춘의 고뇌와 인간의 양면성을 담고 있는 자아찾기를 그려낸 책이라 아마 학생들에게 권장하는 도서였겠지만 내일모레면 40이 되는 나도 자아찾기를 다시 해야하는것인가 ㅎㅎㅎ 여튼 초판본 표지디자인으로 양장커버가 되어 나온 데미안이라 소장하고싶은 욕구또한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BTS 때문에 다시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든게 아니라면 그것도 거짓말임 ㅋㅋㅋ
|
![]()
거기에 적힌 한 문장에 나는 얼어붙었다. 놀란 마음으로 다시 읽는 동안, 심장이 전율하며 운명 앞에 움츠러들었다.
세상 모든 청춘들의 이야기인 <데미안>, 이 작품은 에밀 싱클레어라는 한 청춘의 고독하고 힘든 내면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이라는 것은 사실 좀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아주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학창시절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나 자신인데,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굳이 찾아야 되나. 뭐 이런 식으로 별다른 감흥 없이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청소년 기에 거의 대부분의 고전 작품을 읽었으므로 이 작품 역시 그 당시에 읽었었다. 이 작품은 명성에 걸 맞는 감동을 내게 안겨주지 않았고, 단지, 엄청난 두께와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의 빡빡한 분량을 자랑하는 여타의 고전들과 달리 이 작품은 두께가 얇아 덜 부담스러웠던 정도라고 생각했던 정도였다. 읽으면서 역시 고전은 두꺼우나, 얇으나 비슷하다고 치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만난 <데미안>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싱클레어에게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선악의 진실에 대해 가르쳐준 데미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하에 누렸던 안전한 생활을 벗어나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을 만나 성장하게 되는 싱클레어도 뭔가 익숙하게 공감되는 지점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물들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유년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평화와 안전의 냄새가 풍기는 집을 벗어나 어른이 되어 가는 순간, 그러니까 어린 시절이 끝나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통과의례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누구나 데미안처럼 엄청난 혼란에 빠져 온갖 격정과 감정의 분출들로 괴로워하던 시기를 거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물론 어른이 되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야 그 모든 과정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당시에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제대로 느끼지도, 판단하지도 못하는 게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만나 비로소 선생님이 가르치는 내용이 다가 아니며, 세상은 얼마든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고,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관점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아주 평범한 사람도 평생에 한두 번쯤은 경건함과 감사라는 미덕을 어기게 된다. 누구나 한번은 아버지와 스승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걸음을 떼고, 대부분이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더라도 그 순간의 고독의 쓰라림을 조금쯤은 느끼게 된다. 내 경우에는 부모님과 그들의 세계, 즉 유년 시절의 '빛나는 세계'와 맹렬히 싸워서 헤어진 게 아니라 서서히 거의 눈치채지 못 하게 떨어져 낯설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유감스러웠고 가끔 고향에 갈 때마다 아주 쓰라린 심정이 되었다. p.167
<데미안>은 출간 후 100년 가까이 지난 고전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이 되었기에 나 역시 여러 판본으로 가지고 있는 책이지만 이번에 만난 초판본 시리즈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은 작품인데도 읽을 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 문학들이 그러하다. 학창시절 읽었던 책을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다시 읽었을 때, 여전히 그 작품이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10대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는 지금 다시 읽는 헤르만 헤세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학창시절에는 어렵게 느껴지거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고 보니, 쉽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바뀌어 읽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말이다. 고전 문학들은 세월을 뛰어 넘어 여전히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생각없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모두 불만이던 10대를 지나,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20대를 지나고, 산다는 게 얼마나 처참한지, 얼마나 불공평한지 인지하기 시작하는 30대를 거쳐, 삶의 서글픔을 넘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40대가 되고 나면 그제서야 보이는 게 있다.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같은 것,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들을 제대로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등 어제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의 나는 깨닫게 된다. 그게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의 거의 유일한 장점일 것이다. 사실 <데미안> 같은 작품은 리뷰를 쓰거나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할 때 줄거리 요약을 자세하게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누가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지점이 완벽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고, 유년 시절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과 주변에 안전한 느낌을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받으면서 선 바깥으로 전혀 나와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각각 같은 작품일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대부분은 날기를 포기하고 사회가 정한 테두리 안에서 걷는 편을 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무기력하게 공중에 내던져지고, 무섭고 불안한 감정을 안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오르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늘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었는데,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 본다. 힘든 시기에 다시 들춰보고 또 들춰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게 그런 역할을 했던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도 그런 작품이 되기를 바래 본다.
|
|
고전소설의 명작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데미안.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많이 없는 책. 나도 워낙 유명한 책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읽지도 않았는데 .. 얼마 전 방송이 끝난 "책 읽어드립니다" 를 보면서 구입해 서둘러 읽은 책이다. 책 이름이 데미안이라 주인공이 데미안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싱클레어의 관점이다. 소설 데미안은, 어른이 된 싱클레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자 데미안을 통해 기존의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의심하고 비판적 사고를 갖게 되며 성장해 나간다.
싱클레어는 한 번의 거짓말로 악당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점점 피폐해진다. 크로머의 늪에 빠져가던 싱클레어를 구해주는 운명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다. 그렇게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인연은 시작된다.
데미안이 이사를 가며 싱클레어는 방탕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한 여자를 짝사랑하게 되지만 정작 그녀의 이름은 몰라 싱클레어는 그 여자를 베아트리체라고 부르고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 . 무심코 그린 이 그림은 자세히 보니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을 그리워했던 싱클레어는 그날 밤 데미안 꿈을 꾸고 난 뒤, 새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냈다. 데미안과 인연이 끊긴 싱클레어는 하릴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옛 주소로 그림을 보내게되는데 놀랍게도 그 후로부터 데미안한테 답장을 받는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바로 이 유명한 문장을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면을 성장시킨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자신의 동경, 이상, 그리고 "나"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나를 필요로 하게 될 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어야 한다." 고 말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한 저 말은 나에게도 해주는 말 같았다. 아직은 미성숙한 탓인지 방황하고 데미안을 찾고 싶어질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의존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100% 주거나 갖게되면, 정작 제일 중요한 "나 자신"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 있듯이 . . 싱클레어처럼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내 자신 안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니까.
|
|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은 청춘들의 필독서라고 한다..
거기에는 책임감과 일종의 자기 억제력이 요구되었으며 스스로 새롭게 발견하는 자기 헌신이었다. |
|
읽기전에는 너무 난해한 책 아닐까 했는데, 우선 내용이 재미있다. 하루면 다 읽을정도로 술술 읽힌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데미안에서 나온 말이였다. 두고두고 읽어보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다. 데미안 책의 출판사가 많아서 고민고민하다가 이 책으로 구입했다. 책의 내용도 좋지만 표지도 중요한것 같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
|
중학교때 읽었던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그 당시에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게 봤었고. 데미안의 생각이 엄청 궁금해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어요. 초판본이라는 말에 소장하고 싶어서 낼름 샀어요~ 삼십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릴때 읽었을때보다 더 어려운 듯한 느낌이 드는것은 무슨일일지... 사춘기때의 정서와 지금의 정서가 많이 달라서 그런건긴 싶기도 하고.. 그동안 내가 바보가 된건가 싶기도 하고..ㅠ 한번에 주르륵 읽지 못하고 끊어 읽게되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
|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자, 좁고 긴 길이다. 지금껏 누구도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게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그 길의 끝까지 가려고 애쓴다.' '나는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 새 모양이 분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문장이 너무 낡아서 다시 채색을 했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봐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 새는 뭔가의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데, 그게 꽃인지 바구니나 둥지인지 아니면 나무 꼭대기인지 애매했다. 나는 사소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머릿속에서 분명히 모습이 떠오르는 부분부터 그려 갔다. 무언가 분명하지 않은 욕구 때문에 나는 강한 색깔을 썼다. 나는 새의 머리를 황금빛 노랑으로 칠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린 그 그림은 며칠 안에 완성되었다.' |
|
<초판본 데미안>
워낙 유명한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번에 초판본 표지디자인으로 출간을 하게 되어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어두인 시기에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자신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가정의 안팎으로 큰 위기를 겪으면서 기성 가치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