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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세계의 원초성이 이간세의 도덕성보다 더 순박하고 아름다운 측면도 있지만, 인간세의 발전은 바로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한다고 하는 협동의 국면으로부터 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전기는 이미 수렵, 채집경제사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타인에 대한 복 지나 관희가 없으면 그것은 명명이라 말할 수 없다. 닥사회의 수준으로 전 락하는 것이다.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협력 을 거부하는 문명 이전의 상태로 퇴락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인류 사회 의 한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문명 퇴폐의 한 극상이다. 쥐는 어둠 속에서 인위적인 밝은 불빛을 보면 금새 후다닥 도망가게 마련이 다, 그런데 이 쥐, 우리의 존경심을 담아 서백작이라 하고 후라쉬를 비추어도 도망가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내가 뿌려 놓은 투나를 입으로 물어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서백작은 천재가 아닌 둔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백작은 이미 안전하게 철망 안쪽에 형성된, 새장 밑 소굴에서 코웃음 치고 있어던 것이다. 우리는 서공들의 존재를 닭장 밖에 다가만 상정 했다. 그들 존재의 터전이 이미 닭장 안에 형성 되어 있었 다는 것은 꿈도 꾸질 못했다. 그리고 사이공강이 감싸고 있어 그 퇴로가 강쪽 으로 확보되어 있다. 메인 구멍으로 끊는 물을 붓기 전에 서백작이 나오게 되면 가차 없이 쇠꼬챙이로 찍어 죽일것이다. 물은 하염없이 들어갔다. 몇 초인가 긴장의 순간이 흘렀다. 구멍으로 서백작이 튀어오른다. 순식간에 구둣발로 짓밟아 제압해 버린다. 찍찍 거리던 서백작을 곧 쇠꼬챙이로 찍었 다. 서백작의 가혹한 열반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제 닭장 안의 흙을 전부 들어내고 그 바닥에 철망을 까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닭장 바닥을 한 켜 한 켜 고고학 발굴을 하듯이 퍼들어가면서 터널 의 규모를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터널의 정확한 지도를 그리는데 성공 했다. 그 본부에서 7마리의 새끼쥐가 나왔다. 그곳은 지푸라기와 닭털로 만든 매우 안온한 보금자리 였다. 7마리의 새끼쥐는 이미 3주는 된 꼬마들이 었다. 그가 병아리만 건드리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어도 평화로운 공존을 하면서 새끼 를 잘 키웠을 것이다. 그랬으면 결국 우리 천산재 닭장의 전체적 파멸이 초래되 었을 것이다. 내가 닭을 보고하는 것이나 서백작이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똑같은 '생생지위 역'의 생명고리의 일환이다. 그런데 동일한 우주생명의 위업이 하나는 악이 되고 하나는 선이 된다. 에미쥐와 새끼쥐 7마리를 새로 심은 매실나무 아래 양지바른 곳에 깊게 고이 잘 묻어 주었다. 아마도 그 여덟 마리의 생명은 내년에는 매실로 윤희의 열매 를 맺으리라. 또다시 그 윤희의 열매를 따먹으며 우주 생명께 감사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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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생각하던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음 인간을 파악하고 그려내는 철학이 도올의 삶을 어떻게 발현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음 제목인 슬픈쥐의 윤회는 3번째 자품인 애서윤회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올의 소설은 픽션인가, 논픽션인가? 그의 소설은 구상과 비구상,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전통적 “소설가”의 전승을 승계하고 있다. “소설”은 “대설”과 구분되는 “작은 이야기”이다. “작은 이야기”는 서구문학이 규정하는 “노블novel”이라는 허구양식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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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어디 뭐 별거 있나요. 우리의 삶이 소설이고 소설이 곧 우리의 삶인 것을. 그래서 인생을 가장 철저하게 사는 예술가들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인 것 같습니다. 도올의 책 중에서 가장 쉽게 읽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난 뒤에 드는 생각마저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13편 모두 나의 삶은 어떤지를 되돌아보게 만들었지만 특히 한예종 연극원 이승원군의 글이 너무나도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 책 덕분에 시나리오 소재도 많이 얻고 갑니다. 도올 선생님. 사랑합니다. |
| 소설보다 더 치열한 삶의 이야기다. 그것들은 어떠한 법문이나 진리보다 참되고 공감된다. 한 편 한 편 모두 궁금증을 일으키며 빠르게 읽힌다. 이야기 내용이나 전개 방식, 특히 구두 대화는 현장감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재미있게 읽힌다. 도올 선생님은 순식간에 압축적으로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문에 읽는 이도 그 속도감을 따르게 되는 것 같다. 삶 속에 녹아 있는 철학, 종교, 깨달음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기존 소설과는 다른 도올 선생님의 이 소설집이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슬픈 쥐의 윤회」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던져준다. 단지 슬픔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이라지만 더 진실한 삶의 이야기다. 치열한 삶으로부터 치열한 이야기가 우러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웃의 삶에 대한 애련을 느낄 수 있다. 기존 소설과는 다른 형식과 내용의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다. 고전 철학자가 무슨 소설인가하고 가벼이 지나치는 사람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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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오십이 되고 보니 어르신들의 글에 빠져든다. 어렵지 않고 앞에서 얘기 듣는 것 같은 다정한 글이다. 티비에서 늘 접하던 분이라 그분의 쩌렁쩌렁한 음성과 때론 유머러스한 모습이 교차된다.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도 들었고 옛적 고매한 어르신들이 쓰시던 단어와 문체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시절 어릴때 할아버지와 막내고모 서재에서 몰래 읽던 책들은 어린마음에도 보약과 같았다. 사는건 다 똑같구나 싶으면서도 깊이 있는 삶의 성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학문의 깊이에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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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쥐의 윤회
도올 선생이 쓰는 "소설"은 "작은 이야기들"이라는 뜻으로 썼지만, 결코 현대문학이 말하는 "소설(novel)"이라는 뜻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의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꾸며낸 이야기, 즉 픽션(fiction)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지만, 우리는 예로부터 소설이라는 것은 소소한 이야기, 작은 이야기, 향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라는 뜻으로 써왔다.
이렇듯 도올 선생이 쓰신 소설은 너무 미세하게 느낌 그대로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