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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 레브의 뺨에는 점들이 있다. 멋진 점이다. 이혼하기로 한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점들을 훑어보며 그것들이 그리워질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레브보다 잠이 적어서 보통 먼저 일어나지만 이날 아침에는 나도 침대에서 꾸물거린다. 마지막이니까. 우리가 한 침실을, 한 방을 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 매일 밤 자기 전에 나는 그가 바닥에 팽개쳐둔 티셔츠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는다. 그와 헤어지고 나면 입고 자게 될까, 궁금해진다. P.61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동네로 가겠죠.” 이 동네에서 계속 사는 건 아무래도 부적절한 느낌이다. 어차피 그럴 돈도 없지만. 직장에서 가까워서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여기서 사라지고 싶다. 모두가 전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들 하는 내 새로운 인생과 과거의 실패들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다. P.71-72 줄리엣의 완볃한 변기에 앉으려고 보니 시크 뒤쪽 가장 자리를 따라 둥글게 핏자국이 묻어 있다. 언젠가 내가 변기에 버린 탐폰이 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어서 이를 닦으러 들어갔던 레브가 “상어다!”라고 소리쳤던 일이 기억난다. (.......) 나도 줄리엣에게 그렇게 외치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 생리는 성가신 일일 뿐이지만 그녀가 흘린 피는 하나의 명백한 지표다. 저주다. (.......) “웃기시네.” 그날 욕실에서 나는 레브에게 말했다. 그는 웃었다. 나는 그의 몸 너머로 손을 뻗어 변기 물을 다시 내렸고, 레브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나 외의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 P.77 부모님이 이혼하신 지난 8면 동안 나는 양쪽 집을 왔다갔다하며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두분의 아파트를 왕래했지만, 3년 전부터는 뉴욕과 파리 사이를 오가게 되었다. (.......) 사람들이 늘 잭과 질이라 부르는 남매와 엄마를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조여온다. 그 셋은 아름다운 퍼즐 조각들 같다. (.......) 터울로 연달아 태어난 잭과 질은 정말로 한 자궁에서 같이 자란 듯이 친밀하고 서로의 삶과 친구들을 공유하는 사이다. 내게는 그 둘 사이의 열렬한 신의가 우리 가족 안에서 뚫을 수 없는 내핵으로 느껴진다. P.99 내가 원하는 것들은 내 의지로 존재하게 만들 수 없다. 실존하지 않는 가족에 대한 꿈, 우리 모두가 집이라고 여길 만한 장소. 어쩌면 나도 아빠를 닮아서 이런 데에 적합한 체직이 아닌지도 모른다. 형제들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잭과 질을 감당할 체질이 아닌 건지도. 다 일종의 오작동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리 아프지 않다. 다만 그토록 긴 세월동안 그들과 어울려보려고 애썼던 게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질과 그들의 기질은 애초에 서로 어울릴 수가 없었던 건데. ------------------ P.225 정말로 그랬나? 너는 키스하기도 전에 걔 바지 지퍼부터 내리고 손을 집어넣었고, 걔 입에서는 네 이름이 애원처럼, 주문처럼 새어나왔던가? 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계단은 밝다. 지나치게 밝다. P.226 정말로 그랬나? 물론 정말로 그랬다. 말이 별로 없는 편인 남자애는 주변에 그 얘기를 다 떠들고 다녀서 화요일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그러나 너는 침묵을 선택한다. 네 남자 친구에게도, 그 개새끼에게도, 그 개새끼 여자 친구에게도. 그 여자애는 자기 남자 친구 말을 믿는다. 반박되지 않는 주장은 쉽사리 믿게 되니까. 이제 네 남자 친구는 묻는다. 그럴 가치가 있었어? 좋았어? 그러고도 괜찮을 줄 알았어? 그리고 나도 하고 싶은 질문들이 있다. 그럴 가치가 있었어? 좋았어? 그러고도 괜찮을 줄 알았어? 그 개새끼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다. 너는 15개월 뒤 솔로인 상태로 졸업하게 됐을 때에야 네가 그 개새끼에게 말 한 마디 붙인 적조차 없다는 곳을 깨닫는다. 그때 계단에서 너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흔들었으니까. <옮긴이의 말> 이 외에도 최소한 백 명의 여성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와 공유해주고 또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돕기 위해 이야기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우리의 전통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속 이야기해주십시오. 절대로 입을 다물지 마세요. 2019년 9월 옮긴이의 말 김지현 나에게는 해석이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러나 공감가는 내용이 많았다. 모든 상황들을 다 공감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이런 저런 상황에 대입하니 크게 다를 바 없던 부분도 있었다. 말 그대로 겪고나서 깨닫게 되는 것들도 있고 내가 몰랐던 부분까지 깨닫게 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내용도 흥미로웠으나 해석조차 흥미롭다. 읽어보기 참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모든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는 것이란 것. 우리는 누구 누구의 주체가 아닌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 노란이 빈 공간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the_empty_room노란이 노란 노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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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니얼 래저린의 첫 데뷔 단편집이다. 모든 이야기가 여자의 이야기이며 대부분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섹스 앤 더시티> 속 뉴욕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다. 뻔한 뉴욕이 아니라 결점과 불편함이 있어 오히려 나는 그 부분이 더 흥미로웠다. 여성의 성장과 갈망, 그리고 이혼과 불륜, 죽음, 단짝 친구와의 결별과 같은 소재를 다뤘다. 단편의 길이가 아주 짧은 것도 있어 캐릭터에 몰입하기 어려운 면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첫 단편인 만큼 다양한 시도가 좋았다. 번역가 김지현이 참 매끄럽게 번역해서 만족스러웠다.
대니얼이 그린 여자는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키우고, 헤어지고, 부모와 싸우며 우리가 가진 친숙한 감정을 그려냈다. 전형적인 것들을 특별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실제적이고 단단한 무언가를 건드린다. 마음을 끌어낸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비슷한 배경에서의 백인 중산층이라는 단조로운 설정이라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길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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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들 더미 위에 '반박하는 여자들'이 맨 위로 올려지던날 지나가던 사람이 흘끗 보고 한마디 했다. "반박하는 여자들?" 예상이 가는가? 말꼬리가 미묘히 올라가있었다. 반사적으로 가슴이 선뜩했다. 맨 위에 올려두지 말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짓 "왜요?" 하고 물으니 "책 제목이 뭐 그래?" 하고는 가버렸다. 책 제목이나 표지에 페미니즘 관련된 내용이 있으면 가끔 읽을 순서가 되어도 맨 위에 올려놓지 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페미니즘에 따라붙는 혐오와 공격성이 옮아붙을까 싶었던 것이다. 평소에 놓여진 책들을 슬쩍 훑는 일들이 없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말끝이 올라간 한마디를 들었다. 여자들이 왜 반박을 해서는.
책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 건조하다. 책의 제목을 보고 무서운 페미니즘 전사들이 잔뜩 흥분한채로 고양된 감정을 드러내며 피해의식에 가득한 얘기를 쏘아낼 것이라 생각했을 사람들에게 유감이다. 평범한 소설들로 채워진 소설집일뿐이다.
" 장 뤼크는 미국인은 아니다. 아마도 유부남인 듯하고 나이는 나보다 확실히 많다. 내 평생 처음으로 혼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난 다음 날, 그는 내게 커피를 사주고는 지금쯤 고향에서 샘이 바람피우고 있을 거라고 우긴다. 그는 내가 어리고 순진하며 내 미래는 그가 말하는 진실 그대로 될 거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와 네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서야 내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걸 깨닫는다. p.134 "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이런 순간이다. 어디서 마주쳤던 것 같은 사람과 상황들에 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예의발랐을때 나에게도 자신이 옳고 삶은 이런 것이라며 개똥철학을 늘어놓으려 드는 꼰대들과의 대면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땠었나, 너무 많은 시간을 예의차리며 그 앞에 앉아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깨달음이 더 빨리 왔었다면 좋았을텐데.
다른 단편들보다 '풍경 27'이 마음에 들었다. '반박'도 실제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 괜찮았지만 틴에이저의 시선이라 좀 거칠었다. 하지만 '풍경 27'은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생길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잘 느껴지는 분위기도 좋았고, 리차드 기어가 나온 '언페이스풀'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내용도 흥미진진했다. '언페이스풀'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고, 혹시 안봤다면 그냥 '언페이스풀'을 보면 될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영화는 재밌으니까.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던 영화라 '풍경 27'을 읽으며 '언페이스풀'이 연상되는게 좋았다. 생각보다 짧게 마무리되어서 아쉬웠지만 읽는동안 그래서, 그 다음은?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 그때는 웨슬리를 임신한 지 5개월째였는데, 그 사실을 쉽사리 잊어버렸다. 모든 일의 주도권은 그녀의 몸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녀가 아기를 원하는지, 아기를 잘 돌볼 것인지, 사랑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는 그녀의 안에서 자라다가 태어날 테고, 그 과정에서 둘 중 하나는 - 특히 그녀가 - 죽을지도 모르며, 그녀 몸의 모든 것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 임신할 수 있을 테니까. p.315 "
임신이 여자의 몸을 기능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임신과 출산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만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서 느꼈던 불쾌함은 일의 주도권이 그녀의 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문제들이 사실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성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필연/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맞겠다.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며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났다. 모성이 너무나 위대해서 모성으로 그것들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게 당연하지 않다.
어느정도 강렬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준비하며 읽었는데 생각보다 묘하다. 제목이 도전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비해 내용은 그림자로 비추는 어른한 형태로 윤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좀 아쉽기도 하고, 이런 방식의 접근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읽어왔던 여성들을 주제로한 글들에 비하면, 좀 순한맛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한국적인 소재가 담긴 내용이 더 매운맛에 익숙한 탓도 있겠다. 심심하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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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판 01년생 캐리 느낌의 단편소설들이다. 전형적인 여주인공이 아닌 다양한-하지만 현실적인-성격의 소녀(또는 여자)들의 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습들이 욕망, 좌절, 분노, 비행, 바람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행복을 얻기 위한 과정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단편들이라 호흡은 짧지만 여운은 길다. #반박하는여자들 #대니엘래저린 #창비 #여성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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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남자들
공학(共學)을 다녀본 여성들이라면 알 것이다. 어리고 말이 많은 남성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폭력적인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서 대학교에서 와서도 이 진술은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분노에 떨며 온몸으로 반박했던 순간이,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던 표정이, 차라리 못 알아들은 척 말을 돌리던 치욕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일상에서, 의견을 주장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남성들이고 거기 반박하거나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그건 논점에서 어긋나는 이야기다)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의견을 너무나 많이 검열한다. 이 사실이 극명히 드러나는 차이점은 ‘사과’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돌에게 ‘못 먹는 감’이라고 칭하고 타인에게 ‘너 페미니스트니?’라고 물었던, 지속적으로 혐오적 콘텐츠를 재생산 해내는 래퍼와 가수, 유튜버들. 이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반면 여자 아이돌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어 논란이 되었고 애교 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청자와 미디어의 질타와 조롱을 당했으며 더 이상 소속사와 사회의 요구에 맞춰 ‘짧은 치마’를 입지 않는 그들에게 남성들은 ‘페미 코인’을 탄 거냐며 삿대질을 해대고 있다. 그들은 응당 받아야 하는 징벌인양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고 대중에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더 이상 그 이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과해야 했다. 그가 어떻게 그 책을 읽게 됐는지 그 책이 정말로 ‘그런’ 책인지. 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애교를 강요당했는지 그런 사회에서 살아온 그가 최근 어떤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그가 남성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그들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 불만을 가진 주제에 ‘권력’을 쥐여준 ‘예쁨’마저 거부하려 드는 이상한 존재. 즉, 마녀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함의 조건은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욕망을 자기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욕망은 한 눈에 달콤하고 짜릿하다. 말 한마디와 행동 한 번에 지금 당장 해소되며 굳이 어렵게 찾지 않아도 네이버 연관검색어에 전시되어 있다. 반면 여성들은 욕망을 드러내면 이분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돈을 좋아하면 된장녀고(김치녀는 훨씬 더 포괄적인 혐오 개념을 내포한다) 돈을 아끼면 간장녀가 된다. 남성을 구원하면 성녀가 되고 남성에게 애원하면 창녀가 된다. 운전에 서투르면 김여사가 되고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하면 맘충이 된다. 그간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해왔지만, 이러한 무수한 대명사 속에 여성은 없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여성들은 오해하고 이혼하며 사랑하고 정사한다. 이게 내 욕망이고 나는 한순간 우리 관계를 전복 시킬 만큼 큰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또 한 편으로 그들은 망설이고 선택하고 후회한다. 결코 타자화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나는 어리석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스펙터클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의 범주에는 이미 한참 벗어나 있다. 도리어 이혼녀, 꽃뱀, 창녀라고 함부로 칭해지던 역할을 맡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여기 있다. 그들은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맞으면 뭐 어쩔 건데.” 16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단편은 <거미 다리>와 <반박>이다. <거미 다리>의 나는 거짓말을 한다. 내용은 주로 아빠나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내용이고 또 스스로 정말로 그렇다고 믿음으로써 안전해지고픈 절실함에 대한 것이다.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아빠를 안심시키려고 하지만 아빠는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다만 당부한다. “착하게 지내다 오렴.” 아빠의 낭패감과 죄책감에는 진짜 ‘내’가 없다. 새 가족을 꾸려 가지게 된 딸의 이름을 ‘호프(Hope)’라고 지을 만큼의 되직한 자기 연민에 있을 뿐이다. 엄마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엄마는 내가 엄마와의 유일한 관계성이라고 믿는 유년 시절에 살았던 아파트를 이미 청산한 상태다. 엄마는 내가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물론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이사는 모두에게 좋다는 걸 나에게 설명하려고 들지만 그건 나에게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듣고 싶지 않은) 외국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복남매와 함께 산 ‘따뜻한 핑크색 스웨이드 구두’는 너무 예쁘지만 왠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와 옅은 주근깨가 난 얼굴은 아이 같은데, 낮은 굽 위로 들려 올라가서 생겨난 종아리의 곡선은 어른인 여자’로 비치는 거울 속 모습은 그가 끊임없이 욕망했던 가족애처럼 이질적이다. 나는 그 구두를 신고 이복남매와 함께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리고 게임을 한다. 부모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던 시절 남매가 가출하여 ‘고아 마냥’ 저지르고 다녔던 수준의 게임이다. 택시를 탄 세 사람 중 ‘질(이복 남매 중 한 명)’이 기사에게 가짜 주소를 말하고 기사가 길을 찾는 사이 세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세 방향으로 갈라진 후 쿵쿵 뛰어간다. 택시가 쫓아오는 건 나다. 하지만 나는 택시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찾을 수도, 형제들이 찾으러 와줄만한 어두운 장소를 찾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새 구두는 내가 모퉁이를 도는 찰나에 부러지고 나는 무력하게 주저앉는다. 나는 엄마에게 받았던 돈의 전부를 택시 기사에게 건네며 기사의 가래를 얼굴로 받아낸다. 기사가 떠나고 나를 찾아 위로하는 남매를 밀쳐내고 싶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밀쳐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모두와 헤어진 후 찾아온 성당에서 나는 ‘우리가 가족을 이루려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임을 담담히 깨닫는다. 이렇듯 내가 겪어내는 모든 상황은 타의적으로 이뤄지지만, 그것 역시 나의 자의적인 선택이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집착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황에서도 여전히 ‘퍼즐 조각’이다. 결국 부정하고 싶어 했던 것들을 인정하며 자신을 위한 자리를 내주는 여자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독립적이되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게 한다. <반박>은 세 면의 페이지에 불과한 아주 짧은 단편이다. 파티에서, 남자 친구의 친구는 ‘너(본 단편은 화자를 너라고 칭한다)’에게 “네가 너라서 참 유감이네.” “네가 그 녀석 차지라서 참 유감이야.” “제기랄, 그것만 아니었으면 난 너한테 온갖 짓을 다 할 텐데.”라고 성희롱 한다. 하지만 ‘너’는 위축되는 대신 그를 호젓한 계단으로 이끈다. ‘너’의 몸짓 몇 번에 그가 사정하는 장면은 되려 그를 우습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너’는 남자친구와 사람들에게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반박’한다. 반박이 어떻게 저항이 될 수 있는지 나지막이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소문의 여성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다 진짜가 될 수 있는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는다. 여성에게는 이미 너무 많은 대명사가 붙여져 있다. 옮긴이의 말처럼, ‘그들의 삶과 존재는 어떻게든 그 범주를 초과한다.’ 끝으로,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들도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통에 대한 논의를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대신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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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기 자신이 되고자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_소설가 김세희 책을 읽기 전에 가장 기대하게 만들었던 추천사. 누군가에게 정의되는 '-녀'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자 세상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에게 담담한 용기를 전해줄 책. <반박하는 여자들>은 여성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면 가정적이고 감정적일 것이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읽으면서 내가 평소에 읽던 책 속의 여자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다.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모든 걸 다 받아주는 성녀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16편의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남은 건 '반박'과 '두 번째 가족' 두 번째 가족 中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을 자꾸만 꺾어버리는 엄마의 무심한 발언이나, 내가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려주고자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엄마의 침묵에 비하면, 질 언니네의 소란스러움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 비록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사진을 감추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사진이 있다는 걸 안다. 언니가 내게 보여준 것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곳에 두었으니까. '거미 다리'와 이어지는 이야기라 반가운 이름, 잭과 질이 나왔을 때 놀라서 앞으로 잠시 돌아갔었다. '거미 다리'에서는 모두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같았는데 '두 번째 가족'에서는 삐걱거리지만 그래도 푹신한 의자 같단 느낌을 받았다. 전혀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간 것을 이야기 두 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특히 호프가 자기 엄마와 식사하는 것보다 이복 언니 질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반박'은 딱 세 페이지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을 가장 잘 담고 있다.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반박'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자 생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녀들은 거의 언제나 '-녀'라는 개념으로 규정되고, 그게 아니라고 반박하면 또 다른 '-녀'의 개념으로 편입된다. A녀 아니면 B녀. C녀 아니면 D녀.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들은 저마다 복합적인 인간이므로 결코 그런 단편적인 개념으로 수렴될 수 없다. 그들의 삶과 존재는 어떻게든 그 범주를 초과한다.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우발적으로 그들은 밖을 삐져나오고, 비집고 나오고, 도망쳐 나오고, 박차고 나온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E녀라는 새로운 범주에 포획되겠지만, 이 범주에서 저 범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즉 '반박'하는 순간 그녀들의 모든 존재가, 욕망이, 비로소 우리 앞에 섬광처럼 드러난다. 가장 공감 갔던 구절. '-녀'라는 개념으로 여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캐릭터 안에 욱여넣는 사람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낼 것이고 결국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누군가의 여자, 아내,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고 반박해야 한다. 반박하는 여자들, 단순한 거울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보여주는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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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무니없이 어려 보이는 남자 둘이 현관문으로 이삿짐 상자들을 나르는 것을 지켜보며 저들은 매일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해체하는 걸까 생각한다. p.53 <평면도> 제목을 읊조리며 ‘무엇’에 대한 반박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으레 ‘반박’이라 함은 격렬한 토론이 오가며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라 알고 있기에, 당연히 성 역할에 대한 담론이 담긴 것이라 보았다. 애석하게도 그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부조리한 사회에 비판을 가하거나,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지위에 가로 막혀 울분을 토하는 부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되려 그들은 차분하고 건조한 투로 자신의 삶 한 부분을 보여주며, ‘무엇’에 대한 ‘반박’인지 눈치채게 만든다. 한창 ‘갑질논란’이 대두되었을 때, 논란 속 갑(甲)들은 하나같이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생각과 달리 행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직원은 그저 주차금지 구역을 친절히 알려줬을 뿐이고, 승무원은 명시된 규칙을 따랐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 나는 아빠의 첫째 아이나 둘째 아이와는 다르니까. 오로지 착하게 구는 법 밖에 모르니까 <거미다리, p.77>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동안 사회는 여성이 ‘말 잘 듣고, 나서지 않기’를 강요해왔다는 증명이며, 수용적 태도로 군말없이 의견을 받아들이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길 바랬다 (여전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욕망을 표출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순간 이는 ‘도전’이자 ‘반박’이 된다. 대니얼 래저린은 그 반박의 순간을 여성들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관계에서 엇나가거나, 여러 이성을 만나거나, 부모를 미워하거나, 이혼을 결심하는 등의 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이들은 “OO녀”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으로 규정되길 거부하며, ‘말 잘 듣는 딸’ 혹은 ‘가정적인 아내’ 등 자신에게 부여되는 역할도 거절한다. 이들은 외부에서 오는 상처보다 내면의 욕망에 더욱 치중하려 한다. 독자들은 일말의 후회도 남아있지 않은, 오히려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들에 당황할 수도 있다. 그것이 대니얼이 원하던 반응일 것이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그 어떠한 단편소설 속에서도 시제가 완벽히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니얼 래저린은 현재시제를 사용하며 지나온 과거 혹은 예견된 미래를 그려 시간적 착란을 경험하게 한다. 이 착란은 마치 한 장면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인생의 한 시점이 일생을 관통하는 경험으로 번짐을 암시한다. 문득 우리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가정적인 여성, 아니면 감정적인 여성? 그것도 아니면, 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거나 후회의 늪에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잡아 이끌어줄 이를 찾는 여성? 안타깝게도 이 책 속의 여성들은 그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흔히 말하는 ‘흠’이 있을 지 언정,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알며 뿌리가 단단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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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5 '반박하는 여자들' 서평단 -우리 사회는 사람을 향해 정의내리고 규정짓는 것을 참 좋아한다.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 사용을 매우 즐긴다. 그리고 주로 그 단어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혹은 사회적 관계에서 정의된다. 예를 들면 문제아, 과부,? 창녀, 불량 청소년, 김여사 등 말이다. . -그러나 상황과 관계에서 정의되어 생긴 단어들의 문제점은 상황 및 관계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사회적약자들에게는 늘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늘 좋지못한 부정의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붙기 시작하고 그런 단어들이 붙음으로, 그들은 상황속에서 사회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는 또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이 책은 그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 중에서, ‘여자’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도대체 여자가 무슨 사회적 약자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동안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보다 삭히는 방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내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인 지금 그들을 향해 듣기싫다며 그들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면 사회는 아직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꺼리고 있음을 느낀다. .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모두는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서 우린 소수라는 이유로 약자가 될 수있고,? 그 입장이었을 때의 자신을 잘기억해보며,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우린 좋은 독자로 이 책을 읽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사회적약자들이 내는 목소리를 꼭 다 이해하고 공감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하거나 부수지만 않아도, 그들의 목소리는 누군가에겐 꼭 전달되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전달에 이 소설같은 도구들이 사용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감같은 감정보다는 조금더 성숙된 감정으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 . ="내가 원하는 것들은 내 의지로 존재하게 만들 수 없다. 실존하지 않는 가족에 대한 꿈, 우리 모두가 집이라고 여길 만한 장소. 어쩌면 나도 아빠를 닮아서 이런 데에 적합한 체질이 아닌지도 모른다. 형제들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잭과 질을 감당할 체질이 아닌 건지도. 다 일종의 오작동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리 아프지 않다. 다만 그토록 긴 세월동안 그들과 어울려보려고 애썼던 게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질과 그들의 기질은 애초에 서로 어울릴 수가 없었던 건데. 나는 부모님이 오래전에 깨달았던 것을 이제 이해한다. 나는 우리가 가족을 이루려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인 것이다. 나는 아예 다른 퍼즐 상자에 속하는 조각이다" 99p . . -애초에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면, 굳이 상대를 이해하려고 모든 감정을 소모하기보다 그 상대를 그 존재 그대로 두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도 사회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박이 부서지고 박살나고 있다. 그들의 반박이 하나의 용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해질 수 있도록 지금 이 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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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불륜과 육체적 불륜 사이에서, 긴 시간에 걸쳐 서로 남남이 되어가는 배신과 순간의 부주의에 휩쓸리는 배신 사이에서, 내게 이혼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었나? p67 이제 미결정의 상태는 자식들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최대한 빨리 자기들의 미래를 결정짓기를, 그녀의 손에 맡겨져 있는 아이들의 삶이 어서 본래의 주인들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런 환상조차 품지 않는다. 그녀가 누릴 수 있었을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니까. p324 매우 짧은 소설부터 일반적인 단편소설까지, 반박하는 여자들을 담은 소설집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사랑을 하고, 남자들의 잣대에 목소리를 내며, 이혼을 하고, 섹스를 한다. 여자들이 다수자인 남성들의 잣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고 서로를 감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반박하는 여자는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다. 남자 형제에 맞추어가는 가족 속에서 여성인 우리는 투명인간 존재일 뿐이다. 그런 가족은 정상 가족이 아니다. 그 가족에 의문을 제기하고 맞서야 가족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설은 무심하고 조금은 소름 돋게 쓰여 있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하지만 우리의 일이란 것을 안다. <반박하는 여자들>이란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은 여자들을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다수자의 권력에 반박하는 행위로 비친다. 거창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할 말을 할 뿐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사랑을 할 뿐이다. 자신이 섹스하고 싶은 사람과 섹스할 뿐이다. 누군가가 정의한 '-녀'가 아니라 우리는 '나'가 되어야 한다. 아직 그런 세상이 되지 않았기에 소설은 조금 아프게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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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이 책에 사로잡혔다. '반박'이라는 단어에 담긴 반항기가 작품을 읽도록 부추겼다. 반박과 여자들이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늘 본래의 질서에 반항하는 무리를 존경했다. 마음에 찬 분노와 달리 대열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늘 깨어있고, 반박할 줄 아는 한 명의 여성이자 더 나아가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고자 했다. 책의 제목으로부터 나는 전사와도 같은 여성들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보이는 무미건조한 평범함과 공감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처럼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발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너무 들어 그만두었다. 책을 읽는 데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도 했다. 무조건 깊이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이 책에서 멀어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으면서 상대가 공격도 하기 전에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친절함에 나는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나는 여성들을 너무 피해자와 반박하는 이의 입장에 고정시켜 놓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반박하는 여자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고 가볍게 책장을 넘기라고 조언하고 싶다. 책장이 무척 술술 넘어가는 재밌는 책인 건 확실하니까. <반박하는 여자들> 속 작품을 읽다 보면 여성은 비교적 흔하게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상대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 때문에 비난받는다. 서슴없이 여자의 몸을 만지는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성적인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이외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것처럼 작가는 묘사한다. 또한, 작품 속 여성들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타인이 내린 결정에 휩쓸려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자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그저 타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세상에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눈앞에 떠다니는 누군가의 유령을 조용히 떨쳐내는 여자들에게서 나는 씁쓸함을 감각한다. 사진을 찍는 일처럼(<내가 사랑하지 않은 파리의 미국 남자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텐데.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란 생각도 든다. 즉, 화장실에 갑자기 쳐들어와 내 목에 키스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보다 침묵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쪽이었으리란 것이다. 작가 대니엘 래저린의 작품 속에서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애초에 감정에 지나치게 빨려 드는 것을 경계한다. 상실의 상처를 입기 전에 헤어지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상대와 개선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적인 모습을 미리 제지하는 것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상실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처음부터 원하기를 거부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기울인다.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남녀 관계뿐 아니라 숱한 인간관계에서 지쳐 독립되고 외로운 개체가 되려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감정적인 시련을 덜어낼 수 있으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외로워야 하고, 또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니 <반박하는 여자들>에는 관계로 인해 감지되는 비좁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애정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 변덕에 따라 애정과 자유가 적절하게 주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각자가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도, 어긋나는 지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엔 어느 때든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이 여성을 옹호하고, 세상에 반박하려는 책일 거라고 예측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사람 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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