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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동정이란 감정이 궁금했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면서도 구체적인 실천보다는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슬퍼하는 이 애매모호한 감정을 때로는 위선이라 느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정심이 들 때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동정이란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고 문학과 예술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궁금해 신청한 책이다.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역사'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동정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변하는 경험인 동정은 보기 드문 감정이면서 동시에 "동정심을 느끼는 주체의 만족감과 그가 자신의 자비로움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려 하는 경향이 동정에 수반"되면서 편리한 베일로 둔갑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동정은 상대방의 감정에 상처를 줄 수 있어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고, 심지어 동정하는 사람이 자신의 안전과 튼튼한 기반을 뽐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일까. 동정이란 감정을 도덕적 감성의 기초로 삼은 루소와 쇼펜하우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동정에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니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도덕적 가치'와 '가치에 대한 가치'에 대해 대대적인 비판을 시도했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동정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동정뿐 아니라 용서 자체의 필요성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해 설파했다" 한다. 니체는 동정을 눈에 띄는 방식으로, 기뻐하면서 실천한 위선적인 사람들을 향해 "사랑하면서 동정심보다 우월한 감정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이들 모두에게 화가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감정의 윤리학을 연구하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동정은 하나의 감정인 동시에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기 때문에 철학보다는 시와 미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했다.
문학과 예술에서 그려지는 동정의 모습은 "타인의 얼굴과 타인의 정체가 지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눈물은 동정의 초월적 언어'로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와 로테는 한 시인의 시를 함께 읽고 눈물을 흘린다.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은 "적의 진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과 죽어가는 육체의 고통과 비명, 페르시아 사람들을 강타한 통곡과 살아남은 자들의 도주에 관한 이야기"로 동정심을 유발한다. "오빠에게 법으로 금지된 장례를 치러준 안티고네가 죄인으로 몰린 것은 '동정에 경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정치적 논거를 버리고 죽음을 앞둔 개인에게로 관심을 돌린 프로이트의 시선은 전쟁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작품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든다. "아우슈비치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라고 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처럼 "비인간화의 원리는 동정의 불가능성"을 낳기도 한다.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는 "동정의 표현이 아니라 동정의 부재를 통해 모든 도덕적 질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역사가 곧 인간이 동물의 정체성과 언어와 앎 자체를 탈취한 정복의 역사라는 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에서 "그림 한가운데 주둥이를 벌리고 울부짖는 말의 모습은 생명체가 겪는 수많은 비극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 된 신의 고통, 그가 걸은 십자가의 길이 상징하는, 그리고 예배와 모두의 기억에 의탁된 고통, 이러한 고통의 주변에 예술적 서술과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동정의 형상들" 중 하나가 '피에타'다. 성서가 전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과 그리스도의 무덤을 주제로 창작된 수많은 <피에타>가 동정과 그 진실성을 전하는 증인으로서 존재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로고진의 집에서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 복제화를 보고 마음에 심한 동요를 느끼는데 "그림에 부활의 가능성이 전혀 암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종교적 믿음이 흔들렸던 것"이라 한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젊고 순수한 어머니의 우아함 속에 아들을 잃은 고통을 숨겨놓았다.
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동정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 책을 읽으며 동정이 문학과 예술 속에서 중요한 주제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에 끝없이 소환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 동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의 마지막 말에 더욱 공감한다.
"한 장면, 하나의 회화적 전통을, 이미 이미지화된 이야기를, 하나의 질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길이었다. '과연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었는가'라는 이 오래된 질문은 아마도 오랫동안 인간에게 고유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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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 읽고 리뷰를 쓴다. 두 번을 읽어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들만 잔뜩 남아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하지?’하는 걱정도 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책을 이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 프레테는 동정同情을 여러 표현을 통해 정의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타인과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움직임(p.9) 동정은 타자의 고통에, 타자의 혼란과 이질적인 존재라는 조건에 가까이 다가서는 움직임이다. 동정은 나눔이다. 동정은 환대다. (p.54)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나누어 갖고 타자와 함께 겪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p.84)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감지할 때 발생하며, 이렇게 발생한 동정은 나름의 언어와 감각을 지닌 육감적인 감정이다. (p.137) 결국 동정은 타자의 고통에 내가 일치되는 상황을 의미하며 동정이란 감각에 대해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그 감각에 충실한 상태를 뜻한다고 받아들이며 책을 이해하기로 했다. 본문에 나오는 문장이나 표현은 자주 어려웠다. 각 장의 제목과 그 내용을 연결시키지 못해 고통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텍스트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조망하니 글쓴이가 생각하는 동정의 본질은 정해져있으며 책의 각 부분은 그런 본질이 문학작품과 예술작품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며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이해하게 된다.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머릿속에 남는 것들이 생겼으니 만족한다고 해야 할까? 부족한 리뷰를 시작한다.
동정은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러면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진정으로 동정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고통과 동일한 수준의 고통을 느끼는가? 프레테는 이 지점에서부터 동정이라는 감정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프레테는 동정을 순수하게만 인식하지 않는다. 책은 들어가는 말에서부터 사람들이 동정이란 낱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냉철하게 드러낸다. 타인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동정을 느끼는 주체의 만족감과 그가 자신의 자비로움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려 하는 경향이 동정에 수반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정은 보기 드문 감정(p.9)이 된다. 동정은 결코 정의롭거나 아름답게만 받아들여지는 낱말이 아니다. 동정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차갑게 지적한다. 동정이 갖는 이런 모호함 때문에 철학자들은 동정의 개념을 못 미더워하며 동정의 본질보다는 동정의 부수 효과 등을 파악하는데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동정이라는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실체를 드러내고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이 책은 동정의 역사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을 문학과 예술이 우리에게 전해준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p.13). 왜 글쓴이는 문학과 예술이 보여준 동정의 모습을 다루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가 문학과 예술의 차원에서 그려지는 동정의 모습은 곧, 타자의 현존, 타인의 얼굴과 타인의 정체가 지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p.12)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프레테가 이용하는 소재가 아니다. 글쓴이는 동정이 얼마나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여러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이제 신곡을 필두로 한 문학의 고전들과 고야의 1805년 5월 3일의 총살을 시작으로 한 예술작품―주로 미술작품들이지만 음악도 등장한다―들이 주제를 위해 나타난다. 본문을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글쓴이가 전하는 동정의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책은 문학작품에서 언어로 표현되지만 그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동정을 다루면서 시작한다. 이 상황은 감각의 침몰과 눈물로 대표되며 침묵, 혹은 냉담, 혹은 망연자실로 표현할 수 있는 태도도 포함된다. 지옥에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을 본 단테가 느낀 죽음과 같은 쓰라린 감정은 언어를 넘어서고 고통의 감각을 넘어서는 감각의 침몰이다. 베르터는 로테와 함께 시를 읽을 때 눈물을 흘린다. 말 속에서는 감정의 강렬함이 분산(p.30)되므로 언어를 초월한 동정의 발산이 이루어진다. 언어 안에 머무는 동정은 자기만족에 정체될 위험이 엿보인다. * 이 지점에서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를 소개한다. 이고르 마나셰로프가 모스크바 필을 지휘한 음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BX9rFDZ0UQ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들으면 차이콥스키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책에서 이 곡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는 동정이 사라진 세상의 모습이 등장한다. 동정이 사라진 원인을 전쟁으로 보고―글쓴이의 반전주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전쟁이 남긴 고통과 피아의 구분 없이 그 고통에 대해 보이는 동정을 보여준다. 이런 비극의 시대에도 동정은 살아있지만 최근 백 년 동안 생명의 사악하고 체계적인 파괴가 열어젖힌 비인간성의 심연은 어떤 종류의 동정심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p.39). 인용되는 유명 문학작품은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의 고통>,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프로이트의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이라면>,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등이다. 미술작품으로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총살>과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쟁을 비판하는 대표작으로 나온다. 이 장에 등장하는 문학작품, 미술작품들의 대부분은 이전에 읽거나 보았으며 해석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던 것들이라 글쓴이의 관점과 연결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이후에 등장하는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들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에서 상당한 이해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보고 동정을 느끼는 이와 그 고통을 보고도 무시하는 이를 대비한다.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필록테테스, 프로메테우스, 데메테르를 사례로 들어 고통을 받은 그들과 그들의 고통에 동정심을 느낀 이들이 상황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정이 발휘하는 긍정의 힘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비극을 잘 모른다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다소 거리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과 동정은, 타자에게 다다르는 경로는 다르지만 타자에게 다다른다는 결과는 같다. 네 번째 장은 사랑과 동정이 서로 얽혀서 나타나는 모습을 문학의 세계가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핀다. 사랑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환대로 이어지는데 결국 동정은 상대를 받아들임이라고 읽힌다. 프레테가 바라보는 동정의 지점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는 동정으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그런 시선을 실명의 상태와 죽음을 관조하는 상황으로까지 연결하며 동정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정리한다. 머릿속으로나마 타자의 입장에 서서 타자의 고통을 떠올려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특혜에 가까운 상황을 의식하고 타자가 처한 상황과 거리가 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는 것, 이러한 대조 자체를 슬프고 어쩌면 부당하게 느끼는 것이 동정의 움직임이 내딛는 첫걸음이다(p.124). 이제 동정은 변신의 주제로 이어진다. 변신을 대하는 우리는 놀라움, 침묵, 눈물의 순서로 동정의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카프가의 <변신>이 보여주듯 누군가의 변신은 동정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우리 안의 냉혹함을 드러내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프레테는 서방 일색의 동정에서 눈을 돌려 동방 지역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동정에 주목한다. 먼저 제시되는 우파니샤드의 절제하라, 관대하라, 동정하라는 천둥소리 우화는 다소 심오하다. 설화집인 자타카의 사례는 책의 마지막 장인 동물의 고통과도 연계해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우파니샤드, 자타카를 읽어본 바가 없는데 제시되는 내용이 회심의 철학이 녹아있는 등 관심을 끈다.) 동정은 신의 세계로도 들어간다. 8장의 제목은 ‘신이 인간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면’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신화―100% 다 그런지는 모르기 때문에 거의라고 한다―에는 인간의 불행에 가슴 아파하는 신들의 모습(p.169)이 등장한다. 하지만 프레테는 동정은 인간이 어떤 도덕적 윤리나 보호의 상징으로 경험하는 ‘저 높은 곳’에 뿌리를 둔다거나,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믿음의 표현이나 표출, 혹은 단순히 타자의 현존과 인간의 존엄성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토대로 한다기보다는, 이와 무관하게, 우선적으로 어떤 만남의 언어, 하나의 관계가 발하는 빛에 가깝다(p.169)며 과도한 의미 부여를 제어한다. 그는 신화의 한계를 분명히 긋는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자비를 비롯한 종교의 관념들이 문학과 예술에 반영된 사례를 보면서 동정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 여기에 등장하는 곡 중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첨부한다. 탈리스 스콜라스의 유명한 녹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bgRGUThIfY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면과 코리올라누스를 통해 동정의 의미를 설명하는 영웅의 눈물(9장)은 그 글들을 읽던 때의 심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설명은 생생하며 동정이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인지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 감정의 대가는 자신의 죽음이 되기도 하니까. (나로서는 모든 장 가운데에서 이 장을 가장 이해하기 쉬웠다.) 그런데 프레테는 갑자기 철학이 취급하는 동정의 세계로 뛰어든다. 철학의 접근은 냉정하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자신을 투사하지 못하는 한계를 여러 방면에서 밝힌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철학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인간의 본성을 명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타자의 고통을 전적으로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면서 동시에 그 고통이 어쨌든 자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의 내면에 침전되는 달콤함(p.204) 같은 표현은 그런 시각의 예다. 동정은 결국 앎의 훈련이 된다. 그리고 루소는 물었다. “동정과 동정의 본질에 대해 나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p.238)" 책은 이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동정을 벗어나 동물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진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았다.) 감옥에 갇힌 로자 룩셈부르크가 채찍질 당하는 물소에 대해 표하는 애처로움은 사유를 확장시킨다. 동물은 인간에게 수단에 불과한 존재인가? 많은 문학작품들이 동물 문제를 다루고 그들에 대해 동정심을 발하는 장면을 보면서 새삼 경이로웠다. 동정은 죽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프레테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고통을 눈에 담고 죽어야했던 한 강아지의 눈빛을 떠올린다.
이제 에필로그에서 글쓴이는 미술 영역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졌던 피에타의 모습을 읊는다. 슬픔, 고통, 참담함 등의 표현이 동원된다. 결론적으로 동정에 하나의 얼굴과 극단적인 강렬함을 부여하면서 탄생한 것이 피에타다(p.304). 책은 피에타를 제목으로 한 그림과 조각들을 보여주는데 그 전에 프레테의 해설을 먼저 담는다. 이 해설은 에필로그 뒤에 실린 도판들과 연결해서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작품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기법도 설명하고 있어서 작품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된다. 프레테는 다음의 문장으로 글을 마감한다. ‘과연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가’라는 이 오래된 질문은 아마도 오랫동안 인간에게 고유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p.336).
맨 처음에 언급한 대로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책의 모든 문장을 다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정이라는 주제가 오랜 기간 동안, 어쩌면 인류의 탄생과 함께, 우리 곁에 머물렀음을 문학과 예술에 반영된 바를 목도함으로써 이 주제가 항상 인간의 심성을 관통하는 주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던 바였는데 이 감정이 지금까지처럼 오래 인간을 붙잡고 있을 주제가 되리라 생각하게 된다. 고백하건데 동정이란 말을 들으면 왠지 동정의 대상을 낮추어 보는듯한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니체가 말한 “사랑하면서 동정심보다 우월한 감정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이들 모두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p.241).”는 표현을 발견하고는 안심이 되었다. 나 혼자만 동정이라는 이 낱말, 이 감정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 셈이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았다. 참다운 동정을 드러내려면 앎과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참다운 동정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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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혹은 생명을 살리는 길 - 안토니오 프레테, 『동정에 대하여』
동정(同情)이란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전쟁터에서 팔이 잘린 아이를 보면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아이와 혈연으로 묶여서가 아니다. 아이가 겪는 아픔이 바로 내가 겪는 아픔 같기에 그런 것이다. ‘감정이입’이라고 말해도 좋다. 팔이 잘린 아이와 팔이 멀쩡한 나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다.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이리 보면 동정은 심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내가 팔이 잘린 아이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아이가 느끼는 고통을 마음으로 느낄 뿐이다. 지은이 말마따나 “동정은 타인과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움직임을 가리킨다.”(9쪽) 타인의 고통을 향해 나아가려면 타인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여기서 타인은 약자와 동의어이다. 팔이 잘린 아이는 약자이기 때문에 동정의 대상이 된다. 전쟁을 일으킨 원흉의 죽음을 우리는 동정하지 않는다.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우리는 동정하지만,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을 우리는 결코 동정하지 않는다. 전두환을 향해 우리는 분노를 터뜨린다. 그가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천벌로 생각한다. 전두환이 생을 마치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까, 박수를 칠까? 나는 박수를 칠 것이다. 이미 죽어 영혼이 된 사람들이 그를 반드시 심판하라고 기도할 것이다. 전쟁에서 팔이 잘린 아이를 보면 동정심을 일으키는 내가, 왜 전두환의 죽음에 대해서는 냉정한 판단을 하는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동정심은 무엇보다 약자의 고통을 보는 마음에서 뻗어 나온다. 약자가 아닌 강자가 사람들의 동정심을 받으려면, 강자 스스로 벌인 일을 뼈저리게 뉘우쳐야 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벌인 일을 뉘우쳤는가? 뉘우치기는커녕 그는 아직도 자신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동정의 주체는 때로 스스로의 감각과 상상력으로 인해, 스스로의 느낌을 타자에게 전달하려는 충동으로 인해 어떤 극단적인 단계, 즉 모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도달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타자의 고통이 동정의 주체에게 그가 어쨌든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하찮고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어서 이러한 폭로 자체가 결국 동정의 주체에게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한순간이지만 스스로가 지니는 개인으로서의 무능력함과 심연을 경험하게 된다. (21쪽)
동정의 주체는 고통 받는 대상과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럴수록 동정의 주체는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한다. 주체는 주체이고, 타자는 타자이다. 자기감정이 사라진 상태에서 동정의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모험을 감행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상황 속에서만 가능하다. 곧 동정의 주체는 고통 받는 타자와 상상으로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광주항쟁’의 처절한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보며 우리는 한없는 고통을 느낀다.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지나간 역사를 상기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스스로가 지니는 개인으로서의 무능력과 심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전쟁터에서 팔이 잘린 아이를 동정한다고 우리가 그 아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위해 우리는 몇 푼의 후원금을 내고 잠시잠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 우리는 동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무한 경쟁 시대를 살려면 무엇보다 동정심부터 없애야 한다. 동정이란 곧 타자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타자의 아픔을 느끼면서 어떻게 무한 경쟁을 펼칠 수 있을까? 타자는 동정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이겨야 할 대상이다. 타자를 밟고 넘어서지 않으면 피라미드의 맨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도록 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우리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 달려야 할 트랙은 이미 정해져 있다. 트랙을 벗어나면 경쟁 대열에서 자동 탈락된다. 경쟁이 끝나면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오로지 뛰고 또 뛰는 사람만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토끼처럼 빠르게 뛰고, 거북이처럼 꾸준하게 기어야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동정을 생각한다는 건, 스스로 구렁텅이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정이 사라진 근대는 인간을 위해 희생한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그로 해서 인간은 문명사회로 나아갈 기틀을 마련했지만, 정작 그는 제우스에게 끔찍한 벌을 받아야 했다. 독수리에게 날마다 심장을 파 먹히는 벌. 저녁이 되면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쪼아 먹는다. 아침이면 다시 심장은 살아나고, 저녁이면 또 다시 독수리가 심장을 파먹는 끔찍한 일의 반복. 근대인은 아침이면 프로메테우스가 내지르는 이 끔찍한 고통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다. 근대인이 벌인 자연 파괴를 떠올려 보라. 근대인은 자연을 환대하지 않는다. 환대는커녕 자연에서 빼낼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어떻게든 취하려고 한다. 자연 착취는 인간 착취로 이어진다. 인간만큼 같은 종족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 존재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는 카페에 앉아 있고 테이블 위에는 공책과 빈 컵 하나가 놓여 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그들이 입고 있는 옷도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형편을 떠나서 남들이 무슨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일이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말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다시 말해 스스로를 잊으면서까지 입장을 바꾸어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고통 받는 존재는 분명 타인이며 우리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같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타자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것이 루소가 한 말이다. 타자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다. (237쪽)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고통 받는 타인을 동정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게 불편(?)해서 타인을 도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 타인의 고통이 불편한 것일까? 타인처럼 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일까? 지은이는 루소를 따라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같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시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동정에 대한 이런저런 이론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동정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은 결코 약자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권력과 동정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쥐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권력자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타자 안에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타자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인간을 도구로 생각하면 죽이기가 쉽다.
지금 총으로 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물건이다. 물건을 버리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다. 물건은 쓸모를 따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건이 된 인간은 쓸모에 따라 쉽게 버려진다. 전쟁터에 내몰린 존재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권력은 인간을 물건으로 대체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한다. 그들은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병에 걸린 가축들이 괜히 ‘살처분’을 당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가축이 겪는 아픔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인간’이라는 종족이 중요하다. 인간이 가축을 대하는 마음은 그대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서 동정심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명을 생명으로 보는 존재만이 동정심을 내보일 수 있다.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동정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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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행복, 슬픔, 절망, 희망이라는 감정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다다를지에 대한 고민과 슬픔은 어떤 감정이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걸까라는 고민만 수십 년째 하면서 정작 동정이라는 감정은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동정이라는 감정은 "나 자신"의 감정이긴 하지만 타자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에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심지어 동정이라는 감정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동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애썻다. 그러다 안토니오 프레테 "동정에 대하여" 라는 책을 알게 되어 읽게 되었다. 우선 동정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낯선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드라마를 봐도 평소 일상에서도 동정이라는 감정은 불쑥불쑥 다가왔었는데 이토록 낯선 것은 왜일까….
동정이라는 감정이 낯설게 된 이유로 이 책의 124쪽을 보면 가난에 찌든 장님들이 교회 앞에서 자비를 호소하며 동냥을 구하고, 서로를 지탱하며 항상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어둡고 처참한 삶이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그들이 자신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인다. 단테는 앞 못 보는 영혼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이 거의 "모욕"에 가깝다고 느낀다. '나'는 볼 수 있지만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누군가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것, 이 강렬한 대조, 상황과 입장의 극명한 차이가 동정이란 감정을 움직인다. "나를 못 보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는 것이 모욕처럼 여겨졌기에" 머릿속으로나마 타자의 입장에 서서 타자의 고통을 떠올려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특혜에 가까운 상황을 의식하고 타자가 처한 상황과 거리가 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는 것, 이러한 대조 자체를 슬프고 어쩌면 부당하게 느끼는 것이 동정의 움직이 내딛는 첫걸음이다.
그동안 동정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딱하다고 여기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동정이라는 감정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정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과 성찰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나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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