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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날이나 저녁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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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저녁 같은 날
창밖 멀리 하늘, 그 아래 건물들도 어딘지 삭아가는 시멘트 빛
아, 정작 저녁이 오니 건물들이 희게 빛나네 하늘과 함께 건강함의 진부함을 뽐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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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히 발견한 10년은 좋이 지난 너의 메모 좋은 펜으로 썼나봐 글자가 선명하네 ‘아무 날이나 저녁때’
내게 아직 진부하게도 저녁이 있었을 때 아무 날이나 저녁때
3월의 어느 날 오후 해방촌을 찾았다. 아직 봄이라기에는 이른 듯했지만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나무들에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처음 가는 해방촌은 지하철을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오래된 고등학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가니 꽃향기가 났다. 오래된 중학교도 지난 뒤에야 마을이 나타났는데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길이 본격 시작되었다.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답게 경사가 높은 길, 높지 않은 연립주택을 지나며 시인이 걸었을 길을 생각했다. 수입의 많은 부분을 찾지한다는 고양이 사료를 둘 만한 곳을 찾아보기도 했다. 골목의 어느 귀퉁이, 오래 주차되어 있는 차량의 밑, 시인의 눈이 머물 곳을 그려보았다. 시인은 여전히 그곳에서 고양이와 지내며 시를 쓰고 있을 테다.
소소한 일상을 그린 시편들이 많다. 아무 날이나 잡아서 시를 써도 비슷한 시가 나올 그런 나날이다. 그렇더라도 유머가 있어 반갑다. “잠 깨려고 커피를 마신 적 있나? / 있다 / 있긴 있다만 / 대개는 잠을 깨려고 마시기보다 / 깨어 있어서 마셨다. / 라고 나는 썼다 / 커피는 썼다 / 인생이 쓰고 즘생도 쓰고 / 뭐든지 쓴 밤 / 쓰지 않은 건 잠뿐 / 트리플 샷을 마셔도 / 쏟아지는 잠 / 그래, 커피는 / 마시는 것보다 쏟는 게 / 더 잠을 깨게 한다지 / 뭐라도 써야 하는 밤”(「뭐라도 썼다」) 같은 말장난이라도 하는 시편이 있어 다행스럽다.
소소한 일상에 반짝이는 날이 없지 않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저녁 같은 날이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약동하는 고양이 같은 날이면 좋으련만 창밖 멀리 하늘을 바라보아도, 그 아래 건물들을 바라보아도 어딘지 삭아가는 시멘트 빛이다. 그렇게 회색 빛 하루를 지나는데 아, 정작 저녁이 오니 달라진다. 건물들이 희게 빛이 난다. 하늘과 함께 건강함의 진부함을 뽐낸다. 거기서 그쳤으면 아쉬움이 남았으리라. 그러나 저녁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있다. 어제 우연히 발견한, 10년은 좋이 지난 너의 메모다. 설마 좋은 펜 때문일까. 아니다. 너의, 나의 너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명하다. ‘아무 날이나 저녁때’. 마음을 주고 받을 계기가 마련되리라. ‘아무 날이나 저녁때’. 내게 아직, 진부하게도 저녁이 있었을 때. ‘아무 날이나 저녁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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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렌드 중 하나가 시집 읽기라고 한다. 짧아서 읽기 좋고, 감성 챙기고, 디자인 예뻐서 SNS 올리기 좋고. 어떤 이유건 책 읽는 유행은 좋고, 시 읽는 유행은 더 기쁘다. 그래서 나도 동참해 보려고 도서관에서 시집 책장을 훑어 보았다. 또 요즘 트렌드가 여성 작가 아닌가. 여성 시인 중에서... 최근 연륜 있는 작가들이 주는 깊이감에 매료된 참이니 조금 더 나이 있어 보이고 익숙한 이름으로... 하다가 고른 게 황인숙 작가의 '아무 날이나 저녁때'다.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인생이 쓰고 즘생도 쓰고 뭐든지 쓴 밤 ... 뭐라도 써야 하는 밤 <뭐라도 썼다> 에서 발췌 어제 우연히 발견한 10년은 좋이 지난 너의 메모 좋은 펜으로 썼나봐 글자가 선명하네 '아무 날이나 저녁때' <아무 날이나 저녁때>에서 발췌 따뜻하면서 유쾌하고, 조금은 씁쓸하고, 그리고 지적인 시들로 가득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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