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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장회익 저자를 2014년에 읽은 책 <공부 이야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당시에도 멋진 분, 대단하신 분 엄지 척!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평생 앎을 추구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학문도둑 장회익 저자.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대작을 만났습니다. 동양 고전과 현대 물리학을 아우르며 지혜의 역사를 다룬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부제처럼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된 후 좁은 분야 외에는 문외한이 되어버린 현재의 협소한 학문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앎을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자연철학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앎의 추구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동서양 과학을 오가며 들려줍니다. 이 과정에서 심오한 내용을 열 개의 그림과 도식으로 표현해 핵심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곽암의 <심우십도>와 퇴계의 <성학십도>의 구조와 형식을 가져와 인류 지성사의 주요 과정을 소개합니다. 소를 찾아 나선 구도자의 이야기를 다룬 우화 <심우십도>가 앎의 지평을 넓혀간 역사 이래 열 가지 결정적 장면을 담기 적당했기에 전체적인 흐름은 심우십도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됩니다. 진리를 상징하는 소. <심우십도>의 1장은 소를 찾아 나서는 장면인데 이는 진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첫 그림에 해당하는 역사적 인물로 소개된 이는 조선시대 여헌 장현광입니다. 그가 18세에 쓴 <우주 요괄첩>은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온 생애를 바쳐 공부할 내용들의 줄거리를 정리한 공부계획서와도 같은 이 책은 참이치를 추구하는 기본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열 단계마다 결정적으로 기여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합니다. 데카르트와 뉴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 과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을 살펴보며 궤적을 따라갑니다. 어떤 계기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역사적 사실과 주요 핵심 내용을 들려줍니다. 소를 찾아 나선 구도자가 소를 발견하고 포획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심우십도>의 줄거리와 과학사의 주요 장면들이 잘 들어맞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연철학이라는 제목을 보고 일반적인 철학사를 생각하고 접한 독자도 많을 것 같아요. 저는 과학사를 읽는 느낌에 가까웠어요. 고전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엔트로피 등 물리학 개념이 쏟아집니다. 문과 출신이라면 당황할법한 수식도 가득합니다.(저자는 최소한의 수학적 언어를 사용했다고 하시지만). 물리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자에게는 이 책이 결코 수월하게 읽히는 책은 아닐겁니다. 고전과 철학자들이 등장할 땐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들어봤던 과학을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되더라고요. 완독 도전 의욕도 불러일으키고 말이죠. 과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는 앎의 자세와 방향을 잡아주는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 같습니다. 과학을 전문적으로 접하지 않지만 교양 수준의 과학서가 살짝 심심한 독자에게는 좋은 자극제가 되겠고요. 인간이 자연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고, 다시 인간을 이해하게 되면서 온전한 앎으로 이어지는 탐구의 과정을 보여준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과학과 철학의 본질적 물음을 제기하며 사유를 통해 앎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하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제대로 공부해! 라고 손수 보여주신 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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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앎에 이르기 위한 지난한 도정 - 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장회익은 고전 학문과 근대 학문의 위상을 다른 맥락으로 접근하고 있다. 고전 학문은 성인이 이미 정해놓은 내용을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둔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위 ‘이단(異端)’이라 불리는 사상들은 고전 학문의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꼭이 종교에서만 이단이 있는 게 아니다. 조선조 유학 사상에서도 분명 ‘이단’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이단을 행하는 사람은 고전의 권위를 비판함으로써 전통에 흠집을 내는 존재로 평가되었다. 서양 중세시대에 일어난 ‘마녀사냥’ 또한 넓게 보면, 고전 학문이 지배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근대 학문은 학문을 바라보는 개인의 ‘입장’을 중시한다. 고전 학문이 성인이 그려놓은 학문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면, 근대 학문은 성인이 그려놓은 학문 세계일지라도 후세 연구자가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조선 시대 학자들이 공자를 생각하는 방식과, 지금 이 시대의 학자들이 공자를 생각하는 방식을 비교해 보라. 조선 시대 학자들에게 공자는 믿고 따라야 할 전범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전범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므로 학자들은 그 전범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성인들의 그려놓은 학문 세계를 공부했다고나 할까. 지금 학자들은 어떨까? 옛 사람들이 그려놓은 학문 세계를 지금 자신이 놓인 상황과 연결하여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방식을 취한다. 옛 성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근대’에 스며 있는 개인주의적 특성이 학문 연구에도 적용될 경우라고 할 것인데, 이에 따라 이 시대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지은이는 중국의 곽암 선사가 작성한 <심우십도(尋牛十圖)>와 퇴계 이황이 지은 <성학십도(聖學十圖)>의 형식을 근간으로, 고전 학문에서 (탈)근대 학문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밝히고 있다. <성학십도>는 성스러운 학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고, <심우십도>는 ‘마음’을 나타내는 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10개의 글과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학십도>가 학문의 진경을 소개하는 글이라면, <심우십도>는 소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통해 온전한 앎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요컨대 지은이는 ‘온전한 앎’을 찾기 위한 근원 형식으로 이 두 편의 글을 참조하고 있는바, 그는 동양철학과 서양과학을 아우르는 방식을 통해 지금 인류가 이른 ‘앎’에 접근해 들어간다. 동양이 과학적 실험정신보다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사유방식을 추구했다면, 서양은 통합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실험을 통한 검증 방식을 중시했다. 뉴턴의 동력학을 기반으로 서양이 새로운 문명을 이룬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제1장에서 지은이는 여헌旅軒 張顯光(1554~1637)의 학문 세계를 통해 고전 학문에서 근대 학문에 이르는 초입을 제시한다. 여헌은 ‘내 안에 있는 이理’와 ‘천지만물의 이理’를 구분하고 이들의 관계를 통해 이치 추궁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치를 추궁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이로 천지만물의 이를 비추어 보아 이를 남김없이 꿰뚫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60쪽)는 말에 드러나는 대로, 여헌은 성인들이 세워놓은 이치를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이”로 끝까지 추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은이는 여헌의 이런 방식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우리는 우주 내의 존재물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이理)를 찾아낼 수 있다. 2. 이렇게 얻어진 변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그 존재물의 현재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 (67쪽)
이를 기준으로 지은이는 여헌이 말한 “형形이 없는 형과 상象이 없는 상을 찾으라”는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 보이는 형을 알려면 보이지 않는 형을 이해해야 하고, 상을 알려면 보이지 않은 상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지은이는 형이 없는 형을 대상의 ‘특성’과 연결시키고, 상이 없는 상을 대상의 ‘상태’와 연결시킨다. “돌이 날아간다는 현상의 경우, 대상의 특성을 보이는 그대로의 돌이 아니라 숨겨진 성격(예를 들어 돌의 질량과 이것의 받는 힘)에서 찾아야 하고 대상의 상태 또한 움직이는 겉모습에서가 아니라 서술에 적절한 물리량(예를 들어 돌의 위치와 운동량)으로 삼아야 한다.”(68쪽)는 것이다. 여헌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서양 근대과학을 공부한 지은이는 무엇보다 이런 맥락으로 ‘온전한 앎’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는 ‘처음 상태’가 ‘나중 상태’로 변화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우선 살피려고 한다. 그것이 밝혀져야 앎에 이르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소를 찾아 길을 떠난 학자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다양한 과학이론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제2장에서 제6장까지가 그런 글들이다. 제2장은 뉴턴의 고전역학을 다루고 있으며, 제3장은 상대성이론, 제4장은 양자역학, 제5장은 통계역학, 제6장은 우주와 물질과 관련된 과학담론을 다루고 있다. 데카르트의 영향을 짙게 받은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물었다. 앞서 살핀 여헌 장현광이 “대지는 왜 안 떨어지나?” 하는 질문과는 다른 방식의 물음이다. 지은이는 그 이유를 뉴턴이 공간을 3차원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공간을 2차원의 평면 개념과 독립된 1차원의 수직 개념으로 보는데, 뉴턴은 이를 수직 방향과 수평 방향을 대등하게 보는 3차원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공간 기하학을 통해 3차원 개념을 익힌 덕분에 뉴턴은 이런 인식이 가능했던 셈이다.
뉴턴의 동력학은 아인슈타인이 공간 개념에 시간 개념을 덧붙이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공간 인식(4차원 시공간)을 바탕으로, 뉴턴이 발견한 중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장 우리는 어떻게 지구 표면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아인슈타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물체의 질량이 주변의 시공간을 일정한 방식으로 휘게 만드는 현상에 주목한다. 주변 물체들은 그 휘어진 시공간 안에서 가장 짧은 거리로 움직이는데, 마치 큰 물체가 주변 물체들을 당기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이것을 중력 현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우주의 신비를 풀 듯했던 아인슈타인도 ‘양자 역설’이라는 또 다른 모순 앞에서는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인간이 발견하는 ‘진리’란 늘 이렇다. 드디어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견한 진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지은이는 고전역학이 ‘바탕 이치’의 거친 모형을 만들고, 상대성이론이 이를 정교한 시공간의 틀 안에 담아냈다면, 양자역학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바탕 이치’의 참모습을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잘 알려진 양자 역학은 실험 상자를 열어보지 않는 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상태 역설’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여헌은 그의 <우주설>에서 “이理라고 불리는 것은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있고, ‘없지 않음의 없음’으로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양자 상태’와 비슷한 인식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양자 역학은 존재물의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의 값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함수’로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상이 “어느 시점, 어느 위치에 존재할 확률이 얼마냐” 하는 시공간적 분포를 말하기보다는, 어느 시점에 “대상이 어느 위치에 존재할 확률이 얼마냐” 하는 것을 나타낸다.
통계역학을 알려면 엔트로피 개념을 알아야 하고, 엔트로피 개념을 알려면 거시상태와 미시상태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 거시상태는 현상적으로 구분되는 각각의 형상들을 말하고, 미시상태는 동역학적으로 구분되는 개별 물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엔트로피는 오직 거시상태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거시상태가 지닌 형상이 얼마나 정교한 짜임새를 가지느냐 하는 것과 관련을 가진다. 이를테면,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이 썩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몸의 정교한 짜임새가 점차 풀어지는 현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에 해당된다. 지은이는 거시상태의 변화를 “있을 수 있는 확률이 작은 거시상태”에서 “있을 수 있는 확률이 큰 거시상태” 쪽으로 일어날 것이고, 이는 곧 “해당 미시상태의 수가 작은 거시상태”에서 “해당 미시상태의 수가 큰 거시상태” 쪽으로 일어난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설명한다. 이를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 표현하면 “거시상태의 변화는 언제나 엔트로피가 작은 거시상태에서 엔트로피가 큰 거시상태 쪽으로 일어난다”는 말이 된다.
고전역학에서 통계역학에 이르는 과정은 앎의 본질에 차근차근 접근해 가는 과정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이론은 부분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고, 그것은 다른 이론을 통해 점점이 채워지게 된다. 지은이는 한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론을 우주를 이해하는 단서로 활용한다. 진리에 다가갈수록 이론은 그만큼 단순해지는 법이다. 사물 하나를 분석하는 힘으로 우리는 우주 전체를 분석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우리 주변에 있는 물체 운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헌이 말하는 ‘내 속의 이’와 ‘천지만물의 이’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원리가 여기서 입증되는 것이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이 있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에 사는 인간은 우주가 있는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물고기에게는 물에 해당되는 원류를 우주에서 찾으려고 했는데, 2012년에 그것은 ‘힉스 마당’이라는 명칭을 달고 세계에 알려졌다.
제7장부터 제10장에서 지은이는 소를 잊고 온전한 앎에 이르는 학자의 마음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우주까지 뻗어 나간 앎의 세계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정점에 이른다. 양자역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지은이는 논의를 시작한다. 물리학작인 슈뢰딩거는 왜 생물학과 관련된 책을 지은 것일까? 지은이는 말한다. “그가 이러한 주제를 내걸었던 까닭은, 이제는 물리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할 단계에 도달했으며, 이것이야말로 다음 시대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생산적인 학문적 관심사가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347쪽) 실제로 이 책을 읽은 제임스 왓슨과 프렌시스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해 생물학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지은이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연관된 까닭을 20세기에서 이루어진 물리학의 두 가지 성과에서 찾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사물의 보편적 존재양상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일상적 경험세계에 대한 이해의 틀인 고전역학의 제약을 넘어 원자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양자역학이 구축되었고, 이를 통해 사물의 존재양상을 원자론적 바탕과 연계해 이해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래의 망원경, 현미경 등 광학적 관찰수단을 넘어 X-선을 포함한 광범위한 방사선, 그리고 입자가속장치를 포함한 정교한 관측장치들이 개발됨으로써 원자세계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파악할 수단이 갖추어졌다는 점이다. 물리학을 통해 마련된 이 두 가지 성과는 생명체의 구성과 기능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대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349~350쪽)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확장된 물리학 이론이 생물학 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겠다. ‘생명체의 구성과 기능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물리학의 발전을 통해 나왔다는 건, 그만큼 이 세상 모든 학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고전역학이 거시세계에 대한 탐구에 알맞다면,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 대한 탐구에 알맞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생명을 탐구하려면 양자역학에 근거한 사고방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지은이는 생명에 대한 최근 이론을 짚어나가면서 ‘온생명global life’에 대한 이론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낱생명(개체생명)’과 구별하기 위해 ‘온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낱생명은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생명의 기능을 하게 된다.
지은이가 말하는 온생명은 태양-지구계 위에 형성되어 약 40억 년 간 생존을 유지해가고 있는 ‘우리 생명’을 가리킨다. 지구상에 형성된 최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에서 현재 우리들 자신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계통적으로 연계된 모든 조상을 그는 ‘온생명’이라는 말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동력학과 통계역학이라는 ‘소’를 타고 우주를 둘러본 지은이는 이제 지구라는 고향으로 돌아와 온생명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아직 개체생명이라는 미망에 빠져 온생명이라는 전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알았지만, 그 앎은 다른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길로서만 제시될 뿐이다. 온전한 앎을 향한 길은 이토록 힘겨운 길이다. 제8장부터 시작되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문제가 사람도 소도 모두 잊는 비유와 이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기에 집착하면 온전한 앎에 이르는 길은 그만큼 멀어진다. 자기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온전한 앎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
제8장에서 지은이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비교하며 서술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눈 인물이고, 스피노자는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본 인물이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가 근대철학과 근대과학을 세운 시초가 되었다면, 육체와 영혼의 일원론을 주장한 스피노자는 당대에는 철저히 잊혔다가, 근대 비판이 일기 시작한 최근에 이르러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다. 지은이는 이러한 관례적인 이원론이나 일원론을 넘어 일원이측면론(一元二側面論)을 주장한다. 영혼과 육체, 주체와 객체를 두 개의 실체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양상 혹은 두 측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온생명’이라는 개념과도 이어진 이 방식으로 지은이는 둘이면서도 하나로 주체와 객체를 정리한다. 시인인 랭보가 이야기한 ‘나는 너다’라는 인식구조가 여기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448쪽)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신비’는 원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처음 본 현상에서 신비를 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신비는 인간이성에 의해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은 세계가 내보이는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벌이는 지적 모험을 이 말로 표현한 셈이다. 지은이는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건 층’과 ‘상태 층’을 구분한다. 사건 층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과 이어져 있다면, 상태 층은 사건이 일어나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을 빙산에 비유한다면 ‘사건 층’은 물 위로 드러난 부분이고 ‘상태 층’은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부분이다. 아인슈타인이 얘기한 신비가 상태 층을 가리킨다면, 사건 층은 그 신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겠다.
지은이는 사건 층에서 상태 층으로 이어지는 앎의 과정을 “끊임없이 네 앎을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앎이 너를 죽일 것이다.”(484쪽)라는 지엄함 명제로 표현하고 있다. 네 앎을 죽이란 얘기는 앎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동시에 이러한 앎은 더 깊이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더 단순해지는 특징을 내보인다. 지은이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더 깊이 뚫고 들어갈수록 그리고 우리의 이론이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 될수록, 이러한 이론들을 결정함에 요구되는 경험적 지식의 분량은 줄어들게 됩니다.”(488쪽) 더 많이 알수록 더 깊어지고 더 단순해진다는 말이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지식에 현혹되어 정작 이런 지혜를 무시하는 현대인들을 생각한다면, 네 앎을 죽여야 새로운 앎에 이를 수 있다는 말에 드리워진 의미가 새삼 새로워지기도 한다.
마지막 10장에서 지은이는 주돈이가 지은 <태극도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우주의 원리가 인간의 삶과 이어져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우주의 원리를 체득한 성인이 바른 자리를 세우면, 군자는 그를 따르고 소인은 그를 어긴다. <태극도설>은 이리 보면 성인이 세운 윤리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고전학문 계열에 속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보편성에 치중하는 고전학문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려면 구체적인 일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전역학에서 통계역학에 이르는 지적 도정은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인간들이 벌인 이론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보편성과 구체성이 아우러진 온전한 앎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지은이는 바로 이런 앎을 정립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학문 세계를 살펴온 것이다.
지은이가 온전한 앎에 이르는 길로 제시하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 모형’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띠를 의미한다. 동양철학이 통합성에 치중하고 있다면, 서양철학은 합리성, 정밀성에 치중한 학문 연구 태도를 보여 왔다. 뫼비우스의 띠 모형은 이분법적으로 갈라진 이 연구 태도를 하나로 묶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기존의 학문 태도가 지닌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나는 어떠한 세계에 사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523쪽)와 같은 근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학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지금 이곳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온 이 기나긴 역사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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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연철학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분명 '나'는 이를 증명의 역사중 하나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이를 좀 더 드러내자면, 이책 또한 나름 자연철학에 대한 본질에서 발전에 이르는 오랜세월에 대한 저자만의 정리라 할 수 있는 내용이 녹아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지극히 평범한? 철학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여느 독자의 입장에 있어선 의외로 이 모든 내용을 이해하는데 독서가 아닌 '공부'를 강요받게 될 것이라는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책으로서도 인식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 그럴것이 저자가 드러내는 '철학'의 배경에는 더욱 더 생소한 동양의 역학(성학십도와 심우십도)이 녹아있다. 그러나 본디 성학십도 등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그 핵심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이해하여야 하는가? 에 대한 것에 있어선 분명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도 분명히 답할 수 없는 무지에 가까운 영역에 놓여있다 해도 과연이 아니다. 허나 단 하나 확실히 주장 할 수 있는 것은 본래 자연철학에 대한 개념 자체가, 인간의 본질과 선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강제하는 '정신적인 개념의 정리'가 아닌 '물질의 정리와 증명'을 위하여 발전된 개념이라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유명한 고대 그리스 서양철학과 함께 이 동양의 철학 또한 그 존재를 위해 필요한 개념을 오롯이 간직한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때문에 결국 (동양의) 앎의 탐구라는 영역에 있어서 동.서양의 다름은 있을지언정 높고 낮음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감상이 든다. 실제로 오늘날 그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있어서, 이 고전역학의 역활 또한 보다 더 다른 방향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이에 더 나아가 과거 세계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소외된 이 생소한 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여느 독자 스스로가 앎에 대한 척도를 멋대로 재단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결국 '강의'라는 단어가 들어간 만큼! 책 속의 내용 또한 단순한 글자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옛 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 라 했던가? 이에 저자 또한 단순히 고대의 자연철학, 동방의 독특한 지식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더 나아가 현시대에 발전하는 과학의 영역에 이르는 '연결고리'에 있어서도 그 동양철학이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한 모습이 보여지기도 한다. 이때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지금의 독자인 '나'의 입장에 있어선 그 모든 내용과 설명이 오롯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번 두번... 이 두꺼운 책을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역시나 교육자이자 학자인 저자의 세계에 다가가는 것은 역시나 버겁기 짝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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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처럼 몰아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과학의 시대에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라는 표지의 글이 꽤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그럴수록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주는 인간 탐구는 더 흥미로운 주제다. 우연한 기회에 서평을 하게 된 이 책은 받아 들고는 한참을 벌어진 입을 닫을 수 없었다. 이 어마 무시한 두께는 도대체! 정말 작정하고 읽어야 할 정도다. 얼마나 많은 생각과 시간을 쏟아부었을까. 저자의 노고가 깊이 느껴진다.
"우리는 이제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고 묻는다면 뉴턴의 중력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일반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p189 저자는 과학이 존재로서의 의미로 자연철학의 일부 혹은 부분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심오한 철학을 알기 쉽게 열 개의 그림으로 풀어낸 곽암의 심우십도와 이황의 성학십도의 형식을 빌려 역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 근대 이후 인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과학적 내용을 총 10장에 걸쳐 철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자 혹은 과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문과 과학을 넘나들며 과학은 독자적인 학문이라기 보다 자연철학의 하나라고 풀어 낸다. 600페이지가 넘는, 그것도 빼곡히 기록된 수식과 내용들에 시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은 2장의 내용 부분을 먼저 읽을 것을 저자가 권하고 있을 정도로 내용과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여는 글을 비롯, 기초적인 과학적 지식만 있어도 읽는 데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풀어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학창시절 숫자와 과학이 어려웠던 터라 기초 지식이 전무하다 보니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흥미로운 책이며, 과학이 인문을 넘어 휘몰아치듯 부는 이 시대에 인문학적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앞으로 혹은 현재 과학에 매달리고 매달리려는 사람들은 한 번쯤 정독해 보면 좋을 책이라 생각한다.
"일급 물리학자들조차 포기하거나 비관한 마지막 문제 하나를 생각해보자. 이는 곧 앎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 자체로서 매우 독특하다. 어떤 물음이 추구하는 것은 그 해답에 해당하는 앎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물음은 앎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앎의 자기 완결성을 묻고 있는 물음에 해당한다." p455 이 책은 과학을, 철학을 서로의 학문에 대입해서 또 다른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보긴 어렵다. 저자가 말한 대로 과학은 자연철학이라는 철학적 학문에서 나온 흐름을 이해하길 조언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들, 코페르니쿠스, 아리스토 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등 대부분이 과학과 예술 심지어 의학까지 펼치지 않았었나. 철학은 인간이 왜 사는가와 더불어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하게 한다. 그래서 철학을 좋아하기'만' 한다. 그리고 그저 이 엄청난 양의 철학서를 읽었다는 게 아주 만족스럽다. 그의 철학을 이해한다고 말하기엔 내 스스로 너무 부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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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계시는 장회익 교수가 철학과 과학의 통합이라는 목적을 갖고 진행한 강의를 10회로 나누어 만든 책이다. 부제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제는 완전히 다른 분야로 취급되는 철학과 과학을 "자연철학" 이라는 범주 아래 함께 묶어서 이들의 연관성과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강의를 진행한다.
10장으로 나뉜 강의의 주제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고전역학부터 시작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생명공학, 스피노자의 철학, 성리학의 태극도설까지 시대와 학문 분야를 뛰어넘은 방대한 영역을 아우른다.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성리학 같은 각 장의 주제는 관련 책 몇 십 권을 읽어도 이해할까 말까 한 전문적인 분야라서, 한 장의 강의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대신 저자는 각각 분철된 영역을 하나의 화두를 통해 한 바구니에 담아서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사찰에 자주 가 본 사람이라면 건물 벽에 그려진 소 그림을 알 것이다. 어린 목동이 소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10장의 그림으로 묘사한 심우도(尋牛圖)는 문자가 아닌 그림을 쭉 따라보면서 일반 신자들도 손쉽게 불교의 깨우침을 알도록 도와준다. "자연철학 강의" 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 심우도의 형식을 빌려서, 10장의 주제 앞에 심우도 그림 한 장을 제시하면서 연관된 주제를 한 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소로 상징되는 불교의 진리는, 자연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 이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뉴턴은 고전역학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들고 나온다.
복잡한 수식과 방정식 부분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뛰어넘었다. 그렇다 해도 자연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절대적 이론을 찾아 고군분투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삶과 다양한 지적 체계를 조망할 수 있는 값진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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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학창시절 물리, 생물, 화학, 지구과학으로 나뉜 과학 과목을 공부했었습니다. 저는 생물과 화학을 선택했었는데 물리와 지구과학은 계산할 것도 많고 복잡해서 싫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절대 못한다고 생각했었죠. 대학에 가서 생화학을 배우면서도 여전히 생물과 화학은 별개의 것이라고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과학 서적을 읽다 보니 과학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이것은 좋고 이것은 싫다고 선을 딱 그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점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물과 화학을 완전히 갈라놓고 생각하기 어렵듯이 물리나 지구과학(이라고 말하는 우주과학) 또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 한 우물을 파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반드시 미덕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시대에서 살아가다 보니 과학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공부했던 건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사분화된 사고를 하는 게 좋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과학을 철학과 합쳐서 생각합니다. 책 소개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철학자라고 알고 있는 데카르트 역시 과학자였으며, 과학자로 알고 있던, 철학자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 역시 철학자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5 원소설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기 위해 수학, 과학을 이용했고, 새로운 이론을 발견해낸 과학자들도 철학 하여 사고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도출해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솔직히 쉬운 책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장회익 교수는 12세기 곽암 선사의 심우십도와 16세기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서 착안, 이 책의 흐름을 정했습니다. 처음엔 동양 철학과 사유가 나오는 바람에 그걸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아니 실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쉬운 책을 주로 읽어온 제 탓입니다. 장회익의 글이나 문장은 쉬운 말로 쉽게 쓰여있었습니다. 제가 모자라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책을 읽다가 블로그 이웃 중 몇 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분들이라면 이 책을 쉽게 읽어나가실 텐데... 서양 철학 쪽으로 가니 좀 편해졌습니다. 한자, 한자어 때문이었나 봅니다. 한자 공부를 해야 할까요. 아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읽으면 되는 걸 굳이 적어가며 이해해보겠다고 공식을 따라 쓰고 대입해가며 읽은 저는 뭘까요. 이 책을 읽으시는 분께 처음엔 그냥 쭉 읽어나가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읽을 때는 천천히 깊게 철학 하며 읽으라 권합니다. 이 책은 열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장에서 철학 이야기, 철학자 이야기, 철학 혹은 과학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대개 물리나 수학 이야기를 하는데요. 인문과 과학을 넘나들며 아우르는 책입니다. 과거 뉴턴이나 데카르트도 이런 식의 사유를 했을 것 같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고민하다가 탄생하는 위대한 발견들. 아인슈타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상대성이론 같은 거, 제가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이런 과정들에 의해 탄생했다는 걸 보며 역시 범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이야기'형식을 취하고 있고, 또 특정 분야의 사전 지식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으나, 불가피하게 일정 분량의 수학적 표현들마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수학적 표현 그 자체가 중요한 지적 성취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에, 힘이 든다고 해 수학적 표현을 피해가는 것은 산을 안내하는 자가 산을 피해가는 길만 안내하려는 태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p.8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동서양의 철학자, 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입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해할 수 없어도 그 이름만은 친숙해 만나면 반가웠습니다. 여현 장현광의 <우주설>에서부터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볼츠만 등을 책에서 만나며 그들의 철학과 함께합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만으로도 이해 가능하게 서술하였다 했지만, 첫 번째, 물리 수업을 제대로 들었을 것. 두 번째,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 필요조건일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책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특히 물리 관련 지망하는 학생에게는 좀 더 넓은 시야를 줄 수 있을 책이었습니다. 맨발에 가슴 풀어헤치고 저잣거리 들어서니 흙투성이 재투성이라도 얼굴엔 함박웃음 가득하다. 신선이 가졌다는 비법이 없어도 마른 나무 위에 곧바로 꽃을 피우는구나. -p.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