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도 어김없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을 만났다. 벌써 17회라니…. 그 동안 15편의 수상작 대부분을 읽어왔다. 그중 한창훈, 박민규 님과의 만남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른 어떤 문학상보다 신뢰하는 한겨레문학상. 올해는 강태식이란 늦깎이 소설가의 아름답고도 슬픈 블랙 코미디 <굿바이 동물원>이다.
웃기고 심심하고, 당황스럽고 이윽고 비애가 느껴지는 동물원. 엄청난 실업난에 생계를 위협받던 사람들이 가까스로 취직했던 그 곳. 세링게티 동물원에 가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동물들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그들은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동물 가죽을 뒤집어 쓰고, 고릴라, 하마, 사자, 개미핥기 등으로 취직했다.
이 소설은 네 마리 고릴라가 주인공이다. 저마다 무직자, 공무원 준비생, 실직자, 남파 간첩 등 다양한 사연을 간직한 채 동물원에 모였다. 하나 같이 마늘을 까고, 인형 눈깔을 붙이고, 봉투를 붙이는 부업을 하다가, 돼지 엄마(부업 브로커)를 통해 세링게티에 들어왔다.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아갈 때,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는 그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동물원보다 못한, 디스토피아의 다름 아니다.
마늘을 까면서 눈물 짓는 그들. 매워서 우는 게 아니다. 삶이 맵다. 토사구팽 당한 세상의 소외자들에게 동물원은 그 어느 곳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제대로 살 수 있는 그곳에서 그들이 부려놓는 사연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처절한 이면을 보여준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적자생존의 현장, 그 속에서 대기업 오물처리반에 근무했던 조풍년 과장, 갖은 무공을 익히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앤 대리, 연락책을 죽여야만 숨 쉴 수 있었던 간첩 만딩고 부장. 모두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철저히 밀려난 적자들이다.
그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이렇다. 12m 높이의 철제 구조물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정상에 올라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하는 것. 대신 거기에 놓인 부저를 눌러야 1회당 5천원의 성과급을 받는다. 참혹한 노동 현장과 달리,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되고, 정을 나누며 사람 사는 재미를 찾는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안중근 소주’에 ‘아무거나’ 찌개를 먹으며 쌓인 회한을 쏟아내기도 하고, 구조물을 오르다 추락하여 부상당한 조풍년 과장을 대신해 나머지 사람들이 돌아가며 부저를 대신 눌러주기도 하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삶의 현장이다.
세링게티 동물원의 몰락 과정은 기막히다. 전직 동물로 취직했다가 여행사 가이드로 분한 ‘소생’이 찾아오면서, 동물원의 동물들은 하나, 둘 아프리카의 야생으로 돌아간다. 실제 고릴라 무리, 코끼리 무리에 섞여 평화와 안식을 찾은 그들을 보면서… 긴 한숨과 함께 뭔가가 울컥했다. 픽션이지만 정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난 자리, 주인공 김영수는 홀로 고릴라사를 지킨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오후, 돈벌이를 위해 그는 엠파이어를 오른다. 그때 조풍년 과장(돼지고깃집 홍보를 위해 돼지 탈을 쓰고)과 앤 대리(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가 찾는다. 이윽고 평생 소원이 고릴라를 직접 만져보는 거라 말했던 아내가 그를 찾았다. 한 손을 내밀고, 다른 손이 그것을 맞잡는다.
세상의 밑바닥, 그 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던 사람들. 슬프지만 그곳조차도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 작가는 세링게티 동물원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현실은 이토록 처참하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세링게티이고, 국민들은 그곳의 동물들이며, 그런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살아지는 것이란 약간의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을까?
유쾌하진 않다. 이야기 중간중간 낡은(그러면서도 슬픈) 유머가 장착되어 있지만,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무엇보다 동물원이란 오브제가 주는 억압과 체념의 이미지가 두둥실 떠온다. 그렇기에 강태식 님은 ‘굿바이’라고 슬픈 안녕을 고했던 건 아닐까? |
|
자본주의 경쟁시대의 참혹함을 그린 소설. 인간 답게 살기 위해 동물이 되기를 결심하다. 제 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굿바이 동물원>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바로 위와 같은 구절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초반에는 생각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와 별다른 독특함이 없는 문체, 어떻게 이 작품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 될 수 있었을까. 소설 초반 부분 부업으로 인형눈깔 붙이기를 시작하며 본드중독에 빠지게 된 주인공 김영수의 환각장면 묘사는 이것이 무협소설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고 초등학생들이 읽어도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유치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망과는 다르게 첫 시작부터 나를 확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어떤 소설은 처음은 지루하나 갈 수록 빠져들고, 어떤 소설은 처음부터 지루해서 끝까지 재미없으며, 또 어떤 소설은 처음엔 재밌다가도 갈 수록 흥미가 사라지는데, <굿바이 동물원>은 개인적으로 초반 내용은 당황스러웠으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야기에 깊숙히 몰입이 되었으며 주인공 김영수가 동물원에 취업하는 순간부터는 한겨레문학상의 진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주인공 김영수는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장남성이다. 그리고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실직자이기도 하다. 집 안의 기둥으로서 부인의 따끔한 눈초리가 무섭고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의 기대어린 눈빛도 두려운 대한민국의 그런 흔한 남자. 회사에서 울 수 있을 곳을 찾아 화장실로 들어서는 남자, 마늘을 핑계로 남자로서 눈물을 몰래 훔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본주의 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마늘까기, 인형눈깔붙이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영수는 '돼지엄마'의 주선으로 동물원에 취직하게 되며 여기서부터 작가의 기발한 소재가 시작된다. 영수가 취업한 동물원은 '세렝기티 동물원'이다. 세렝기티동물원이 다른 동물원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자본주의에 철저히 입각한 맞춤설계형 동물원이라는 점. 세렝기티동물원의 동물들은 관람객들이 원하는 행동만을 취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그 동물들은 그러한 행동을 좀처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렝기티동물원의 동물들은 관람객의 요구에 맞게 딱딱 움직여줌으로써 관람객유치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세렝기티동물원의 동물들은 바로, 동물의 탈을 쓴 사람들이 동물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김영수 역시 세렝기티동물원의 마운틴고릴라로 취업을 한다. 고릴라사에서 영수와 사정이 비슷한 동료들, 만딩고, 조풍년, 앤도 만나게 된다. 영수가 만난 이 고릴라들 역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마늘을 까고, 인형눈깔을 붙이다가 이 곳 동물원에까지 온 사람들이며 '앤'의 경우에는 이 시대의 20대를 잘 대변해주는 인물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20대는 공무원열풍이다. 너도나도 공무원시험에 뛰어들어 경쟁률은 100:1에 육박해졌고 어른들은 언제부터 월급이 적어 하대받던 공무원이 신격화되었냐며 혀를 끌끌 찬다. 고릴라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 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냥,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개인사를 접하면 괜히 마음이 쓰라리고 우울해지며 이 시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한탄하게 되더라.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는 바로 사회주의 북한에서 간첩으로 남파한 '연락책'이 만딩고에게 했던 말이다. 사회주의사상을 갖고 있던 그가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칼도 사람도 아닌 바로 '돈'이라고 하는 대목. 대한민국에서 '돈', 자본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동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 말에 대한 의미는 책을 읽게 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진짜로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약간의 호기심이 일게 되며, 그리고 결국에는 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실제로도 이게 가능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소망을 품게될 지도 모른다. 아마 이러한 마음이 드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쟁시대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앤'과 마찬가지로 아직 20대이며 취업전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굿바이 동물원'을 외치며 이 시대를 버리고 저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 벌써부터 이렇게 지쳐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막막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을 통해 무언가의 해답을 찾기를 기대하진 말라. 이 책을 덮고 나서는 두려움부터 몰려온다. 이것은 소설, 즉 허구일 뿐이며, 막상 그런 '세상'이 있다 해도 자본주의 경쟁시대를 박차고 '굿바이 동물원'을 외치며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 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즉, 소설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들은 평생 자본주의라는 우리에 갇혀 몸부림쳐야 할 것이며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슬퍼진다. 요즘은 지인, 가족들 사이에서 까지도 살인 및 강도 등의 범죄가 밥 먹듯이 일어나고 있고 직장내에서도 '살생무기'만 없을 뿐 번번히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예전부터 삶은 쭉 퍽퍽했고 요즘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과연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 그리고 나는 당당하고 용기 있게 굿바이 동물원을 외치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까. <굿바이 동물원>은 독자들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고 독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예상컨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그래도 돈은 돈이야. 돈이 제일 좋지" |
|
빨래를 (세탁기가 하는 거지만) 제때 돌리는 것도 힘들지만 탁,탁 털어 펴서 말리는 일은 좀 더 싫고, 말린 후 반듯하게 개서 옷장에 넣은 일은 더 싫다. 일 주일에 최소한 두 세번은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처지다 보니 매번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벗고 살 수도 없으니.. 십 수년을 되풀이해 오면서 '이게 왜이리 싫지..'늘 이런 마음이다. 깨끗한 빨래를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차곡차곡 개서 넣을 땐 어지러운 마음까지 정리되는 것 같다는 혹자의 말은 진심일리 없다고 생각되니..내가 이상한 건가?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라 여기자.
하기 싫은 빨래를 매번 해야하는 햇수만큼 책 읽기와 함께 해 왔다. 다독, 정독..그런건 못하고 가만 있는 거 보단 나을거 같아서 손에 잡히는대로 읽는 편이다. 읽은 책의 느낌을 정리해서 적어두는 일은 만만찮은 내공을 필요로해서 정리와 거리가 먼 나는 역시 잘 되지 않는다. 분명 읽기 읽었는데 뭔 내용인지 생각 안나는 책이 반 정도고 나머지 반은 좋았거나 실망스러워서다.
서평을 써야하는 경우, 되도록 기분 안 좋은 날은 피해서 쓸려고 한다. 특히, 내 취향의 책이 아니거나 기대 이하의 책을 읽었을 때는 더더욱! 괜히 안좋은 기분을 책 내용과 결부해 이상하다, 아닌것 같다..이렇게 적기 때문이다. 평생 연필을 깎고 깎아 쓴 들 책을 낸 작가들의 한문장도 못 쫒아갈 걸 알지만... 맘에 안드는데 좋았다고 느낌을 적을 순없다. 빨래를 정리해 넣을 때 처럼, 왜 이렇게 싫지..할 뿐이다. 기분이 안좋은 날엔 허접하다, 시간이 아까웠다..이렇게 적게되니 책을 쓴 작가에게도 미안하고 출판사에도 도리가 아닌 듯 해 완곡한 표현으로 훌륭한 내용이었으나 내가 읽기엔 좀 어려웠다..이렇게 적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엔 내용이 전문적이거나 심도있어 문외한이 접근치 못한 경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기분이 나아지길 기다린다.
한겨레 문학상이 벌써 17회를 맞이했구나!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참 좋았다. 역대 수상작을 훑어 보니 5편 정도를 읽었다. 생각나는 건, 당혹스럽게도 박민규 뿐이다. 수상한 작품의 절반도 읽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한겨레 문학상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내 취향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문학상 마다 나름의 색깔을 가지고 작가를 발굴해야 하는 건 뜻깊은 일이다. 한 때 돌리는 채널마다 강호동이 나왔던 것처럼 문학상마다 김영하(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다^^)의 이름이 올라오게 된다면 한국문학의 앞날을 우려해야 하는거니까. 신선한 문장과 새로운 감각, 기존의 틀에 얽매지 않는 새로운 플롯들을 높이 사는 문학상이 많을 수록 우리나라 독서 인구도 늘어나고 장르의 고른 발전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니. 시도가 새롭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듯 전통 방식에서 맴돌아도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다. 독자의 눈과 귀를(요샌 들려주는 오디오 북도 잘 판매된다고 한다.)붙잡을 수 있는 기본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 허접한 책읽기의 기준이다.
<굿바이 동물원>의 느낌을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도장에 적힌 말로 표현하자면 '노력을 요함'이다. 이 시대 실직자들의 애환을 눈물 한 스푼, 사랑 두 스푼, 감동 세 스푼의 달달한 다방 커피로 녹여 식지않은 상태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빛났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동물원으로 사라져 갈 뿐이다.. 비장미도 좀 있다. 적자생존이 지배해야 할 세렝게티 동물원 안에서의 묘한 인간미와 동물원이여 굿바이를 외치며 자아를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현대인들의 로망까지, 좋다. 하물며 해피엔딩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디서 봤더라...동물의 탈을 쓴 체,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기시감에서 시작된 갸웃거림이 이야기의 집중도를 방해했는지 모르겠다. 삶의 모퉁이마다 맞닥뜨리는 지난하고 비루한 현실들을 무겁지 않게 터치하려는 의도는 무거움을 벗어던짐과 동시에 너무 가벼워져 희화화 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들이 너무 많이 길게 끼어드는 바람에 중구난방 핵심이 흩어져 버렸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울고 싶은 날 마늘을 까는 주인공 이야기지 함께 잘린 동료나 남파 간첩 아저씨 이야기가 아님에도 그들을 너무 배려했다. 가볍게 터치 해야할 사람들을 위해 너무 많이 울어 주었고, 12미터 철제 구조물의 엠파이트 스테이트 빌딩을 오르내리며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쩐지 가슴뭉클 한 스푼이 부족하다. 매일 울고 싶은 날의 연속인 우리도 같이 울려주기엔 마늘만 까서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양파도 같이 까야 할 듯 싶다. 절절한 생활수기용 소설이 아니라 예시용 참고 소설 같아서 아쉬웠다.
왜이러지 오늘, 기분 안좋은 일이 있었나..ㅠㅠ
밥벌이의 지겨움과 위대함에 대한 주인공의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은 나와 비슷하다. 주인공 처럼 나도 열심히 살 작정이다.
다음엔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아무래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되는 윤성희의 '웃는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두 소설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버거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웃는 동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물이 되려하고,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동물이 되려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현대화가 진전될 수록 자기 반성과 성찰이 가능한, 즉 인간과 같은 '대자적 존재'는 욕망의 발현과 실현에 있어 즉각적인 실천이 가능한 '즉자적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퇴행의 욕망이 증식한다는 것인데 두 작품은 그런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퇴행을 단순한 바람, 다시 말해 삶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그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게 된 소망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즉자적 존재로의 퇴행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어 우리 자신을 압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가듯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낭떠러지 가장 자리로 내몰린 결과라는 것이다. 고무공을 손으로 억지로 누르면, 고무공은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며 제 모양을 유지하려 버티다가 그것이 안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버둥댄다. 그 버둥대는 육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퇴행인 것이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야 말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 준다. 소설은 동물원에서 동물 탈을 쓰고 관람객 앞에서 정말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짜 동물은 관리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보다 값싼 비용으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치한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가 동물 보다 더 추락해버린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주인공 역시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우리 안에서 고릴라처럼 행동하는데,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집에서 놀면서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전전한 끝에 거기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그렇게 동물이 되는 것은 사회라는 고양이가 쥐인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몬 끝에 다다른 종착지였고,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능력만을 체력 테스트를 통해 증명하고는 동물이 되었다.(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보다 더 어렵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에 합격해야 동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굿바이 동물원'은 퇴행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이들은 그 퇴행의 압박 속에서 오직 동물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p. 214) 한 편, 퇴행의 욕망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발현이기에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욕망을 양산하는 사회가 진정 어떠한 민낯을 가지고 있는지 오롯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동물로 일하는 동물원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물원인 것이다. 사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동물처럼 살아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물원. 소설은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사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툭튀'한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의 것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그 모델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근대가 창출한 서양 문명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근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근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나하면 중세까지 종교의 그늘 속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재산 수호와 증식을 위한 농노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보통의 인간들이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들 역시도 지배자들과 똑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성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서 다시 말해 본다면, 근대란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던 인간을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방시켜 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었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고난 피가 아닌 실력이 주가 되었기에 이제는 귀족 혈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 자본가만 근대의 햇살로 영근 과실을 마음껏 섭취했을 뿐,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처지란 중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 면직 산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영국은 경작지를 목축지로 점점 더 많이 바꾸는 인클로저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살던 곳에서 도시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했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긴 노동 시간과 그에 비해선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9세 미만의 아이들 조차 어른들 못지 않게 공장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만은 살인적인 노동 조건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공장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만큼 사람들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귀족의 농노에서 공장의 노예로 소속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귀에 근대가 외친 '천부인권'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설의 주인공 '김과장'(소설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김과장'으로만 불릴 뿐이다. 주인공이 누구든지 가리킬 수 있는 김과장으로만 불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가 쓰기만 하면 그걸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똑같은 고릴라가 되는 탈을 쓰고 고릴라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익명의 사람에서 익명의 동물로 전이되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에서도, 동물원에서도 사회가 강제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고릴라 역시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결국 이 사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하는 가짜 세렝게티가 아니라 정말 동물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짜 세렝게티를 염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곳은 정체성을 강요하는 철책이 없는, 오로지 자기가 선택한, 자신이 정립한 정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광할한 자유의 영토이다.)이 그랬듯이, 겨우 귀족의 동물원을 나와 곧장 자본의 동물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중세 때, 사람들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은 이렇게 단순했다. 지금도 똑같다. 오로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사람 이하의 존재, 사물이 되거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은 사실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간힘이라는 것이 더 처연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우스꽝스럽기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웃는다. 그러고보니 퇴행을 보여주는 윤성희의 '웃는 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모두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헛웃음'에 가깝다. 예전에 한참 유행한 개그인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 아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나오는데, 그렇게 웃는 자신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되는 웃음. 바로 그런 웃음이다. 그저 그렇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 한 마디로 '자조(自嘲)'.
내 생각에 '자조'는 더욱 단단한 철창으로 우리를 가두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지금 시대를 견뎌가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 같다. 조금 무리한 근거일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예능이 대세를 이룬다는 사실이 '자조'가 돈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 정말 힘든 이 시대에 그 때문에 더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의 격언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격언은 이러하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장 슬픈 동물이라 웃음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엔 반드시 따라붙는 부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민(憐憫)이다. 어쩌면 이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오히려 비웃음이란 형태로 나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굿바이 동물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다. 마늘을 까면서도 울고, 본드를 흡입하면서도 운다. 그렇게 울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을 찾았다가 모든 칸이 다 우는 남자들로 가득 차서 그냥 돌아나와야 했었던 때를 떠올린다. 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울음은 마치 기본 사양처럼 장착되어 있다. 돈이라는 콧두레에 끌려가는 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지라, 하나같이 소처럼 긴 목울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는 것은 등장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읽다가 얼핏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이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에, 읽는 이도 얼마든지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동병상련이 피워내는 물안개가 마음을 자욱하게 휩싸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아프다. 웃음은 견디기 위해서라지만 울음으로 집약되는 연민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소설은 퇴행을 다룬다. 퇴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헛웃음이 난다. 때로는 한번 길게 내쉬는 한숨이 고달픈 현실을 달콤한 노래보다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듯이, 이런 헛웃음 또한 버틸 힘을 준다. 하지만 웃음, 그것밖에 없다면 소설은 독자에게 살아가려면 그저 자신을 자조하면서 잠시 현실을 잊는 것밖에 없다는 말만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 눈물로 대변되는 연민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보다 더 진정한 모습의 버틸 힘을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이 소설엔 자조와 연민이 있다. '자조(自嘲)'가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연민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소설에서 연민은 오늘의 비극을 그치게 할 대안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자조가 가진 한계를 이미 깨달아 연민을 다시 소설에 누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조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조를 통해 힘든 오늘을 견디더라도 그 효과는 오직 자신에게 한정된다. 자조는 내몰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 내몰림은 혼자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퇴행을 강요하는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러면 함께 변화를 도모할 타인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타인과 이어져야 한다. 바로 그 연결, 매개의 역할을 연민이 한다. 연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겪은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니체의 말마따나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슬픔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공감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그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타인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저절로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위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이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서로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연대가 이뤄진다. 소설에 나오는 '마운틴 고릴라들의 모임' 그대로 말이다. 주인공과 송과장의 관계처럼,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이어질 수 없었던 관계들이 동물이 되어서는 이뤄진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같이 내몰린 자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고 응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교감은 오로지 그들이 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진솔한 소통과 두터운 연대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조를 넘어 연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민을 통한 이해와 배려가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이 가짜 세렝게티 동물원에 갇혀 있을 지라도 영혼만은 창살을 빠져나와 저 무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어디에 있는 타인이든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태익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뭣이 중한데? 공간이 그토록 중요해? 이 육체가 창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차이나냐?"고.
작가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공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바로 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몸은 비록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두지 못할 것이라 한다. 동물 탈을 아무리 써도 동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릴라 탈을 쓰고 행동할 때, 관람객들이 그를 진짜 고릴라로 알고 하는 행동의 묘사를 통해 거꾸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동물원인 이 곳을 빠져나가려 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랬기에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굳이 진짜 세렝게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곳까지 찾아간 이들 역시 진짜 동물처럼 살게 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도 자신을 여전히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물론 이렇게 되려면 타인과의 연대를 가능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연민의 이랑을 마음 밭에 무던히도 많이 갈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남들에게 자주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연민 그리고 슬픔이 오히려 당신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보다 더 사람답게 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막바지의 만딩고처럼 이 사회에 당당하게 '굿바이 동물원' 할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강태익 작가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난 그 말을 깊이 믿는다. |
|
"울고 싶은 날에는 마늘을 깐다."로 소설의 첫 문장은 시작된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한 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번, 마지막으로 마늘을 깔 때, 남자는 운다"같은 문장을 능청스럽게 소설 중간중간에 집어 넣으면서 작가는 글을 이어간다. 그런 작가의 소설은 재미있지만 왠지 슬프기만하게 흘러간다. 주인공인 영수씨는 정리해고를 당했다. 집에서 놀고만 있을 수 없어 마늘까기, 부업으로 곧잘 등장하는 인형 눈 붙이기 등등의 일을 시작한다. 마늘을 까면서 인생의 쓴 눈물을 흘리고 인형 눈을 붙이면서 본드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디베어와 격렬한 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도 깐 마늘 아가씨의 "벗겼으니까 책임져요" 같은 능청스런 대사를 집어 넣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던 영수씨는 모든 부업의 매개체 같은 정체모를 "돼지엄마"의 소개를 받아 동물원 일을 하기 위해서 시험 준비를 한다. 그 과정이 눈물겹다. "이 나라 가장들의 심벌"이라 생각되는 "각이 무너진 완만한 곡선의 알몸"을 가지고 정말 우라나라 가장들의 대표격인 양 체력 시험에 매달린다. 그 과정에서 만난, 전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다 같이 잘린 "송과장", 그의 모습도 눈물겹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한 시험, 그러나 막상 시험장에는 "남자가 너무하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아줌마만이 경쟁자, 2: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곳은 동물원. 모처럼 직장다운 직장을 잡았다고 정장을 입고 출근한 영수씨. 그러나 정장은 필요없었다. 동물원에서 하는 일이란 동물 사육이 아니라 동물의 탈을 쓰고 고릴라 역을 하는 것이다. 표지 그림에 나온 모습처럼. 그 고릴라 역도 결코 쉽지 않다. 첫날, 그냥 쑥 내밀었다는 조풍년 씨의 주먹을 맞고 쓰러져버린 영수씨. 그냥 쓰러지기만 하고 설렁설렁 우리 안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받으면 좋으련만, 높이 14미터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힘겹게 올라가는 조풍년 씨의 모습을 본다. 설마 했던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그 높은 빌딩 위에 버저가 있고 그것을 눌러야 성과급을 준다는 정말 웃지 못할 삭막한 현실에 마주한다. 남의 돈을 벌기가 쉽지는 않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짓누르는 설정이다. 고릴라 사에 고릴라는 네 명!이 있다. 정말 고릴라 취급한다고 해서 한 방 날렸던 조풍년 씨를 비롯해서 킹콩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앤, 대장 고릴라 만딩고. 그들 각자의 사연도 남다르다. 조풍년 씨 역시 대기업을 다니다 해고당했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일명 "오물처리반" 살벌하게 변한 눈빛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떠나가고 결국 토사구팽 당하면서 "돼지엄마"를 만나 동물원까지 온다. 주변 도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무원 수험생이었던 앤, 무협지를 인용한 그녀의 무공 쌓기는 무협지를 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각종 무공 비법들이 독자들을 웃게 하면서도 씁쓸하게 만든다. "흡성대법, 남의 공력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절정의 비기. 동사무소에는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9급 공무원이 된 절대 고수들이 전입신고나 주민등본 열람, 기타 등등의 민원 관련 업무를 처리하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앤은 그런 무림의 고수들의 기를 흡수하러 동사무소에 가서 동귀어진을 시전한다. 이런 작가 특유의 입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하는 대단한 민원일. 그런 것들이 씁쓸한 웃음 맛을 남긴다. 그나마 소설 마지막에는 무공을 전수한 영희 언니였던 앤이 시험에 합격해서 다행이다. 남파 공작원이었던 만딩고. 동물원을 찾아온 잡상인 "소생"을 만나 결국 콩고에서 사람이 아닌 "마운틴 고릴라의 삶"으로 "사람답게"살기 위해 날아간다. 전세금 걱정도 월세 걱정도 쫓아오는 연락책도 없고 널린 먹이감이 있는 그곳. 그곳에는 이미 많은 동물아닌 동물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건너가 있다. 만딩고의 휴대 전화로 인해 소란해진 동물원에 하나 남은 마운틴 고릴라. 영수씨! 영수씨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숟가락을 국그릇에 빠뜨릴 정도로 기뻤다. 임신을 계기로 아내가 수퍼맨 망토를 붙일 때 쓰는 본드를 멀리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더 이상 "클라크"라고 자신을 부르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영수씨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콩고로 떠나 고릴라의 삶을 선택한 만딩고처럼 갈수가 없다. 여전히 동물원의 한 자리를 지킨다. 어느날 삼겹살 집 돼지로 취직한 조풍년 씨와 동사무소 무림 고수로 재탄생한 앤과의 재회가 기뻐 고릴라의 신분을 망각한 사이에 다른 여자 관람객이 다가온다. "여자 관람객이 배가 불룩한 임신부라는 걸"알아채고 당황해서 고릴라 흉내를 낸다. 여자 임산부 관람객이 손을 내밀자 다가가서 철장 밖으로 수줍게 손을 내민다. 그 임신부가 활짝 손을 잡으면서 웃었다.
다음 웹툰에 연재됐던 Hun작가의 "해치지 않아"의 한 장면. 전직 동물원 사육사였던 주인공은 동물원을 계속 지키기 위해 동물 탈을 쓰고 동물 역을 하는 발상을 해 낸다. 마치 "굳바이 동물원"의 동물들과 비슷하다. 물론 "소망 동물원"이란 이름처럼 소망을 담은 Hun작가의 웹툰 속 등장 인물들과 "굳바이 동물원"에서 현실에 쫓겨 살기 위해 동물 탈을 쓴 영수씨 같은 사람들은 많은 차이가 난다.
소설은 재미있고 씁쓸한 웃움 맛이다. 그래서 잘 읽혔다. 또 내가 주인공 영수와 비슷한 연령대라서, 굳이 빗대자면 한 가정의 가장이라서, 그리고 영수씨처럼 탈을 쓰지는 않았지만 동물원에서 일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책이 더 자~알 읽혔다. 한편의 블랙 코미디 같은 유머가 중간중간에 들어가면서 신랄하게 이 사회를 빗대어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마지막에 영수씨와 아내가 손을 잡는 모습으로 소설을 끝내는 작가의 글솜씨가 돋보였던 소설이다.
|
|
이상한 동물원 "세렝게티 동물원"
여기 "이상한“ 동물원이 있다. 이름은 TV 다큐 <동물의 왕국>의 단골 무대인 “세렝게티 동물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았다. 겉모습만 보면 고릴라, 코끼리, 곰, 악어, 호랑이 등 여느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동물들을 빠짐없이 구비(?)해놨고, 편의시설이나 유락시설도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모습들인데 뭐가 이상한 걸까? 이 동물원의 인기 동물인 “고릴라” 우리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가 고릴라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킹콩”일 것이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가슴을 쳐대는 그 모습 말이다. 그런데 실제 고릴라들은 으르렁대거나 가슴을 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잘 움직이지도 않고, 한 자리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전혀 구경꺼리가 없는 심심한 곳이 바로 “고릴라” 사육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동물원에서는 고릴라들이 마치 연기(演技)라도 하듯이 구경꾼들을 향해 수시로 으르렁대고 가슴을 쳐대며, 구경꾼들이 던져 주는 바나나를 척척 받아먹는다고 한다. 심지어 한 시간에 한번은 우리 가운데 있는 높이 12m 짜리 철제 탑 - 이름도 킹콩이 기어 올라갔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 을 기어 올라가 포효하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한다고 하니 말만 들어도 당장 달려가 구경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고릴라 뿐만이 아니다. 이 동물원의 곰들은 비닐 공을 수시로 몸으로 터뜨리고, 하마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둥에, 그것도 철제 기둥에 머리를 시시때때로 쳐박곤 한단다. 거기에 구경꾼들이 뜨문뜨문해지면 으르렁대던 동물들이 끼리끼리 모여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니 이건 동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것도 앵무새나 구관조가 사람을 따라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아니고 또박또박 단어를 발음하고, 적절하게 감탄사나 추임새도 섞어서 말이다! 이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인가? 제17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인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한겨레 출판/2012년 7월)>은 바로 이 “세렝게티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유쾌하고 즐거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슴이 찡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세렝게티 동물원의 정체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각각의 사연들
중소기업에서 과장으로 재직하던 “나(김영수)”는 몇 달 전 회사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 바람에 그만 실직하고는 집에 들어 앉아 마늘 까기 알바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종이학과 공룡알 접기, 인형 눈깔 붙이기를 하다가 본드를 불기까지 하는 등 소소한 재택 알바를 전전하던 나는 부업 브로커 “돼지 엄마”의 소개로 혹독한 체력시험을 거쳐 “세렝게티 동물원”에 취직하게 된다. 부푼 꿈을 안고 첫 출근하던 날, 엉뚱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것은 고릴라 탈과 털옷이었다. 고릴라 옷을 입고 고릴라 우리에 들어간 나는 고릴라 세 마리를 만나게 된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안절부절하는 나에게 고릴라 한 마리가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그것도 사람 말을 말이다! 나는 그 순간 기절하고야 만다. 앞서 말한 이상한 동물원 “세렝게티 동물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이 동물 옷을 입고 동물 연기를 하는 것, 그렇다 보니 여느 동물원의 동물들보다 더 관객들의 기호에 맞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고릴라 연기(?)에 적응한 나는 고릴라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퇴근 후 술자리를 기울이는데, 그들이 터놓는 사연들 또한 나 못지않게 기가 막히고 기구하기 짝이 없다. 먼저 대장 만딩고는 남파 간첩이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경찰과 자신을 배신한 동료에게 쫓기고 있는 그런 신세이고, 대기업에서 오물처리반 - 동료와 부하직원들을 자진 사직하게 만드는 - 에 있다가 같은 신세가 되어 퇴직하고 동물원에 온 “조풍년” 과장,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취업을 하지 못하고 결국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보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몇 년 째 공부 중인 “암컷” 고릴라 “앤”이 그들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고릴라 우리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소생”이라는 이상한 말투를 쓰며 자신도 이 동물원에서 동물로 근무했다는 여행사 직원인 그는 고릴라들에게 이상한 제안을 한다. 동물원을 탈출하여 대자연(大自然)의 품으로 돌아가 실제 동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싶은데 벌써 몇 몇 동물들이 그의 제안에 따라 자연에서 동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대장 만딩고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동물원 우리로 찾아오는 옛 간첩 동료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프리카 케냐로 떠난 대장 만딩고는 매일 밤 고릴라 동료들과 다른 동물들에게 전화를 해온다.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이다. 그러자 동물원 동물들이 동요를 하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몇 몇 동물들이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동물원에 비상이 걸리고, 사육사 - 동물 탈을 쓴 사람을 관리하는 이상한 사육사들이지만 - 들이 나서 보지만 동물들의 “탈출”은 계속 늘어만 간다. 제목 그대로 “굿바이 동물원” 하면서 말이다.
이 책, 참 재미있다.
동물원 동물들이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이라니 이런 기발한 상상이 또 어디 있을까? 요즘이야 분장술과 SF 효과가 워낙 발달해서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을 보면 도저히 사람과 침팬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지만 영화가 아닌 실제 동물원이라면 표가 나는 게 당연할 텐데 작가는 시치미를 뚝 뗀다. 그렇다면 고릴라, 곰은 사람 체형과 비슷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개미핥기나 하마, 기린, 악어는 어쩔건가. 역시나 작가는 아무런 부연 설명이 없다. 하긴 이 책을 읽으면서 실제로 사람이 동물 연기를 가능한지 안한지를 따질 독자가 누가 있을까. 동물원은 작품의 장소적 배경이자 “루저(looser)"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에게 있어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는 소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 동물” - 표현이 맞나 모르겠다 - 들이 초원과 밀림으로 가서 동물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도 실현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참 기발하다고만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동물원에 대한 설정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동물”간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참 재미있고 기발하다.
그런데 이 책, 한편으로는 참 슬프다.
주인공인 김영수는 마늘을 까면서 눈물을 흘린다. 마늘의 매운 알리신 성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초라하고 처량한 신세에 대한 한탄이 눈물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울고 싶을 때는 마늘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우는데,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마늘을 깔 때란다. 그는 마늘도 맵지만 사는 건 더 맵다고 말한다. 실직하고 집에 앉아 마늘을 까는 지난 몇 달을 돌아보면 코끝이 찡해지고, 화장실 같은 곳에 숨어서 남몰래 울고 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정리해고 소식을 부장에게서 듣던 날 울고 싶은 마음에 숨어서 울고 싶어 회사 화장실을 갔었다. 그런데 화장실에는 이미 자신처럼 숨어서 울고 있는 사람으로 꽉 차 있어서 울지 못하고 나왔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마늘은 울고 싶은 그를 울리는 참 좋은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슬픔은 주인공 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실직 때문에 통장을 하나 둘씩 깨먹었고, 마지막 하나 남은 통장 만큼은 지키기 위해 남편처럼 마늘을 까고 봉투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그만 본드에 중독되고 만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정은 오죽할까? 고릴라 동료 조풍년씨 사연 또한 서글프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와 후배들을 사직케 하는 “오물처리반” 활동을 하던 그를 아내와 딸은 무섭다며 곁을 떠나버린다. 그런 아내와 딸을 붙잡지 못하고 집에 남겨진 그의 어깨는 슬픔에 영 처량하고 무겁기만 하다. 대장 만딩고는 자신을 배신한 선배 간첩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회 칼을 들고 찾아가지만 이 선배 간첩은 칼침을 여러번 맞았는 데도 죽기는 커녕 그에게 달려든다. 그러면서 그에게 자네의 칼은 전혀 무섭지 않다고,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돈이라고 말한다. 북(北)에서의 공작금이 끊기고 남한에 정착하여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그 선배 간첩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거꾸로 그에게 쫓겨 숨어 살아야 하는 만딩고의 삶은 생각만 해도 슬프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 책, 가슴 찡하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고릴라들이 위험천만한 12m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오르는 이유는 꼭대기에 설치된 부저를 누르기 위해서다. 그 부저를 눌러야만 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조풍년 씨는 그 빌딩을 오르다가 그만 떨어져 허리를 다친다. 그런데 고릴라 동료들인 만딩고, 앤, 그리고 주인공은 번갈아 가면서 조풍년씨에게 할당된 부저를 대신 눌러준다. 자신들도 수당을 받아야 하는 근근한 처지이지만 다친 동료를 위해 기꺼이 동료의 부저를 눌러주는 것이다. 모두가 다 떠난 텅빈 고릴라 우리에 나는 남아 있다. 그래도 이 동물원은 가족의 생계 수단임과 동시에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본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뱃속에 있는 3개월 된 애기 때문에 본드를 과감히 끊어버린 아내가 찾아온다. 고릴라 우리로 다가온 그녀에게 고릴라 탈을 쓰고 있던 나는 손을 내밀고, 평소에 고릴라 구경을 좋아했던 아내는 그 손을 만지며 즐거워한다. 그 고릴라가 사실은 남편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부부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옛 고릴라 동료들은 내색하지 않고 박수를 쳐준다. 그리고 세렝게티 초원에서 고릴라들과 어울려 살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만딩고, 그처럼 동물원을 탈출하여 대자연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동물들, 그리고 미처 다 소개 못하는 여러 감동 코드들을 떠올리면 저절로 가슴 한 켠에 찡한 울림과 함께 입가에는 웃음이 절로 지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 책, 낄낄거리고 웃다가도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책이다.
오랜만에 웃기면서도 슬프고, 감동적인, 책 한 권으로 여러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우리” 책을 만났다. 이 책과 비슷한 외국 소설을 꼽아보자면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떠오르는데, 나는 <공중 그네>보다 <굿바이 동물원>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비록 소설 속 허구의 인물들이긴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들 이웃, 아니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읽는 내내 감정이입되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따라 때론 웃다가도 때론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되고, 마지막에는 가슴에 아련한 슬픔과 함께 감동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소시민들 - 1%의 최상위 계급들에게는 영 찌질하고 못난 사람들 이야기겠지만 - 이라면 한번쯤은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들에게 이 책은 즐거움과 함께 가슴 깊이 새겨진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은 <굿바이 동물원>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모두들 동물원에 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원의 그 많은 동물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고릴라 우리를 찾아갈 것이다. 예전에는 바나나나 던져 주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철망에 바짝 다가가서 말 한마디를 건넬 것이다. 당신이 사람 동물인 것 안다고, 힘내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고릴라가 움찔하는지, 즉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고릴라가 움찔하지 않으면 어떠랴. 어쩌면 그 말은 고릴라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하는 말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 험하고 고달프기만 현실에서 결코 쓰러지지 말고 힘을 내라는 자신들에 대한 격려 말이다.
|
|
여기 울고 싶은 날에는 마늘을 까는 남자가 있다. 서른여섯 살인 김영수다. 아내가 있고,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해 지금은 마늘을 까는 부업을 하고 있다. 마늘도 맵고 사는 건 더 매워 그는 마늘을 까면서 눈물을 흘린다. 부업도 단계가 있어 마늘 까기 다음에는 인형 눈깔 붙이는 일을 하게 된다. 환기가 안 되는 반지하 집이라 본드의 영향으로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감각도 없어진다. 부업 브로커 돼지엄마에게 다른 일은 없냐며 묻지만, 없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일은 부족하고 대기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영수는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계속 인형 눈깔을 붙인다. 그러다가 그만 직접 본드를 흡입하는 지경에 이른다. 현실은 지옥이지만, 본드는 영수를 ‘꿈과 환상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환각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환각에서 깨어나면 영수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돼지엄마는 영수에게 또 다른 ‘꿈과 환상의 나라’로 인도한다. “꿈과 환상의 나라 세렝게티.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세렝게티.” 공무원하고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실기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가게 된 세렝게티 동물원이다. 이 곳은 환각이 아니라 현실이다. 다만, 선뜻 믿기 힘든 현실이다. 세렝게티 동물원에서 영수의 직업은.. 마운틴고릴라다.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굿바이 동물원』은 사회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사람 구실하겠다고 사람답게 사는 걸 포기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이는 홉스가『빈곤의 문제』에서 거론한 “우리는 이들(빈곤층을 의미한다.)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는 가르쳐 줬지만, 인간다운 삶을 성취할 만한 힘은 부여하지 않았다.”, 라는 글과 연결된다. 인간다운 삶을 성취할 만한 힘이 없는 우리들은 스스로 짐승이 되어 잔혹한 동물원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그러나 영수가 일하는 ‘꿈과 환상의 나라’ 세렝게티 동물원은 좀 다르다. 다들 동물의 탈을 쓰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미가 넘친다. 영수와 함께 마운틴고릴라로 일하는 조풍년 과장은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라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조풍년 과장은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고통을 참고 임무를 수행한다. 단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 구실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굿바이, 동물원.. 그럼에도 동물원에서 나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마운틴고릴라의 실버백 만딩고는 ‘놈’의 추적도 추적이지만, 북한과 남한의 상처를 뒤로 하고 제3국을 선택한다. 그곳에서 만딩고는 전세금, 물가, 세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 이 역시 ‘꿈과 환상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들 알다시피 ‘꿈과 환상의 나라’는 없다. 환각 혹은 소설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영수는 마지막까지 세렝게티 동물원을 지킨다. 전보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아내가 본드 중독에서 헤어나오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변화라면 큰 변화이다. 이 변화는 먹구름뿐이었던 영수의 마음을 빛나게 한다. 만딩고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영수의 마음에 곧 닥쳐올 분유값, 기저귀값 같은 돈 걱정은 없다.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마운틴고릴라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웃긴다. 사는 게 코미디고 이 소설도 코미디다. 블랙 코미디..
“남자가 돈 못 벌면 여자가 도망가. 정말이야. 나도 남편이 돈 못 벌어서 집 나와 혼자 살잖아.” 돼지엄마가 영수에게 종종 쓰던 말이다. 이 소설 속에서도 혹은 실제로도 여자가 도망간다. 그러나 영수의 아내는 도망가지 않는다. 본드에 취해 클라크를 찾기는 해도 영수 곁을 지킨다. 그래서 아내는 영수의 한 줄기 같은 빛이다. 돈에 의해 가족도 해체되는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결속해야 한다고 외치는 듯하다. ‘꿈과 환상의 나라’는 어쩌면 파랑새처럼 집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무시하지 말자. 그들도 어떻게든 구실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조금씩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람답게 살다 보면 무지개가 뜰 날이 온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대책 없이 희망적이기는 하나, 그리 밉지 않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이야기니까. |
|
1년 중에 그나마 한 달 남짓 숨을 돌릴 수 있는 - 야근이 없는 - 공연 비수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공연만 없을 뿐인지 맡고 있는 업무 특성 상 다가오는 하반기 공연에 내년 상반기 공연들까지 미리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본연의 업무 외에도 중구난방 일들은 주어지고, 납득이 되지 않는 인사 결정과 1년 내내 말만 돌고 있는 조직 개편 등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이직 생각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펄쩍 뛰며 걱정하실 일이다. 좀처럼 마음의 가닥은 잡지 못하고 있던 최근 어느날 <굿바이 동물원>의 서른 여섯 살의 김영수 씨를 알게 됐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고 일어나니 백수가 되어버린 사람도 있다. 영수 씨가 그랬다.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 당한 그는 화장실에 빈 칸이 없어 - 이미 차지하고 앉아 울음을 삼키고 있는 다른 정리 해고자들 - 울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부업으로 시작한 마늘을 까면서 원없이 울고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하고... 자아정체성에 심각한 의문을 품던 즈음 그는 두 번째 부업 인형 눈 붙이기를 시작했고 곰인형과 바비인형의 눈 붙이기 기술이 늘어난만큼 본드 흡입 기술도 더불어 일취월장하기에 이른다. 본드 환각 상태에서의 그는 지구를 지키는 용사가 되었다가 희대의 정력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오래가진 못했다. 천만 다행으로 그만둬야 할 때를 알았던 영수 씨는 부업 브로커 일명 '돼지엄마'에게 공무원 버금가는 부업을 다시 소개 받는다. 체력 검사라는 만만치 않은 산을 넘어 드디어 입사하게 된 곳은 '세렝게티 동물원'. 그곳에서 영수 씨는 마운틴 고릴라로 다시 태어난다.
지금처럼 폭염이 계속되는 날 같으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 일인데 영수 씨는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사의 룰을 익히며 적응해 나가고 그 안에서 비슷한 처지의 취업준비생 '앤' 대리, 전직 대기업 사원이었던 '조풍년' 과장, 전직 남파 간첩 '만딩고'를 만나 끈끈한 동료애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지나온 삶과 처한 현실이 영수 씨에는 동질감과 위로를 동시에 안겨 주기도 한다. 노동자의 비애는 고릴라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인간미를 그들은 '세렝게티 동물원'에서는 찾고 느낀다. 저자는 자본주의 경쟁시대의 쓸쓸한 뒷 모습을 그만의 언어 유희로 독자들에게 쓴 웃음을 던진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유행가 가사가 이렇게 와닿을 수가 없다. 영수 씨가 마늘을 까고 인형의 눈을 붙일 때도 그랬지만 영수 씨의 아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 믿고 있는 통장을 깨지 않기 위해 마늘 부업을 하는 모습도 애처롭다. 아내의 눈물이 어떤 눈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영수 씨의 마음은 또 오죽할까?
책을 읽으며 '동물원'과 이 '사회' 둘 중 어느 곳이 더 동물적인 곳인지 판단이 어렵다. 곁에 있던 동료도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절벽 아래로 밀어버려야 하는 경쟁과 동료를 대신해서 성과급 부저를 번갈아 눌러주는 배려 사이에서 현대인들은 여전히 갈팡질팡 헤매고 있다. 어쩌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굿바이 동물원"이란 고별사는 영수 씨를 받아준 '세렝게티 동물원'이 아닌 영수 씨를 내쳐 버린 '사회'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발목이 잡혀 정글 같은 세상에 갇혀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굿바이 동물원>은 블랙 코미디로 잘 보여 주었다. 따라서 쓰리고 아픈 이야기를 웃음과 풍자, 해학으로 승화 시킨 저자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저자 강태식은 소설가 아내를 두고 그 자신은 학원 강사로 일하며 15년 간 꾸준히 공모전에 도전했다고 한다. 포기 하지 않은 그의 의지 덕분에 불혹의 나이에도 장쾌한 홈런 한 방을 날렸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뽑아준 주최 측 덕분에 또 한 명의 반짝이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사람을 위로하는 글, 불꽃처럼 한순간에 터지는 글"을 쓰겠다는 그의 각오가 살아 숨 쉴 후속작, 벌써 기대된다.
|
|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싶다는 딸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하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종목이 써비스업이긴 하지만 외국계 회사로 내가 볼 때는 괜찮은 회사였는데 단지 그 이유때문이라고 하니 친구가 속앓이를 할 만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중의 하나라는데... 도움을 요청하기에 만나서 한참을 설득아닌 설득을 했었다. 정 그렇다면 사직서는 내지 말고 새벽에 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보겠노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녀석 지금은 그 회사에서 잘나간다. 승진도 했고 어느정도는 시간도 자신에게 맞출 수 있을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지금은 모녀가 그 때 말려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다는 말일게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에게 존재한다. 내가 그 때 저 길로 갔더라면... 내가 그 때 저것을 선택했더라면... 그게 사람일테다. 끝없는 선택과 후회가 충돌하며 시간을 꾸며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는 광고카피가 생각난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표내야겠다는 직장인과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백수, 뒹굴거리는 백수를 보며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군인, 그 군인들을 바라보며 저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직장인.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면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그린 광고가 그렇다. 누구나 그 상황에 닥쳐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알 수없는 울림이 내게 전해져왔다. 어느날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시간은 오롯한 아픔이다. 그 아픔이 주인공 영수만 느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의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어디에 응모되어 당선된 작품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선되었다는 그 자체는 이미 그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도 될테니까. 그래서 보기좋은(?) 앞의 수식어는 떼어내 버리고 그냥 내용에만 관심이 간다고 하면 삐딱한 시선일까? <굿바이 동물원>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아픔을, 이미 곪아버린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비켜가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으로 인해 마트 계산원이 되어 출근하던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놀거야? 마늘이라도 까지? 그 날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은 마늘까기, 곰인형눈알 붙이기, 바비인형 속눈썹 붙이기의 달인이 되어간다. 그런데 묘하다. 곰인형눈알을 본드로 붙여한다는 그 설정이. 본드 흡입으로 인한 환상의 세계는 그에게 색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진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다. 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시 얻게 된 직장. 그 직장이 또 묘하다. 단순히 동물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진짜같은 가짜가 되는 일이 그에게는 버겁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원의 우리속에서 동물처럼 행동하며 관람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그 동물원이라는 배경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동물원에 동물로 취직된 사람들 또한 바라볼수록 아프다. 세상이 나를 구경하는 것인지, 내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표지의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표정속에서 내가 눈치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울고 싶으나 차마 울지 못하는 고릴라 탈속의 저 남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욕이 앞서 바나나를 너무 먹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못된 관람객에게 쿡쿡 찔림을 당해도, 동물앞이라고 부끄럼없이 끈적한 장면을 연출하는 남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철장 안에서나 철장 밖에서나 모두가 관람객의 입장일 뿐이라는 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바라보는 입장으로만 살아가니 제 아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라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장을 덮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면 책표지의 남자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웠다. 다시 마주치면 나도 그 동물원의 철장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 할 것만 같았다. 같이 느낄 수 없는 그 아픔에 공연스레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줄기 빛처럼 나를 찾아왔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다가가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고릴라를 만져보고 싶다는 아내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내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활짝 웃었다는 것. 희망의 빛이라는 건 순간일지라도 설렘을 안겨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것일까? 어설픈 첫인사와 함께 영수에게 찾아왔던 새로운 인연들. 그 관계속에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정이 있었다.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안고 동물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꿈을 놓지않는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격려와 다독임이 있어 좋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소통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그럼 동물처럼 사냐? 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될까? 괜찮았다. 오랜만에 멋진 소설을 읽었다. 다 읽고도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어설픈 위로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실한 마음 나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행복한 인생 통장' 까지도 깨면서 서로의 마음을 믿어준 영수와 그 아내처럼. 그런데 내내 궁금한 존재가 하나 있다. 그 돼지엄마는 누구였을까? /아이비생각
|
|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 매년 같은 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늘 설레고 즐겁습니다. 2012년 수상작 <굿바이 동물원>은 분명 기존의 수상작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간결하고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바삭한 문체를 좋아하는데, 이번 작품은 질척거리지도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도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유쾌하고 즐겁지만, 묘하게 슬펐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 시선에서 동물원이 무척 답답하고 비인간적인 곳으로 비쳤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약자를 지켜주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홀딱 벗긴 마늘과 금지된 상상을 펼치는 대목이 무엇보다 웃겼습니다. 주인공은 물론 주인공 아내까지 말입니다. 안쓰럽지만 웃음으로 아픔을 이겨내도록 하는 멋진 소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