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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위치 | 호미 바바 저 | 나병철 옮김 | 소명출판 | 2014-02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소명출판, 2014)는 탈구조주의 문화이론에 의존하고 있는 학술서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탈구조주의는 언어 · 담론 · 텍스트성 등을 통해 주체와 자연현실을 이해하려는 이론(그리고 실현)을 말한다. 탈구조주의에 의하면, 주체의 정신세계나 객관적 물질세계는 텍스트 · 담론 · 수사학에 의해 매개되어 그들이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탈구조주의가 강조하는 언어와 텍스트란, 그처럼 주체의 정신세계와 객관적 물질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영역인 물질적 삶의 형식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탈구조주의 문화이론가(마이클 라이언 등)들은 그와 같이 언어 · 텍스트 · 수사학에 의해 매개되는 삶의 형식을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언어나 문화는 단지 상부구조 영역에 폐쇄된 것이 아니며 정신세계(의식)와 물질세계(존재)를 연결하는 삶의 형식 그 자체이다. 삶의 형식으로서의 문화가 중요한 것은 사회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형식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과거 현실 사회주의가 보여주듯이, 인간의 의식과 물질적 토대를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사회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주체의 의식과 물질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문화형식들을 만들어 나갈 때 새로운 사회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호미 바바의 문화이론 역시 그 같은 탈구조주의의 문화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바바는 텍스트성의 역동성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른바 정치적 주체란 일종의 담론적인 사건에 다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체의 정치적 의식과 실천이 언어 · 텍스트 · 담론의 매개가 없이는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론과 실천, 텍스트성과 정치학을 연결하려는 이런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탈구조주의에서 문화란 단지 창조적 예술(문학) 뿐만 아니라, 법률, 교육, 이데올로기, 의식주 형식, 그리고 정치경제학까지 포함한다. 바바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그가 주목하는 여릿한 서사가 대서사와 교섭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성을 관통하는 탈식민지적 통과는 앞으로 투사되는 과거라는 반복의 형식을 생산한다. 탈식민지적 근대성을 시간적 자연은, 이원적인 문화적 논리(과거/ 현재, 내부/ 외부) 속에 배열되어 진보의 신화에 구속된 순응적인 과거를 지우면서 앞으로 움직이다.” (5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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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되거나 고착되거나 식민지배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식민의 내면화이다. 흔히 식민지배의 기간을 언급하면서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기념일로 삼는다. 이는 물리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문화식민지배는 그 해방의 날이 영원히 없을 수도 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식민지배문화가 대를 이으며 연속되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세대가 죽어도 그 잔재가 남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식민지배의 또 다른 안타까운 점은 억압이 정당화되는 인식이다.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배자가 1:1로 만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양 쪽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다만 더 많은 영역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 불균형은 있다. 이는 면역력의 우위, 문자 체계에 대한 우위, 의료 기술에 대한 우위 등이 그것이다. 피식민지배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선진화 된 어떤 것의 영역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좋았던 일부 기억으로 그 시대를 정당화해서 식민지배자들의 만행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참고 견뎌야 하는 필요악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노예화되어 식민지배를 염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문화에 대한 식민성이 우리 삶을 왜곡시킨다. 가치상대적인 문화의 영역에 더 좋음이란 잣대를 댄다. 그리고 언제나 자문화는 바뀌어야 할 후진문화이고 선진문화는 밖에서 찾는다. 삶의 습관이라든지 조형적인면도 저급한 특징을 보이는 하위문화는 제거 되고 수정되어야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도덕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어 그 정당성은 강화되고 그 인식이 대를 거듭하며 이어진다. 이렇다보니 자문화에 대한 주체성을 외부에서 찾는다. 서양의 눈으로 본 동양의 모습을 동양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정의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용어가 문화의 영역에서의 식민성을 보여준다.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자기인식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서양의 눈으로 본 동양을 계속 재생산할 뿐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성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이 한국으로부터가 아닌 선교사의 시선이거나 ‘본국’에서 한국 성을 소비하는 외부사람들의 시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들의 시선에 좋은 것, 취향에 적합한 쪽으로 수입업자에 의해 한국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들의 시선으로 한국의 모습, 비단 그것이 바뀌어야할 혹은 더 좋은 상태로 가야할 모습이 아닐지라도 한국의 모습은 주체를 상실당하면서 단일한 시선과 단일한 언어로 고착화 되었다. 박정희 시대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의 이면엔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되는 한국성은 인사동에 가면 잘 느낄 수 있다. 인사동 매대 위에 한국성은 박제된 체 소비되기 적절한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네 일상과 한국성이 이처럼 이질적이고 분리된 것에는 우리문화는 언제나 과거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현재의 것을 반영해야 하지만 고착화된 한국성은 그곳에 가면 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가시적으로 만들어놔야 평소 한국성에 대한 고민 없이 살 수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문화식민지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노예근성으로 있는 것이 속 편할테니 말이다. |